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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과 그를 위한 전인격적인 양육 프로그램을 통해 ‘초대교회’를 열망하는 계산교회를 찾아 김태일 목사를 만났다.
신평식 국장 : 새로 건축한 건물이 깔끔해 보인다. 예배당이 지역과 잘 어우러져 있는 것 같다. 도로 곁에 있어 접근도 용이하고 초등학교와 아파트들이 인근에 있어 분위기가 좋아보인다. 계산교회는 언제 세워졌으며, 이번 건축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김태일 목사 : 우리교회는 1953년에 설립된 교회다. 새 예배당은 지난해 연말 입당했으며 연건평 2천5백 평 규모로 대예배실이 1천7백석 정도이다. 이번 건축은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이룬 것이 아니라 지난 2003년 12월경에 갑작스럽게 건축을 하게 되었다. 건물이나 건축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런데 건물이 너무 낡아 배관이 새고 전기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갑자기 진행한 것이다. 이 때가 IMF 때보다 더 힘든 시기였다고 하는데 교인들과 함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신 : 건물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는 말에서 목사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건축은 해야 했고, 또 진행을 했는데 그렇다면 계산교회만의 건축방식이 있었을 것 같은데? 김 : 건축을 하게 되면서 교회 스스로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첫 번째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교회를 옮겨가지 않는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본 건물을 허물고 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어떤 지역에 세워지면 그곳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건축을 진행하면서 건축 헌금에 대한 과도한 부담 때문에 성도들이 탈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그 가이드라인대로 이사 가지 않으면서 본 교회 건물을 허물지 않기 위해 원래 본당을 리모델링해 이용하고 그 뒤로 똑같은 건물을 세워 붙인 두 건물 위에 공사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비용 절감과 함께 원예배당에서 계속 예배를 드리면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건축헌금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믿음이 좋아지면 헌신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억지가 들어갈 때 문제가 생긴다. 은혜가 넘치는 가운데 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 더 내기 운동’을 전개했고, 모든 교인들이 불평없이 기쁨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건축을 마치고 4개월 정도 된 상황에서 이제는 본래 지향하던 교회의 목표를 더 힘 있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제나 선교 부분을 비롯해 교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신 : 목사님의 목회를 보면 ‘평신도 사역화’에 대한 내용을 많이 살필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와 구체적인 방법은 어떠한가? 김 : 평신도 사역화에 대한 근거는 제가 늦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신도의 시각으로 교회를 보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데서 출발했다. 은혜를 체험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언떤 교회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회자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좋은 교회요, 초대교회요,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그래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제도나 방법에 있어 현재에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실제적인 방법으로 구상한 것이 성경공부반이다. 우리는 먼저 새로운 교인이 들어오면 새가족 1단계로 7주간 성경공부를 하게 된다. 미국의 빌리그래함 목사의 6주 교재를 번역해 사용하는데 성도들의 만족도가 높다. 이 과정을 거친 교인들은 거의 1천여 명 쯤 될 것이다. 2단계는 강의식으로 4일 동안 진행하게 되고, 3단계는 1년 반 정도의 기간으로 네비게이토 성경공부 프로그램으로 공부하게 된다. 이 새가족 성경공부 과정을 2년여 정도 지나게 되면 교인들은 자립할 수 있는 정도로 성장한다. 그 후에는 전도폭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단계별로 과정을 마치면서 리더 훈련에 들어가고, 리더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평신도 사역자’로 일할 수 있게 된다. 신 : 전체 교인 가운데 리더로 세워질 수 있는 분들은 어느정도인가? 김 : 전체의 10%정도 될 것이다. 신 : 사역자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 : 교회 안에서 다른 분들을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이며, 또 선교지에 나가서도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수준의 분들이다. 신 : 이러한 양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에 보통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님 부임 이전에 있어던 기존 교인들이다. 이분들과의 충돌은 없었는가? 김 : 우려되는 문제다. 그래서 처음 부임했을 때 전체 과정을 모두 프로그램화 하지 않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2단계 과정을 먼저 도입해 전체 성경공부 방식으로 2년동안 시행했다.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정착되면서 1단계와 3단계를 도입해 충격을 줄였다. 신 : 부임 당시 9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는데 당시 기존 교육 프로그램이 없었는가? 김 : 전도폭발 훈련이 있었다. 그 과정과 프로그램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보완하고 강화하여 지금의 전도폭발의 과정을 만들었다. 부임후 9년이 지나면서 150% 정도의 교인이 증가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분들과 기존에 계시던 분들이 함께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신 : 목사님의 목회에서 내적으로는 평신도를 세우는 사역이라면 외적으로는 어떤 교회의 모습을 지향해 가는가? 김 : 친교와 구제하는 교회,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를 지향한다. 그 일환이 우리가 계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도서관이다. 예배당 본관 정문에 있는 교육관에 ‘푸른 초장’과 ‘마을문고’를 오픈해서 전문적인 사서를 두고 운영 중에 있다. 교회 옆에 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방과 후 시간에 어린이들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신 : 이건 혹시 목사님이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한 것과 상관이 있는가? 김 : 그건 아니다. 혹시 상관관계를 찾는다면 전문 사서를 두는 것 정도일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지역마다 있는 공공도서관 시설에 대해 많이 부러워했다. 우리 교회가 지역에 대해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이것이 필요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사서를 두는 것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일이 그저 취미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서는 도서 구매 결정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독서 지도, 대출 관리, 도서 배열, 전산화 작업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관여한다. 신 : 도서관 이외에 지역사회와 연관된 일들은 무엇인가? 김 :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은 모두 다 하고 있을 것이다.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일이나, 소년소녀 가장들, 또 어렵게 생활하는 이웃들을 돌본다. 또 교회가 지역사회에 봉사함으로 그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이 있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찾고 진행한다. 신 :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다. 이 시대의 교회는 선교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교갱협 서기를 맡고 있는 등 교회의 장래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은데 한국교회와 목회의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는가? 김 : 지금의 한국교회를 이야기하면 세속화된 것을 위기로 드는데 이것은 성장 지향주의의 어두운 단면이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교인의 수적 부흥에 치중하고, 준비되지 않는 목회자가 넘쳐나게 되면서 교회는 어두운 그늘이 더욱 짙어지게 됐다. 또한 개혁을 하기 위해 모인 개혁자들까지도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이 좋은 목회자들 양성하는 신학교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1세대 목회자들처럼 영웅적 리더십으로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 현대에 맞는 전인적 리더십으로 무장된 좋은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대담 : 신평식 국장 정리 : 손인선 기자 kcnn2000@kcnn.co.kr
취재 후기 / 김태일 목사는?
문헌정보학 전공한 독서광, 차분하고 편안한 사람
김태일 목사의 사무실은 인근 초등학교가 훤히 내려다뵈는 넓은 창을 갖고 있다. 건축한지 얼마 안돼 건물 냄새와 많은 책 냄새가 함께 날리는 작은 공간이 인상적이다. 계산교회에 부임한지 9년째에 되는 김 목사는 1953년 계산교회가 세워진 해에 태어났다. 올해 나이 52세. 계산교회는 그동안 많은 목회자들이 지나가면서 많은 상처가 있었다. 김 목사는 그 때문에 “이번에도 목회자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 교회는 발전할 수 없다’는 성도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 제가 목회를 잘 할 수 있었다”며 겸손하게 말한다. 김목사는 연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인격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했다. 철저하게 불신자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몰랐던 그였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적적이었다. 재수 시절 결핵을 심하게 앓던 그가 이번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그 여부조차 불투명하던 수술실 앞에서 한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 어쩌면 조금 있다가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시면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는 수술 후에 깨어나서 살아났지만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대학교 2학년 때 후유증으로 2개월 동안 심하게 아프게 됐다.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가고 탈수 현상이 나는 가운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성경구절이 쓰여진 종이쪽을 줍게 됐다. 그 종이에는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 14)”는 성구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듯 전율했다. 이상하게 그 날 저녁부터 고열이 사라졌다.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와 기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삶과 몸과 영혼을 통해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고 계셨다. 그 후로 그는 죽었다. 하나님의 사람 김태일 목사만 남았다. 그는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했음 때문에 목회 헌신 때의 그 초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한다. 불신자였던 때를 기억하며 더욱더 비판적인 입장에서 깨어있는 시각으로 교회를 보려한다. 김구 선생의 일기인 ‘백범일지’를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책으로 여길 만큼 원리와 기준에 깨어있으며 인간애를 가지려 노력한다. 김목사님과의 인터뷰는 100여권의 책을 돌려가며 동시에 읽어간다는 ‘곡서광’의 대화 같았다. 차분하고, 편안한 대화였다. 김태일 목사 가족으로는 정안나 사모와 딸 예은과 수은이 있다. kcnn2000@kcn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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