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박은(朴誾, 1479~1504)이 지은 안호(安瑚, 1437~1503)의 행장(行狀)을 보면 안호의 부친 안지귀(安知歸)가 문성공 안향(安珦) 부터 자신까지 8대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안호(安瑚) 본인은 1466년 문과에 급제했고, 아들이 없어 동생 안침(安琛)의 둘째 아들 안처선(安處善)을 후사로 삼았는데 그도 1497년 문과에 급제했다고 나온다. 이 행장에는 결국 순흥안씨 10대연속 장자 급제가 나오며, 그 후 안처선의 아들까지 급제하여 11대 연속 급제의 기록을 달성한다.
안지귀는 안원숭의 현손이며, 고조부의 문과 급제 여부를 잘못 알았을 리가 없다.
"안향(安珦) - 우기(于器) - 목(牧) - 원숭(元崇) - 원(瑗) - 종약(從約) - 구(玖) - 지귀(知歸) - 호(瑚)ㆍ침(琛) - 처선(處善) - 정(珽)"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卷四 / 행장(行狀) / 안호(安瑚) 행장(行狀)
고(故)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 안공(安公) 행장
증조 종약(從約)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해주 목사(海州牧使)이다.
조부 구(玖)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이다.
부친 지귀(知歸)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전주 부윤(全州府尹)이다.
본관은 순흥부(順興府)인데 지금은 경상도 풍기군(豐基郡)에 속한다.
안씨(安氏)의 선조는 순흥(順興)에서 나왔으며, 현달(顯達)한 것은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에서 비롯하였다. 문성공은 휘는 모(某)인데 고려의 성세(盛世)에 문장과 공업(功業)으로 첨의중찬(僉議中贊)의 자리에 올랐으며, 학교가 쇠폐(衰弊)하여 인재를 양성할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하여 자신의 종복(從僕)과 금전을 희사하여 학교의 재정에 충당하는 한편 중국에서 선성현(先聖賢)의 화상 및 제기(祭器)와 악기를 입수하여 왔다. 학교가 쇠퇴했다가 다시 진작된 것은 실로 공의 힘을 입은 것이다. 이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지금까지 모셔진다.
문성공 이후로 공에 이르기까지 9대(代) 동안 관작이 이어져 당대의 명문(名門)이 되었다. 우기(于器)는 대사헌이고, 목(牧)ㆍ원숭(元崇)은 모두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원(瑗)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개성 유후(開城留後)가 되었고, 지귀(知歸)는 전주 부윤(全州府尹)이니, 이들이 그중에서 가장 현달한 이들이다.
공은 휘는 호(瑚), 자는 모(某)이니, 부윤공(府尹公)의 윤자(胤子)이다. 모친 박씨(朴氏)는 상주부인(尙州夫人)에 봉해졌다. 외왕부(外王父) 이창(以昌)은 세종조(世宗朝)의 유명한 분인데 병조 참판으로 벼슬을 마쳤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기우(器宇)가 남달랐다. 그래서 부윤공(안지귀)이 공을 어루만지며 “우리 집안 8세(世)는 모두 과거로 현달하였고 청검(淸儉)을 집안의 전통으로 이어 왔으니, 이 아들은 세업(世業)을 실추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 기묘년(1459, 세조 5) 진사과(進士科)에 입격하였다. 부윤공이 졸(卒)하자 광묘(光廟 세조(世祖) )께서 그 후손을 녹용(錄用), 음보(蔭補)로 공을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임명했다.
성화(成化) 병술년(1466)에 공은 과거에 제 2 명(第二名)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으며,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 예승(例陞)하였다. 그리고 상(上)께서 친히 유신(儒臣)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공의 글이 뽑혀서 1급(給)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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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부인 김씨(金氏)는, 그 부친이 휘 철구(哲鉤)로 전농주부(典農主簿)이며, 아들이 없어 관찰사공(안침)의 둘째 아들 처선(處善)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처선은 정사년(1497)에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으며, 전취(前娶) 최씨(崔氏)에게서 1남 1녀를 낳았고 후취(後娶)는 송씨(宋氏)이다.
장차 갑자년(1504, 연산군 10) 2월 27일에 광주(廣州) 망월동(望月洞)의 기슭에 공을 안장(安葬)할 것이다.
진용교위(進勇校尉) 용양위 사과(龍驤衛司果) 지제교(知製敎) 박은(朴誾)은 삼가 행장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