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다스(Midas) 왕(王)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미다스 왕은
어떤 왕이며 프리기아(Phrygia) 는 어떤 나라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1. 히타이트(Hittite) 제국(帝國)의 멸망(滅亡) (약 1200 BC)
1200 BC 년 경에 일어난 고대사(古代史) 최대(最大)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고대국가
(古代國家)들의 갑작스런 몰락(沒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청동기(靑銅器) 시대 말, 철기(鐵器) 시대로 접어들 무렵에 지중해 동쪽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잿더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히타아트, 미케네, 필로스, 트로이, 우가리트, 알라시아(키프로스) 등 지중해(地中海)
연안(沿岸)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후 그리스에 첫 도시국가가 생기고 문자(文字)로 기록(記錄)을 남기기 시작하는
800 BC 년 까지를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라고 부른다.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는 서양(西洋)의 관점에서 편의상(便宜上) 붙인 명칭이다.
앗시리아나 아집트는 멸망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암흑시대(暗黑時代)는 아니다.
2. 무쉬키(Mushki) - 프리기아(Phrygia)의 등장 (1160 BC)
그리스인들이 프리기아(Phrygia)라고 부르는 나라가 앗시리아의 기록에는 무쉬키(Mushki)
로 적혀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1160 BC 년에 무쉬키(Mushki) 라는 나라가 대군(大軍)을 이끌고
앗시리아의 알지(Alzi) 와 푸루후지(Puruhuzzi) 를 공격한다.
50년 후 앗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1세(Tiglath-Pileser I)가 반격(反擊)하여
무쉬키를 몰아낸다.
히타이트가 강성(强盛)했을 때 앗시리아는 이류국가(二流國家) 수준이었으나,
히타이트 말기(末期)부터 군사강국(軍事强國)으로 발돋움하다가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에는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 지역(地域)으로 진출을 꾀하게 된다.
히타이트 멸망 후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은 말라티아(Malatya), 타발(Tabal),
쿠에(Que),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에 독립된 소국(小國)을 세우지만 점증(漸增)하는
앗시리아의 위협(威脅)에 직면(直面)하게 된다.
이들은 앗시라아에 정복(征服)당해 공물(供物)을 바치기도 하고, 앗시라아의 지배(支配)가
느슨해지거나 폭정(暴政)이 심해지면 반란(反亂)을 꾀하기도 했다.
무쉬키(Mushki) 도 이들과 같이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무쉬키는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이 세운 나라는 아니고 히타이트 멸망을 전후
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3. 미다스 왕의 등장 (718 BC)
718 BC 년에 프리기아(Phrygia)의 미다스(Midas) 왕으로 추정(推定)되는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 왕이 등장한다.
미타(Mita) 왕은 타발(Tabal),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과 연합하여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해 싸운 것으로 앗시리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709 BC 년에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왕은 갑자기 앗시리아에 호의적(好意的)
으로 나온다.
앗시리아에 의해 폐위(廢位)되었던 타발(Tabal)의 전왕(前王) 우리키(Urikki)가
앗시리아의 또다른 적대국이었던 우라르투(Urartu)와 동맹(同盟)을 맺기 위해
사신(使臣)을 파견한다.
사신(使臣)들이 무쉬키(Mushki) 영토(領土)를 지날 때 이들은 미타(Mita) 왕의 군사들에게
체포(逮捕)되어 앗시리아로 넘겨진다.
앗시리아의 오랜 적국(敵國)이었던 무쉬키가 앗시리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態度)를
갖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4. 킴메리아(Cimmeria) 인의 등장과 미다스 왕의 죽음 (714 BC, 696BC)
714 BC 년에 킴메리아인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호전적(好戰的)인 민족(民族)이 코카사스
산맥(山脈)를 넘어 우라르투(Urartu)까지 내려왔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흑해(黑海)
의 남쪽 해안을 타고 이동하여 시노페(Sinope) 부근에 근거지(根據地)를 마련한 다음
타발(Tabal)까지 진격하는 일이 일어난다.
킴메리아인들은 무쉬키(Mushki)를 압박(壓迫)했는데 미타(Mita)왕은 앗시리아와 킴메리아
를 동시에 대적(對敵)할 수 없었으므로 앗시리아와 동맹(同盟)을 원했던 것이다.
705 BC 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2세(Sargon II)는 군대(軍隊)를 이끌고 타발(Tabal) 지역의
군주(君主)들 중 하나였던 고르디아스(Gordias) 왕과 전쟁(戰爭)을 벌인다.
이때 무쉬키는 앗시리아의 동맹국(同盟國)이었기 때문에 무쉬키 군(軍)도 같이
원정(遠征)을 간 것으로 보인다.
앗시리아-무쉬키 동맹군(同盟軍)은 대패(大敗)하고 사르곤2세는 전사(戰死)한다.
사르곤2세의 아들인 센나케립(Sennacherib, 704-681 BC)이 앗시리아의 왕이 되고,
무쉬키의 미타(Mita) 왕은 앗시리아의 모든 기록물(記錄物)에서 사라진다.
고고학자(考古學者)들 중 일부는 미타(Mita) 왕이 가까스로 전쟁터를 빠져나온 다음
살아남은 군사(軍士)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옛길을 따라 중앙 아나톨리아 지역을
가로지른 후 그리스 문명권(文明圈)에서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본다.
이때 그리스는 미케네 멸망(滅亡) 이후 시작된 400 년 동안의 암흑시대(暗黑時代)를 빠져 나오던 참이었다.
프리기아(Phrygia)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의 유물(遺物)을 조사(調査)하면
BC 8 세기까지는 서부(西部) 아나톨리아 양식(樣式)의 유물이 발견되다가, BC 8 세기
이후 지층(地層)에서는 동부(東部) 아나톨리아 양식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르디온(Gordion)으로 이동
했다는 증거다.
이후 미다스(Midas) 왕(王)은 어떻게 됐을까?
696 BC 년에 킴메리아인들이 프리기아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으로 쳐들어 온다.
킴메리아인과 맞서 싸우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미다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프리기아(Phrygia)는 역사(歷史)에서 사라진다.
이후 서부(西部) 아나톨리아의 주도권(主導權)을 잡은 나라는 리디아(Lydia) 이다.
5.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2권"을 보면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메티코스"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알아내기 위해
갓 태어난 두 아이를 뽑아 양치기에게 맡기고 인적(人迹)이 없는 곳에서 키우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이 말을 할 시기가 됐을 때 처음으로 하는 말을 조사하여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직접 인용한다.
명령 받은 대로 행한 지 2 년이 된 어느 날 양치기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두 쌍둥이 아이가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달려들면서 "베코스"라고
말했다.
양치기가 그 말을 듣고서도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두막으로 가 아이들을 돌보아줄 때마다 계속 그 말을 듣게되자,
양치기는 마침내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을 왕 앞으로
데려왔다.
왕도 직접 자기 귀로 그 말을 듣고 "베코스"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조사해 보도록 했다.
그 결과 프리기아어로 빵을 "베코스"라 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 2 권, 박광순 역, 범우사>
프리기아인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정말로 믿었을까?
이집트인, 앗시리아인, 미케네인이 프리기아인 보다 더 오래된 민족인데 말이다.
6. 남은 이야기
20세기 중반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고고인류학 팀이 터키의 야시휘육크(Yassihoyuk)
(프리기아의 서울 고르디온으로 추정) 에서 미다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굴한다.
작은 언덕 모양인데 지름이 300 미터, 높이가 47 미터인 원뿔 모양의 무덤이다.
이 무덤이 미다스 왕의 무덤이 아니라 아버지인 고르디우스 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무덤 안에는 각종 진귀(珍貴)한 물건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미다스 왕의 황금손
이야기를 낳은 것이 아닌가 추정(推定)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나귀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프리기아는 그리스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부유(富裕)한 미다스 왕을 깍아 내리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검색(檢索)해 보니 사라 모리스(Sarah Morris)라는 학자(學者)가
새로운 주장을 펼쳤는데 "당나귀 귀" 는 청동기 시대 때 왕(王)의 신성(神性)한 신체적
특징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더 이상 적지 못하겠다.
미다스 왕은 황금손이나 당나귀 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다.
밀려드는 야만족(野蠻族) 킴메리아인에 대항해 싸웠고 생존을 위해 앗시리아에 대한
적의(敵意)를 버리고 동맹(同盟)을 맺은 사람이다.
전쟁에서 대패하자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역사에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킴메리아인의 재침입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만 싸움에서 지고 더 이상 희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그가 살아온 역정(歷程)이 동화(童話) 보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참고한 책]
- The Hittites and their comtemporaries in Asia Minor (J.G. Macqueen)
- Cultural Atlas of Mesopotamia (Michael Roaf)
- Ancient Iraq (Georges Roux)
첫댓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의 주인공이~~경순왕이셨군요~~ㅎㅎ
경순왕이 무덤에서도 속 상해 하시겠네요.
소문나지 않기를 바랬는데...세월이 흘러흘러 영일만 월월이 청청에 공개가 되어버렸으니...ㅎㅎ
결코 이야기속처럼 어리석은 임금님은 아니였겠지요 ..
예나지금이나 사람사는 이야기는 늘 신비롭네요 ... 감사해요 ... ^^
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진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무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