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안대군묘지명(定安大君墓誌銘)
- 李齊賢 撰幷書, 1615년(광해군 7)
익재공(益齋公)이 찬(撰)한 * 정안대군(定安大君)의 묘지명과
후대에 이를 입수하여 첩(帖)으로 꾸미기까지의 내력을 기록한 글을
부록(附錄)한 비명첩(碑銘帖-비석면에 새긴 글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1첩으로 되어 있는데 정안대군의 묘지명 탁본과 이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필사해 놓은
후기(後記)로 이루어져 있다.
1615년(광해군 7년)에 후손 시발(時發)이 쓴 후기(後記)에 따르면
익재공(益齋公)이 짓고 직접 쓴 이 묘지문(墓誌文)을
개성부(開城府) 적전(籍田-임금이 몸소 농사를 짓던 밭) 근처에서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는데
후손 시발이 이 소식을 듣고 몇 부를 탁본하여 소장한 것이다.
1744년(영조20)에 이석규(李錫圭)가 쓴 글에는
이시발이 얻어서 족자(簇子)로 만들어 집안에 내려오던
정안대군의 지문(誌文)이 많이 파손되었고,
이시발의 글씨 역시 손상되어 보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첩(帖)으로 만들어 보관한다고 되어 있다.
정안대군의 묘지명은 두전(頭篆-전자체의 글머리)이
'定安大君墓誌銘'이라고 되어 있고 정안대군(定安大君)이 세상을 떠난
1345년(고려 충목왕 2)에 찬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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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안대군
- 허종(許琮)을 일컬으며 검교정승(檢校政丞) 평(評)의 아들로
충렬왕에 의하여 궁중에서 자라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혼인하였다.
충선왕 때 수사도(守司徒-벼슬)로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지고
후에 다시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해졌다.
1345년(충목왕 1년) 수춘옹주가 죽자 슬픔으로 병들어 죽었다.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