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계산 품에서(1031)
유병덕
아침기온이 청량하다. 지난여름실내온도는 섭씨 30도를 맴돌았다. 오늘 보니 23도를 나타내고 있다. 서재의 커튼을 올리니 누가 청소해 놓은 듯 하늘이 깨끗하다. 수통골이 아파트 사이로 아침햇살을 받으며 가까이 다가온다. 좌우로 나지막한 빈계산, 도덕봉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 뒤로 금수봉이 얼굴을 살짝 내민다.
지난 사월 계룡산을 등산하며 대지의 꿈틀거림을 느꼈다. 계룡산은 큰 산이라 할 수 없지만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빈계산은 계룡산자락 동쪽외곽에 자리한 암탉처럼 생긴 작은 산이다. 수통골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시내버스 표지판도에도 빈계산 입구가 아닌 수통골로 표기하고 다닌다.
세 개의 봉우리 중 왼쪽에 있는 봉우리를 빈계산이라 부른다. 금수봉은 빈계산보다 하늘 가까이 있다. 내가 빈계산보다 더 높으니 봉이라 부르지 말고 산이라고 불러 달라 할만도 한데 아무 말이 없다. 그대로 인정한다.
주말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찾아온다. 시골의 5일장 서듯 북새통을 이룬다. 요즈음 보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금발의 아가씨도, 피부색이 까만 젊은이도 가끔 나타나서 눈길을 끈다. 나도 그 대열에 끼곤 한다. 비록 작지만 내공이 많이 쌓인 듯하다. 늘 편안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맞아 준다.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라는 주제로 어제 풀꽃 문학제가 공주에서 있었다. 그 곳에 가기 위해 주유소도 들릴 겸 수통골 쪽으로 우회했다. 지난번 보았던 빈계산 푸름이 간곳없다. 노인얼굴에 누런 검버섯이 돋듯 산중턱이 온통 그러하다. 초라해 보였다.
언뜻 내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다. 공주풀꽃 문학제에서 만난 한 친구가 빈계산을 가겠노라 했다. 그는 한 주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냥 오롯이 편안한품에 안기어 휴식을 취하고 싶은 모양이다. 오전에 약속을 한지라 일찍 미사를 다녀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걱정이 되었다. 평생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던 습관 때문에 잠시나마 심난했다. 손전화기를 꺼내 열어보니 거두절미하고 ‘20분 늦음?’이다. 산에 오르면서까지 시간을 따지는 내 자신의 조급함을 꾸짖어 볼일이다. 풀꽃처럼 소박한 그 친구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주말이라 차와 사람으로 넘쳤다.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도로변 경계석까지 차가 올라와 앉았다. 계곡 쪽으로 가족이나 친구끼리 무리지어 다정히 걸어간다. 가끔 혼자서 백 팩을 메고 두리번대는 사람도 보였다. 다리난간의 엿장수는 박자와 율동을 맞추어가며 흥을 불러온다.
버스종점 뒤 등산로를 따라 아이들이 내려온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새소리처럼 들린다. 입구의 소나무가 일렬로 도열하여 환영한다. 깨끗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청소해준다. 수형도 잘 생겼다. 쭉쭉 하늘로 향하고 있다. 함께 간 친구의 얼굴 표정이 오버랩 된다. 한 주간 고생하여 체력이 고갈되었건만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주차장에서 빈계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조금 가파르다. 친절하게도 로프를 잡고 올라가라고 늘여 놓았다. 쉬엄쉬엄 걸어 올라가다가 체력단련 하러온 친구가 나타나면 길을 양보했다. 여기가 어디일까, 궁금할 때쯤 이내 안내 푯말이 나타나 정상까지 500미터 남았다고 알려준다. 도란도란 세상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 올라갔다.
도심에 분주히 움직이는 차량, 가을햇볕을 받은 평화로운 시가지모습, 바로 아래 오벨리스크처럼 하늘을 향하고 있는 도안신도시 빌딩의 위용, 대전을 둘러싼 구봉산, 보문산, 계족산능선까지 잘 보인다. 서북 방향으로 지난봄에 올랐던 계룡산 삼불봉도 멀리 들어온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앉아 가을햇볕을 쬐고 있다. 김밥이나 음료로 허기를 채우고 나더니 이구동성으로 참 맛있다. 잘 먹었다하며 즐거운 표정이다. 파란하늘에 구름 한 조각이 한 폭의 그림처럼 도덕봉에 걸쳐있다. 순간 내 마음은 창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갑자기 북한산을 오르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군에서 훈련 상황이다. 한 병사의 애인을 헬기로 백운대 정상에 이동시켜 놓고 그 아가씨가 무전기로 한 병사의 이름을 부른다.
“자기야, 나 북한산 정상에 와 있어,”
놀랜 그 병사는 앞으로 나왔다. 교관이 완전군장을 시켰다. 그리고 명령한다.
“지금부터 시간을 잰다. 1시간 30분 내에 정상도착하면 애인과 함께 일주일간 휴가다.”
나머지 병사들이 부러워했다. 소총 한 자루와 수통만 옆구리에 매고 헉헉거리며 그 병사를 따라 북한산을 올랐던 나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산행이다. 쉬엄쉬엄 올라가다 바쁜 손님만나면 길을 양보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다 평평한 능선도 걸었다.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보리 고갯길도 찾아보았다. 나무숲 사이로 청량한 하늘도 보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인사도 나눴다. 산 아래 빌딩을 바라보며 군상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마치 인생길을 뚜벅 뚜벅 걸어가는 듯 했다.
“바로 주차장 계곡으로 내려갈까요?”
같이 간 친구가 아니란다. 금수봉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산에 와서 힘이 더 생긴 것 같다. 금수봉에 오르니 빈계산이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잘 지어놓은 팔각정은 장정들이 자기네 집처럼 독차지하고 있다. 그 들에게 밀려나 다시 서북 방향 능선으로 걸었다. 한참가다 보니 도덕봉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도덕봉 쪽으로 더 가고 싶지만 해가 많이 기울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때, 빈계산 너머를 즐겼다. 후지산, 알프스, 킬로만자로, 아콩카구아 등 외국으로, 때로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국내 명산만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당시 그 명산의 그늘에 묻히어 나를 보지 못했다. 그저 없는 시간을 쪼개고 돈을 마련하느라 힘들었던 기억뿐이다.
산을 찾는 것은 풍광만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있는 다른 유형의 자유에 흠뻑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연행 당하듯 버스에 실려가 감시받아가며 바라보는 금강산이 세계적인 절경인들 감흥이 없다. 그 곳에서 하루빨리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름다움으로 유혹하는 장미보다 소박한 풀꽃이 편하다. 정해놓은 시간에 쫓기어 허둥대는 내모습보다 오늘 중 만나면 되지 하는 그 친구의 여유로움이 평화롭다. 헉헉대며 힘들게 찾는 명산 보다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빈계산이 엄마의 품같이 포근했다. 함께 등산한 친구가 처음으로 산을 느껴보았다고 한다. 어제 풀꽃축제에서 만난 시인의 잔영이 남아있다.
아름답네요. 붉은 단풍이
첫사랑처럼 이 마음 훔쳐가네요.
아! 벌써 내 나이 가을이라네,
나는 몰랐다. 빈계산 너머로 활보하고 다닐 때 어디쯤 가고 있는지, 이제 한 잎 두 닢 내려놓고 비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