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자금성(紫禁城)은 함흥(咸興) 본궁터다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보면 아래와 같이 야백제(夜白祭-白夜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正祖實錄 42권, 正祖 19년 4월 28일 戊申 1번째기사
함흥과 영흥 두 본궁의 의식이 완성되다
또 야백제(夜白祭)와 야흑제(夜黑祭)가 있다. 함흥에서는 정월과 9월에 야백제를 지내고 12월에 야흑제를 지내는데 기품은 각각 36개이다. 영흥에서는 정월에 야백제를 행하고 12월에 야흑제를 행하는데 기품은 각각 21개이다. 오직 야흑제 때만은 돼지고기 한 그릇을 더 놓는데 궁의 뜰을 소제한 다음 진설한다. 함흥에 있는 제단은 별차(別差)가 그 제사를 주관한다.
又有夜白、夜黑祭, 咸興正月九月行夜白祭, 十二月行夜黑祭, 器各三十六; 永興正月行夜白祭, 十二月行夜黑祭, 器各二十一。 惟夜黑加豕一, 就宮庭掃除 而設。 咸興有墠, 別差掌其祀
위 글을 보면 조선(朝鮮)의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에서는 각각 정월(正月)에 야백제(夜白祭)가 행해졌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야백제는 다름아닌 백야(白夜)현상을 기념하여 치러진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사오천년의 역사를 현 반도에 한정지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들을 분석하면 반도역사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가득한 것도 그렇거니와 위의 기록처럼 야백제(夜白祭)와 야흑제(夜黑祭)라는 전혀 엉뚱한 그리고 반도역사에서 해석이 도저히 불가능한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사오천년의 역사무대를 대륙의 현 알타이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거대한 강역을 놓고 분석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수많은 이해불가한 기록들이 정당한 타당성을 갖게 되고 우리 후손들도 또한 정확히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백야(白夜)는 북위 48도 이상의 지방에서는 여름 하지(夏至) 전후에 밤, 즉 일몰과 일출사이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 18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 하늘이 희미하게 빛나는 태양광선 때문에 박명(薄明)현상이 계속되는 아주 짧은 밤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남위 68도 이하의 남쪽지방에서는 백야가 동지(冬至)를 전후해 일어나며, 백야기간이 가장 긴 극지방에서는 6개월이상 계속되기도 하며 이것은 지축(地軸)이 23.5°기울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야백제(夜白祭)에 대한 해석이 바로 백야(白夜)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해석했을 때, 조선의 백두산인 현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거대한 산맥(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북위 48도 이상의 지역들에서는 백야현상이 정확히 목격되었음을 현재의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와 이르쿠츠크 그리고 흑룡강성(黑龍江省) 모허(漠河)라는 마을에서 관측된 백야(白夜)기록을 통해 우리는 검증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위 정조실록(正祖實錄)의 기록속에 나오는 야백제(夜白祭) 즉 백야현상이 발생하는 지역에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이 존재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일식현상에 대한 분석글인 <1813년의 일식도는 조선의 서북(西北)경계를 고증한다>에서 살펴본 함경도 북관(北關)의 위치가 북위48° 이북에 존재함에 따라 백야현상이 관측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1813년의 일식기록을 통한 함경도 북관(北關)의 위치 비정과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나오는 야백제의 기록을 상호연관시켜 분석해 보면 야백제(夜白祭)란 바로 대륙 알타이산의 동쪽 북위 48도이북에 존재했던 함경도 함흥지역에서 관찰되었던 이른바 백야(白夜)현상을 말한다고 분석해낼 수 있다.
2.
현 반도에서 함흥의 위치는 원산(元山)북쪽 약80km에 위치하고 있다. 간교한 일제가 대륙의 거대한 조선을 반도로 옮기면서 그 지명은 구한말을 기준으로 그 지형적 모습을 그대로 반도에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 우리가 고찰하려는 함흥의 위치와 관련해 정조대왕(正祖大王)시절에 기록된 함흥(咸興)의 위치는 대륙조선의 원산인 현 천진(天津)의 위쪽에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왕조실록을 토대로 분석해 본다면 분명 함흥은 백야(白夜)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구한말 대륙조선을 방문했던 러시아 관리들의 기록은 당시 함흥(咸興)이 어떻게 원산(元山)의 위쪽으로 이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다.
조선은 해안이나 바다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륙에는 만족할 만한 교통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국의 지방과 가까운 경흥(慶興)북쪽에서 이원(함경도), 호량(회령), 부량(부령)들이 해안(海岸)으로 이전될 예정이었다. 최근에는 함경도(咸鏡道) 지방 자체가 두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 완전히 독립했으며, 각각의 관찰사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1889년 여름-조선북부 여행기)
카르네프 외 4인 著, 이르게바에브,김정화 譯 내가 본 조선,조선인 2003- 가야넷
역사기록은 1896년 함경도(咸鏡道)가 남북(南北)으로 나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찰해보면 알타이산 동쪽에 존재했던 함흥이 이미 1889년경 대륙조선의 원산(元山)인 현 천진(天津)의 위쪽 어느 곳으로 이전했음을 우리는 파악해 낼 수 있으며 지도를 통해 고찰해보면 그 이전지역이 현 북경 자금성(紫禁城)임을 또한 알아낼 수 있다
역사속 한족(漢族)의 북경(北京)은 여러 고찰을 통해 현 주천(酒泉)임을 고증했다. 따라서 자금성(紫禁城)은 현 감숙성(甘肅省) 주천(酒泉)에 있었던 것이지 현 베이징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현 자금성(紫禁城)은 명확히 1949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을 대만(臺灣)으로 몰아내고 대륙전체를 석권한 후, 구한말 조선(朝鮮)의 함흥(咸興)에 존재했던 태조 이성계의 본궁(本宮)을 개조하여 자금성(紫禁城)으로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거대한 대륙의 조선(朝鮮)이 제일 신성시한 개국시조 이성계(李成桂) 가계의 중심인 함흥(咸興)과 그 본궁을 옮긴 이유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단지 러시아 관리들의 기록을 통해 1889년 대륙조선 함경도의 많은 중요지역이 해안가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이는 결국 북쪽에서 강한 힘으로 동방진출을 추구했던 러시아의 강성과, 남쪽으로는 장강(長江)을 통해 영국과의 무역확대를 추구했던 조선조정의 이해관계속에서 북륙조선의 행정구역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1898년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인 크노헨하우어(1861-1942)는 그의 저작에서 영국산 옥양목(玉洋木)이 조선을 점령해 양잠업(養蠶業)을 포함해 조선의 국내 모시산업은 망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대한 대륙조선 2억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던 강역에 영국산 모직물이 조선의 내수시장을 강타할 정도라면 조선조정에서 가만히 있을리 없는 일이며, 결국 1890년을 전후한 행정구역의 개편은 점점 커지는 서구열강의 침투와 무역의 열세(적자)를 극복하기 위한 조선(朝鮮)조정의 적극적 조치로 파악해 볼 수 있다.
3.
2023.08.16.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함흥은 본디 이성계의 본진이라 들었습니다. 김종윤 선생은 호화호특이 함흥이라 비정하신 적이 있는데. 송계님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왜 조선이 지리적으로 봐도 대륙 삼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과거 역사를 부정했는지 이해는 갑니다만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어거지의 역사를 하나로 엮어 논 현재 한국의 역사는 뭔가 이질적인 조합이 뒤섞인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듭니다. 중국 역사를 재편하면서 오만 짬뽕을 만들어 놨듯이 일본이고 중국이고 한국이고 자국이 주장하는 장구한 역사들은 전부 엉터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저때 2억명의 인구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대륙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으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처형당하거나 한족화되었어요.
서양 제국주의가 총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왜구들도 침략준비를 서두를 때 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을까요?
붕당정치 때문이겠죠.
2억 이상의 조선 민족 사람들이 한반도로 건너온 인구수는 1천만명도 안 되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럼 지금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19C~20C 조선 민족 인구 변천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나오면 좋겠네요.
역설적이게도 크기 대문에 당한것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큰나라 대국이 쉽게 무너지겠어. 500년을 유지한 나라가 내일 무슨일이 있겠어? 전쟁에 임하는 자세 명분 여기서 판가름 나는것이죠 우크라이나전을봐도 병력의 크기와 화력보단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것 지금도 볼수있죠. 그리고 단일 통치라인은 지금의 푸틴처럼 김정은처럼 시진핑처럼 충신이라믿는 간신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나라를 위한결정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결정(짐이 곧 국가이다. 이말은 독재자에게도 통용되는말임)이 나라를 위한결정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함. 위의 역기능에 신물이나 민란이일어나고 왕정파 유학파로 갈라져 왕권제가 날라갔지만 ...평화로울때는 단일라인 통치가 기똥찬것이기 때문에...국가가 쪼개지는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