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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士禍의 흔적 , 한남군 이어 , 훈구파의 또 다른 피해자
글쓴이 : 꼭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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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士禍의 흔적] 2. 한남군 이어 - 훈구파의 또 다른 피해자
1. 훈구파의 생성과정과 피해자들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조 초기에 성리학을 실천철학으로 삼은 사림의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화(士禍)의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초 비성리학적이며 비정상적인 왕권쟁탈의 부조리한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성종(1469~1494)대 후반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특권적이고 세습적인 관료집단을 형성하며 정권을 독점하던 훈구파가 결국 부패의 진원지이며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지경에 이르자, 성종에 의해 견제세력으로 등용된 사림파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는 훈구파가 태동하게 된 계기가 바로 부조리한 왕위 찬탈을 단행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이었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왕위 찬탈을 계획하고 단종의 보위세력인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과 수양의 친아우 안평대군 등 종친을 살해, 제거하여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결국 수양대군은 정난 2년 후인 1455년 6월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수양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한명회를 필투로 수양의 편에 붙어 공을 세운 자들은 공신 책봉으로 각종 특권과 보직을 받아 성종대 때까지 세습과 혼맥을 통하여 세력 확대를 거듭하며 기득권을 거머쥐고 권력을 독점한 훈구파의 시초가 되었다.
왕위계승의 변고를 지켜보던 종친부에서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조차 눈치 빠르게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정난때 처형된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성품이 강직한 금성대군 등 일부는 세조의 부당한 조치에 반발하여 유배당하였으며, 이 틈을 노려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종친들과 훈구세력들은 그 동안 단종을 보필하며 자신들을 견제해 온 혜빈 양씨(惠嬪楊氏:?~1455) 세력들도 제거할 기회로 삼는데 바로 지리산 자락 함양으로 유배를 온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어:1429~1459)이다.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 사이에 태어난 서자로서,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이 깊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하며 세조도 아꼈음을 사료의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혜빈 양씨는 세종 생전 문종이 세자일 때 세자비가 단종을 낳은 후 갑자기 죽자(1441) 세종의 지시로 젖을 물리며 단종을 키웠다. 세종이 죽자(1450) 왕가의 법도에 따라 궁 밖으로 나가 살다가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1452년) 다시 궁 안에 들어와 풍전등화같은 단종을 보필하였는데, 결국 단종의 가장 가까운 왕친이 되어 수양의 왕위 찬탈 때(1455)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그해 11월 신하들의 여러 상소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한남군도 함흥으로 유배된 부인과 떨어져 혼자 아산으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져 유배를 당했다,
세조가 대대적인 숙청을 통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한동안 세종과 문종에게 은혜를 입은 세력에 의해 단종복위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는데,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대대적인 처형이 벌어지자, 이때 한남군은 한양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지리산 골짝 함양으로 이배되었다. 1457년에는 한남군과 같은 시기에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의 역모가 발각되어 결국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처형되고, 두 달 뒤에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당했던 단종이 자결하며 끔찍한 세조의 왕위 찬탈의 피비린내는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에도 종친과 훈구대신들은 자신들의 세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후한을 없애기 위하여 한남군을 비롯한 나머지 유배자들을 처형할 것을 끊임없이 상소하였으나, 이미 많은 형제들과 대신들의 피를 밟고 왕위에 오른 세조로서는 인간적으로 더 이상 할 짓이 아닌데다가 한남군에 대한 우애가 남아 있었는지 번번이 거부하였다.
비록 참형은 면했으나 한남군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세종 치세에 27세 때까지 궁궐에서 왕자로 지내다가 졸지에 유복자를 임신한 부인과는 생이별 당하고, 생모와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처형을 당하고 홀로 머나먼 지리산 골짜기로 유배된 지 3년만인 31세의 한창 나이에 병을 얻어 엄천강변에서 쓸쓸히 한 많은 일생을 하직하였다.
이때 참혹한 과정을 학습하며 권력을 잡은 훈구파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무자비한 반대파의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으니, 이후 백년간에 걸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가 그것이다.
2. 한남군의 유배지로 구전되고 있는 새우섬
한남군이 함양에 유배당하여 3년여를 지낸 곳이 엄천강변 새우섬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새우섬은 용유담에서 흘러내려가던 엄천강이 문정마을을 지나 한남마을을 앞두고 크게 꺾이는 곳에 모래톱처럼 튀어 나온 곳이다. 원래는 새우모양을 한 섬이었는데 홍수로 토사가 쌓여 한쪽 강변으로 붙어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엄천강의 잦은 범람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년전 강변을 따라 석축을 쌓고, 주변의 자갈과 토사로 채워 넣고 퇴적토로 평탄작업을 한 후 코스모스 밭으로 만들어 놓아 섬의 형상은 완전히 없어졌다. 조선말 이지역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는 1918년 지형도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섬은 아니다.
*조선말 새우섬 주변 지형을 보여주는 1918년도 지형도
*현재 새우섬 주변 지형도
*2004년도 새우섬 모습 2003년 태풍 매미를 비롯하여 2004년 태풍의 영향으로 엄천강이 쑥대밭이 되어 정비하는 도중의 모습 왜 저렇게 주변 토사를 새우섬에 산처럼 높이 쌓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좌측 강변으로 원래의 지형이 남아 있고, 2006년도에는 평탄작업이 되어 코스모스밭으로 조성하여 지금과 같다.
*지금의 새우섬. 뒤에 보이는 산은 새우섬에서 떨어진 먼산
설령 옛날에는 섬이었다 하더라도 1918년 지형도 기준으로 섬 양쪽으로 작은 샛강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원래 섬의 크기는 작은 강가의 모래톱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며, 지리산 자락의 격심한 강수량에 의한 잦은 범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유배지의 한칸 작은 오두막일지라도 범람을 이기며 새우섬 자체에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새우섬 자체라기보다는 새우섬으로 통칭될 수 있는 새우섬 주변 지역에 유배되었던 것을 절해고도와도 같은 이미지의 ‘새우섬에 유배되었다’고 전해오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3. 한남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한오정과 한오대
새우섬에서 백미터 가량 하류로 내려가면 강가에 특출한 하얀 바위군이 있고 그 위에 ‘漢鰲臺(한오대)’ 각자가 있다. 1887년 주변 유생들이 한남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한남군이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 강가 바위에 앉아 소요하던 곳이라고 한오정(漢鰲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 앞에 있는 바위에 ‘한오대(漢鰲臺)’와 ‘이한남군장구소(李漢南君杖屨所)]를 새겨놓았고 계원들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한남교 남단에서 바라본 한오대. 위쪽 하천이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이 새우섬, 중간 강 좌측에 붙은 바위군이 한오대
*한남마을에서 바라본 한오대
*거친 필체로 새긴 漢鰲臺 각자
*가운데 세로로 희미하게 보이는 李漢南君杖屨所각자와 그 아래 계원들 명단(사진찍기가 위험한 위치에 각자가 있어 사진 상태가 좋지 않다.)
한오대라는 이름에 ‘자라 오(鰲)’를 사용한 것을 보면 강변 바위가 마치 자라같이 생겨 자라바위라 불리다가 유생들이 한오정을 지으면서 그 앞에 있던 바위(자라바위) 이름을 따서 한오정과 한오대를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어떤 자료에는 새우섬에 한오정을 세웠다는데, 이때의 지형은 위에 있는 1918년도 지형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섬은 아니고 모래톱의 지형으로 강가 자갈 퇴적토 토질이었을 것인데 그 위에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현재 한오대 바위 뒤쪽 강가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오정마저 1936년 한남마을이 다 잠기는 수해 때 휩쓸려 가버려 이제는 흔적조차 없으며, 투박하게 새겨놓은 한오대 각자만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볼 뿐이다.
4. 가대지
한남마을 한쪽에 ‘가대지(家垈址)’라 불리는 나대지가 있는데, 한남군의 집터가 있었던 곳이라 구전되고 있다. 이곳에 집을 지으면 화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어 일찍부터 묵은 땅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우섬과 가대지 두 곳 모두 한남군의 유배지라고 구전되어 오는데, 유배지의 거처가 두 군데 있을 수는 없으므로 앞서 살펴보았듯 새우섬 보다는 새우섬이 바라보이는 이곳이 한남군의 유배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화를 입는다는 속설도 한남군의 유허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주춧돌은 남아 있다고 하였지만, 한남군이 유배당했던 집의 주춧돌이었는지 그 뒤의 흔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집터 가장자리 소소한 대숲만 옛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가대지(도로 건너편 멀리 새우섬이 보인다.)
*새우섬에서 바라본 한남마을 가운데 푸른 공터인 가대지
*가대지, 한남마을, 원기마을 지형도
5. 한남군과 관련한 마을 이름
한남군의 역사가 서린 마을에 한남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이 한남동(漢南洞)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시도할 때 가담하였다가 참형을 당하여 최근 사육신으로 현창된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1399~1456)의 영정이 한남동에 거주하고 있는 김녕 김씨 집안에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한남마을 (<유키>님 사진)
최근 한남마을을 중심으로 ‘한남군 적소 복원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령포, 보길도와 같은 유배지 테마 관광 명소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지리산 오지의 유배지와 세상을 등진 은둔지답게 차분하면서도 품격 있는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상업적으로 접근하여 근거도 없는 괴상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기존에 있던 엄천강변의 서정성만 떨어뜨려 있던 관광객마저 발길을 돌릴까 걱정이다.
한남동 바로 옆 원기동(院基洞)은 원터 혹은 원촌동(院村洞)이라고도 한다. 많은 경우 원기동은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元基(원기)’를 사용하는데, 유독 조선시대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던 곳을 뜻하는 院(원)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새우섬에 유배된 한남군을 문안하기 위하여 고을 원들이 와서 쉰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세조실록’을 보면 고을 원이 주기적으로 유배자들을 방문하여 동태도 살펴 보고하도록 하는 한편 아울러 보살펴줄 것을 하교하고 있으므로, 고을 원들이 방문하여 한남마을 직전 이곳에서 쉬었다는 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설로는 숙종때 이곳에 광혜원(廣惠院)이 설치되어 원이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함양군 병곡면에 휴촌(休村)이라는 곳이 있다. 한남군이 귀양 가는 도중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쉬었다 해서 부쳐진 이름이라 전하는데, 마을 지명이 누가 스쳐 지나간 곳이라는 식으로 불려진다는 것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믿을 만 한 것이 못된다.
6. 한남군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임금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벌어진 대화를 비롯한 모든 일들을 사실 그대로 상세히 기록해 놓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세조실록’의 세조5년(1459년) 5월29일에는 특이할 정도로 짤막한 기사 한줄 실려 있다.
‘함양(咸陽)에 안치(安置)된 이어(李어)가 병으로 죽었다.’
한남군의 31년 구구절절 한 많은 생애는 짤막하게 기사 한 줄 건조하게 남겨놓고 무심하게 끝나고 만다. 사후 어떻게 장사지냈는지는 상세히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함양읍 상림 뒤쪽 산자락에 한남군의 묘가 있다. 이곳에 묘를 처음 조성했을 당시 세웠을 묘비에 의하면 명종 12년(1557년) 4월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459년에 죽은 이후 1557년까지 100년간은 숨을 거둔 한남마을에 조촐하게 장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역적의 죄를 지고 있었으니 표 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1557년에 새운 한남군묘비
1557년 묘비의 수수한 규모에 비추어 이때 조성한 묘의 규모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지 100년이 지난 이때에 비로소 후손들이 지리산 골짝에 버려두다시피 한 한남군의 묘를 함양읍내 양지 바른 곳으로 조용히 이장하면서 조촐한 묘비를 세웠을 것이다. 한남군이 역모의 누명을 벗고 신원(伸寃:원통함을 풀어내림)된 때가 영조 18년 (1742년) 이니 그 동안 왕자의 신분에 걸맞는 묘역을 마음대로 조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 작은 비석 하나로 간신히 묘임을 표식했다가 신원이 멀지 않았던 1713년(숙종 39)에야 비로소 후손의 요청으로 예를 갖추어 현재 묘역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한남군묘역
*한남군묘역 위치 무조건 상림 주차장 앞으로 와서 상림을 좌측에 두고 200미터 진행하면 우측으로 안내하는 입간판이 있다.
한남군묘역의 답사는 치열한 권력투쟁의 와중에 머나먼 지리산 자락으로 밀려와
생의 마지막을 처절하게 보낸 한 젊은 이의 생애를 추적해보는 기행을 마감하는 의미도 있거니와,
수도권을 벗어난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형식을 갖춘
조선왕조 왕자 묘역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남군 이름은 이어인데 '어'자가 임금왕변에 늘어(於)자 인데, 편집기에서 일반 옥편에도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편집기에서 인식을 하지 못하여 제대로 적지 못하였다. 자료 : 지리99 (http://jiri99.com/new.ph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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