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가 된 조선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 역사의 아침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였지만, 우리의 역사란 끊임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이 책의 첫 머리글자인 ‘비장미’는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전체를 정의한 것이리라. 1천년 역사를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일생을 유랑했던 마의태자의 슬픔, 국가의 죽음 앞에 선비 하나 죽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슬픈 일이라던 매천 황현의 절명 또한 아름다움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 어떤 글이나 말보다 진솔한 심정으로 나는 울었다. 감동적이라거나 눈물이 난다는 말들조차 사소하게 여겨질 만큼 그것은 벅찬 폭풍우였다.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존경심, 알 수 없는 분노와 회한, 무언지 모를 억울함 등이 복합적 통곡으로 분출되어 나왔다면 그대 또한 비장미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생이 단지 그들만의 고군분투였다는 서글픔은 광활하게 아팠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망국에 기여한 공로로 작위를 받은 수작자의 일생과 이회영의 일생 중 어느 쪽이 불쌍한지는 역사가 말해준다던 저자의 서문을. ※지금까지 읽은 저자의 글 중 이렇게 압도적인 서문은 처음 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책읽기가 끝난 후 다시 서문을 읽을 것을 권한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유명한 명제
우선 작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망국의 두 가지 풍경을 제시하였다. 국망國亡에 공을 세운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일흔여섯 명의 신분이 주로 왕가의 후손이거나 노론계열이었다는 것은 신선할 것 없는 사실이다. 후작 이재완(대원군의 조카), 후작 윤택영(순종의 장인), 후작 박영효(철종의 사위), 백작 민영린(명성황후의 오빠)은 왕족 일가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집권 노론으로 64명 중 56명이었다.
이회영 일가를 비롯하여 강화도와 진천의 양명학자들(하곡 정제두의 7세손 정원하, 홍양호의 후손 홍승헌, 이건창의 아우 이건승), 안동의 석주 이상룡, 김대락 일가, 구례의 매천 황현까지, 사상적으로는 양명학자였으며 당파적으로는 소론(야당)과 남인(재야)계열이었다. 사상의 뿌리가 양명학(강화학파)이란 것은 성리학의 조선에서는 곧 정치적 탄압을 의미한다. 탄압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자랐을 것이고, 이들 독립운동가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음을 짐작해보았다. 그들의 삶은 불행했을지라도 역사의 평가마저 불행하진 않으리라는 정의를 믿어보고 싶다.
삼한갑족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그는 66세 노구의 몸으로 황포강 남창호 4등선실에 몸을 의탁하면서도 새로운 광복운동을 전개하리라는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를 잃었다고 그 누가 가솔들을 이끌고 고난을 스스로 짊어질 것인가. 남부러울 것 없는 명문가의 후예로서 안락이 보장된 삶을 뒤로 할 때 일말의 후회도 없었을까는 사특한 궁금증들이 주로 나의 범주에 속했다. 흔히 부러지는 가지가 되지 말고 휘영청 흔들리며 살라고들 말한다. 타인에게 물을 것 없이 인간이란 죄목으로 나는 그러하다. 흔들리는 인간으로서 역사를 움직인 이들에게 어떤 드높은 소명의식이 죽음에까지 완고할 수 있도록 하였는지, 그 학문의 결기가 어느 정도였기에 배반의 달콤함을 알뜰히 물리칠 수 있었는지, 또한 오늘날 그것이 있기나 한지, 부끄럽게 묻고 싶다.
역사는 과거를 정립하여 현재의 삶의 좌표를 제시하는 바, 우당 이회영과 그의 젊은 아나키스트들의 생애를 가까이 하는 것은 역사가 조직적으로 배제한 힘의 논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특권은 있고 의무는 없는’양반의 국가관이 오랜 시간 조직적으로 형성된 나라에서 지배층의 집단 매국이란 어쩌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닐 것이었다. 그들의 가치관에서 나라를 지키는 역할은 상민이나 하층민의 것이었으니, 망국의 한이나 집단 망명을 택해야 했던 이들과는 인식 자체가 달랐을 것이다. 이후의 역사는 끊임없는 노선의 차이로 이어져, 매국과 망국의 두 얼굴이 곧 분단의 두 얼굴이었고, 이는 정치적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하겠다. 비단 현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에 관심을 가진 건 널리 알려진 야당정치인(이종걸, 이종찬)의 가계도가 알려지면서부터였지만, 부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거물급 인사로서 모든 재산을 청산하고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다 생을 마쳤다는 사실은 숙연함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사회지도층에 대한 높은 도덕성이 요구될 때마다 이들의 삶은 각성제의 역할로서 회자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망명이 높은 도덕적 의무감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불리는 것도, 물질적 헌신으로 좁혀진 견해이기에 거룩한 행위에 대한 정의로는 부족할 것이다. 조상의 봉제사를 위해 장남은 남을 것이라는 관례를 깨뜨렸다는 것부터가 남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완성의 숭고함을 실현한 집단적 영웅이라는 생각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친일파 이광수로부터 ‘변변치도 못한 무정부주의자 일파와 감옥에서 분사’하였다는 소리는 들었을지언정, 자신의 장삼을 벗어 이규창의 교복을 마련하라는 ‘혁명가적 여유’를 보여 감동에 들끓게 했다. 그런가 하면 도시락 폭탄은 윤봉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건 제비뽑기로 서슴없이 나아간 구파 백정기와 이강훈, 원심창의 항일은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일변절한 옥관빈을 상해 일본 조계지에서 통쾌하게 거사한 양여주(오면직의 별명)와 엄형순의 영화 같은 저격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이어 엄형순과 이규창의 이용노 암살작전과 엄형순의 죽음 앞에서 보인 따뜻한 동지애는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는 규창에게 좋은 세상 오면 어머니 모시고 잘 살라는 당부를 남겼고, 애인에게는 자기를 잊어달라는 글을 남겼다. 그들을 통해 시인의 감성보다 혁명가의 투박함이 어쩌면 인간이 마지막까지 추구하고 싶은 드높은 소명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아나키스트야말로 강렬한 로맨티스트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추측을 해본다. 혁명가의 죽음보다 강렬한 시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할 때 문득,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던 체 게바라가 떠올랐다. 그의 삶은 세계 젊은이의 우상처럼 숭배받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백정기나 엄형순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고 했던가.
언제나 늦었지만 이 모든 독립운동가의 감히 넘볼 수 없는 고난의 생애에 통절한 연민을 바친다. 인간의 아름다운 선행이 어디까지 쓰여야만 만인이 평등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이국의 땅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그 허무한 독립의 다른 이름이 '자유'였다는 것, 그것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로써 완전무결한 한 인간을 만나고, 마침내 엄숙한 슬픔과 지사적 울분의 비장미悲壯美를 마음에 세운다. 분노보다는 감동을, 비판보다는 철학을 앞세우면서도 여전히 가슴 한쪽이 뛰고 있다는 걸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부록-
※ 이 책은 너무나 뜨거운 할말들로 인해 책의 독후기록을 쓰는 일이 오히려 힘에 겨웠다. 슬픔이 너무 차올라서 놓친 것이 많아 아쉬운 마음, 이례적으로 부록을 싣는다. 먼저 332페이지 사진 속 이시영과 김구의 귀국장면은 오랫동안 먹먹하였다.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35년간의 망명생활은 우리의 일제치하 기록과 동일하다. 그의 모든 형제들은 굶어죽거나 광복과 무관한 고난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과연 우리 역사는 그들의 사후 수십 년을 방치한 죄목을 어떻게 씻을 것인가. 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 그의 여섯 형제들은 다음과 같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무슨 의미가 있으랴만 그분들의 이름이라도 알아야겠다는 가장 소박한 죄스러움에...
※ 이회영은 첫 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이은숙)와 재혼하였다. 그는 전통적 명가 출신으로서 봉건적 인습과 유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상동교회에서 재혼식을 올렸다. 부인 이은숙 여사가 펴낸 책의 이름은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이다. 만주의 싸아한 가난이 그려지는 책이름이다.
※ 독립운동가였으나 우리가 몰랐던 이름들에 대해서도 뜨거운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들 중 일부 이름을 열거한 것은 일종의 부채감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부분부분 오열 같은 피가 끓어 올랐음을 밝힌다. 수많은 밑줄이 그어졌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내용은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 권으로 세차게 달려와 종착점에서 비수를 꽂은 명징한 역사가의 눈은 너무도 서늘했던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지배층이 있었던 반면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던진 지배층이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당 이회영 일가를 비롯해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일가 등의 집단 망명, 충청도 진천과 강화도, 평안도와 함경도 등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던 사대부들의 집단 망명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친일세력에 대한 인적 청산으 실패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해방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사학계 주류의 지위를 차지했고 식민사관은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정설의 지위로 복원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독립투쟁사가 어둠 속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