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본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 사제관과 사무실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모든 것이 주변 풍광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한폭의 그림같은 신앙유산
안정된 느낌, 자연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신앙 유산. 하우현성당(주임 정광해 신부)은 산수화 속에 담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시기가 정확치는 않으나 계곡과 울창한 수목들로 인해 옛 신앙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다.
교우촌이 형성되고 교우들이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던 곳이라 해 ‘토굴리’라고도 부르는 이곳. 자연스레 순교자도 배출됐다. 신유박해 때 한덕운 토마스와 김준원 아니체도가 그들이다.
본당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서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그는 본당의 초대신부이며 1982년 9월 5일 본당의 주보성인이 됐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기도 했다.
서신부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65년 5월. 당시 나이 24세 때 였다. 서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며 교우들에게 성사도 주고, 교리도 가르치며 전교지 파견을 기다렸다. 병인박해가 일자 교우들의 안전을 위해 청계산 중턱 천연 동굴에 은신했으나 밀고로 인해 1866년 2월 체포, 그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후 1894년 김기호 요한 총회장과 왕림본당의 도움으로 성당을 초가집 형태로 처음 건립했다. 당시 본당은 왕림본당의 공소지였으나 5년 뒤인 1899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특히 김기호 총회장은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5명의 주교로부터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됐고 총회장으로서 조선 8도에서 전교한 투철한 신앙인이었다. 1900년에는 채시걸 신부가 제2대 본당신부로 부임, 석조 사제관을 건축(한불 절충식)하고 축복했다. 노기남 대주교는 1923년 신학생 시절, 이곳에서 어린이들의 교리 교육을 했다고 한다.
용산 영등포 등 여러 본당 분가
작은 본당이지만 하우현본당은 여러 본당을 분가시키기도 했다. 용산, 영등포, 구로, 시흥, 안양, 군포, 성남 등의 지역으로 본당을 분가시켰다.
성당 안에서 역사를 가늠해봤다. 나무로 된 마루. 나무의 오래된 향만큼이나 신앙의 향기도 솔솔 풍겨왔다. 정원으로 발을 옮겼다. 서신부의 동상 뒤로 특이한 형태의 사제관이 보였다. 1906년 지어진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지붕은 한국식이었다. 당시 동서양 기법이 혼용된 것은 드문 일. 건축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2001년 1월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됐다.
역사가 말해주듯 눈에 보이는 것 마다 예사롭지 않았다. 괜한 마음에 하나하나 모든 것에 손을 대봤다. 감흥이 일었다. 다시 성당으로 들어섰다.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뒤에 조용히 앉아 기도했다. 특별한 지향 없는 묵상. 잔잔했다.
성당을 나와 왼편으로 갔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 14처 조형물이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절규하는 표정, 성모님의 모습…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14처가 있을까 싶었다.
승용차 한 대가 마당에 들어섰다. 운전자가 급히 성당으로 뛰어갔다. 따라갔다. 어느샌가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우현은 그런 곳이었다. 누구나, 언제든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곳. 신앙의 향기가 지역 일대를 덮고 있는 곳 말이다. ※문의 031-426-8921
유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