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수요일
트래킹 시작. 난 죽었다.
'우리집'에서 아침 5시 30분 일었났다. 평소 같으면 자다가 자세 한 번 바꿀 시간인데. 5시 30분에 눈을 번쩍 뜬 내가 신기했다. 벌써 네팔에 적응한건가? 전기장판이 밤새 뜨끈뜨끈 데펴저서 일어나기 싫었다. '비비적'거리다가 언니가 분주하게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꼬물락 꼬물락 일어났다. 오늘부터 머리를 못 감는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오늘 까지는 감을 수 있을 줄 알았더만. 에효 세수를 하려고 나오니까 발이 시렵고 춥다. 역시 한국의 뜨끈한 온돌이 좋다.
'한국이었으면 맨발로 화장실까지 걸어가서 따뜻한 물에 미장센 펄샤이닝 보습20%추가된 샴푸로 감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말리다가 드라이기로 말렸을텐데. 박혜민 넌 너무 편히 살았다. 고생 좀 해봐라.'
하면서 세수를 한다. 어젯 밤에 짐 정리도 다 하고 입을 옷도 미리 꺼내놔서 금세 준비했다. 미역국이랑 밥을 먹었다. 아 이 미역국도 이제 '안녕'이구나.
어제 탔던 관광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나갔다. 우리 포터 아저씨들이 타셨다. 포터 아저씨들이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걸고 싶었는데 아직은 낯설다. 공항으로 가는 중간에 꺼멍 아저씨가 군인들이 서있는 곳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리셨는데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공항에 도착. 저쪽 한 구석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여자가 차를 팔았다. 몸 수색을 하는 군인들도 거기서 차를 사먹었다. 저 여자분이 이 공항 '인간 자판기'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붙히고 몸 수색을 하고 들어갔다. 아무 장비없이 여직원이 직접 손으로 '더듬어' 수색을 했다. 기분이 뭔가 찝찝하다.
공항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날씨가 제법 쌀쌀 하다. 타멜에서 바람막이를 사지 못해 떨고 있는 우리에게 에몬 대장님께서 스카우트 100주년 기념 바람막이를 빌려주셨다. 언니가 잠깐 입다 내가 입었는데 에몬 대장님께서 녹색이랑 잘 어울린다고 하셨다.(쑥쓰) 바람막이를 여기서 사려고 제대로 된 잠바를 준비하지 못한 건 우리 실순데 챙겨주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창 밖을 보니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안개가 자욱해서 바로 코 앞에 있는 차도 안 보인다. 비행기가 뜨긴 하는 건가. 1시간이 지
나니 슬슬 걱정이 들었다. SMOKING ROOM을 왔다갔다 하시며 익숙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계시는 신부님께 여쭤봤다.
"신부님, 우리 갈 수 있어요? 이러다 일정대로 못 가는 거 아니에요?"
얼굴에 '여유'라고 써 있으신 신부님의 여유있는 대답.
"혜민아, 네팔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어. 되는 '오 되는구나.' 안 되면 '어이고 안 되는 구나'야. 네팔 사람들은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
"그럼 우리 일정은요?"
"이게 계산된 일정이다. 이런 상황을 다 감안하고 짰으니까 걱정 마."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서 잠을 청하시는 신부님을 바라보며 신부님의 철저함(?)에 감탄했다. 하도 지루해서 타이항공에서 준 카드로 현정이, 현실이랑 도둑잡기랑 원카드를 했다. 도둑을 가진 사람이 눈에 훤히 보이니 원. 꼴찌는 현정이가 휩쓸었다. 계속 매점에 샌드위치와 삶은 달걀이 눈에 밟혔던 나. 다들 꼬셔가지곤 매점에 갔다. 밥 먹은지 3시간은 지났으니 배고플 만도? 샌드위치는 아무래도 나눠먹기가 좀 그래서 포기하고 이것 저것 구경하는데 돈 가지러 간 현정이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출발한데!"
오 하느님 아버지. 드디어 비행기가 뜬다. 후다닥 달려갔다. 언니랑 나는 1진. 좀 기다리다가 비행기에 탔다. 루클라로 갈땐 왼쪽이 풍경이 좋다고 책에서 봤던지라 언니랑 갈 땐 내가 왼쪽 올 땐 언니가 오른쪽을 하기로 정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비행기 조종판을 본적이 없더지라 신기해서 "오! 오!" 외쳤다. 드디어 바퀴가 굴러간다. 솜을 귀에 꼼꼼하게 넣고 사탕을 오물오물 먹었다. 네팔 향료 맛이면 어떡하지 하고 깠는데 맛있는 캬라멜이었다. 구르던 비행기가 아까 봤던 비행기들처럼 슁하고 올라야 되는데 오르진 않고 다시 굴러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뭔가 했더니 루클라 바람 상태가 안 좋단다. 안개가 문제더니 이번엔 바람이냐! 속상해 하는데 조종사 아저씨가
"I'm sorry."
하면 웃는데 어찌 안 괜찮을 수가 있는가. 큭큭 2진은 올라타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아쉬움 맘을 감추고 다시 들어왔다. 다시 들어와 카드 게임을 하다 이번엔 진짜 사자고 매점에 몰려갔다.
치토스 같은 맛을 기대하고 샀다. 100RS. 한국 돈으로 1500원. 과자 치고 비싸긴했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먼저 사고 다들 고르는 동안 잠깐 일행있는 데로 가니까 라무 아저씨께서 출발한다고 하신다. 매점으로 뛰어가서 빨리 오라고 출발이라고 하니까 언니의 말.
"아, 왜 우리가 매점만 가면 출발이야."
맞소다 맞소다 하면서 준비하고 탔다. 과자 맛은 무슨 시큼한 토마토 케첩 맛이다. 그래도 안에 스티커도 들어있고 나름 뿌듯한 선택이었다. 엄청 빵빵하길래 양도 적은데 공기만 빵빵하게 넣은거 아닌가 했더니 양이 무진장 많았다. 처음엔 상한 댤걀 맛에 우웩 하지만 중독성 강한 맛. 와우 손이 자꾸만 간다.
솜을 받을 때 언니가 사탕 맛있다고 많이 가져가자고 했다. 승무원이 쟁반을 들고 오니까 언니가
"Can I get two?"
하면서 손가락으로 두개를 펼친다.
승무원이
"Sure!"
하길래 난 손가락으로 세 개를 만들고는
"Three?"
했더니 이번에도
"Sure!"
이다. 세 개 먹겠다고 하고는 에라 모르겠다 네 개 집었다.
드디어 출발. 트래킹 시작이다! 히말라야 산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설산들이 장관으로 펼쳐진다. 뭐니 뭐니해도 안개 걷힌 하늘이 그렇게 맑고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절친 보은이가 하늘 예쁜 거에 '껌뻑' 죽다보니 연방 찍어댔다.
내 창문으로 옆에 달린 프로펠러도 보였다. 설산에다가 계단식 논에다 높은 산에 바위 붙은 고동처럼 붙어있는 집들.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여배우들처럼 분위기 잡고 풍경에 심취하던 난 바로 잠들어버렸다. 신부님께서 활주로가 짧아서 경사있게 깎다보니 엄청 스릴 넘친다고 무섭다고 하셔 기대했다. 하지만 난 자느라 아무것도 못 느꼈다는-
루클라에서 블랙티를 시키고는 아직 안 온 친구들을 기다렸다. 유진 아저씨 말로는 아마 우리가 탄 비행기가 다시 가서 태우고 올거랜다. 어이쿠!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밥을 시켰다. 처음이라 두렵고 신중하다. 언니랑 상의 끝에 신부님께서 맛있다고 하신 갈릭 스프와 닭고기 볶음밥, 클럽 샌드위치, 마가리따 피자를 주문했다. 1시간 동안 공항에서 산 남은 과자를 먹으면서 기다리니 스프가 한 두 개씩 나왔다. 길쭉하게 다진 마늘이 둥둥 떠다녔다. 태국에서 먹었던 샥스핀 스프랑 색깔이 똑같은게 숟가락을 대기 두렵게 만든다. 한 스푼 퍼먹으니
'오, 괜찮은데?'
열 숟가락 정도 먹으니 도저히 질리고 마늘 냄새 나서 못 먹을 것 같았다. 스프가 다 나왔을 때 쯤 2진 대장님들과 친구들이 왔다. 서둘러 주문을 하고 얼마나 지루했는지 하소연 한다. 아직은 남자친구들다 안 친하다 보니 나 한테 말하지도 않은 하소연을 듣고 혼자 '큭큭'거렸다. 드디어 닭고기 볶음밥과 클럽 샌드위치, 마가리따 피자가 나왔다. 언니 닭고기 볶음밥 OK. 마가리따 피자 O~K! 클럽 샌드위치..응? 빵을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바로 꺼내서 만들어서 나이프로 쓱 밀면 잘린 빵이 '툭' 떨어지고 가루가 엄청 나다. 아까워서 먹으려고 했는데 결국 포기다. 신부님도 나와 똑같은 클럽 샌드위치를 시키셨는데 역시 표정이 안좋으시다. 배부르게 먹고 마당에 나가서 스틱을 꺼내고 필요없는 물건들을 다 카고백에 넣었다. 이틀 동안 배낭에서 숨 죽이고 있던 물통도 꺼냈다.
'아 이제 진짜 트래킹 시작이네. 이제 난 죽었다.'
태국에서 '우리집'에서 보냈던 달콤한 시간들을 뒤로 한 채 드디어 트래킹을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고 지나 가다 보니 참 좋다. 쪼끄만 애기들이 나와서 "나마쯔떼" 하는데 깨물어 주고 싶다. 아직은 무릎도 발목도 따로 노는 느낌이다. 스틱도 계속 헛짚는다.
'진짜 힘들어도 지금처럼만 씩씩하게 걸어야지. 엄마랑 처음 보여줬던 즐거운 표정 잃지 않기로 한 약속 끝까지 지켜야지.'
다짐 또 다짐을 한다. 쉴 때 마다 디카를 꺼내서 연방 찍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사진 찍을 힘이 남아있을까 모르겠다.
루클라(2,800m)→팍딩(2,600)
공항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서 일정이 좀 급해졌다. 금세 어둑어둑해지다 보니 신부님 마음도 급해졌다. 어두워져서 그런지 기운이 더 빠진다. 익숙한 SUMMIT 카고백에 내 트레킹 가방까지. 원형테이블에 둘러 앉은 포터들까지. 완전히 반가웠다. 다이닝 룸에 들어가 축 늘어져서는 블랙티 한 잔 마셨다. 에몬 대장님께서 방 배정을 해주셔서 차를 다 마시지도 못한 채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물에 발이랑 손, 얼굴을 씻었다. 이거 원, 신부님이 말씀해주셨던 물티슈 생활에 비해 너무 호화로웠다. '레이디 퍼스트'는 모르는 남자 아이들은 새치기 까지. 얄미웠다. 친했더라면 뭐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아직은 나의 신비주의를 지킬 때.(호호)
깨끗히 씻고 다이닝 룸에 가니 김치가 탁자에 올라와있었다. 모양은 네팔리였지만 김치가 있다는 자체도 참 감사했다. 오늘 메뉴는 모든 브랜드 라면을 다 섞어 만든 '라면'이었다. 내가 또 팍딩 내려오면서 라면 먹고 싶단 생각하신 건 어떻게 아셨담. 후루룩 쩝쩝 2그릇을 비웠다. 국물이 '신라면' 맛이 처음에 나다가 또 '맛있는 라면' 맛이 나다가 뭐라 말하기 힘든 맛이었다. 그래도 누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묻는다면
"네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래킹 첫 날 팍딩에서 먹은 '섞은 라면'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먹고 따또빠니(뜨거운 물)을 받고 다음 방으로 갔다. 오늘 룸메이트는 현실이. 현실이도 나도 침낭에 물통을 밀어넣고 들어가서는 따뜻하다고 너무 좋다고 떠들었다.
혜민: "아, 따뜻해. 아 좋다. 아 너무 좋아. 아 너무 따뜻하니까 쪼~끔만 누워있다 이 닦고 카고백 정리하고 자야지. 아 좋다. 현실아 진짜 좋지?"
현실: "응~진짜 따뜻해! "
잠시 후...
난 이를 닦지도 짐 정리를 하지도 않은 채 잠들어 버렸다. 현실이도.
<다음 편에 계속> |
첫댓글 전교회장~~보고싶다~♡
ㅋㅋㅋㅋㅋ 쪼~끔만 누운게 다음날 아침까지 크하하하하하하! 대폭소!
......................... 섞.은. 라면 ㄷㄷㄷㄷㄷㄷ
혜민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보고 싶구나 ♥
생생한 체험을 보니 정말 부럽고 궁금하네요 소중한추억이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