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운 시조시인
시간은 참으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계절은 변화한다. 어김없이 봄은 가고 여름이 오고, 그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오고 다시금 봄이 내 곁으로 슬쩍 들어온다.
돌아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의 작은 텃밭에는 몇 종류의 과실나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종류별로 두세 그루씩 짝을 이뤄 자라고 있다. 어떤 나무는 앙상한 가지에서 연초록 순이 나와 잎이 되고 푸르름을 자랑하고는 어느 순간에 꽃이 피더니 열매가 토실토실 크고 있다. 또 다른 나무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새순보다 먼저 꽃을 피워 기다리는 마음을 들뜨게 하고는 푸르른 잎과 열매를 키워간다.
아직 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그런 날, 꽃 무더기를 들고 봄 마중을 나와서 마냥 마냥 황홀한 행복을 주었던 매화나무가 이제는 매실나무가 되어 탱글탱글하게 열매를 키워내고 점점 익어간다. 얼마 전 그 매실을 수확하는 기쁨을 누렸다.
움츠리던 날, 꽃으로 따뜻한 기운을 북돋우어 주고 그 꽃이 지면서 뾰두라지 같은 열매의 탄생을 보았는데 어느덧 여물어서 수확한 것이다. 꽃으로 환한 웃음을, 열매로 군침 도는 즐거움을 조건 없이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불교에는 육바라밀 또는 육도라고 하는 수행의 방편이 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한다. 이 중에 보시행이 으뜸이다. 다른 이들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재시가 있고, 다른 이들에게 부처의 법을 전하는 법시가 있고,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해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는 무외시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면서도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마저 버림으로써 자신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끊고 매달림에서 벗어나 타인의 괴로움마저 없애주는 마땅히 해야 할 실천이라 하겠다. 베푸는 자, 받는 자, 그리고 베푸는 내용이 되는 것도 없는 자유로움인 것이다.
그리운 날은 장끼가 운다. // ~생략~ // 장끼가 우는 날은 나의 詩도 운다. // 그리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초라한 나의 詩를 드린다. - 오승철「개닦이」自序 / 나의 詩, 나의 辯 부분
얼마 전 제주문인협회 회장 고 오승철 선생님의 영결식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이 땅 제주에, 문학이라는 들판에, 우리 고유의 정형 율격인 시조를 심고 가꾸고 그 열매를 수확하여 후배 문인들에게 푸짐하게 내어주셨다.
시조라는 나무에 물을 주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위해 열정 하나로 평생을 바쳐 주저함 없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셨다. 훌쩍 가 계신 그곳에서도 시조의 나무를 튼튼히 가꾸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