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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가의 형성(形成)
1. 김유신 가문(家門)의 등장
서기 562년 고령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신라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멸망한 가야인의 상당수는 신라 각지에서 노비로 전락하여 생활하였으나, 간혹 신라에서 출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진흥왕대에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라든지, 문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강수의 조상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가야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경주에 거주하지 못하고 지방도시 국원(國原: 충주)에서 일생을 마쳐야만 했다. 가야를 흡수한 뒤에 신라는 정책적으로 가야인들을 강제로 그곳에 옮겨 살게 하였던 것이다.
가야 출신으로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그 인물됨과 자질면에서 워낙 걸출하였던 탓에 후일 문무왕과 더불어 신라의 이성(二聖)으로 추앙받기도 하였으나, 이미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가야출신이라는 제약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은 주로 군공(軍功)을 통해 세력형성을 꾀하였으나 왕녀와 야합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김유신과 그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수록된〈가락국기〉의 구형왕(仇衡王)조 및 문무왕의 제지(制旨)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료에 의하면 김유신은 법흥왕 때인 서기 532년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귀족이 된 김해 가락국 왕조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으로 유신의 증조부가 되는 김구형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상등(上等)의 위(位)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아 그들의 본래 근거지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형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무력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그는 김유신의 조부로서 가락국 왕족의 가문을 대표하여 활동한 장본인이다. 이처럼 김무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가야왕족의 활동은 그들이 신라왕실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얻게 되는 반대급부, 즉 신라 중앙정계로의 진출이라는 계기가 되었다.
2. 김유신가의 번성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그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진흥왕 12년 이전에 이미 병부령 이사부를 도와 북방경략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적성비에 진흥왕을 수가(隨駕)한 10명의 고관 중에 무력은 비차부(比次夫) 다음의 8번째로 기록되고 있어 아직까지는 신라사회에서 그 정치적 비중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14년(553년)에 무력은 아찬으로서 신주군주(新州軍主)에 임명되고, 다음 해의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무력의 공훈은 결국 그들 가문을 신흥귀족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녕비(561)에는 42명의 수가신(隨駕臣) 중에서 무력이 잡찬으로서 8위에 기록되고 있고, 마운령비(568)에는 상대등 거칠부 다음의 고관으로 승진되고 있어 진흥왕 30년(569)경에 이르러 무력은 최고위층의 관료로 부상하였다.
이렇듯이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그 자신은 입신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골품제사회 아래에서의 신분적인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특히 혼인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김유신 가문의 혼인에 얽힌 두 개의 설화는 이러한 신분의 벽을 실감나게 해준다. 즉 당시 김유신의 집안사람들은 가야의 왕족으로서 진골에 해당하는 신분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이 진흥왕 말년에 최고위층의 관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왕족이었던 숙흘종의 딸과 결혼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숙흘종이 자신의 딸 만명과 김무력의 아들 서현이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딸을 별궁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명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뛰쳐나와 김서현을 따라 나섬으로써 이 혼인은 겨우 성사될 수 있었다.
물론 숙흘종이 지증왕의 손자이자 진흥왕의 친제(親弟)로서 왕실의 지친이었다고는 하나, 서현의 가문 또한 골품상으로도 왕골(王骨)에 준하였다. 그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숙흘종이 그의 딸과 서현과의 결혼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즉 서현이 비록 진골이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관습상으로 신라왕실에 버금할 수 없었던 신분이었다는 점. 더욱이 숙흘종으로서는 보수적인 화백회의의 구성원과 그들을 대표하는 상대등과 같은 세력의 반대를 경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명이 서현을 따라감에 이르러서 숙흘종은 이들의 혼인을 묵인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는 김유신 가문이 비록 그 신분상의 한계가 있다고 하나 신라 중앙 정치무대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한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열전에서 김유신이 왕경 사람이라 한 것은 그의 가문이 할아버지 김무력 이후로 중앙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만명과 결혼한 시기가 진평왕 건복(建福) 12년(590년) 한 두해 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때 당시에 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이 이미 신라 최고의 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뒷날 유신의 누이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할 때도 역시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 유신은 ‘중매 없이 야합함(無媒而合)’을 책하며 문희를 불에 태워 죽이려 하여 왕명으로 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공인받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그의 누이 문희의 혼인을 주시할 때 가야계의 김유신 가문은 비록 진골이라 할지라도 신라의 왕골과는 일정하게 차이가 있는 신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부단한 무공(武功)을 통한 관직에서의 승진과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그들의 신분적 상승을 공인받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계 김유신 가문의 노력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그들 가문의 유지와 성장을 모색하고 있었던 진흥왕계의 김용춘(김춘추의 아버지)의 의도와 서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서현의 입장에서는 비록 숙흘종의 딸 만명과 혼인하여 왕실의 지친과 관계를 맺었다고는 하나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기에는 골품제라는 벽이 너무 높았으며. 그들의 신분적 차별을 깨뜨릴 만한 강력한 조력자를 왕실 내에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반면에 김용춘으로서는 진지왕의 폐출 이후 왕위계승에서 소외되고 있는 가문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귀족가문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양 가문의 욕구가 일치된 상황에서 진평왕 51년(629)에 김용춘과 김서현은 고구려의 낭비성을 함락시켜 양파의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적극적인 친교와 협조는 양 가문의 결합에 실마리를 마련케 하였으니, 김용춘과 김서현의 결속은 신라사회에서 신귀족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연의 전단계로서 신라사회의 정치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해 준다고 하겠다. 더구나 선덕여왕대에 이르러 계속된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은 신귀족집단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러한 국가적 위기의식은 이들의 정치적 진출을 허용하였다. 때문에 선덕여왕 11년(642)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 함락에서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일가의 몰살이라는 김춘추 가문의 개인적인 비극을 국가의 불행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으며, 용춘과 서현 가문은 더욱 결속하게 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미 두 집안간의 혼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이어 선덕여왕 16년(647)에는 비담, 염종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김춘추, 김유신 등의 신귀족세력과 비담을 중심으로 하는 구세력간의 쟁패전으로 신귀족세력이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반란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상당수의 유력한 구귀족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하는 무열계는 대권을 위해 유신계와 결속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알천과 같은 일부 구귀족을 흡수하여 과도체제로서 진덕여왕을 추대하였다. 따라서 진덕여왕의 8년간에 걸친 재위기간은 무열왕권의 성립시기인 동시에 그들의 정책시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김춘추, 김유신 두 사람은 신라 정계를 주도하는 주역으로서 춘추는 정치와 외교에서, 유신은 군사에서 당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정도의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본기에 전하고 있는 김춘추의 왕위 등극 기사에 의하면, 진덕여왕이 죽자 군신들은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사양하면서 춘추를 추대하니 춘추는 두세 번 사양 끝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김유신의 위세로 인해 당시 상대등의 지위에 있던 알천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김유신열전에는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으므로 유신이 재상인 알천과 모의하여 춘추를 즉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남산 오지암에서 열린 화백회의 도중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공(公)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당시 김유신의 힘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김춘추는 화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였다. 지금까지 방계였던 무열계는 왕위를 계승하는 가문으로 등장하였으며, 유신계도 이에 버금가는 가격(家格)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무열왕 2년에 왕녀 지소가 김유신에게 출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열왕 7년 상대등 김강의 사망과 더불어 유신이 상대등으로 되었음은 당시에 김유신 가문의 위치를 웅변해 준다고 하겠다.
김유신은 상대등이 된 직후 신라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백제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어 문무왕 원년(661)에도 제 1차 고구려 정벌군의 대장군이 된 후 문무왕 2년에는 당군의 군량미 수송을 지휘한 바 있다. 문무왕 8년에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김인문이 대신하였고, 문무왕 13년(673)에 마침내 타계하였다.
3. 김유신가의 쇠퇴
김유신 가문은 그 성립과정에서 주로 군사적 활동을 통해 기반을 닦았으며, 무력. 서현. 유신의 3대에 걸친 군주(軍主)직 계승은 군주가 단순한 외직이 아니라 병부령, 상대등의 전단계로서 당대 제일급 인물이 받은 관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특히 무력은 신주군주로서 한강유역의 경영에 큰 몫을 하였으며, 서현은 민노군(진천)의 태수로 백제방어에 공을 세운 후 대량주(합천)군주가 되어 신라 서남방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도 합천은 대야성 비극을 맞은 바로 그 곳이어서 훗날 유신이 압량주 군주를 지낼 때 여기에서 백제군을 전멸시켜 한을 풀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주(新州), 대량주(大良州), 압량주(押梁州)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이 지역의 책임관을 역임한 유신가에는 신라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유신가에는 유신이 죽고 난 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김유신에 대한 평가 및 그의 후손에 대한 처우가 역대로 어떻게 변화하여 갔는가를 살펴보자.
문무왕은 김유신의 임종을 앞둔 병석에 임하여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은데,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인민은 어찌하며 사직은 어찌하겠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러한 극진한 존경은 그의 삼국통일에서의 공로와 문무왕과의 인척관계(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문무왕의 어머니이다)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통일의 기분이 가시지 않은 신문왕대만 하더라도 김유신은 지극히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가령 신문왕대에 동해에 소산(小山)이 나타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든 대(竹)를 제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일관(日官)은 “성고(聖考: 문무왕)가 지금 해룡(海龍)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또 김유신공이 삼십삼천(三十三千)의 일자(一子)로서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는데, 이성(二聖: 문무왕과 김유신)이 덕을 같이하여 성(城)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주려 하니 만일 폐하가 해변에 가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대보(大寶)를 얻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신문왕이 그 산에 가자 용(龍)이 나와서 맞이하였다는데, 왕이 “이 산과 대(竹)가 혹은 갈라졌다 혹은 합쳤다 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라고 묻는 데 대해서 용은 “지금 왕고(王考)가 해중(海中)의 대룡(大龍)이 되고 유신이 천신(天神)이 되어 이성(二聖)이 마음을 같이 하여 값을 칠 수 없는 대보(大寶)를 내어 나로 하여금 비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김유신은 문무왕과 함께 이성(二聖)이라 불리우고 있다. 또 김유신은 본래 삼십삼천의 일자였으니, 죽어서 천신이 되었느니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김유신이 그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얼마나 존대를 받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기분이 가시면서부터 김유신의 지위는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유신의 후손들은 출세의 길이 좁아졌다. 성덕왕대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김유신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이 성덕대왕을 섬기어 대아찬이 되어 여러 번 은고(恩顧)를 받았는데 왕의 친속(親屬)들이 대단히 질투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이라 왕이 월성(月城)의 둔덕 위에 올라 조망하며 시종관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고 놀더니, 명하여 윤중(允中)을 부르게 하였다. 간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지금 종실척리(宗室戚里)에 어찌 호인(好人)이 없겠습니까. 유독 소원한 신하를 부르니 어찌 이른바 친(親)을 친(親)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한 것은 윤중의 조(祖)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과 같이 이를 잊어버린다면 선(善)을 선(善)으로 대함에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義)가 아니냐’고 하였다. 드디어 윤중을 옆에 앉게 하여 그 할아버지(김유신)의 평생에 대한 말을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가게 하고 절영산 말 한 필을 주었다. 군신이 불만할 뿐이었다. 윗 기록에서는 신라왕실 일족이 김유신의 후손, 나아가서는 다른 귀족 일반을 배척하는 기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대(中代) 무열왕계의 전제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대의 전제주의적 경향 속에서는 아무리 김유신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왕실에게 배척을 받고 점차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고 하겠다.
김유신 가문은 혜공왕대를 전후하여 드디어 6두품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유신계의 최후를 장식한 김암(金巖)이 이찬으로서 태수(太守), 시랑(侍郞), 두상(頭上) 등 6두품 계열이 주로 맡는 관직에 임명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김암과 같은 세대인 장청(長淸) 역시 집사랑(執事郞)에 있었다. 랑(郞=史)은 중앙관부의 최말단 관리로서 6두품 이하의 계층에서 주로 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신계가 8세기 중반 이후에는 그 신분이 6두품 이하로 강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종무열왕의 즉위를 전후하여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 세력은 절정기를 이루었으나 김유신이 죽은 뒤 그 후손들은 신라 왕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점차 약화되어 갔고, 통일신라 말에는 사회적으로 거의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附記>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전 말미에 ‘유신의 현손으로 신라의 집사랑인 김창정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니, 지어낸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를 깍아 버리고 기록할만한 것만 취하여 전을 만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청이 《개국공행록(開國公行錄)》을 집필하게 된 것은 통일 이후 신라왕실로부터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김유신의 공훈과 또 자신들이 소외되고, 배척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면서 김유신 행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해김씨세보〉등에는 모두 장청이 김윤중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윤중의 손자로 되어 있고 아버지는 공백으로 남겨놓고 있다. 일설에는 윤중의 아들이 김융(金融)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하기도 하고, 또 김융이 윤중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혜공왕 때 김유신 묘에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미추왕릉으로 이어지는 이변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김유신의 후손들에게 불가항력(不可抗力)의 큰 곡절이 있었던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출전 : 2001년 10월 간행 駕洛總攬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