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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이웃
통합이 이루어지는 곳
LA POLITICA E «IL PROSSIMO»
Dove si fonda l’integrazione*
프란체스코 오케타 신부(예수회)**
이근상 시몬 신부(예수회) 옮김
1958년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는 이렇게 썼다. “보편적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집 주변 작은 장소들 (…)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우리가 다니는 학교, 공장과 일터. 이런 장소들이 모든 남녀노소 사람들이 공정한 정의와 공평한 기회, 차별 없는 존엄성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이런 권리들을 이 일상의 장소들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1)
세계 인권 선언 10년 후, 이 선언서 초안 작성의 주역들 한명인 루즈벨트는 정치 영역이 명심해야 할 점을 지적했는데, 무엇보다도 타인의 구체적인 필요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에서 ‘이웃’이란 개념이 구체화된다고 역설했다.
1948년 12월 10일에 승인된 선언문 초안 작성 기간, 국가들 간의 긴장을 중재했던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주 바티칸 프랑스 대사는 ‘공동 실천 원칙들’에 대한 합의를 제안했다. 그의 실용적인 접근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실천적인 목표”에 관한 합의를 위해 그 공통분모를 추구하는 범위를 좁혀갔다.2)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 없이’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이 선언이 규정한 모든] 권리를 가지며”(선언 2조1항)3)
, 어떠한 국가주권의 제한과, 그 이념과 정치 체제에 상관없이 인정받는다”는 것에 합의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권선언의 전체 내용은 첫 구절에 토대를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1조) 왜냐하면 모두가 똑같이 존엄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역사를 통해 ‘인본주의 혁명’이라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를 의회에 부여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자, 천부적이고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존재로 인정받아야 할 ‘사람’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엘리너 루즈벨트, 자크 마리탱, 존 험프리John P. Humphrey, 르네 카생René Cassin 등과 같이 앞을 내다보는 정치지도자들이 ‘사람persona umana’에 대해 말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손상 받은 인간의 존엄성이란 보편적 가치를 채택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336개 언어로 번역된 이 국제 인권법의 ‘대헌장Magna Carta’은 각국 입법의 참고 기준이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의 강령들은 실제 효력을 지닌 130개 국제법적 합의들과 1948년 이후 제정되거나 개정된 약 90개 나라들의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보기에만 화려하고 좋은 크리스탈 화병 같은 것이어서 각 나라 입법에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선언이 영감의 원천 정도로 머물고 있어서 말만이 아닌 실제로 효력화시킬 정치인들이 필요하다.
세계 인권 선언 선포 70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이웃들의 존엄성은 덜 존중되고 있다. 세계의 많은 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명목상으로만 인정될 뿐, 실제로는 침해되고 있으며, 오히려 존엄성의 이름으로 가장 잔악한 행위들이 정당화되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것으로, 국제 정치 의제들 중 몇 가지 주요 쟁점들, 예를 들어 이민 문제, 시민권, 사법 개혁 등에서 징벌 형식이 배상의 형태에 비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또한 벨기에의 경우처럼 특정 조건 아래 어린이 환자의 안락사 요청을 허용하는 등의 주관적 권리의 변질이나 스스로 본인의 자유를 처분할 권리와 타인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 같은 생명 중단 선택권을 인권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문화의 일면도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묻게 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의 정치행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유대-그리스도교 계명의 정치행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멀리 떨어진 이웃들
유럽의 여러 곳에서 나치의 상징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띠고 있으며, 작은 불길처럼 보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일구어 온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심각한 불관용의 태도를 점점 더 자주 목격하고 있다. 지난 8월, 페이스북에 올라온 가짜 포스트는 비밀스럽게 숨겨져 왔던 것이 갑작스럽게 확 드러난 사건이었다. 투스카니 지방의 포르테 데이 마르미Forte dei Marmi에서 찍힌 사진에는 두 명의 유색인이 ‘벤치 위 게으른 이민자들’이란 설명 위에 업로드되어 있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은―각각 유명한 배우이며 농구스타인―사무엘 잭슨Samuel L. Jackson과 매직 존슨Magic Johnson인데, 이들은 쇼핑 후에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한 팬에 의해 사진에 찍힌 것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사진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은 누구나 위험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일은 사람들의 만남에서 얼굴이 사라지고 사람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는 곳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상황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선거운동을 위해서 적들을 만들어 내고, 폭력을 부추기며, 진실에 대해서 의심을 조장하고, 가짜 뉴스들을 만들어 낼 때 더 악화된다.
우리 이웃들과 그들의 필요, 다른 말로 하자면, 정치인들의 사명이 지금, 다시 한 번, 수많은 권위 있는 학자들에게 성찰의 주제가 되었다.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Luigi Zoja 같은 이들은 서구 문화는 먼저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니체에 의해서 선포된 하느님의 죽음 이후 또 하나의 상실 때문에 애도중이라고 믿고 있다. 즉,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인, 이웃의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가까움이란 일종의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된다. 이에 반해 거리감은 일종의 (거짓) 안정감을 준다. 과거에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삶을 풍부하게 하는 기회였다면 오늘날 이는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반대로 가르쳐 왔다. 1538년 살라망카 학파는 의사소통의 권리ius communicationis를 천부적 권리로 정의하며, 이 권리에 이동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형사법, 다른 나라의 법을 존중할 의무가 포함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낯선 이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들을 ‘우리에게 가까운 이(그리스어로 plesios)’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인류학적 현상은 온라인상의 의사소통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온라인상의 의사소통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를 가깝게 해 주고, 이에 반해 같은 도시, 같은 거리,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는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감을 제공한다.
이런 거리감의 역동은 오늘날 사람들의 내적 공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공간에 점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허용하고 있다. 우리의 내적 공간이란 바로 신뢰와 두려움이 출발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내적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과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정치적 활동가들은 가까움prossimità이란 차원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한다. 가까움의 이해를 통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 우리와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 역자 주) 여기서 특별히, 사람들과 그들 간의 공간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인들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사회적 통합을 위해서 차별 없는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들의 이웃들의 필요를 이해하는 이들이다.
이는 복음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하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돕기 위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이를 위해서 행동한다. 강도를 당하고 두들겨 맞은 이를 돕는 것, 길가에 죽도록 버려진 이를 돕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복음사가 루카는 루카복음 10장에서 10개의 명료한 동사를 통해서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선택을 한 사람을 기술한다. 그것은 ‘보다’, ‘연민하다’, ‘다가가다’, ‘몸을 구부리다’, ‘싸매주다’, ‘(기름을) 붇다’, ‘일으켜 세우다’, ‘데려가다’, ‘돌보다’, ‘주다’, 그리고 마지막 11번째 동사는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였다.
이것이 바로 공공영역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모든 선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 필요한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이웃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진, 특정한 필요가 있는 고유한 존재다. 다른 이들의 고유함을 인정할 때, 그들에게 들씌워진 가난뱅이, 병자, 이주민이라는 범주화나 고정관념이 깨진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연민을 느꼈기에 멈추었다. 그의 도움이 필요한 ‘너’가 그의 ‘나’를 불렀다.4)
정치에서 착한 행동이란 그 정치적 행동프로그램이 담고 있는 이론에 의해서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를 돕고 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접촉해온 움직임,’ 즉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구체적인 도움)에 의해서 평가된다.5)
이는 복음에서 원래의 질문이 다시 뒤집힌 이유이기도 하다. 질문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이론 ―역자 주)’에서 시작하지만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는가?(실천 ―역자 주)’로 바뀐다.
우리의 이웃을 무시하며 지나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고독으로 빠져든다. 루이지 조야Luigi Zoja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의 죽음 이후, 이웃의 죽음은 인간에게 두 번째 근본적인 관계의 실종이다. 이로써 인간은 깊은 고독에 떨어졌다. 인간은 역사상 유래 없는 고아가 되었다. 인간이 그의 천상 부모(신)의 죽음으로 종적인 면에서 고아가 되었다면, 가까운 이들의 죽음으로 그는 횡적인 면에서도 고아가 되었다.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는 곳 어디에서건 인간은 고아가 되었다. 이웃의 죽음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른 이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에서건 주검을 바라보는 것은 불안한 일이기 때문이다.”6)
우리의 소외alienazione현상에sms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계속해서) 조야의 말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덜 말하고 있다. 그것이 만연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산구조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이웃이란 존재치 않는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이웃은 죽었다). 모든 사람이 다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들이 떨어져 나온, 더 이상 존재하지 가까움이란 무엇일까?”7)
균형(건강한 거리와 가까움 사이의 균형 ― 역자 주)과 참된 삶의 관계에 대한 향수어린 갈망이 사회적 양심을 다시 일깨울 수 있다. 로렌조 프라골라Lorenzo Fragola와 아리사Arisa가 노래한 어른의 삶에 대한 패러디는 이런 갈망을 통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린 셀피의 군대/아이폰으로 선탠을 하지/하지만 아무와도 만나진 않아/단지 또 하나의 포스트에 라이크를 클릭/나는 몸을 가진 네가 그리워”
전 세계와 개별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후자는 문제이기도 하고 해결책이기도 하다. 각 나라의 정치적 공동체는 공동체적 공간의 장점과 나눔에 대해서 교육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웃과의) 만남과 대화의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동동체가 패쇄와 분리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정치인들이 벽만이 해결책이라고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야의 말이다. “벽은 누군가를 바깥으로 밀어내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특권 속에 가두어 놓는다. 마치 도둑에 대한 공포가 평생 감옥에 갇힐 것이라 두려워해야 할 악당들의 몫이 아니라, 도둑을 무서워하는 부자들의 것인 것과 같은 이치다.”8)
우리가 패쇄적이고, 편협한 온라인상의 그룹에 속할 때, 이와 똑같은 부메랑 효과를 경험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바다를 건너, 출애굽을 감행할 때, 벽이 무너지고, 그들은 분리의 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운다. 수단controlli과 원칙leggi을 가지고 다리를 놓는 일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전제에 근거한다.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적 차원이 시작된다. 도덕적이든 법률적이든, 모든 법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다루며, 여기에는법을 부과하는 이와 이를 따르는 이 사이의 관계도 포함된다. (…) 이것은 모호하고도 감정적인 끌림이 아니라 윤리적 근거를 이루는 근본 조건이다.”9)
정치적 선택과 우리의 이웃
이 모든 것은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주와 고용을 다루는 정치적 방식이란 두 가지 예에 우리의 논의를 한정하겠다.
먼저 우리는 최근 몇 달 동안 이탈리아 해안에 다다른 이주민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사실을 알고 있다. 2016년 7월 21,229명이었던 이주민의 수가 2017년 7월 겨우 2,245명으로 줄었다. 리비아가 해안과 해상에서 단속을 강화했고, 영국 언론 기관인 로이터에 따르면 과거에 배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며 돈을 벌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유럽연합과 이탈리아의 재정지원으로 리비아의 해상 보안 요원이 되어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훨씬 적은 수의 이주민들이 이들을 피해 바다를 건너고 있고, 리비아의 민간 무장 단체의 힘이 증가하고 있다.
이 이주민들은 어떤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는가? 그들의 인간존엄성이 존중되고 있을까? 리비아가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면 (우리의) 안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인권이 고통 중에 짓밟히도록 얼마나 허용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은 바로 이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제104차 세계 이민의 날(2018년 1월 14일)에 발표한 메시지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모든 인간 차별의 폐지를 위한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며 다음의 네 가지 동사, 곧 환대하기accogliere, 보호하기proteggere, 증진하기prouovere, 통합하기integrare를 사용했다.
콜롬비아 사목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종은 이 행동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했다. “각국은 통치자의 덕목, 즉 현명함prudence(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신중하게 행동하는 마음 ―역자 주)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이 현명함은) 내가 가진 여유 공간의 크기를 (관대하게) 묻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나눌) 공간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속에서 어우러지기 위한 통합의 공간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리 모두가 국가 안보에 앞서서 (각 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하는) 인간 안보를 놓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인간 안보가 우선일 때, 우리의 논의가 인종(국가) 갈등으로 퇴보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인종 갈등은 20세기 극심한 인종 청소를 야기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 인권 선언으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제시한다.
이상의 세 요소, 즉 행동을 위한 목표(여유공간을 내놓기), 방법(모두 함께 어울리도록 통합하기), 기본 원칙(세계 인권 선언)으로 적법하고 안전하게 이주민들의 통합 모델을 구성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고용의 문제이다. 고용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7개의 대실패가 야기한 주제이다. 장기 비전이 없는 투자, 책임지지 않는 시장, 절제 없는 풍요, 도덕기반이 없는 기술적 효율성, 공동체가 없는 정치, 분배가 없는 특권, 고용 없는 성장이 그것이다. 변화는 가능하다 그러나 변화는 모든 ‘…가 없는’을 ‘…와 함께 하는’으로 바꿀 때 이루어진다. 이는 이익보다 사람에게 더 큰 가치를 두는 구체적인 선택과 문화적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예들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사업의 중심에 놓는 고용주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세금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입법자들이 고용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줄 필요가 있다.
얼굴 그리고 나눔
정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이런 인류학적 도덕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려는 위험한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루카복음에 나오듯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들의 경험처럼 우리는 ‘반출애굽counter-exodus’을 할 위험이 있다.(24,13-25) 그들은 낯선 이와 함께 그러나 슬픔과 실망 속에서 걷고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일은 빵을 나누면서 이루어졌다. 복음의 이 이야기에서 주님은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두 제자에게 그는 낯선 자중에 가장 훌륭한 예였다. 우리 곁에 있는 그의 가까움은 언제나 우리가 가진 경계선을 넘어선다. 그는 옷이 필요하고, 우리가 찾아가 주어야 하며, 치료가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수회원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믿는 이들에게 신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자로 남아있다. ‘우리에게 타자인 그는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존재이며 알아보고 싶지도, 환영하고 싶지도 않은 자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신을 믿고자 한다면) 문제는 ’저 위에 있는 존재’를 찾는 일이 아니라 신이 ‘우리가 바라보는 곳(저 높은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10)
드 세르토는 우리가 무한자를 경험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입장을 지키는 것으로는 신을 경험할 수 없다. 문화, 정당 또는 공동체에서 움직이기는 멈춘 이들은 계속해서 ‘자기 편 안에서’ 살아가며, 미래를 거부한다.11)
이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인간적, 정치적 태도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낯선 이가 됨xeniteia(초기 교회의 사막교부들의 실천이며 봉쇄수도원에 들어가는 모습에서 사용됨 ― 역자 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움직임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다.”12)
마치 일신교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지식과 관계들은 문화적, 지리적, 사회적, 지적 영역에서 다른 이를 인정할 때 강화된다. 결국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키는 바로 그 낯섬이 풍부함의 원천이다.
정치이론가들은 정치가 행동원칙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허술하고 단견에 사로잡힌 세속적 주장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추구해 온 목표를 잊게 만들기도 하고, 특정 믿음을 절대 진리로 정당화하는 감상주의에 자리를 내주어 버리는 일도 있다. (그러니 어떤 정치적 행동원칙을 확고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 ― 역자 주) 그러나 정치는 어떤 원칙들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치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행위들을 위한 전제와 조건을 의미한다. 정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계속되는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모든 주요 종교와 문화가 공유하는 황금률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주의를 촉구한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 모든 것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우리 이웃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하며, 그를 맞아들이고, 보호하며, 지지하고, 함께 어울리는 관계 속에서 그에게 우리가 한 이웃으로 인식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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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145-152 | 4016 (21 ott/4 nov 2017)**
Francesco Occhetta S.J.1)
E. Roosevelt, In Our Hands, 19582)
See Dei diritti dell’uomo. Testi raccolti dall’Unesco, Milan, Edizioni di Comunità, 1952, 12.3)
J. Maritain, I diritti dell’uomo e la legge natural, Milan, Vita e Pensiero, 1977, 60.4)
마시모 가치아리Massimo Cacciari가 최근에 반복했듯이, “그 사마리아인은 길의 한 켠에서 처참하게 당한 한 사람을 보았고, 그의 마음이 부서졌다(희랍어 표현). 이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길에서 강도 당한 자의 몸처럼 상처 입었다. 그 마음의 상처는 다른 이의 상처를 고쳐줌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는 상처였다. (M. Cacciari, “San Francesco in viaggio verso l’altro”, in la Repubblica, September 14, 2017).5)
P. Bovati, La porta della Parola. Per vivere di misericordia, Milan, Vita e Pensiero, 2017, 134.6)
L. Zoja, La morte del prossimo, Milan, Einaudi, 2009, 13.7)
같은 책, 24.8)
Ibid., 59.9)
U. Eco, Cinque scritti morali, Milan, Bompiani, 1997, 85.10)
M. de Certeau, Mai senza l’altro. Viaggio nella differenza, Magnano (Bi), Qiqajon, 1993, 29.11)
같은 책, 30 참조.12)
같은 책,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