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earch.daum.net/search?w=img&q=%EB%B9%84%EB%B9%84%EC%95%88%20%EB%A7%88%EC%9D%B4%EC%96%B4%EB%A5%BC%20%EC%B0%BE%EC%95%84%EC%84%9C&DA=IIM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사진들은 이미지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2013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2015년 우리 나라 영화제에 초청되어 개봉된 다큐영화이다.
제작노트에 소개된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프랑스 태생의 거리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마이어는
2009년 사망할 때까지 외부에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영화는 2007년 부동산 중개인이자 아티스트인 존 말루프가
옥션 경매에서 400달러를 주고 인화되지 않은 마이어의 필름통이 담긴 박스를 우연히 구입한 경위에서부터, 이를 현상, 인화하여 보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존 말루프의 노력에 의해 음지에 묻힐 뻔했던 주옥편들이 뉴욕, 시카고, 유럽을 통해 전파되었다. 마이어의
사진을 외부에 알리는 과정과 함께 존 말루프는 사물과 인간의 심부를 꿰뚫는 심미안의 비밀을 캐기 위해 그녀의 생애를 더듬는다. 마이어는
편집증적으로 신문을 모았던 ‘팩트’의 수집가였고, 평생을 유모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았으며, 또 그들을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마이어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과 사진들, 유모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찍은 홈 무비 등이 한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을 증언한다. "
(2014년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_장병원)
학기 초, 3월의 피로 끝에 지난 주말 체증을 앓으면서 이 영화를 보았다. 유투브에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서울대 강연 편을 듣던 중, 이 영화를 소개 받았다. 컨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의 사례로 이 여인의 사진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유시민 작가는 이 영화는 일종의 텍스트의 컨텍스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소개한다.
...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이 아팠다.
비비안 마이어는 가난했던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가족들과의 유대도 끊기고 봉제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거리를 산보하고 싶은 욕망에 유모나 가사 도우미로 직업을 바꾸고 평생을 자기 집도 없이 일하는 집에서 숙식을 제공 받으며 살아가는 외롭고 가난한 여인이었다. 어릴 적 프랑스인이었던 어머니가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영향이었을까 그녀는 일할 때도 늘 사진기를 메고 산다. 아이들을 이끌고 거리고 나가서 무작정 어딘가로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몇 만장에 이르는 현상된 필름을 남겼지만 한 번도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 분명하다. 그녀는 늘 해고의 위험에 시달리는 가난한 하층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점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기 시작한다. 어릴 적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간직하면서 살아온 듯한 그녀는 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사건, 세상의 어두운 측면에 집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신문에서 오려둔 강간, 살인, 폭행의 기사들, 그리고 점점 쌓여가는 신문더미들... 그 신문을 치우려는 주인집 가족들에게 히스테리적으로 광분하고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양도축장으로 가서 죽음을 보여준다. 양우리에 구겨넣어진 양떼를 막대로 찔러서 도축장으로 내모는 과정에서 양떼들에게 밟혀 죽은 어린 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결국 해고되어 다시는 일할 수 없었던 마이어는 그 후 수입이 없었으니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말년엔 그녀가 돌보았던 성장한 아이들이 모아준 돈으로 월세를 내는 집에서 홀로 살아간다. 늘 비밀에 싸여 친구도 없이 살았기에, 홀로 벤치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서 노년을 보낸다. 먹을 거리가 없어 쓰레기통을 뒤진다. 이웃에서 가져다 주는 헌옷등을 얻어 입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날 거리에서 쓰러져 구급차에 끌려가게 되는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사정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고 그녀의 모든 사진들도 잊혀질뻔 했다.
다행히 영민한 청년이 사진을 발견하면서 그녀의 사진들은 빛을 보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세계를 순회하는 전시회를 열고 사진이 판매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 모든 수입은 사진을 발견한 그 청년의 몫이고 그 청년은 비비안 마이어가 누구인지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이 영화에 담았다.
예민하고 지적인 여성이었으나 가난과 성폭력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세상과 불화하며 스스로를 고독 속으로 밀어 넣었던 비비안의 삶은 어땠을까?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에 행복했을까? 사람들과 세상을 누구보다 예민한 눈으로 포착하며 사람들과 세상 속으로 성큼, 용감하게 걸어들어 가 셔터를 누를 수 있었던 그녀의 사진 작업과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유폐시켰던 현실적인 삶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사진은 그녀의 고통과 맞바꿀 수 있는, 아니 그 고통을 감히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예술과 삶은 그렇게 맞바꾸어도 좋은 것일까? 불행했던 고호처럼... 이런 질문은 너무 가혹하다. 예술은 그렇게 한 인간의 삶을 통째로 제물로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런 불행 속에서만 불멸의 작품이 잉태될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런 사진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까?
...
세상의 고통과 어둠을 겪었기에, 그 고통 속을 통과하는 삶의 여정이었기에 그런 예민한 시선을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래... 그래서,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기에 그녀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해두자. 사진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생을 끝까지 완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가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관찰자, 관조자의 영혼과 시선으로 무장할 수 있기에, 일면 축복일지도 모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겪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고통을 살아낼 수 있다.
나도 그랬다. 학교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던 시절... 그 모든 드라마틱한 사건과 고통에 밀착하면서도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해석하려 애썼지. 현실이 드라마틱할 수록 작품이 깊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은 다시 연극을 만들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다시 그러한 시선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떤 역경도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고 존엄하게 그 모든 것을 겪어나갈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이어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경꾼의 시선... 철학도 예술도 이중 생활이다. 이중적 존재방식을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관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