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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주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살 것이라며 회개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1-10ㄱ.13ㄴ.30-3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3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5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6 곧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 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8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0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13 아들이 살 것 같으냐? 그는 살지 못한다.
이 모든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31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32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 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내 앞에 한 아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보니
나를 보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웃으니
내게 웃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다가가니
내게 다가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손 내미니
내게 손 내미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건네니
내게 건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안으니
나를 안네
내 앞에 한 아이
너를 보니
내가 보이네
내 앞에 한 아이
오늘의 성인
성 마마 (Mamas)
활동년도 : +275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카이사레아(Caesarea)
같은 이름 : 마마스, 마만스, 맘마, 맘마스
성 마마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에 살던 양치기였으나, 전심으로 하느님을 섬기려는 불같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박해자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소년이었는데 너무나 열심하고 또 용감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앞에까지 끌려가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고 한다. 어느 전설에 따르면 그 도시의 산속에서 이리들과 같이 살았지만 아주 평화스럽게 야생동물과 지냈으며, 꿀과 우유만으로 생활했다고 하며, 순교한 것이 아니라 야생동물과 함께 사라졌다고도 한다. 그는 맘마(Mammas) 또는 마만스(Mamans)로도 불린다.
성 히야친토 (Hyacinth)
활동년도 : 1185-1257년
신분 : 신부, 선교사
지역 : 크라쿠프(Krakow)
같은 이름 : 히야친또, 히야친뚜스, 히야친투스, 히야친트, 히야킨또, 히야킨뚜스, 히야킨토, 히야킨투스
서폴란드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185년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Schlesien) 근처 란카 성에서 태어난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또는 히야친토)는 크라쿠프와 프라하(Prague)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볼로냐(Bologna)에서 법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폴란드로 돌아와서 크라쿠프 교구장의 비서가 되었다. 1220년 주교와 함께 로마(Roma)에 갔다가 그곳에 와 있던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폴란드로 돌아와서 1222년 크라쿠프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를 하였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하여 프로이센(Preussen)과 리투아니아(Lithuania) 전역을 돌며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257년 8월 15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폴란드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는 그는 1594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베아트릭스(Beatrice)
신분 : 동정녀, 설립자
활동지역 : 실바(Silva)
활동연도 : 1424-1492년
같은이름 : 베아뜨리체, 베아뜨릭스, 베아트리체
실바의 성녀 베아트릭스(Beatrix de Silva Meneses, 또는 베아트리체)는 포르투갈에서 브리트(Brites)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1424년경 포르투갈의 캄푸마이오르(Campo Maior)에서 비아나(Viana)의 백작의 딸로 태어났으며, 개혁 프란치스코회의 창시자인 복자 아메데우스(Amedeus)의 동생이다. 그녀는 이사벨(Isabel) 공주의 시녀로 있다가 공주가 카스티야(Castilla)의 요한 2세와 결혼할 때 에스파냐로 함께 수행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성녀 베아트릭스의 미모가 공주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여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3일 동안 투옥되었는데, 이때 음식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석방된 후 성녀 베아트릭스는 궁중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톨레도(Toledo)로 가서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여자 수도회 설립을 꿈꾸어 오다가, 1484년경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이던 이사벨 여왕이 이 수녀회의 첫 공동체가 사용하도록 갈리아나(Galliana)의 성을 하사하였다. 그녀는 시토회의 규칙을 따랐고 푸른 외투에 흰 수도복을 입었는데, 성모님의 발현도 여러 번 경험했다고 한다.
성녀 베아트릭스는 1492년 8월 16일(또는 9월 1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는데, 이때부터 이 새로운 수녀회는 톨레도의 대주교이며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시스네로스(Cisneros) 추기경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클라라회의 수도 규칙을 준행하는 수녀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녀는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6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의 축일은 오랫동안 9월 1일 또는 8월 16일에 기념해왔는데, 2012년에 8월 17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