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9회 金剛經의 핵심, 空 - 10
탄허스님의 말씀은,
“空이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있어서 無我를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유교처럼 克己. 나를 이겨야 된다.”
일어나는 내 마음들을 이겨내서 그것이 극한에 도달 했을 때ㆍ지극해
졌을 때, 無己가 되고 無我가 된다는 겁니다.
“무아ㆍ무아 한다고 해서 그냥 무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무아이지만, 우리는 我에 집착하고 있다.
有我에 끄달리고 있다. 我相에 끄달리고 있다. 그래서
금강과도 같은ㆍ벽력과도 같은 지혜의 칼날로 우리 번뇌를
잘라내야 된다. 영원히 있다고 하는 생각을 잘라내야 된다.”
이렇게 금강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지요.
空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론적인 공을 아시고 난다음에,
실제로 우리가 공부를 해서, 마음 공부를 해서 ‘空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실제로 증득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증득을 해야 됩니다. 이런 부분들이 우리가 앞으로 굉장히 수련해야
할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쉽지 않아요. 이것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금강경을 독송하고ㆍ외우고
이렇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마음이 일어났는데요.
항상 생각을 어떤 영원한 생각으로 가지고 있고,
내가 뭐를 이뤘으면 그것을 영원하다는 것에 자꾸 집착하고 애착과
그러한 것을 가지게 되거든요.
사람이 죽었는데요.
내 몸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몸뚱이에 집착을 하고,
여기에 살았던 인연 관계에 집착을 하고, 우리가 다 그렇게 살고 있
거든요. 이런 것이 전부 번뇌의 근원이거든요.
그래서 “無我”라고 하는 것.
“緣起ㆍ無自性ㆍ空”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입니다.
기존에는 전부 다 “있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전부 다 영원불멸하게 있는 것이 없다.”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ㆍ금강경에서 말하는 無我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번쯤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無我에서 無我相이라는 것이 “나”라는 생각인데요.
지금까지는 “아뜨만ㆍ뿌드갈라ㆍ사뜨와ㆍ지와” 라고 하는 범어를
가지고 금강경의 四相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을 했지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저는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我相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가 흔히 “서로 相”자를 썼지요?
그런데 현장스님의 번역에는 마음 心이 붙어있는 “생각 想”자를 썼
습니다.
“나” 라는 생각 ←이러면 현장스님처럼 마음 心이 있는 생각 想자를
써야 되지 않겠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구마라집에 “서로 相자로 나라는 생각”을 써놨거든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色 受想行識(색수상행식)” ←여기에서 想이
“생각 想”입니다. 현장스님과 똑 같습니다.
첫댓글 _()()()_
()()()♡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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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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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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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 想,
스님들의 사상체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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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생각하던 문제, 相과 想... 相으로 번역된 의미를 깊이 생각 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相과 想의 다름
고맙습니다_()()()_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9-10. 金剛經의 核心, 空 - 10.
"空은 가만히 있어서 無我를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겨야 된다" 일어나는 내 마음들을 이겨내서 그것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지극해 졌을 때) 無己가 되고 無我가 된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