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엄경론 제18권
17)초발심공덕품② 두 번째1)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초발심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려 본 40단락의 경문 속에서 최초의 1단락은 제석천이 청한 것으로 경문과 같으니 알 수 있다. 제2의 경문에서는 초발심에 있는 열 가지 광대함이 알기 어려운 법임을 들어 천명한 것이니, 경문대로 알 수 있다. 제3 단락은 공양의 광대함을 올바르게 들어 천명한 것이다. 제4 단락은 사람의 공양한 바를 갖고서 교량할 수 없음을 올바르게 밝힌 것이다.가령 가라분(歌羅分)이라는 것은 많음[多]을 갖고서 적음[少]에 비교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비유이니, 말하자면 사람 몸의 털을 분서해서 100으로 나눴는데 앞 사람이 지은 공덕으로도 초발심 보살의 100분모(分毛) 중 1분모쯤의 공덕만도 못한 것이다. 또 우파니사타분(優波尼沙陀分)이라 말한 것은 약간은 서로 근접함을 말한 것이니, 한계가 없는 선근을 한계가 있는 선근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대비(對比)한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서 스스로 밝힌 대로이다. 제5 단락에서 교수십선도(敎修十善道)라 말한 것은 신(身)의 세 가지와 구(口)의 네 가지와 의(意)의 세 가지로서, 욕계의 천(天)에 태어나는 선(善)이다. 그 이상에서 4선(禪)이라고 말한 것은 색계의 업이니, 초선(初禪)은 근심[優]을 멸하고 2선은 괴로움[苦]을 멸하며, 3선은 기쁨[喜]을 멸하고, 4선은 오직 적정(寂靜)뿐이다. 교주사무량심(敎住四無量心)이라 말한 것은 유위(有爲) 중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교주사무색정(敎住四無色定)이라 말한 것은 이는 무색계의 선정이다. 이상은 3계(界) 속의 선업(善業)이다.교주수다원과(敎住須陀洹果)라 말한 것은 소위 처음으로 견혹(見惑)을 끊어 이생(異生)의 성품을 버리고, 처음 성성(聖性)을 얻어 성행(聖行)의 흐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명칭이 ‘흐름에 들어감[入類]’이다. 교주사다함과(敎住斯陀含果)라 말한 것은 한역하면 일래(一來l인데, 이른바 이 성자가 비록 욕계의 6품 미혹을 끊었지만 나머지 3품은 아직 끊지 못해서 이 성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욕계에 태어나게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래과(一來果)인 것이다. 교주아나함과(敎住阿那含果)라 말한 것은 한역하면 불환(不還)인데, 이른바 욕계의 9품 미혹을 다 끊어 이로부터 색계에 태어나서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명칭이 불환(不還:不來)인 것이니, 이는 10사(使) 중 견도(見道)의 의심이 능히 명료하지 못해서 아라한과(果)에 들지 못한 것이다. 10사 번뇌는 첫째 신견(身見), 둘째 변견(邊見), 셋째 견취(見取), 넷째 계취(戒取), 다섯째 사견(邪見)인데 이상 다섯 가지는 이사(利使)가 된다. 이후의 다섯 가지 둔사(鈍使)는 견제(見諦)에서 끊어지고, 여섯째 탐냄, 일곱째 성냄, 여덟째 어리석음, 아홉째 아만, 열째 의심인데, 이 다섯 가지 둔사(鈍使)는 능히 행에 따른 사(事)를 미혹시키는 것이다. 이 10사(使) 중 다섯 가지 이사(利使)는 수다원이 견제(見諦) 뒤에 조복시켜서 일어나지 않으며, 나중의 다섯 가지 둔사(鈍使)는 희박해진다. 사다함(斯陀含)은 욕계의 여섯 가지 미혹을 끊지만 색계의 탐심이 없지 않으며, 성냄[瞋]ㆍ어리석음ㆍ아만의 세 가지는 희미하고 엷어져서 현행이 생기지는 않으나 종자가 없지 않으며, 위의 2계(界)2)의 과보에 성냄이 없게 되는 것은 선정을 닦아 조복해서 현행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수다원과 사다함의 2과(果)는 환난(患難)을 싫어해 증장하지 않게 함으로써 늘 세간을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로써 삼계에 빠지는 종자(種子)를 이루지 않는 것이다. 아나함(阿那含)은 염리(厭離:싫어해서 벗어남)로서 영원히 쉬게 하지만, 오직 견도(見道)의 의심만이 있어서 견도가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히 삼계의 업과(業果)를 단박에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라한(阿羅漢)은 견도에 의심이 없어서 삼계의 업과가 일시에 소진하는 것이다. 이전의 세 가지 과(果)와 비교하면 설령 아홉 가지 번뇌를 끊을지라도 오직 의심만은 존재하기에 여전히 번뇌를 끊었다고 이름붙이지는 못하는 것이니, 견제(見諦)의 무명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염복(厭伏:싫어해서 조복시킴)이라 칭하는 것이며 끊음[斷]이라 칭하지는 않는 것이다. 또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은 다만 세간을 벗어남만 기뻐하고, 정토보살과 공관보살도 세간을 벗어남을 기뻐해서 6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현행의 무영을 꺾어 굴복시킨 것이지 번뇌를 영원히 끊었다고 칭하지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공관으로 무명을 꺾어 굴복시킬 뿐, 무명이 본래로부터 이미 온 부동지불임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을 요달하지 모하고 공(空)으로 꺾어 굴복시켜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10지(地)에 이르더라도 다만 의생신(意生身) 등을 얻을 뿐, 여래의 일체종지생신(一切種智生身)이라 이름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10진여(眞如) 등의 관(觀)을 지어서 열 가지 추중(★重)을 끊더라도 ‘무명이 본래 여래의 근본지라서 대용(大用)이 항상 공적함’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 불과의 가르침에서는, 불과에 의거해 발심함으로써 초발심 때에 근본무명이 바로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임을 요달하고 차별지의 대용법문(大用法門)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초발심 위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타는 문(門)을 원만케 하는 것을 ‘일체지승(一切智乘)을 타는’ 것이라 칭하는 것이니, 만약 지비(智悲)와 원행(願行)이 털끝만치라도 부처님과 같지 않다면 신심도 또한 성취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물고 여래의 일체종지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참된 자식이 되고 모든 부처님의 사(事)를 갖춤으로써 지혜가 다르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 겁의 차별이 일념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이겠는가? 반드시 이같은 선정과 지혜로 비추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불보살인 올바른 선지식에 의거하고 근본지에 의거해서 발심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가령 아래 경문에서 겨우 발심한 보살이 능히 시방에 몸을 나타내 성불하는 것은 초발심 때 여래의 부사의일체지승(不思議一切智乘)을 타고 부처님의 종지(種智)를 얻어서 여래 법계의 집안에 태어나 부처님의 한 푼 지혜와 대자비의 세분(勢分)을 타게 되기 때문에 능히 이와 같이 몸을 나타내 성불하는 것이다. 저 아래의 게송에서 “보살이 부처님의 10력(力)에 대해 비록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또한 의심이 없어서, 보살이 한 털구멍 속에 널리 시방의 한량없는 찰(刹)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총체적으로는 초발심 보살의 덕(德)이 여래의 한 푼 지력(智力)을 얻음으로써 세분(勢分)이 이같음을 밝힌 것이니, 마치 윤왕(輪王)의 태자가 권위로 왕정을 통치하는 데 자재로운 한 푼을 얻는 것이 부왕과 같은 것과 같다. 저 대지가 진동하고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법의 위력을 밝힌 것이며, 또한 대중에게 법열(法悅)과 마음의 기쁨으로 대지가 진동함을 밝힌 것이며, 마음과 경계의 체(體)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니,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시방으로 각각 만불찰미진수(萬佛刹微塵數)를 지나 부처님과 명호가 같은 법혜가 그 앞에 와서 나타나는 것은 시방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더불어 합치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만불찰진이란 수행의 승진으로 미혹을 열어 법을 깨닫는 양(量)이 10신ㆍ십십(十十)주ㆍ백십(百十)행ㆍ천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승진의 견제(見諦)로 미혹을 풀고 법을 깨닫는 명칭을 밝힌 것이다. 가령 아래에서 만불찰미진수 보살이 발심하자, 천불가설(千不可說) 겁을 지나 성불의 수기를 주면서도 모두 똑같은 명호인 청정심이라 한 것은 역시 이같은 천불가설 겁량(劫量)의 법문을 요달해서 모두 청정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청저임인 것이다. 이는 실로 정(情)으로 보는 길고 먼 겁이 아니니, 총체적으로는 해당되는 지위의 미오법(迷悟法)을 따르는 명칭이지 그 교량(校量)의 설을 간직해서 망정(妄情)으로 보는 따위는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로부터” 이하 품 말미에 이르기까지는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졌으면, 경문대로 칭찬한 것이다. “여시(如是)” 이하 242행의 게송과 168행은 모두 불과 및 신(信) 등의 6위 법문을 찬탄한 것이며, 이하 74행은 이 품 안에서 발심의 공덕이 광대해서 비하기 어려움을 비교하여 헤아려서 찬탄한 것이니, 경문에 스스로 갖추고 있으며 경문에 따라 찬탄하고 있다. 4행과 1게송은 예에 준거해서 알지니, 이처럼 초발심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려 보건대, 설령 허공과 동등한 무한 경계에서 일체의 낙구(樂具)로 한량없는 중생에게 모두 공양함으로써 모두로 하여금 인천(人天)의 뛰어난 즐거움을 얻게 하고 또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와 벽지불과와 3승의 세간을 벗어난 보리를 얻게 할지라도, 말하자면 이같은 허공의 경계와 제도 받는 중생이 비록 동등하긴 하지만 제도 받는 중생으로 하여금 성불을 얻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또한 ‘이 가르침에서 초발심 때 여래의 대지혜를 타고 부처님께서 행하는 바와 동등함으로썬 널리 중생을 교화하여 다 성불케 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발하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어서 들어가고 있는 경계의 넓고 좁음이 같지 않고, 교화받는 중생의 성불함과 성불하지 못함이 같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품 아래 경문에서는 “초발심 보살이 삼세에서는 조금도 얻는 바가 있지 않으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인 듯하고, 모든 불법(佛法)인 듯하고, 보살인 듯하고, 보살법인 듯하고, 독각인 듯하고, 독각의 법인 듯하고, 성문인 듯 하고, 성문의 법인 듯하고 나아가 널리 설해진 경전과 같은 것이다. 다만 오로지 일체지(一切智)만을 구하기 때문에 모든 법계에 대해 마음을 집착하는 바 없이 보리심을 발한다”고 한 것이다. 대략 보리를 설한 법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성문의 보리, 둘째 연각의 보리, 셋째 권교 보살의 보리, 넷째 1승 보살의 불과(佛果)의 보리이다. 앞의 세 가지는 세간을 벗어난 보리이지만, 불과의 보리는 법신의 대지혜와대자비의 진(眞)과 속(俗) 만행(萬行)인 법계의 원만한 보리이니 출입(出入)이 없기 때문이다. 3승의 보리는 비록 4제(諦)와 12연(緣)을 관(觀)하긴 하더라도 4제와 12연의 실체(實體)는 알지 못하고 있다. 비단 2승만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 보살이 10지(地)의 지위에 오르더라도 여전히 능히 다 알지는 못하고, 오직 1승의 보살만이 지혜로써 비로소 아는 것이니, 「십지품」에 가면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가략히 대강만을 말한다. 3승에서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와 12연생(緣生)을 관하고 6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고(苦)를 싫어하고 진(眞)을 기뻐해서 단지 세간을 벗어남만 구하고, 대자비의 보살이라야 비로소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윤택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1승 보살은 지혜로써 4제와 12연생을 관하여 무명이 바로 지혜이고 고제(苦諦)가 바로 성제(聖諦)라서 생사와 열반에 풀고 묶이는 성품[解縛性]이 없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서는 그 명칭이 고성제(苦聖諦)이며 집성제(集聖諦)인 것이니, 이같은 10성제와 12인연이 모두 법계 자성(自性)의 속박도 없고 풀림도 없는 자재로운 연(緣)이기 때문에 무명이라 이름붙이지 못하고 고제(苦諦)라 이름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법이 이같음을 총체적으로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1승이라 하는 것이니, 법계의 연기는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워 성품에 맡겨 연(緣)이 생기므로 일체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 모두 법계 연기의 자재로운 법문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신통력이 이를 통해 있는 것이니, 다만 선정관조(禪定觀照)의 모든 바라밀로서 이를 드러내 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이같이 닦으며 이같이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 이하 게송의 경문이 4행 1게송인 것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해석하지는 않겠다. 지혜로운 선비는 경문을 따라 찬탄해서 대중으로 하여금 발심케 할 것이다.
18)명법품(明法品) 장차 이 품을 해석하는 데 대략세 가지 문(門)으로 나누겠다. 첫째는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품이 온 뜻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품은 「승수미산정품」과 「게찬품」과 「십주품」과 「범행품」과 「초발심공덕품」의 5품 법문이 미미 보리심을 발해 광대한 공덕을 얻었기에 이 정진혜(精進慧)로서 물은 법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이전 다섯 품의 법으로 하여금 그 마음을 다시 밝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중에 행하는 법으로 하여금 더욱 더 뛰어나서 명백하게 하기 때문에 「명법품」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승진하는 전후(前後)의 법을 밝힌 것이다. 즉 정진혜보살이 법혜보살에게 청을 드려 말씀하길 ‘지니고 있는 대원(大願)을 다 만족하게 하고 모든 보살의 광대한 장(藏)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전의 얻은 법을 다시 밝게 하고 나중의 승진을 명백하게 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10행의 향(向)을 닦아서 근본 지위의 10주법(住法)을 오래도록 기른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과 명목을 해석한다는 것은 전과 같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둘로 나누리니, 첫째로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다. 둘째로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한다는 것은 대략 세 단락으로 과(科)하리니, 첫째로 “이때” 이하 긴 행으로 33행 반의 경문이 있고 게송을 통합하면 55행이 되는데 이것은 정진혜보살이 법을 밝힌 분(分)이며, 둘째로 “이때 법혜보살” 이하 6행의 경문은 법혜보살이 설법을 허락함을 밝힌 분(分)이며, 셋째로 “불자야, 보살마하살” 이하부터 품 말미에 이르기까지는 게송을 통해서 올바로 법을 설함을 총체적으로 밝힌 분(分)이다. 처음 ‘제일청법분(第一請法分)’ 속의 뜻을 둘로 나누리니, 하나는 이 1단락 경문의 뜻을 과(科)하는 것이며, 둘은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1단락 경문의 뜻을 과(科)한다는 것은 대략 세 단락으로 과(科)하겠다. 첫 번째로 “이때” 이하 “다시 다음은”에 이르기까지 12행의 경문은 정진혜보살이 처음으로 법을 청함을 일으킨 분(分)이다. 두 번째로 “모든 보살” 이하 “보살이 행하는 바의 차례를 바라건대 모두 연설해 주옵소서”에 이르기까지 21행의 경문은 정진혜보살이 해당되는 지위의 반드시 수행해야 할 행과 이익 얻음을 들어서 거듭 수호하는 법을 설하기를 권함을 밝힌 분(分)이다. 세 번째로 “이때” 이하 1행의 경문은 정진혜가 게송의 설(說)로써 거듭 법을 청함을 밝힌 분(分)이다. 둘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이때[爾時]”라는 것에 ‘이(爾)’는 ‘이것[此]’이니 이 법을 설하는 때를 말한 것이다. 정진혜보살이란 지위의 가행(加行)을 잡아서 명칭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열 개의 슬기에 통하는 통칭이니, 이 지위의 승진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진의 공(功)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슬기라는 것은 비춘다는 뜻이며, 정진이란 것은 사념이 없다는 뜻이니, 사념이 없는 슬기로 작위가 있는 공(功)을 비추니, 작위 있음이 본래 스스로 공(功)이 없고 만법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이다. 만법이 스스로 청정한 것을 정(精)이라 이름붙이고, 공용이 없는 지혜로 응해서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진(進)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니, 이는 지위를 성취하면서 닦아 나아가는 것을 잡아서 칭한 것이다. 보살이란 것은 늘 말한 대로이다. 백법혜(白法慧)보살이란 것은 백(白)은 밝음이니 명언(名言)을 밝게 드러내서 그 밝음을 펴는 것이다. 일체지승(乘)을 오른다고 말한 것은 이 지위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이 지위의 보살이 일체지승을 타고서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 부처님의 종지(種智)에 들어가 부처님의 자식이 됨으로써 늘 모든 부처님의 거두어들이는 바가 되는 것이니, 이처럼 밝은 지혜로 상응하여 이익을 주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모살의 광대한 장(藏)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저 10회향 중 지장(智藏)과 비장(悲藏) 등 10장(藏)이 이에 해당된다. “어떤 방편으로써” 이하는 정설(正說) 중 십십(十十)의 법문이 이에 해당된다. 6통(通)이라 말한 것은 신통(身通)ㆍ천이통(天耳通)ㆍ천안통(天眼通)ㆍ숙명통(宿命通)ㆍ타심통(他心通)ㆍ누진통(漏盡通)이다. 신통이란 것은 1찰나에 몸이 지혜의 작용을 따라 시방에 두루하니,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해서 근기에 따라 널리 응하는 것이다. 천이통이라는 것은 이근(耳根)이 늘 시방의 일체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이며, 천안통이라는 것은 안근(眼根)이 늘 시방 일체의 거칠고 미세한 색깔을 보는 것이며, 숙명통이라는 것은 삼세 일체 중생이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남을 따라서 지은 업행(業行)의 인과를 지혜로써 능히 다 아는 것이며, 타심통이라는 것은 일념에 능히 삼세 일체 중생의 심념(心念)이 바라는 바를 아는 것이며, 누진통이라는 것은 지혜를 따라 일체 모든 법을 두루 알면서도 정욕(情欲)의 어리석음이나 애착을 따르는 마음이 업는 것이다. 이 경전에는 또한 열 가지 통(通)이 있으니 「십통품」의 설과 같다. 3명(明)이란 첫째 숙명(宿命)이며, 둘째 천안(天眼)이며, 셋째 누진(漏盡)으로 그 명칭이 3명이다. 4무외(無畏)라는 것은 첫째 일체지의 무외[一切智無畏]이며, 둘째 누진의 무외[漏盡無畏]이며, 셋째 장애의 길을 설하는 무외이며, 넷째 고(苦)의 길이 다함을 설한 무외이다. 상호(相好)라는 것은 이 경전의 10신상해(身相海)이다. 역무소외(力無所畏)라는 것은 10력인데, 첫째 시처비처력(是處非處力)이며, 둘째 업력(業力)이며, 셋째 정력(定力)이며, 넷째 근력(根力)이며, 다섯째 욕력(欲力)이며, 여섯째 성력(性力)이며, 일곱째 일체지처도력(一切至處道力)아며, 여덟째 숙명력(宿命力)이며, 아홉째 천안력(天眼力)이며, 열째 누진력(漏盡力)이니, 이것이 열 가지가 된다. 삼세 업과(業果)가 그 명칭이 처(處)가 되고, 유(有)가 아님을 요달하는 것이 그 명칭이 비처(非處)이다. 논주(論主)의 게송은 이렇게 말한다.
중생 업의 인과를 잘 알고 마음이 정(定)하여 움직이지 않음은 산왕(山王)과 같다. 중생의 근기는 상품ㆍ중품ㆍ하품이요 욕락(欲樂)의 낱낱은 저마다 차별된다.
갖가지 세간은 모든 성품의 나뉨이며 일체의 도법(道法)은 저마다 같지가 않다. 숙명통은 삼세의 업을 두루 아는 것이며 천안통은 시방을 막힘 없이 요달한다.
온갖 분별을 따라 시방에 충만하면서도 마음은 잡된 오염이 없이 늘 티가 없노라. 이가은 열 가지 덕의 자재로움의 그 명칭이 여래의 무외력이다.
18불공(不共)이라는 것은 첫째 부처님 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둘째 입[口]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셋째 생각[念]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넷째 상(想)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 마음이 정(定) 아님이 없어서 늘 삼매에 있는 것이다. 여섯째 알지 못함이 없으면서도 이미 버리는 것이다. 일곱째 욕(欲)이 감소하지 않는 것이다. 여덟째 정진에 감퇴가 없는 것이다. 아홉째 생각에 감퇴가 없는 것이다. 열째 슬기에 감퇴가 없는 것이다. 열한째 해탈에 감퇴함이 없는 것이다. 열두째 해탈지견에 감퇴가 없는 것이다. 열셋째 신업(身業)이 지혜의 행을 따르는 것이다. 열넷째 구업(口業)이 지혜의 행을 따르는 것이다. 열다섯째 의업(意業)이 지혜의 행을 따르는 것이다. 열여섯째 지혜가 괴거의 걸림 없는 일을 아는 것이다. 열일곱째 지혜가 미래의 걸림 없는 일을 아는 것이다. 열여덟째 지혜가 현재의 걸림 없는 일을 아는 것이다. 앞서 말한 ‘허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묘한 선(善)으로 상응하는 것이며, 앞서 말한 ‘감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지은 선법(善法)을 늘 잊지 않는 것이다.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말한 것은 종종지(種種智)와 무진지(無盡智)를 말한 것이니, 이는 차별지의 다함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저 수호분(守護分) 속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초발심 보살이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수호하여 능히 사람을 위해 연설함을 밝힌 것이며, 둘째 천왕(天王)과 야차왕(夜叉王)과여래 법왕 등의 수호를 얻는 것이다. 게송으로 거듭 청하는 분(分) 속에 22행의 게송이 있는데, 처음 두 행의 게송은 능히 설하는 법주(法主)를 찬탄한 것이며, 이하 20행의 게송은 2행이 1게송이니 첫 2행은 초발심 보살의 지혜와 복덕이 세간을 초월해 이익 얻음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2행의 게송은 승진의 행을 권하여 설한 것이며, 다음 2행의 게송은 대지혜가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집착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음 2행의 게송은 온갖 행이 결함이 없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 2행의 게송은 견고하게 공을 성취한 출리법(出離法)과 승법(勝法)을 거듭 권해서 설하길 청함을 밝힌 것이다. 다음 2행의 게송은 어둠을 타파하고 마(魔)를 항복받는 도를 바라건대 설하길 청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 2행의 게송은 여래께서 얻은 법을 역시 권해서 설하길 청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 2행의 게송은 ‘어떻게 여래의 법을 연설하는가’라고 말함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2행의 게송은 ‘초발심으로 하여금 어떻게 무외(無畏:두려움 없음)가 사자와 같고 무착(無着:집착 없음)이 연꽃과 같은가’라고 말함을 밝힌 것이다. 두 번째로 설법을 허락한 분(分) 속에서 법혜보살이 찬탄한 ‘능히 묻는 사람’은 경문과 같으니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올바로 법을 설한 분은 다시 둘로 나누리니, 하나는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며, 둘은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경문의 뜻을 장과한다는 것은 “불자야, 보살이 이미 일체지심(一切智心)을 발했으니” 이하부터 품 말미에 이르기까지 20단락으로 장과(長科)하겠다. 첫째로 “처음엔 불자야” 이하부터 “불방일(不放逸)에 머문다”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열 가지 불방일법에 머묾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로 “불자야” 이하 “열 가지 청정함”에 이르기까지 10행 반의 경문은 불방일에 머무르니 열 가지 청정법 얻음을 밝힌 분이다. 셋째로 “불자야” 이하 “능히 일체 여래로 하여금 기쁘게 한다”에 이르기까지 11행 반의 경문은 열 가지 법을 행하니 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함을 밝힌 분이다. 넷째로 “불자야” 이하 “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하다”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열 가지 법에 안주함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로 “불자야” 이하 “모든 보살로 하여금 조속히 온갖 지(地)에 들어가게 하다”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이 열 가지 법을 행해서 조속히 온갖 지(地)에 들어감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로 “다시 다음에 불자야” 이하 “스스로 장엄하여 보살지에 들어가라”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지(地)에 들어가 승진함을 밝힌 것이다. 일곱째로 “불자야, 열 가지 법이 있으니” 이하 “행한 바의 청정함”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뭉능 청정행을 밝힌 분이다. 여덟째로 “보살이 이미 청정을 행하게 되어” 이하 “열 가지 증승법(增勝法)”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승진이 더욱 발전함을 밝힌 분이다. 아홉째로 “불자야” 이하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한 원(願)이 된다”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대원(大願)으로 행을 성취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밝힌 분이다. 열째로 “불자야” 이하 “무상법문을 수호하다”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열가지 법을 행해서 대원을 원만하게 함을 밝힌 분이다. 열한째로 “불자야, 보살이 이 같은 원(願)을 만족할 때” 이하 “응하는 대로 법을 설하는가?”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열 가지 다함 없는 장(藏)을 밝힌 분이다. 열두째로 “이른바 그 지은 바를 알아서” 이하 “바라밀도(道)를 구족해 장엄하여”에 이르기까지 16행의 경문은 보살이 근기를 알아 이롭게 함을 밝힌 분이다. 열셋째로 “이때” 이하 “삼보의 종성(種性)을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한다”에 이르기까지 52행 반의 경문은 10바라밀을 행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대치(對治)를 밝힌 분이다. 열넷째로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하 “생각생각마다 열 가지 장엄을 구족하니”에 이르기까지 18행의 경문은 삼보의 종성을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함을 밝힌 분이다. 열다섯째로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하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해 해탈시킨다”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은 열 가지 장엄을 통해 보는 자로 하여금 발심하여 헛되이 지나침이 없게 함을 밝힌 분이다. 열여섯째로 “불자야” 이하 “이같은 자재력을 얻는다”에 이르기까지 23행의 경문은 보살이 초발심 때 부처님과 더불어 평등한 법을 얻어 대법사가 됨을 감당함을 밝힌 분이다. 열일곱째로 “가령 불가설 세계의 광대한 도량” 이하 “그리고 법을 수호해 지니기 때문이다”에 이르기까지 13행 반의 경문은 대중에 처해서 두려움이 없고 설법이 자재해서 몸을 영폐(映蔽)함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열여덟째로 “이때” 이하 1행의 경문은 법혜가 게송으로 법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열아홉째로 이처럼 게송으로 법을 찬탄한 가운데 20행의 게송이 있는 것은 2행 1게송이 경문과 같아서 그 뜻이 스스로 갖추어졌으니, 경문에 따라 찬탄함이 옳은 것이다. 스무째로 가장 마지막 1행의 경문은 법을 듣고 환희하면서 대중이 받들어 행함을 밝힌 분(分)이다. 둘의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올바로 법을 설한 분에서 “불자야, 보살” 이하 20단락의 경문에서는 단지 경문에 따라 그 뜻이 은밀하고 말이 유현(幽玄)한 곳은 비로소 해석할 것이며, 경문이 스스로 분명한 곳은 경문에 저절로 갖추어졌기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가령 경문에서 “깊은 선정에 머물러서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성문의 멸진정(滅盡定)을 여의는 것이며 또한 위에 있는 2계(界)의 식려선(息慮禪:사념을 쉬는 선)을 여의는 것이다. 즉 색계의 초선(初禪)은 아래에 있는 욕계의 근심[愁憂]을 소멸시켜 낳지 않기 때문에 한 푼의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經安寂靜]을 얻으니, 욕계의 애착은 없지만 적정(寂靜)의 애착이 있기 때문에 물의 재앙이 문득 이르는 것이다. 가령 『능가령』에서는 “진윤(津潤:윤택하게 함)의 망상(妄想)이 능히 안팎의 수계(水界)를 낳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애착으로 진윤을 삼기 때문에 물의 재앙이 이르는 것이다. 또 색계의 제2선(禪)은 능히 욕계의 근심과 고통[憂苦]을 소멸시켜 낳지 않기 때문에 한 푼의 경쾌하고 편안한 적정을 얻지만,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서 능히 청정한 경계에 반연하는 것이 오히려 있기 때문에 불의 재앙이 문득 이른다. 또 제3선(禪)은 각도 없고 관도 없이 선열(禪悅)의 즐거움만 있어서 마음에 기쁨의 동요가 있기 때문에 바람의 재앙이 문득 이른다. 또 제4선(禪)은 몸과 마음이 적멸하니, 들숨과 날숨을 여의어서 기쁨의 동요도 없기 때문에 3재(災)가 이르지 않고, 오직 묘한 빛깔의 몸만이 백은(白銀)처럼 청정한 빛이 순결하고 옷도 금빛 색깔과 같은 것이다. 이 4선(禪)의 몸은 신장이 20리(里)이고 옷의 길이는 40리이며, 이하 3개의 선(禪)은 곱으로 반감되니 초회에서 이미 해석해 놓았다. 이처럼 4선(禪)이 다 마음에 쉬어 청정케 하는 것으로 세분(勢分)을 삼으며, 나아가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이 모두 승진을 타파해 없애고 염(念)을 낳게 하지 않음으로써 적정(寂定)에 머무는 것이다. 이처럼 새계의 청정한 빛깔을 타파해서 무색계의 공식(公識)을 이루게 하고, 또 공(空)을 보는 식(識)도 공(空)하다고 타파하는 것이 그 명칭이 식처정(識處定)이며, 또 공(空)을 식(識)하는 견(見)도 또한 없다고 타파하는 것의 명칭이 무소유정(無所有定)이며, 또 무소유의 마음을 타파해서 무상(無想)의 상(想)마저 없는 것의 명칭이 비상비비상정이다. 이처럼 상계(上界)에서 수행하는 선은 모두 뜻을 짓고 정(情)을 간직해 마음을 조복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성품에 맡긴 무위가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음으로써 진(眞)에 칭합한 이지(理智)의 공적 작용이 자재로워서 작위 없는 하는 정(定)은 아닌 것이다. 저 욕계의 선정이 5욕(欲)에 반연함은 명칭이 들뜸[掉]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은 그 명칭이 가라앉음[沈]이며, 또 성문과 연각의 선정은 그 명칭이 가라앉음이며, 공관보살이 6바라밀을 행해서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그 명칭이 들뜸이니, 이처럼 삼승의 선정에 다 가라앉음과 들뜸이 있는 것은 더러움과 청정함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도를 보는 것이 참되지 못해 좋고 싫어함이 있기 때문이다. 2승의 선정은 비록 삼계 현행(現行)의 미혹은 없지만, 모두 근심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대치하는 복멸(伏滅:굴복시켜 소멸시킴)의 무위(無爲)로서 능히 미혹을 일으키지 않아 아생(我生)이 생기지 않고 비지(悲智)도 또한 없기 때문에 멸진정에 머무는 자는 머리 위에서 북을 치더라도 듣고 알지 못하며, 변화의 불[火]로 부모의 분단신(分段身)을 태우는 자는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들어간다. 이처럼 2승이 미혹을 끊어 분별하지 않는 법은 그 의세(意勢)가 서로 같고, 혹 성문의 경우는 12연생으로 도를 얻으니, 이러한 3승의 관행(觀行)인 연각과 성문과 정토보살이 도를 얻은 것은 모두 세간을 벗어난 것이다. 3승이 서로 작용하여 전부 9승(乘)이 되니, 대체로 『승만경』으로 요약하건대, 삼계의 번뇌를 조복해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의생신(意生身)을 얻으니, 이는 분단(分段)의 생사는 없지만 변역생사를 얻은 것이다. 또 진(眞)에 응하고 지(智)에 맡겨 자재하니, 들어오고 나가는 체(體)가 없는 것이 아니며, 지(智)에 맡겨서 중생에게 응해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 쉬지 않으니, 자세히는 『승만경』의 설과 같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 그리고 3승의 선은 가라앉음도 있고 들뜸도 있는 것이다. 가령 대승 중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은 도(道) 이전인 30심(心) 보살의 습종성(習種性)과 성종성(性種性)과 도종성(道種性)을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성종성(聖種聖)에 들어가는데, 4섭법과 4무량심과 37조도품관(觀)과 10바라밀이 명목은 서로 같지만, 교화하는 경계와 부처님을 보는 수량과 의생신(意生身)과 지생신(智生身)과 성불하는 인과로써 본다면 모두 다 같지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미혹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이 닦는 선정도 또한 가라앉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는 것이니, 다만 세 종류의 의생신을 얻을 뿐 여래의 지생신은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7ㆍ8ㆍ9ㆍ10지(地)에 종류구생무행작의생신(種類俱生無行作意生身)을 얻은 보살이라도 삼계의 번뇌 속에서 공관(空觀)으로 형핸을 굴복시켜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의생신 중의 자재함을 얻는 것이니, 여래의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여래의 일체종지 속에서 닦아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은 절대적으로 3기(祈)에서 원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보는 바의 부처님 경계도 초지 보살은 다만 백불(百佛)세계를 공양하고 교화해서 오직 백 가지 법이 분명한 문(門)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엄경은 초발심 보살이 처음부터 여래 일체종지의 마음을 발하는 것을 보리심이라 칭하는 것이니, 가령 초발심주(住)에서 처음으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인 대지혜의 집안에 태어나서 ‘초발심 때 문득 정각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가 자기 지혜와 더불어 하나인 줄 회통하기 때문이며, 성불이 찰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지혜의 경계가 늦고 빠름이 아니기 때문이며, 교화의 경계가 백불찰미진수와 다백불(多百佛)에 두루한 것은 지혜의 경계와 덕의 작용이 다함이 없고 한량이 엇어서 겹겹이 겹쳐서 다함이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말을 잡은 것인데, 체(體)가 하나임을 생각하면 곧 일체가 무한인 것이니, 가령 10지(地) 중 초지 보살이 다백불(多百佛)과 다백천불(多百千佛)에게 공양하는 것은 비록 수가 백수(百數)를 여의지는 않지만 다백(多百)이 바로 무한으로써 단백(單百)과 더불어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4념처와 4섭법과 4무량심과 10바라밀의 하나하나의 법이 모두 무한한 것이며, 따라서 이 10주(住) 보살이 닦는 선정의 업도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가라앉거나 들뜨는 선정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 깊은 선정에 머물러서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는 것을 모두 해석했다. 경문에서는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님의 신통을 얻는다고 햇다. 가령 앞서 말한 새계와 무색계의 천(天)과 3승의 신통 중에서 색계와 무색계의 신통은 마음을 쉬어 상(想)이 청정한 과보로 얻은 신통이며, 2승의 신통은 선정 이전의 염(念)한 바에 의거하는 것이며, 정토 보살의 신통은 청정의락신통(淸淨意樂神通)을 얻으니 예컨대 세 종류의 의생신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님의 신통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이 이(理)에 칭합해 근본적으로 출입이 없음으로써 체(體)에 고요함이나 시끄러움이 없고 체에 조작의 성품이 없다. 그리하여 이(理)에 맡겨 스스로 진(眞)이라서 낳지도 않고 조복시키지도 않으며, 이가 참되므로 지혜가 응하면서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삼세와 시방을 일시에 널리 응하고 색신을 대현한다. 이처럼 지혜에 따라 응하여 군품(群品)을 교화하면서도 오고 감이 없으며 아울러 변화하지도 않는 것을 부처님의 신통이라 칭하는 것이니, 지혜가 의지함도 없고 형색(形色)도 없어서 체(體)에 오고 가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스스로 두루하여 삼세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삼세의 법에 널리 응하는 것을 신통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전에서는 “지혜가 삼세에 들면서도 오고 감이 엇다”고 한 것이니, 삼세가 중생의 정(情)으로 망녕되이 세운 것이지 실유(實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지혜의 체(體)가 형상이나 빛깔이 없어서 조작하지 않고서도 군품(群品)에 응하는 것을 신(神)이라 칭하는 것이며, 시방에 원만하여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근기마다 알아채지 못함이 없는 것을 통(通)이라 칭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자위 없는 문(門)에 의거해서 모든 청정한 행을 닦는다’고 한 것은 이 작위 없는 문을 통해서 법계ㆍ허공계의 행해(行海)에 두루한 청정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즉 지혜가 하는 바가 없는 것을 수(修)라 이름붙이고, 근기를 알아 사(事)를 같이함을 행(行)이라 이름붙이며 행이 이롭게 하지 않음이 없지만 작위도 없고 낳음도 없는 것을 무작문(無作門)이라 이름붙이고, 항상 시방의 일체 삼계에 처해서 생(生)을 받아 세속을 이롭게 하면서도 오염이나 청정이 없는 것을 정행(淨行)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다. 경전에서 ‘삼세의 부처님과더불어 체성(體性)이 동일하다’고 한 것은 법신의 지혜가 같기 때문이니, 삼세의 광대한 겁이 일념과 같기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현이 함께 대지혜와 대자비를 행해서 원만한 것이다. 같은 경전에서 ‘열 가지 법이 모든 보살로 하여금 조속히 모든 지(地)에 들게 한다’고 한 것은 초발심 주(住)의 지위라도 모든 주(住)와 모든 행과 모든 회향과 모든 지(地)의 법문을 두루 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이기 때문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이며, 인(因)에 즉하고 과(果)에 즉하기 때문이다. 가령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나자 미륵보살이 문득 문수사리를 보게 한 것은 인과가 다르지 않고 여의지도 않음을 밝힌 것인데, 이 또한 마찬가지라서 초발심의 지위부터 불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일념으로 가지런히 나아가면서도 일념 속을 벗어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인과와 보살행을 닦아서 다 원만하기 때문이다. 즉 선재의 한 생[一生]과 용녀가 1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3생(生)에 성불하는 것이 모두 서로 같기 때문이다. ‘한 생에 성불한다’고 말한 것은 금생은 부모의 분단신(分段身)으로서 신심과 도(道)를 보는 수행으로 살다가 분단신을 버리고 변역(變易)의 생에 들어가는 것을 한 생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며, ‘또한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고금의 성품이 없고 분단의 성품이 없고 변역의 성품이 없어서 만상(萬相)이 꼭두각시와 같기 때문이며, 화현(化現)과 같기 때문이며, 생멸이 아니기 때문이며, 삼세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주(初住)에서 두루 모든 지위와 모든 지(地)를 닦기 때문에 모든 법을 관총해서 총체적으로 일시(一時)이자 일법(一法)인 것이니, 이는 많고 적음이나 늦고 빠름이 자재롭고 걸림이 없어서 1찰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이 이와 같기 때문이니 정(情)을 버리고 지혜로써 관(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 ‘일체 중생과 모든 여래의 체성이 동일함이 안다’고 한 것은 3승의 보살에서는 일체 중생이 여래의 불성이성(佛性理性:바탕의 법신)을 똑같이 갖고 있는 줄 알지만, 이 경전에서는 일체 중생이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事를 판단하는 지혜)의 성품을 갖고 있는 줄 아는 것을 말한다. 가령 경전 아래 경문에서, 경권(經卷)이 삼천대천세계 같아서 소중생(小衆生)의 몸 속에 들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성불하면서 이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이 경권(經卷)을 낸다고 하는 것은 미진만한 크기의 중생에게 다 부처님의 일체종지가 있기 때문에 보살이 성불하여 화(化)하면서 총체적으로 여래의 일체종지를 얻음을 말한 것이니, 이(理)를 요달한 지혜의 명칭이 일체지(一切智)이며 차별지의 명칭이 일체종지(一切終智)이다. 경문에서 ‘모든 불국토를 듣고 다 왕생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티끌 속을 벗어나지 않고 지혜가 두루 나타나 응하면서 시방 일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도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모든 차제(次第)의 선정’이란 것은 색계의 4선(禪)에 보살이 차례대로 능히 들어가고, 무색계의 4선에 보살이 다 능히 순조롭게 들어가는 것이며, 혹은 간격을 초월해서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다. 마치 『열반경』 「사유분(闍維分)」에서 설했듯이, 초선으로부터 들어가서 3선의 정(定)에서 나오고, 공처(空處)에 들어가서 무소유처에서 나오고, 비상처(非想處)에 들어가서 공처에서 나오는 것이 이같은 간격을 초월함이며 이같은 차제(次第)인데, 이 경전에서는 방망삼매(方網三昧)가 일방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시방에서 일어나고, 시방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일방(一方)에 일어나는 등과 같은 것이니, 자세히는 10신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삼마발저지인(三摩鉢底智印)이란 것은 공적의 작용이 똑같이 일어나 모든 만법을 인(印)쳐서 명료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큰바다의 물로서 만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청정한 지혜가 일체 만법을 널리 인(印)을 쳐서 능히 요달해 알면서도 능(能)과 소(所)가 없으며 작위하는 자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경문에서 ‘모든 법을 잘 관해서 실상(實相)의 인(印)을 얻는다’라고 한 것은 작위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상념도 없는 대지혜의 인(印)으로 모든 만법을 인쳐서 일어나는 것은 오직 법만이 일어날 뿐 무명의 삼세를 집착하는 것이 없음을 실상의 인이라 이름붙인다. 경문에서 ‘입진삼매(入眞三昧)’라고 말한 것은 삼계 및 3승에 오염과 청정, 가라앉음과 들뜸이 없는 것이 해당된다. ‘온갖 편벽된 견해를 여읜다’는 것은 유(有)와 무(無)의 두 겨해가 이에 해당되며, 내견(內見)과 외견(外見), 신견(身見)과 변견(邊見), 계취(戒取)와 견취(見取)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되며, 나아가 62견(見)이 이에 해당된다. 62견이란 일체법 위에 계교로 인한 네 가지 견(見)이 있으니, 첫째 상(常), 둘째 무상(無常), 셋째 상(常)이면서 무상(無常), 넷째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님이며, 5음(陰) 위에 각각 이 네 가지 견(見)이 있어서 4와 5로써 20개가 되는데 삼세의 5음을 합해서 모두 60개가 되고, 여기다 근본 2견(見)을 더해 62견이 된다. 일체의 편벽된 견해는 이 62견을 벗어나지 못한다. 보문혜(普門慧)라는 것은 중생의 모든 근기와 법을 두루 아는 지혜이며, 일체지지(一切智智)는 갖가지 차별지이다. 색계의 중생은 선정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관(觀)을 일으키게 하고, 무색계의 중생은 무상관(無相觀)을 닦게 되기 때문에 미묘한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니, 상(相)이 정(情)에 해당되지 않아 지혜가 날카롭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화경법(和敬法)이란 첫째 신(身)이며, 둘째 구(句)이며, 셋째 의(意)이며, 넷째 계(戒)이며, 다섯째 시(施)이며, 여섯째 견(見)이니, 그 명칭이 6화경법이다. 중생의 밭에다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심는다는 것은 일체 중생의 보리이지(菩提理智)를 보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미묘한 선근(善根)이 뛰어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6통(通)은 앞에서 이미 다 해석했고, 「십통품」에서 10신통을 설한 것은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하 게송 중 2행 1게송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 있으니, 경문에 따라 찬탄한 것이다. 마지막 긴 행의 1행은 대중이 JQ을 듣고 환희하면서 받들어 행함을 밝힌 분(分)이다. 이 1회(會)는 「승도리천궁품」이 서분(序分)이며, 「게찬품」부터 이하는 정설분(正說分)이며, 대지를 진동하는 것과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유통분(流通分)이다.
19)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장차 이 품을 해석하는 데 대략 세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는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무슨 이유로 명칭이 야마천궁인가? 이는 처소로써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이 천(天)의 명칭이 시분천(時分天)인 것은 이 천(天)이 해나 달의 밝고 어둠이 없이 연꽃이 피는 것으로써 아침을 삼고 연꽃이 오므리는 것으로써 밤을 삼기 때문에 그 명칭이 시분천인 것이니, 10행의 법문이 때[時]를 알아 사물에 응해 화(化)함으로써 때를 알지 못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시분천으로써 근기를 알아 행을 대치하는 데 일향(一向)으로 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 인천(人天)의 종성(種性)과 2승ㆍ3승ㆍ1승의 종성을 어떤 선근으로써 접인(接引)할 수 있는가를 알기 때문에 시분천을 통해 소행의 행이 반드시 때[時]를 앎을 나타낸 것이다. 수미산으로 10주의 법문을 나타낸 것은 믿음으로부터 승진하여 범부지를 여읨을 밝힌 것이며, 또 10주의 지위에서 처음 법의 정상에 올라 모습이 다한 곳[相盡處]에 이름[至]을 밝힌 것이며, 또 수미산이 큰바다 속에 처하고 높이가 8만 4천 유순이라서 손발로 반연해 오르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첫 10주의 지위가 유심(有心)의 사려로 찾거나 관행(觀行)으로 반연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려도 없고 작위도 없는 제멋대로인 지혜로 응하면서 만법이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어야 비로소 오를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10행위가 야마천에 처한 것은 공(空)에 의지해 머물 뿐 인간과는 연결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10행도 마찬가지라서 법의 공함에 의지해 행을 행함으로써 때를 알아 세속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 하늘에 처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도솔천에서 10회향을 설한 것은 이 처소가 욕계천의 처소 가운데 거처함을 밝힌 것이며, 또 이 하늘이 지족(知足)을 즐김을 밝힌 것이다. 즉 10회향으로써 바른 지혜를 돌이켜 세속에 처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대자비문에 처하여 일체를 이롭게 하면서도 모든 경계에 탐착하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기에 이 하늘에 처하는 것으로 표현을 삼은 것이다. 타화천에 올라서 10지 법문을 설한 것에서 화락천을 지나친 것은 욕계의 끝에 이름을 밝힌 것이니, 10지가 자재해서 화락천을 초월해 욕계의 정상에 이르기 때문에 심마왕(心魔王)을 화(化)해서 욕망이 다한 곳에 이름을 나타낸 것이다. 제3선(禪)에 올라서 불화(佛華) 법문을 설한 것은 보현행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행의 법열(法悅)로써 다함 없는 중생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함을 나타낸 것이며, 또 제4선(禪)이 부처님 지위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닦아 나아감의 오르고 내림을 잡아서 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세운 것이지만, 그 이지(理智)는 하나하나가 두루하여 가고 옴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보리도량인 보광명전을 여의지 안혹 도리천과 야마천과 도솔천 등에 오른다”고 말한 것이며, 제3선이 초선과 2선을 초월한 것은 지위가 곱으로 뛰어남을 밝힌 것이다. 이 한 회상은 경문이 있지 않다. 이는 『영락본업경』에서 여래께서 성문과 보살 대중을 거느리고 보리수 밑을 향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이 보리수 밑에서 처음 정각을 성취했을 때 법계의 경전을 설했다”고 하였으니, 하나하나를 이 순서대로 배열해서 제3선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마천에서는 10행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앞에서는 10주의 승진을 밝히고 있기에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며, 여기서는 10행의 승진을 밝히고 있기에 야마천에 이르는 것이니, 차례대로 이 품이 반드시 온 것이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 소의 대의를 둘로 나누리니, 하나는 경전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며, 둘은 경문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1품 49행의 경문을 대략 10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째로 “이때 여래의 위신력 때문에” 이하 “항상 부처님을 대하지”에 이르기까지 3행 반의 경문은 시방에서 다 함께 여래께서 그 처소를 여의지 않음을 보는 것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로 “이때” 이하 “보장엄전”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시방 일체 보리도량의 보광명전을 여의지 않고 야마천에 오름을 밝힌 분이다. 셋째로 “때에 야마천왕” 이하 “그때 저 천왕이 법좌를 펼쳐놓고”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시분천왕이 멀리서 부처님께서 오는 것을 보고 법좌를 화(化)해서 장엄하는 것과 공경함을 밝힌 분이다. 넷째로 “불세존(佛世尊)에게 향하여” 이하 “이 궁전에 들어가다”에 이르기까지 2행 반의 경문은 시분천왕(時分天王)이 부처님을 청해 전(殿)에 들어가서 법좌에 오름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로 “그때 부처님께서 청을 받아들여” 이하 “다 역시 이와 같다”에 이르기까지 1행의 경문은 여래께서 청을 받자 시방이 다 마찬가지임을 매듭 지은 것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로 “이때 천왕” 이하 1행 반의 경문은 천왕이 지나간 인(因)을 상기해서 게송을 설해 부처님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일곱째로 게송을 설한 가운데 있는 20행의 게송은 10여래께서 일찍이 이 천궁에 들어옴을 찬탄한 분이 가운데 있는 20행의 게송은 10여래께서 일찍이 이 천궁에 들어옴을 찬탄한 분이다. 여덟째로 “이같은 세계” 이하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함”에 이르기까지 2해반의 경문은 시방이 이와 똑같이 일시에 부처님을 찬탄함을 밝힌 분(分)이다. 아홉째로 “이때 세존” 이하 “모든 머무는 처소”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여래께서 청을 받아들여 전(殿)에 들어가자 전이 넓혀짐을 밝힌 분이다. 열째로 “시방세계가 다 이와 같다”는 시방이 이와 똑같음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분이다. 둘의 경문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처음 “이때” 이하부터 “항상 부처님을 대하지”까지는 시방 일체처에 늘 두루 충만해서 늘거나 줄어듦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보리수를 여의지 않고 수미산 정상에서 야마천에 오른다”라고 말한 것은 지혜가 일체처에 두루하여 그 몸을 보이면서도 가고 옴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멀리서 부처님께서 옴을 보고”라고 말한 것은 10주로부터 10행위로 향함을 밝힌 것이다. “곧 신력(神力)으로 법좌를 화해서”라는 것은 행의 지위가 공(空)의 지혜에 의거해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 능(能)과 소(所)로 정한 건립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법좌로 행을 나타내서 연화(蓮華)라 호칭한” 것은 작위 없는 행이 원만히 이루어지니 오염의 집착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장(藏)이란 것은 갈무리한다는 뜻이니, 행 없는 행이 온갖 선(善)을 갈무리함을 밝힌 것이다. “법좌로 행을 나타내서 연화(蓮華)라 호칭한” 것은 작위 없는 행이 원만히 이루어지니 오염의 집착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장(藏)이란 것은 갈무리한다는 뜻이니, 행 없는 행이 온갖 선(善)을 갈무리 함을 밝힌 것이다. 사자(師子)라는 것은 무외(無畏)를 밝힌 것이니, 무위(無爲)의 이지(理智)로써 생사에 처하면서도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주(主)에 의거해서 법좌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백만 층급(百萬層級)이란 다 10주의 십천(十天)과 10행의 백만(百萬)을 밝힌 것인데, 지위에 따른 승진의 계급을 밝힌 것이다. 백만의 금망(金網)으로 교락(絞絡)을 삼는다는 것은 이 지위에서 행의 그몰로써 중생을 교화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과보로 얻은 의과(依果)가 되기 때문에 10주의 십천(十千)과 10행의 백만(百萬)은 승진을 밝힌 것이다. 화만향보(華鬘香寶)와 네 가지 장(帳)이란 것은 4섭법의 방편행으로써 중생을 내포함을 밝힌 것이다. 또 네 가지 덮개[蓋]는 4무량심인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로써 중생을 감싸는 것을 밝힌 것이다. 백만(百萬)의 광명으로 비춤을 삼는다는 것은 지혜의 눈으로 근기를 관(觀)해서 교화함을 밝힌 것이다. 천왕(天王)이란 것은 행이 자재로운 것이며, 공경하여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한다는 것은 행마다 오만함이 없는 것이다. 범왕용약(梵王踊躍)이란 것은 청정한 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구걸하는 자를 보면 기뻐하면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백만 보살이 칭양(稱揚:칭송)한다는 것은 행으로써 사물을 제도하니 여러 성현이 환희하면서 찬탄함을 밝힌 것이다. 천악주음(天樂奏音)이란 것은 능히 법을 잘 설해서 초래한 과(果)를 밝힌 것이다. 네 가지 구름은 자비를 행해서 세속을 감싼 것이니, 앞서 개(蓋)라고 말한 것과 나중에 네 가지 구름이라고 말한 것은 기(器)의 크고 작음을 잡아서 감싸 기르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마니운(摩尼雲)도 마찬가지이니, 근기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비춤[照燭]으로 이익을 주는 것이다. 백만의 선근(善根)이 낳는 바란 것은 이상의 장엄이 다 행 속의 선근을 잡아서 낳은 바임을 밝힌 것이니, 행이 능히 사물을 이롭게 하고 선(善)을 쌓음으로써 곧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온갖 복(福)의 장엄을 얻는 것이다. 이하는 경문대로 이해할 수 있다. 선래선서(善來善逝)라 말한 것은 선(善)은 온갖 악의 고통과 재앙을 소멸하는 것이며, 서(逝)란 중생을 제도해 속박을 여ㅢ게 하는 것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청을 받아들여 법좌에 오르고’란 것은 승진을 해서 올바르게 10행위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상은 부처님 스스로의 덕(德)에 비추어 보면 시방에 늘 스스로 두루하는 것이지만, 이제 오르고 내림[昇降]을 지은 것은 총체적으로 중생의 닦아 나아감의 오르고 내림을 취했기 때문이다. 20행의 게송 안에서 10불(佛)이 과거에 이 전(殿)에 들어온 적이 있음을 찬탄한 것은 지금 들어간 10행의 이지(理智)가 옛과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 10여래도 또한 행의 승진을 잡아서 성취한 호칭이며, 이전 10주위에서 수미산 정상에 오른 10여래의 명호도 또한 이 지위를 따라 옛[古]을 회통한 호칭이니, 들어간 바의 법이 옛날과 지금의 모든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가령 10주우위 중 수미산 정상의 제석궁에서 멀리 부처님께서 옴을 보고 즉각 전(殿) 안에다 보광명장(寶光明藏)인 사자좌를 안치한 것은 처음으로 여래 지혜 안에 들어가 태어나서 곧 방편삼매의 문으로써 보광명장을 안치한다고 이름붙임을 밝힌 것이니, 바로 지혜가 법계장(藏) 비춤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10행위에서 시분천왕이 멀리서 부처님께서 옴을 보고 보련화(寶蓮華) 사자좌를 화현해 만든 것은 행의 꽃[華]으로써 가르침의 그물을 시설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여래 지혜의 경계장(境界藏)에 들어가게 함을 밝힌 것이다. 연꽃[蓮華]은 행의 집착이 없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화좌(化座:화현한 법좌)란 행의 체(體)가 10주 지혜의 허무법신(虛無法身)에 의거함으로써 안립함이 없기 때문에 지은 바가 화현과 같음을 밝힌 것이니, 이로써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 5행의 경문은 시방이 동시에 부처님을 찬탄함을 매듭지은 것이며, 여래가 전(殿)에 들어가자 그 전(殿)이 넉넉해져 천(天)이 머무는 바와 같다는 것은 지위에 들어가 승진하니 스스로의 지혜가 넉넉해지면서 비로소 부처님 경계를 앎을 밝힌 것이다.
20)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장차 이 품을 해석하는 데 대략 세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품의 명목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야마천궁에 올라서 10행의 법을 설한 것인데, 이 품은 공덕림(功德林) 등 10보살 대중이 해당 지위의 행으로써 게송을 통해 해당되는 지위의 법을 찬탄하기 때문에 「게찬품」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10행의 법을 설하고자 할 때는 먼저 반드시 게송으로 10행 속의 인과 법문을 모두 찬탄하기 때문에 이 품이 반드시 옴을 밝힌 것이니, 만약 행한 바의 인과를 먼저 들지 않는다면 10행이 무엇을 의거해서 성취하겠는가?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 1품을 대략 두 가지 문으로 나누리니, 하나는 경문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며, 둘은 경문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경문의 뜻을 장과한다는 것은, 대략 다섯 단락으로 장과(長科)하겠다. 첫째로 “이때 부처님의 신력(神力) 때문에” 이하 “결과부좌”에 이르기까지 13행 반의 경문은 지위에 따른 보살인 공덕림 등 10보살과 아울러 스스로의 행과 부처님의 인도와 모여듦을 진술함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로 “이같은 세계” 이하 “다 동등해서 별다름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시방세계의 보살이 이와 똑같이 모여듦을 거양한 분(分)이다. 셋째로 “이때 공덕림보살”의 1행의 경문은 법을 관해서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分)이다. 다섯째로 첫 게송 이하 10단락의 게송은 10행 중 각각 자행(自行) 법문의 인과를 펴는 것을 밝힌 분(分)이다. 둘의 경문에 따라 뜻을 홰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 품 처음의 제1 단락 속에 있는 13행 반의 경문 속의 뜻을 셋으로 나누게다. 첫째로 보살의 명칭과 아울러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감의 인과를 짝지음을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로 찰토의 멀고 가까움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로 보살의 저마나 똑같은 명호가 두루함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보살의 명칭과 아울러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감의 인과를 짝지음을 해석하는 데 대략 열 가지 인과가 있다. 첫째의 공덕림보살이라는 것은 가령 10주위에서 처음오 부처님 지혜의 집 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보살의 명칭이 법혜(法慧)와 재혜(財慧) 등인데, 이 지위에서는 슬기[慧]로부터 행을 해해서 복과 지혜의 두 과보가 광대하고 많기 때문에 임(林)으로 명칭을 삼음을 밝힌 것이다. 또 임(林)이란 광대하고 많다는 뜻으로 그늘을 드리운다는 뜻이고 장엄의 뜻이며, 몸통ㆍ줄기ㆍ가지와 꽃ㆍ잎ㆍ열매가 서로 자랑하는 뜻이니, 10행위(行位)의 보살이 자체성 없는 지혜로써 만행의 줄기와 가지를 장엄하고 대자비로 잎사귀를 삼아서 일체 중생에게 그늘을 드리워 교화함으로써 자타(自他)의 보리의 꽃과 열매를 다 개발하게 함을 밝힌 것이다. 마치 냇물이나 연못에 숲이 있으면 온갖 새가 돌아오는 것처럼 사람에게 행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의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10행 보살을 가리켜서 임(林)이라 이름붙인 것이니, 이는 환희행의 단바라밀문에 해당된다. 가령 선재동자의 10행 초기에 선지식의 명칭이 선견(善見)인데 숲 속에서 경행(經行)하는 것이 역시 이와 같고, 나라의 명칭이 3안(眼)인 것은 이 지위의 불과가 그 명호를 안(眼)이라 하는 것을 말한다. 국토의 명칭이 친헤(親慧)세계인 것은 이 10행이 몸소 부처님의 슬기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인(因)을 삼고, 또한 늘 일체 중생과 더불어 친근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불과의 명호를 상주안불(常住眼佛)이라 한 것은 몸소 부처님의 지혜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근기를 알아 세속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상주하는 지혜의 눈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여래 지혜의 눈을 얻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도 또한 남에게 지혜의 눈을 얻게 함임을 밝힌 것이니, 여래의 지혜로써 근기를 관(觀)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智)가 바로 해당 지위의 불과임을 밝힌 것이다. 공덕림은 행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낸 것이며, 친혜세계는 해당 지위에서 수행하는 지혜의 인(因)이며, 상주안불(常住眼佛)은 해당되는 지위의 근기와 견해를 아는 과(果)이니, 근본지와 더불어 상응하는 것을 ‘상주안불’이라 칭한다. 둘째의 혜림(慧林)보살이라는 것은 지혜가 숲처럼 광대하고 많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요익행(饒益行)이니 지혜로써 일체 중생을 요익해서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며, 계(戒)바라밀을 행함이니 이 지위가 지혜로써 계율의 체(體)를 삼기 때문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10행 중 선지식인 석천(釋天)동자가 계바라밀을 행할 때 산법(算法)과 상법(相法)과 인법(印法)으로써 바로 촌영성읍(村營城邑)의 길흉의 땅을 안치한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니, 10주 안에서는 법신으로 계의 체(體)를 삼았지만 이 10행에서는 지혜로써 계의 체(體)를 삼는 것이다. 혜림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당혜(幢慧)세계는 수행하는 바의 인(因)이니 슬기를 계의 체(體)로 삼아서 생사 속에 기울지 않는 것이며, 무승안불(無勝眼佛)은 행하는 과(果)이니 슬기의 눈으로 근기를 알아서 나머지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의 승림(勝林)보살이란 것은 바로 거스름이 없는 행으로서 인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니, 모든 행 중에서 인행(忍行)이 가장 최고로서 행에 인(忍)이 없으면 행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호가 승림보살인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인 우바이의 명칭이 ‘구족(具足)’인 것은 인바라밀이 온갖 행을 모두 거두어서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가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우바이란 자비행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며, 하얀 옷과 피발(被髮)은 계인(戒忍)의 상(相)이며, 방 하나에 처해서 방의 네 문이 열리는 것은 중생을 자비로 기르는 4섭법을 나타낸 것이며, 십천(十千)의 시녀는 만행을 갖춘 것이며, 하나의 작은 그릇으로써도 구제와 은혜가 무궁한 것은 오만하여 제 스스로 높다 함을 여의고 4섭법이 무한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하나하나의 바라밀이 서로 작용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승림보살은 이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보혜(寶慧)세계는 수행하는 바의 법이니, 이는 인(忍)을 온갖 행의 보배로 삼음으로써 귀중함을 밝힌 것이며, 무주안불(無住眼佛)은 바로 인(忍) 중의 불과(佛果)이니, 비록 인행을 행하더라도 행한 바를 염두에 두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의 무외림(無畏林)보살이란 늘 정진을 행하는 것이 바로 생사에서 인천(人天)에게 이익을 주어 두려움이 없게 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굽힘이나 흔들림이 없는 행[無屈撓行]을 주재하는 것이니, 지혜로서 때[時]를 알고 법을 알고 근기를 알아 사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사(事)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 공(功)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선지식인 명지(明智)거사(居士)가 이 지위 속의 선지식이니, 명지(明智:밝은 지혜)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그 행에 굽힘이나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며, 대흥성(大興城)에 머무는 것은 바로 정진의 뜻이기 때문이며, 시사구도(市四衢道:저자의 거리)라는 것은 요익(饒益)이 광대하고 많아서 무한히 이롭게 함을 밝힌 것이며, 순간적으로 사념하는 것은 작의(作意)의 방편인 것이며, 허공을 우러러보매 곳에 따르는 사물이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모두 공(空)으로부터 내리는 것은 지혜가 공과 같아서 지혜의 염(念)에 응함을 밝힌 것이니, 공(空)이 지혜의 근본이 되어서 지혜가 공(空)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을 관하면 사물이 지혜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공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근본이니, 이로써 관해 보면 일체 공덕이 총체적으로 공의 지혜로부터 있음을 밝힌 것이다. 무외림보살이란 이 지위에서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승혜(勝慧)세계는 수행의 법이며, 부동안불(不動眼佛)은 이 지위 중의 불과이니, 정진의 지위가 사물을 따라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부동안(不動眼)인 것이니 경계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진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다. 다섯째의 참괴림(慘愧林)보살이란 혼란스럽고 어리석은 행이 없는 것이니, 선(禪)바라밀을 주재한다. 부끄러움을 갖춰서 선을 행하게 되니, 선정이 슬기를 발하여 행에 혼란스러움과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선지식인 보계(寶髻)장자가 이 지위 중 선지식인데, 저자 속에 있는 것은 행 중 선체(禪體)가 시끄러우면서도 늘 고요함을 밝힌 것이며, 선재의 손을 잡고 장차 거처하는 집[宅]에 나아가는 것은 인도해서 제접함을 밝힌 것이니, 생사의 저자 속에서 인도해 제접함으로써 장차 거처할 지혜의 과(果)로 나아감을 밝힌 것이다. 이는 과(果)를 관해서 인(因)을 앎을 밝힌 것인데, 그 집의 보배 장엄은 10층이요 8문(門)이다. 원(院)에 8문이 있고 각(閣)에 10층이 있는데, 8문은 8정도(正道)를 밝힌 것이며 10층의 각(閣)은 10바라밀의 과보에 근거한 것이니, 한결 같이 10도(度)의 행이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배열해서 스스로 법칙을 갖추고 있다. 경문에 이르면 비로소 밝힐 것이지만, 이는 선체(禪體)가 만행을 모두 거두어들임에 근거한 것이다. 참괴림보살은 이 지위의 수행하는 사람이며, 등혜(燈慧)세계는 행하는 법이니, 선정이 능히 슬기의 밝음을 일으켜서 사물을 비추기 때문에 세계의 명칭이 등(燈)이며, 천안불(天眼佛)이라는 것은 이 지위의 불과이니, 선정이 능히 모든 근(根)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명호가 천안불인 것이다. 여섯째의 정진림(精進林)보살이란 선현행(善現行)으로서 반야바라밀문을 주재한다. 반야로 온갖 행을 잘 나타냄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그 명호가 정진림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보안(普眼)장자(長者)인 것은 처음에는 신명(身命)을 구원하고 다음에는 음식을 베풀며, 마지막에는 함께 법을 설해서 하나하나가 근기에 따름을 밝힌 것이니, 이는 지혜의 성취를 밝힌 것이다. 정진림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금강혜(金剛慧)세계는 수행의 법이니 지혜로 번뇌를 타파하는 것의 명칭이 금강임을 밝힌 것이며, 해탈안불(解脫眼佛)은 이 지위의 불과이다. 일곱째의 역림(力林)보살이란 무착행(無着行)으로서 방편바라밀을 주재한다. 방편으로 세속에 처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그 행류(行流)를 같이 하면서도 세간에 처해 집착이 없고 대자비행을 이루는 것이 역림(力林)이 됨을 밝힌 것이다. 진(眞)으로서 세속에 들어가 속박에 처하면서도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명칭이 역림이 된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무염족왕(無厭足王)인 것은 대자비를 행할 때 스스로 몸을 화현해서 모든 불선(不善)을 끊어서 반드시 고통으로 다스리는데, 이처럼 실제 중생이 두려움으로 악을 끊게 함으로써 중생을 구하고 보호하면서도 사랑으로 저버리지 않는 것을 무염족이라 칭하는 것이다. 역림보살은 능히 행을 닦는 사람이며, 안락혜(安樂慧)세계는 행하는 바의 법이며, 심제안불(深諦眼佛)은 이 지위의 과(果)이니, 이 지위가 대자비문을 성취하기 때문에 명칭이 안락세계인데, 이는 중생을 안락하게 함에 근거해 명칭을 얻은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가 심제안(審諦眼)인 것은 중생을 반드시 어떤 법으로 교화할지 살펴서 앎으로써 비로소 조복하기 때문이다. 여덟째의 행림(行林)보살은 난득행(難得行)으로서 원(願)바라밀을 주재한다. 얻기 어려운 것을 능히 얻기 때문에 그 명칭이 행림이 되고, 이 지혜의 지위가 오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명칭이 난득행인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중 선지식인 왕의 이름이 대광(大光)인 것은 이 제8의 지혜가 대원을 따라 중생의 뜻을 만족시켜 대요익(大饒益)을 행하는데, 널리 중생에게 세간 낙구(樂具)를 베풀어 주고 이체의 지보(智寶)를 모두 베풀어 주는 것이다. 행림보살은 능히 행하는 사람이며, 일혜(日慧)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니, 이 지위의 지체(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세계의 명칭이 일혜인 것이며, 명상안불(明相眼佛)은 이 지위의 과(果)이니, 이 지위의 지체(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불과의 명호가 명상안인 것이다. 아홉째의 각림(覺林)보살은 선법행(善法行)으로서 역(力)바라밀을 주재한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부동(不動)우바이(優婆夷)인 것은 제9 법사위(法師位)인데, 어째서 여자 몸이 되었는가 하면 법사위에 처할 때 정결하고 자비롭고 유연함을 밝힌 것이기에 여인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여인의 발심이 염부제의 미진겁(微塵劫)을 거치면서도 발심으로부터 오기에 마음에 일념도 없고 5욕의 상념도 없는 것은 정결과 자비와 유연함이 바로 법사의 덕임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의 명호를 각림이라 하는 것이니 역바라밀을 주재한다. 각림보살은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정혜(淨慧)세계는 수행의 법이며, 최상안불(最上眼佛)은 수행하는 바의 과(果)이니,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최상안인 것이다. 열째의 지림(智林)보살이란 것은 진실한 슬기의 행이기 때문에 지(智)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니, 여기서 명칭의 지위가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선재 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호(號)가 출가외도(出家外道)이고, 이름이 변행(遍行)인 것은 지혜를 얻어 자재함으로써 능히 사견(邪見)을 같이 하면서도 모든 사견(邪見)을 거두어들임을 밝힌 것이니, 3천 가지 경계와 아흔여섯 가지 외도를 내가 모두 다하는 것을 말한다. 자림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범헤(梵慧)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며, 감청안불(紺靑眼佛)은 이 지위의 과(果)이니 감청은 10행의 지혜가 한번 종결되어 원만해지면서 밝고 청정함의 비춤[明淨照燭]이 지극한 것이다. 두 번째의 찰토의 멀고 가까운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에서 “시방으로 각각 앨대보살(一大菩薩)이 있는데, 하나하나가 저마다 불찰미진수 보살과 더불어 함께 함으로써 시방 십만불찰미진수 국토 밖의 모든 세계로부터 와서 모였다”고 했는데, 10주에서는 백불찰미진이라 말하고 이 지위에서는 10만이라 말한 것은 승진하는 지혜의 확장을 밝힌 것이다. 미혹된 마음과 모든 경계는 진(塵)의 양(量)이 되고, 미혹된 집착이 거처하는 곳은 국(國)이라 칭하고, 마음이 경계를 따라 구르는 것을 ‘모든 국토의 밖’이라 칭하고, 집착이 없어지면서 지혜에 계합하는 것을 ‘온다’라고 칭하고, 밝은 지혜가 두루하면서 경계를 요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라 호칭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보살이 예의 그러한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미혹을 요달해서 지혜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의 보살이 각각 같은 호칭으로 두루함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모든 경계를 미혹하니 티끌[塵]은 무명의 광대함을 나타낸 것이며, 마음이 깨달아 지혜가 통하니 멀리 찰해에 두루하도록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그 견(見)과 같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명호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니, 미혹할 때는 경계마다 미혹 아님이 없지만 깨닫고 나면 경계마다 지혜 아님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 모든 보살” 이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다”는 법좌에 올라 공경을 바침을 밝힌 것이며, “화좌마니장(化座摩尼藏)”은 10행이 생사에 처해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그 행에 늘 더러움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마니좌(摩尼座)라는 것은 이구보(離垢寶)요, 장(藏)이란 갈무리한다는 뜻이며, 사자(師子)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 이는 범부의 행에는 오염이 있으나 성인의 행에는 더러움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사자는 주(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수행자의 지혜와 더으로 수행할 바의 법을 밝힌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두 발등으로 백천억 광명을 놓았다”고 했는데, 10신에서는 발밑의 족륜에서 광명을 놓고, 10주에서는 발가락 끝에서 광명을 놓고, 이 10행에서는 발 등 위로 광명을 놓는 것은 차례로 지위에 따라 승진하는 법을 나타내는 광명을 밝힌 것이며, 십천(十千)과 백천(百千)과 백천억(百千億)으로부터의 묘한 빛깔의 광명은 모두 지위에 따른 승진을 밝힌 것이니, 대체로 발 밑과 발가락 끝과 발 등 위가 모두 행하는 바의 행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 긴 행으로부터 이하 10단락의 게송은 이 10림 보살이 각각 스스로 해당 지위의 수행하는 법을 읊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열 가지 법이 다 함께 하나의 행을 이루는데, 이 같은 하나하나의 행 속에 모두 10행을 갖춰서 저마다 자행(自行)의 지위에 따라 이름 아랫 글자의 뜻을 바로 찬탄하는 법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하 명칭과 같은 뜻은 저마다 해당되는 지위에서 행하는 법을 찬탄한 것이니, 명칭을 요달해서 법을 알면 알 수 있을 것이다.
新華嚴經論卷第十八長者李 通玄 撰第二隨文解釋者,如前挍量初發心功德四十段文中,最初一段,帝釋請,如文可知。第二文中,擧初發心有十種廣大難知法,如文可知。第三段中,正擧供養廣大。第四段中,正明將人所供不可挍量如歌羅分者,是將多比少,不如喩如析人身上毛作百分,將前人所作功德,不如初發心菩薩百分毛中一分毛許功德。又云:優波尼沙陁分者,謂少許相近類之,無限善根不可將有限比對,餘如文自明。第五段中云:教修十善道者,身三,口四,意三。是欲界生天善上者云:四禪色界業也。初禪滅憂,二禪滅苦,三禪滅喜,四禪唯寂靜。云教住四無量心,此是有爲中慈悲喜捨。云教住四無色定,此是無色界定,已上是三界中善業。云教住須陁洹果謂,初斷見惑捨異生性,初獲聖性入聖行流故,故名入流。云教住斯陁含果,此云一來,謂此聖者雖斷欲界六品惑然爲有餘,三品未斷,令此聖者,一度來欲界生故名一來果。云教住阿那含果,此云不還,謂斷欲界九品惑盡,從此生色界,更不來欲界受生,故名不還。此十使中,見道疑未能明了不入羅漢果,如十使煩惱,一身見,二邊見,三見取,四戒取,五邪見,已前五爲利使,已後五爲鈍使,見諦斷,六貪,七瞋,八癡,九慢,十疑,此五鈍使,能迷隨行之事。此之十使,前五利使,須陁洹見諦之後,伏之不起,後五鈍使薄,斯陁含斷欲界六種惑,非無色界貪,於瞋癡慢三種,微而且薄,現行不生,非種無故爲上二界報且無瞋爲修定伏而現行不起,須斯二果有厭患而不令增長,常求出世之心,以此不成三界沈淪種子,阿那含厭令永息,唯有見道疑以見道不分明,不能頓超三界業果,阿羅漢爲見道無疑,三界業果一時盡故,望前三果,設斷九種煩惱,唯有疑在,不得名爲斷煩惱,爲見諦,無明未明,摠名厭伏,不得名斷。又羅漢辟支佛,但欣出世,淨土菩薩及空觀菩薩,爲但欣出世行六波羅蜜,摠是折伏現行無明,不得名爲永斷煩惱,爲且以空觀折伏無明,不了無明從本已來是不動智佛爲不了根本,以空折伏使令不起,乃至十地但得意生身等,不名以如來一切種智生身,以作十眞如等觀斷十種麤重,不了無明本是如來根本智故,大用恒寂故,一乘佛果教中依佛果發心,初發心時達根本無明,是根本無分別智,成差別智大用法門,初心之上圓滿一切諸佛共所乘門,名乘一切智乘。若智悲願行毫釐不似佛,信心亦不成,何況住佛所住生在如來一切種智家?生爲佛眞子具諸佛事,以智不異願行平等大悲不異,無限境界不異,過去未來劫差別與一念不異,應如是定慧照之可見。此是名依佛菩薩正善知識依根本智發心,如下文纔發心菩薩能於十方示身成佛者,爲初發心時,乘如來不思議一切智乘,得佛種智,生如來法界之家,乘佛一分之智慧大慈悲勢分,卽能如是示身成佛。如下頌云,菩薩於佛十力中雖未證得亦無疑,菩薩於一毛孔中,普現十方無量剎如是摠明初發心菩薩之德,爲得如來一分智慧勢分如是,如輪王大子權統王政亦得自在,一分與父王相似,如動地興供明法威力亦明,大衆法悅心悅,地動明心境體無二故,境由心現故,如十方各過萬佛剎微塵數佛,同名法慧來現其前者,爲明與十方諸佛智慧合故,萬佛剎塵者明昇進修行啓迷悟法之量,十信十,十住百,十行千,摠是明昇進見諦解迷悟法之名,如下萬佛剎微塵數菩薩發心,受過千不可說劫成佛之記,皆同號之爲淸淨心者,亦明達如是千不可說劫量法門摠淸淨故,故佛號淸淨心,非是實有如情所見長遠之劫也。摠明當位隨迷悟法之名,不是存其劫量之說如妄情所見也。自此已下直至品末如文,自具如文,稱歎如是已下二百四十二行頌一百六十八行,摠歎佛果及信等六位,法門已下七十四行所歎此品之內挍量發心功德廣大難比,如文具明,隨文稱歎,四行一頌,准例知之,如是挍量初發心功德,設使以等虛空無限境界,以一切樂具摠供養無限衆生,皆令得人天勝樂。又教令得四沙門果及辟支佛及三乘出世菩提,如是虛空境界及所度衆生雖等,然未令所化衆生得成佛,亦不可比,於此教中初發心乘如來大智等佛所行,普化衆生皆成佛故發菩提心。以是義故,所擧境界廣狹不等,所化衆生成佛不成佛不等故。不可爲比故。是故此品下文云:初發心菩薩不於三世少有所得,所謂若諸佛若諸佛法,若菩薩若菩薩法,若獨覺若獨覺法,若聲聞若聲聞法,乃至廣說如經,但爲唯求一切智於諸法界心無所著發菩提心,略說菩提。其法有四,一聲聞菩提,二緣覺菩提,三權教菩提,四一乘菩薩佛果菩提。前三竝是出世菩提,佛果菩提是法身大智大悲眞俗萬行法界圓滿菩提,無出入故,三乘菩提雖觀四諦十二緣,而亦未知四諦十二緣之實體,非獨二乘未知,三種意生身菩薩位登十地,猶未能悉知,唯一乘菩薩以智方知,至十地品具明,但且略而摠言,三乘中觀苦集滅道及十二緣生及行六波羅蜜菩薩,厭苦欣眞但求出世,大悲菩薩方云留惑潤生,一乘菩薩以智觀四諦十二緣生,無明卽智苦諦卽聖諦,於生死涅槃無解縛性。是故此經名苦聖諦集聖諦。如是十聖諦十二因緣,摠是法界自性無縛無解自在之緣,不名無明,不名苦諦,如是摠觀萬法,如是名爲一乘法界緣起智悲自在任性緣生,一切眼、耳、鼻、舌、身,莫不皆是法界緣起自在法門,一切諸佛知見神通力,以此而有,但以禪定觀照諸波羅蜜而顯發之,是故學者應如是修如是悟入,已下頌文四行一頌,如文自具不煩更解有智之士隨文稱歎令衆發心。明法品第十八將釋此品約作三門分別,一釋品名目,二釋品來意,三隨文釋義。一釋品名目者,此品爲明前之昇須彌頂品、偈讚品、十住品、梵行品、初發心功德品,五品法門已,發菩提之心得廣大功德,此精進慧所問之法,有二義,第一令前五品之法其心更明,第二令後所行之法轉勝明白。故云明法品,爲明昇進前後法故,是精進慧菩薩啓請法慧菩薩言:所有大願悉使滿足,獲諸菩薩廣大之藏,此明前所得法使令更明後之昇進使令明白,是修十行之向,長養本位十住之法。二釋品來意及名目如前。三隨文釋義,分之爲二,一長科經意,二隨文解義。第一長科經意者,約科爲三段,第一初爾時已下,長行有三十三行半經,通偈頌有五十五行,明精進慧菩薩請法分。第二爾時法慧菩薩已下,有六行經,明法慧菩薩許說分。第三佛子菩薩摩訶薩已下,直至品末通偈頌,摠明正說法分,從初第一請法分中,義分爲二,一科此一段經之文意,二隨文解義。第一科此一段經文意者,約科爲三段,第一爾時已下,至復次有十二行經,明精進慧菩薩初起請法門分,第二如諸菩薩已下,至菩薩所行次第願#皆演說有二十一行經,明精進慧菩薩幷擧當位應所修行之行及獲益,重勸說守護法分。第三爾時已下,可有一行經,明精進慧以偈說重請分。第二隨文解釋者,從初爾時者,爾猶此云說此法時也。精進慧菩薩者,約位加行成名,此通十箇慧之通稱,爲今欲成此位之昇進,必籍精進之功,慧者照燭義,精進者無思義,以無思之慧照燭有作之功,有作本自無功,萬法本來自淨,萬法自淨,名之爲精,無功智應知根利生,名之爲進,此約成位進修之稱也。菩薩者,如常說也。白法慧菩薩者,白者,明也,明著名言申其明也。云昇一切智乘者,明入此位也,以此位菩薩乘一切智乘生如來家入佛種智爲佛之子恒蒙諸佛之所攝受故,明智相應其與益故。故云攝受,云獲諸菩薩廣大之藏者,如十迴向中智藏悲藏等十藏是也。以何方便已下,正說中十十法門是。云六通者,身通、天耳通、天眼通、宿命通、他心通、漏盡通。身通者,於一剎那際身隨智用,周遍十方對現色身,隨根普應。天耳通者,耳根常聞十方一切諸聲。天眼通者,眼根常視十方一切麤細等色。宿命通者,智隨三世一切衆生死此生彼,所作業行因果悉能知之。他心通者,一念能知三世一切衆生心念所欲。漏盡通者,隨智遍知一切諸法而無情欲順癡愛心。此經又有十種通,如十通品說。三明者,一宿命,二天眼,三漏盡,是名三明。四無畏者,一一切智無畏,二漏盡無畏,三說障道無畏,四說盡苦道無畏。相好者,此經十身相海也。力無所畏者,十力也。一是處非處力,二業力,三定力,四根力,五欲力,六性力,七一切至處道力,八宿命力,九天眼力,十漏盡力。是爲十三世業果名爲處,了達非有名非處,論主頌曰:善知衆生業因果心定不動如山王衆生根品上中下欲樂種種各差別種種世間諸性分一切道法各不同宿命遍知三世業天眼十方無㝵了隨諸分別滿十方心無雜染常無垢如是十種德自在是名如來無畏力十八不共者,一佛身無過失,二口無過失,三念無過失,四想無過失,五心無不定常在三昧,六無不知已捨,七欲無減,八精進無減,九念無減,十慧無減,十一解脫無減,十二解脫知見無減,十三身業隨智慧行,十四口業隨智慧行,十五意業隨智慧行。十六智慧知過去無㝵事,十七智慧知未來無㝵事,十八智慧知現在無㝵事。所言無過失者,妙善相應,所言無減者,所作善法常無忘失。云一切智智者,云種種無盡智,此明差別智無盡故,如守護分中有二義,一明初發心菩薩守護一切諸佛法藏而能爲人演說,二得天王夜叉王如來法王等守護,以偈重請分中有二十二行頌,初二行頌歎能說法主,已下二十行頌,兩行一頌,初兩行歎初發心菩薩智慧福德超世獲益,次兩行頌,勸說昇進之行,次兩行頌,明大智度衆生無著,次兩行頌,明衆行無缺利生令佛種不絕,次兩行頌,明堅固功成出離法勝法重勸請說,次兩行頌,明破闇降魔之道,亦願請說,次兩行頌,明如來所得之法,亦勸請說,次兩行頌,明云何演說如來法,末後兩行頌,明云何令初發心無畏如師子無著如蓮華。第二許說分中法慧菩薩所歎能問之人如文可知。第三正說分中復分爲二,第一長科經意,第二隨文釋義。一長科經意者,從佛子菩薩已發一切智心已下,至品末,長科爲二十段。第一從初佛子已下,至住不放逸,有十行經,明十住十種不放逸法分。第二佛子已下,至十種淸淨,有十行半經,明住不放逸得十種淸淨法分。第三佛子已下,至能令一切如來歡喜,有十一行半經,明行十種法諸佛歡喜分。第四佛子已下,至諸佛歡喜,有六行經,明安住十法分。第五佛子已下,至令諸菩薩速入諸地,有八行經,明行此十法速入諸地分。第六復次佛子已下,至而自莊嚴入菩薩地,有十行經,明入地昇進分。第七佛子有十種法已下,至所行淸淨,有八行經,明淨行分。第八菩薩旣得行淸淨已下,至十增勝法,有八行經,明昇進轉增分。第九佛子已下,至是爲菩薩十種淸淨願,有七行經,明大願成行利生分。第十佛子已下,至守護無上法門,有七行經,明行十法令大願圓滿分。第十一佛子菩薩滿足如是願已下,至如應說法,有八行經,明十種無盡藏分。第十二所謂知其所作已下,至具足莊嚴波羅蜜道,有十六行經,明菩薩知根利益分。第十三是時已下,至令三寶種永不斷絕,有五十二行半經,明行十波羅蜜利益衆生諸對治分。第十四所以者何已下,至念念具十種莊嚴,可有十八行經,明令三寶種不斷絕分。第十五何者爲十已下,至度脫無量無邊衆生,有三十行經,明以十種莊嚴令見者發心無空過分。第十六佛子已下,至如是自在力已下,有二十三行經,明菩薩初發心得與佛平等法堪爲大法師分。第十七假使有不可說世界廣大道場已下,至及護持法故,有十三行半經,明處衆無畏說法自在身無映蔽分。第十八爾時已下,可一行經,明法慧以頌歎法分,第十九如此以頌歎法中,有二十行頌兩行一頌,如文其義自具,隨文稱歎卽得第二十最下一行經,明諸聞法歡喜大衆奉行分。第二隨文解釋者,從正說分中佛子菩薩已下二十段文中,但隨經文義隱言幽方可解之,經文自顯處,如文自具不煩更釋,如文中住於深定不沈不擧者,不沈離聲聞滅盡定,亦離上二界息慮禪,如色界初禪,滅下欲界愁憂不生,得一分輕安寂靜,無欲界愛有寂靜愛,水災便至。楞伽經云:津潤妄想能生內外水界,以愛爲津潤故,水災至,如色界第二禪,能滅欲界憂苦不生,得一分輕安寂靜,爲有覺有觀能緣淨境猶有火災便至,如第三禪,無覺無觀有禪悅樂心有喜動,風災便至,如第四禪,身心寂滅離出入息,喜動亦無三災不至,唯妙色身如白銀淸淨光潔,衣如金色,四禪身長二十里,衣長四十里,以下三禪倍倍減半,如初會中以釋,如是四禪,皆是息心令靜,以爲勢分,乃至空處、識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定,皆是破除昇進令念不生住寂定故,如是破色界淨色,令成無色界空識。又破見空之識亦空,名識處定。又破識空之見亦無,名無所有定。又破無所有心,此無想之想亦無,名非想非非想定,如是上界修禪,皆是作意存情伏心不起,不是任情無爲無沈無掉稱眞理智寂用自在不作而爲之定也。如欲界名攀緣五欲名掉,色無色界定名沈。又聲聞緣覺定名沈,空觀菩薩行六波羅蜜,生於淨土名掉擧,如是三乘之定,皆有沈掉,爲垢淨未亡見道不眞有欣厭故,二乘之定,雖無三界現行之惑,皆是厭患對治伏滅無爲無能起惑,我生不起悲智亦亡,住滅定者,頭上擊鼓,亦不聞知,化火燒父母分段身入變易生死,如是二乘斷惑不分別法,意勢相似,或有聲聞以十二緣生得道。如是三乘觀行緣覺聲聞,淨土菩薩所得道者,皆是出世三乘互用通爲九乘,大體以約勝鬘經得伏三界煩惱不起,得意生身,無分段生死得變易生死,非是應眞任智自在無出入體任智應衆生利樂不息,廣如勝鬘之意。以是義故,色界、無色界及三乘禪,有沈有掉,如大乘中留惑潤生菩薩,道前安立三十心習種性性種性道種性方入聖種性,四攝、四無量心、三十七助道品觀、十波羅蜜,名目相似,若以攝化境界及見佛數量意生身智生身成佛因果,摠皆不同。以是義故,如是留惑潤生菩薩所修定亦沈亦掉,爲但得三種意生身#未得如來智生身故,乃至七八九十地得種類俱生無行作意生身菩薩,但得三界煩惱中空觀,折伏現行不起,於意生身中自在故,非是生如來一切種智家故,非是於如來一切種智中起慣習故。所云成佛定滿三祇,所見佛境初地菩薩,但云供養百佛及攝化百佛世界,但得百法明門,如此華嚴經者,初發心菩薩初發如來一切種智之心,名爲菩提心,如初發心住,創生一切諸佛一切種智慧大智家,生初發心時便成正覺,爲會諸佛一切種智與自智一故,成佛不出剎那之際以智境界非延促故,攝化境界遍百佛剎微塵數。又多百佛明智境德用無盡無限重重故,此猶約隨位進修之言計體一卽一切無限也。如十地中初地菩薩供養多百佛多百千佛雖數不離百數,然多百卽無限,與單百無比。是故四念、四攝、四無量心、十波羅蜜,一一法悉皆無限。是故此十住菩薩所修定業,不屬世間出世間沈掉之定也。已釋住於深定不沈不擧竟。如文入深禪定,得佛神通者,如上色界、無色界天及三乘神通,色、無色界神通息心想,淨報得神通,二乘神通依定,前所念淨土菩薩神通得淸淨意樂,神通如三種意生身,是如此經中入深禪定得佛神通者,以心稱理,源無出入,體無靜亂,體無造作,性任理自眞,不生不伏,理眞智應,性自遍周,三世十方一時普應,對現色身,隨智應而化群品,而無來往,亦不變化,名佛神通,智無所依止,無形色體無來去性,性自遍周,非三世攝,而能普應三世之法,名曰神通。是故經云:智入三世,而無來往爲三世是衆生情所妄安,非實有故,爲智體無形無色不造作而應群品,名之爲神,圓滿十方無法不知無根不識,名之爲通。經云:依無作門修諸淨行者,以此無作門修法界虛空界行海,周遍淸淨故,智無所爲名之爲修,知根同事名之爲行,行無不利非作非生,名爲無作門也。常處十方一切三界受生利俗而無染淨,名之爲淨行故。經云:與三世佛同一體性者,爲法身智慧同也。三世廣大劫一念同,三世諸佛普賢共行大智大悲圓滿同。經云:有十種法令諸菩薩速入諸地者,明於初發心住位而遍知諸住諸行諸迴向諸地法門,爲一卽一切故,一切卽一故,卽因卽果故,卽如善財童子,見彌勒菩薩已,彌勒還令卻見文殊師利,明因果不異亦不離故,此亦#如是。從初發心住佛果地位一念齊進,而亦不出一念中,修成正覺,佛因果及菩薩行悉圓滿故,如善財,一生龍女不出一剎那際,三生成佛摠相似故。云一生成佛者,明今生是父母分段身,是信心及見道修行生,捨分段身,入變易生名爲一生,亦不出剎那際,無古今性,無分段性,無變易性,萬相如幻故,如化故,非滅故,無三世故,以此初住遍修諸住諸地故,貫通諸法摠一時一法,多少延促自在無㝵,不出一剎那際故,法如是故,去情以智觀之可見。經云:知一切衆生與諸如來同一體性者,三乘菩薩知一切衆生同有如來佛性,理性此經知一切衆生同有如來一切種智之性,如經下文有經卷如三千大千世界,內在小衆生身中,有人成佛,破此微塵出此經卷,言微塵許大,衆生皆有佛一切種智故,菩薩成佛化之,摠得如來一切種智故,達理之智名一切智,差別智名一切種智。經云:聞諸佛土悉願往生者,不出塵中智遍現應供養十方一切諸佛而無來去。經云:諸次第定者,色界四禪菩薩次第能入,於無色界四禪菩薩悉能順入,或超間入出,如涅槃經闍維分說,從初禪入三禪定出,空處入無所有處出,非想處入空處出,如是超間,如是次第,如此經方網三昧,一方入定十方起,十方入定一方起等,具如十信位中說,三摩鉢底智印者,明寂用同起印諸萬法無不明了,如大海水而現萬像,淨智普印一切萬法,皆能了知,而無能所,亦無作者。經云:善觀諸法得實相印者,以無作無依無想大智印印諸萬法,起唯法起,無有無明三世繫著,名實相印。經云:入眞三昧者,無三界及三乘染淨沈掉是也。離諸僻見者,有無二見是,內見、外見、身見、邊見、戒取、見取等摠是。乃至六十二見是。六十二見者,於一切法上繫有四見,一常,二無常,三亦常,亦無常,四非常,非無常。於五陰上各有四見,四五二十,三世五陰上合爲六十,本二見共爲六十二見,一切僻見不離此也。普門慧者,遍知衆生諸根及法智一切智智種種差別智也。色界衆生爲住定故,教令起觀,無色界衆生爲修無相觀故,教微妙智,慧爲相不當情智慧利故,六和敬法者,一身,二口,三意,四戒,五施,六見,名爲六和敬法,於衆生田中下佛種子者,示一切衆生菩提理智故,及微少善根爲勝緣故,六通前已釋訖。如十通品說,十神通如經具明,已下頌中兩行一頌文自具足,隨文稱歎,最下長行一行,明大衆聞法歡喜奉行分此之一會昇忉利天宮品是序分,從偈讚品以下是正說分,動地興供是流通分。昇夜摩天宮品第十九將釋此品約作三門分別,一釋品名目,二釋品來意,三隨文釋義。一釋品名目者,何故名夜摩天宮?明以處表法,此天名爲時分天,爲此天無日月晦明,以蓮華開爲晝合爲夜故,名時分天故,爲表十行法門知時而應摠化不可不知時故,故以時分天,以表知根而對行不可一向爲也。知是人天種二乘三乘一乘種,可以何善根而接引之故,以時分天以表所行之行須以知時故,須彌山以表十住之法門,明從信昇進離凡夫地故。又表十住之位初登法頂至相盡處故,又表須彌處大海中,高八萬四千由旬,非手足所攀緣而昇上故,明初十住之位非以有心思求觀行攀緣所及,以無思不爲,蕩然智應萬法無依,方可昇也。此十行之位處夜摩之中,明依空而住不與人連,十行亦然,依法空而行,行知時而益俗也。故處此天而表之也。於兜率天說十迴向,爲明其處居欲界天之中。又明此天樂知足也。以表十迴向以迴正智處俗利生處大悲門饒益一切於諸境界無所貪求故,處此天以爲所表,昇他化天說十地法門者,超過化樂明至欲界際,表十地自在超昇化樂至欲界之頂化心魔王至欲盡際故,昇第三禪說佛華法門,明普賢行滿,表以行法悅無盡衆生故。又彰第四禪是佛位故,此約進修昇降表法,且如是安立,然其理智一一遍周無去來也。以此皆云不離菩提道場普光明殿而昇忉利夜摩兜率等,如第三禪超初禪二禪者,明位位倍勝故,此一會未有來文,是瓔珞本業經,如來領聲聞菩薩衆,向菩提樹下,說往昔於菩提樹下初成正覺時說法界經,一一排次至第三禪故,是故於此夜摩天以表十行。二釋品來意者,前明十住昇進以昇須彌之頂,此明十行之昇進以至夜摩,以次此品須來。三隨文釋義者,於中大義義分爲二,一長科經意,二隨文解釋。第一長科經意者,此一品四十九行經中,約作十段長科,一爾時如來威神力故已下,至恒對於佛有三行半經,明十方同見如來不離其處分。二爾時已下,至寶莊嚴殿可有兩行經,明不離十方一切菩提場普光明殿而昇夜摩天分。三時夜摩天王已下,至時彼天王敷置座已已下有十四行經,明時分天王遙見佛來化座莊嚴及恭敬分。四向佛世尊已下,至入此宮殿可兩行半經,明時分天王請佛入殿昇座分。五時佛受請已下,至悉亦如是可有一行經,明如來受請都結十方同然分。六爾時天王已下,有一行半經,明天王憶昔往因說頌歎佛分。七說頌之中有二十行頌歡十如來曾來入此天宮分。八如此世界已下,至歎佛功德有兩行半經,明十方同此一時歎佛分。九爾時世尊已下,至諸所住處可兩行經,明如來受請入殿殿博寬容分。十十方世界悉亦如是,此摠結十方同此分。第二隨文解釋者,初爾時已下,至恒對於佛,明十方一切處恒遍滿無增減故,言不離菩提樹須彌頂而昇夜摩天者,明智遍一切處而示其身非去來故,云遙見佛來者,明從十住向十行位故,卽以神力化座者,明行立依空智而成無能所定建立故,以座表行,號曰蓮華,明無作行成無所染著故。藏者,含容義,明無行之行含藏衆善故。師子者,明無畏也。以無爲之理智處生死而無畏故,此依主爲座名,百萬層級者,明十住十千十行百萬,明隨位昇進階級故,百萬金網以爲絞絡者,明此位中以行網化衆生故,此爲報得依果故,十住十千十行百萬明昇進也。華鬘香寶及四種帳者,明以四攝法方便行含攝衆生故,四種蓋者,明以四無量心慈悲喜捨覆蔭衆生故,百萬光明而爲照曜者,明以智眼觀根而攝化故,天王者,行自在也。恭敬頂禮者,行行無慢也。梵王踊躍者,淨行利生見求乞者歡喜無厭也。百萬菩薩稱揚者,明以行濟物衆聖歡喜稱歎也。天樂奏音者,明善能說法所招果也。四種雲者,以行慈覆俗,前云蓋,後云四種雲,明約器大小覆育故,摩尼雲亦然。隨根大小照燭與益故,百萬善根所生者,明已上莊嚴皆明約行中善根所生故,爲行能利物積善,卽得諸覆護衆福所嚴。已下如文可解。云善來善逝者,善滅衆惡苦災,逝者度衆生而離縛,時佛受請昇殿者,明昇進正入十行位故,已上望佛自德十方恒自遍周,今作昇降者,摠約衆生進修昇降故,二十行頌中歎十佛昔曾入此殿者,明今所入十行理智與古無殊。此十如來還是約行昇進所成之號,前十住位昇須彌頂十如來名號,亦是隨位會古之號,明所入之法不異古今諸佛故。如十住位中,須彌頂上帝釋宮中,遙見佛來,卽於殿中安置普光明藏師子之座,爲明初入如來智慧中生,卽以方便三昧之門,名安置普光明藏,卽明智慧照曜法界藏故,今此十行位時分天王遙見佛來化作寶蓮華師子之座者,明以行華設其教網漉諸衆生令入如來智慧之境界藏故,蓮華表行無著義故,化座者,明行體以依十住智慧虛無法身無安立也。所作如化也。以茲所表,末後五行經都結十方同時歎佛如來入殿其殿包容如天所住者,明入位昇進自智寬容方知佛境故。夜摩天中偈讚品第二十將釋此品約作三門分別,一釋品名目,二釋品來意,三隨文釋義。一釋品名目者,明昇夜摩天宮以說十行之法,此品以功德林等十菩薩衆,各各以當位之行,以偈都讚當位之法故,名偈讚品。二釋品來意者,明欲說十行之法先須說偈都讚十行之中因果法門故,此品須來。若不先擧所行之因果,十行依何有成?三隨文釋義者,於此一品之中約作二門分別,一長科經意,二隨文解釋。第一長科經意者,約作五段長科。第一爾時佛神力故已下,至結跏趺坐有十三行半經,明隨位菩薩功德林等十箇菩薩幷陳自行佛因果來集分。第二如此世界已下,至悉等無別,可兩行經,都擧十方世界菩薩來集同此分。第三爾時世尊已下,至靡不皆現,可兩行經,明放光所在分。第四爾時功德林菩薩,可一行經,明觀法說頌分。第五從初頌已下,有十段頌,明十行之中,各申自行法門因果分。第二隨文解義者,從品初第一段中十三行半經之內義分爲三,一釋菩薩名及配隨位進修之因果,二釋剎土遠近之意,三釋菩薩各各同號遍周。第一釋菩薩名及配隨位進修之因果,約有十種因果。第一功德林菩薩者,如十住位中,初生佛智慧家故,菩薩名法慧及財慧等,此位明從慧行福智二報廣多故,以林爲名也。又林者,廣多義,覆蔭義,莊嚴義,身幹枝條華葉果實相資義,明十行位菩薩,以無性智慧,莊嚴萬行枝條,大悲爲葉,覆蔭攝化一切衆生,皆令自他菩提華果悉開發故,如川澤有林衆鳥歸。若仁有行多人依。是故十行菩薩目之名林,此當歡喜行檀波羅蜜門,如善財十行之初善知識名爲善,見在林中經行,亦如此也。國名三眼者,如此位佛果號爲眼也。世界名親慧者,明此十行親從佛慧所生爲因,亦常與一切衆生,以爲親近故,佛果號常住眼者,爲親從佛智慧生故,所有知根利俗直令得其常住之智眼故,明自得如來智慧之眼所有利生亦令他得智眼故,明以如來智慧觀根利生之智卽是當位佛果也。功德林,是表所行行之人,親慧世界,是當位所修行智慧之因,常住眼佛,是當位知根見解之果也。與根本智相應名常住眼佛。第二慧林菩薩者,明智慧如林廣多義故,此是饒益行,以智慧饒益一切衆生令不迷故,行戒波羅蜜。此位以智慧爲戒體故,如善財童子十行中善知識釋天主童子行戒波羅蜜以算法相法印法卽安置村營城邑吉凶之地是智慧故,十住之中以法身爲戒體,此十行之中,以智慧爲戒體故,慧林菩薩是修行之人,幢慧世界,是所修行之因,以慧爲戒體,於生死中不傾動故,無勝眼佛是所行之果,以慧眼知根餘無勝故。第三勝林菩薩者,此是無違逆之行,主忍波羅蜜,諸行之中,忍行爲最在行,無忍不成行也。故號勝林菩薩,如善財童子,於此位中善知識是優婆夷,名爲具足,爲忍波羅蜜摠攝衆行,慈悲喜捨摠在其中,明優婆夷者,是表慈悲行也。素服被髮,是戒忍之相,處其一室,室開四門者,表慈育衆生四攝法也。十千侍女者,萬行具也。以一小器濟惠無窮者,表離慢自高四攝無限故。明一一波羅蜜互含容故,勝林菩薩是行行之人,寶慧世界,是所修行之法,明以忍爲衆行之寶,可貴重故,無住眼佛,卽是忍中之佛果也。明雖行忍行而不念所行也。第四無畏林菩薩者,明常行精進卽於生死利人天之無畏也。主無屈撓行,爲以智慧知時知法知根利物,不撓其事,不滯其功故,如善財善知識明智居士,是此位中善知識也。爲以明智利衆生,卽行無屈撓故,住大興城,是精進義故,於市四衢道者,明饒益廣多無限利益故,須臾繫念作意方便故,仰視虛空隨所須物惠利衆生,皆從空下者,明智如空應智念故,空爲智本,智不異空故。是故觀空摠隨智現也。是故空者衆法之本,以此觀之,明一切功德摠從空智而有,無畏林菩薩是此位行行之人,勝慧世界,是修行之法,不動眼佛是此位中之佛,果故明精進之位,不隨物變故,佛號不動眼故,於境不動名爲精進。第五慚愧林菩薩者,是無癡亂行,主禪波羅蜜,爲具慚愧而行禪,爲禪定發慧,卽行無癡亂故,如善財善知識寶髻長者,是此位中善知識也。在於市中,明行中禪體鬧而恒寂,執善財手將詣所居之宅,明引接也。明於生死市中,引接將詣所居智果故,明觀果知因,其宅寶嚴十層八門,院有八門,閣有十層,八門明八正道,十層之閣約十波羅蜜之報,一如十度之行從下向上排之,自具法則,至文方明,此約禪體摠收萬行,慚愧林菩薩是此位所修行之人,燈慧世界,是所行之法,爲定能起慧明照物故,世界名燈也。天眼佛者,是此位佛果也。爲定能淨諸根故號天眼佛。第六精進林菩薩者,此是善現行,主般若波羅蜜門,爲以般若善現衆行以益含生故,號精進林,如善財,此位中善知識號普眼長者,明初救身命,次施飮食,後與說法,一一隨根明智慧成就故,精進林是修行之人,金剛慧世界是修行之法,明智慧能破煩惱名金剛故,解脫眼佛,是此位之佛果。第七力林菩薩者,是無著行,主方便波羅蜜,明以方便處俗利生,同其行流,處世無著,成大悲行,是爲力林也。以眞入俗處纏不污。是故,名爲力林。如善財,此位善知識號無厭足王,爲行大悲自化現身作諸不善,還自化其身追捉治罰,或斷命根苦當治之,令實衆生懼而斷惡,救護衆生,愛而不捨,名無厭足。力林菩薩是能修行之人,安樂慧世界是所行之法,審諦眼佛是此位果也。爲此位是成大慈悲門故,名安樂世界,約安樂衆生得名,佛號審諦眼者,審知衆生應以何法化故,方始調伏。第八行林菩薩者,是難得行,主願波羅蜜,難得能得名爲行林。此智位難可昇故,名難得行。如善財童子,此位善知識王名大光是。第八智隨大願滿衆生意行大饒益,普施衆生世間樂具,一切智寶悉皆施之,行林菩薩是能行之人,日慧世界是所修之法,此位智體增明,世界名日慧,明相眼佛,是此位之果,爲此位智體增明,佛果號明相眼。第九覺林菩薩者,是善法行,主力波羅蜜如善財此位善知識號不動優婆夷,是第九法師位。何故爲女身?爲明處法師位時貞潔慈悲柔軟,以女表之,此女發心以經閻浮提微塵劫,自發心來,心無一念五欲之想,明貞潔堅固慈悲柔軟,是法師之德也。是故此菩薩號曰覺林,主力波羅蜜覺林菩薩是行行之人,淨慧世界是修行之法,最上眼佛是所修行之果,爲智慧淨故,佛號最上眼。第十智林菩薩者,是眞實慧行故,主智波羅蜜,在此名位相似可知。如善財,此位善知識號出家外道,名爲遍行,明得智自在能同邪見攝諸邪見,云三千之境九十六種外道我皆爲之,智林菩薩,是所修行之人,梵慧世界是所修之法,紺靑眼佛,是此位之果,紺靑是十行之智,一終之滿明淨照燭之極故。第二釋剎土遠近之意,經云十方各有一大菩薩,一一各與佛剎微塵數菩薩俱,從十萬佛剎微塵數國土之外諸世界中而來集會者,十住云百剎微塵,此位云十萬者,明昇進智慧之增廣,迷心及諸境爲塵之量,迷執所居名之爲國,心隨境轉名之爲諸國土之外,執亡智契名之爲來,明智遍周境無不達同號菩薩,一一菩薩例然,摠明達迷智遍。第三釋菩薩各各同號遍周者,明心迷諸境塵表無明廣多故,心悟智通遐周剎海,一切種智無不同其見,故卽各各名號遍周,明迷時無境不惑,悟已無境不智,是諸菩薩已下頂禮佛足明致敬,昇座化座摩尼藏,表十行處生死而化衆生行常無垢故,摩尼藏者,離垢寶也。藏者,含藏義,師子者,無畏也。此明凡夫行有染聖行無垢也。師子依主立名故,摠明修行者,智德所行之法。爾時世尊從兩足上放百千億光明者,十信足下輪中放光,十住足指端放光此十行之中足趺上放光者,明次第隨位昇進,表法光從十千百千百千億妙色光明摠明隨位昇進也。凡足下足指端足趺上,摠不離所行之行也。自此長行已下有十段頌文,是十林菩薩各各自頌當位所修行之法,以此十法共成一行,如是一一行中皆具十行,各各隨自行位中名目下義,卽是所讚之法,如文具明,已下如名之義,各歎當位所行之法,達名知法可知。新華嚴經論卷第十八丙午歲分司大藏都監開板
1)「초발심공덕품」을 셋으로 나누어 해석한 것 가운데 세 번째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과목을 다시 둘로 나눈 것 중 그 두 번째이다. 2)색계와 무색계를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