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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소망 행복한 교회/국제순회 선교회 성령사역 원문보기 글쓴이: 박바울
이슬람 문화/ 이슬람 이데올로기와 국제운동 | |
서동찬(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서론 이데올로기는 진실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허위의식’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개인이 현실을 이해하는 의미의 체계로서, 적극적으로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설정케 하고,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한 영혼이 이데올로기에 감염이 되면,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게 된다. 아니면 이전의 이데올로기가 흔들리고 새로운 의미체계가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객관적 실체와 관념의 형태인 이데올로기를 별개의 두 세계로 보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일차적인)지 논쟁했던, 전통적인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오랜 갈등도 이제는 의미를 잃고 있다. 분명한 것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경쟁하고 조우(encounter)하고 충돌(clash)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이분법적이지만 서구와 비서구라는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양극이 엄연히 존재한다. 서구 문명이라고 하면 민족국가, 자본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면, 비서구 문명은 이와 달리 초민족주의(보편주의), 공동체주의, 영성주의 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와 비서구의 구분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고, 다만 지배적 문명의 확장과 이에 반응하는 대응과 대안의 이데올로기가 영토 구분을 초월하여 전 지구적으로 조우하고 충돌하면서 상호간에 변용과 변이의 과정을 거듭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기점으로 필자는 본고에서 글로벌 시대의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변이과정과 국가와 영토와 문화를 초월하여 전 지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 국제운동의 변모와 특징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연구의 목적을 위해서 정치권력 장악을 통한 이슬람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사상적 뿌리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정치적 이슬람의 확장과 좌절 과정을 연구하면서 국가보다는 개인과 사회에 중점을 두는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운동의 성장과정과 운동성 연구가 요구된다. I. 20세기 이슬람 부흥 운동 1.이슬람 부흥 운동의 이데올로기 15세기부터 형성되어 온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세계를 하나의 활동 공간으로 통합하였고, 비서구권 문명들은 여기에 다양한 양태로 반응 할 수밖에 없었다. 반응의 형태를 개념적으로 유형화 시켜보면, 크게 개혁주의 유형, 폭력 저항 유형, 원리주의 유형 등의 양태를 보이는데, 대부분 이슬람세계는 개혁주의 유형에 따라 민족자결과 국가주권에 근거를 둔 민족국가형태의 정치적 단위로 재편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통합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근거하여 이슬람은 종교 층위에 머물고 정치와 경제와 다른 사회 영역은 개혁과 실용에 바탕을 둔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17년에 발생했던 사회주의 혁명은 이슬람 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민족국가 단위 안에서도 좌파, 우파, 혹은 중립적 노선을 선택하게 했고, 전 이슬람 세계는 미소 냉전의 국제적 파워 게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현존했던 사회주의 실험이 소련에서 실패하고 중국에서 변형되고 서구 사회에서 다양한 좌파적 형태로 변이 되었듯이, 세계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이슬람 사회 또한 발전 유형과 정체성에 대해 끝나지 않는 논쟁과 충돌과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20세기의 이슬람 부흥 운동은 이슬람국가의 세속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그 이전 시대의 원리주의 운동과 별반 다를 게 없다. 1)무슬림형제단 1928년에 창설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설정한 기본 이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은 포괄적인 가르침이다. 즉, 종교이자 국가이고, 삶의 궁극적 목적이자 길이며 방법이다. 둘째, 이슬람 공동체는 초기 이슬람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범이슬람주의의 깃발이 있는 모든 지역은 이슬람의 고향이며 국가이다. 따라서 이것에 방어는 무슬림의 방어다. 넷째, 이슬람 칼리프체제는 복원되어야 한다. 다섯째, 이슬람 정부의 수립은 무슬림형제단의 의무다.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특징이 전 세대와는 달리 이슬람 정부의 수립을 전략적 목적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조직과 당의 건설을 추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말, 무슬림형제단의 조직원수는 100만 명에 달하고, 지부 조직은 5,000개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정당으로 성장한다. 2) 싸이드 쿠틉 Sayyid Qutb(1906-1966) 무슬림형제단 소속이면서 이슬람혁명이론의 주창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싸이드 쿠틉의 사상에는 세속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를 이슬람 사회를 파괴시킨 주범으로 보는 시각에서 몇 가지 이슬람정치운동의 개념 틀들이 구체화 되어 있는데, 1964년에 발간된 쿠틉의 저서 <길가의 이정표>에는 아래와 같은 10가지 이슬람 혁명 이념이 명시되어 있다.
① 현대이슬람을 통치하는 기본적인 사상은 자힐리야 시대의 것이다. 2가지 개념은 상반되며 절충은 있을 수 없으며 한 가지를 제거하는 것에 있다. ②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는 이슬람으로의 교화와 전향을 위한 선교와 지하드를 통해 자힐리야 사회를 일소하고 이슬람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③ 무슬림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지상에서 모든 악과 고통과 탄압을 제거하고 알라의 주권이 지배하는 알 하키미야(신의 통치)를 구체화 시키는데 있다. ④ 오직 이슬람이 진리의 종교이다. 다른 모든 종교들 철학, 이론들은 무익하고 오도된 것이다. ⑤ 믿음이란 매일 말과 행위로 실현되는 것이기에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⑥ 변화는 행동과 원리주의 혁명에서 발생한다. ⑦ 혁명은 현 사회의 외부로 등장하는 미지의 한 사람의 신앙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은 새로운 이슬람사회가 통치 권력을 잡을 때까지 그를 도울 것이다. ⑧ 이러한 변화는 다름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슬람을 진실로 믿는 집단으로 가능할 것이다. ⑨ 지하드는 서구학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다른 것이고, 지하드는 오직 이슬람만이 전파되도록 전 세계를 지속적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⑩ 유대교와 기독교는 불신자이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와 유대인의해석은 순수학문분야를 제외하고 배제되어야 한다.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싸이드 쿠틉은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자힐리야, 즉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의 우상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악을 몰아내고 알라의 주권이 다스리는 신의 통치(하키미야)를 실현하는 신정정치론을 설파하면서도 이 사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전위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알 마우두디 Mawlana Mawdudi(1903-1979) 인도 힌두교 배경에서 이슬람이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고 소수종교로서 이슬람을 지켜가야 했던 환경에서 등장한 강력한 이슬람운동의 주창자로서 기억되고 있는 알 마우두디도 또한 이슬람 국가를 모든 무슬림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로 보았으며, 위로부터의 이슬람화 전략을 선호했다. 결국 그는 레닌의 혁명 모델을 모방하여 이슬람혁명 전위대로서 1941년에 Jammat-e-Islami를 창설한다. 그러나 알 마우두디는 쿠틉과는 달리 권력을 잡는 것 보다 이슬람국가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생활의 전 영역에 대한 이슬람적 해석을 체계화시키는 이슬람신학을 발전시키고, 폭력보다는 교육과 엘리트 육성을 통한 이슬람 부흥을 설파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슬람주의의 1차 공격대상은 1970년 전에 모든 이슬람국가들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 민족주의(국가) 모델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들의 역사관은 자힐리야와 이슬람 시대로 극명하게 구분되는데 유일신을 믿지 않는 사회인 자힐리야가 인간이 입법자인 사회에 까지 적용되어 이슬람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 자힐리야 사회는 타도되어야 하는 지하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민족국가 모델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오면서 이슬람의 땅 (dar el-Islam)이 파편화 되고 민족문제와 종족 갈등이 그치지 않게 되었고, 초기의 개혁주의자들이 민족주의의 세속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종교적 기반을 도외시 했다고 비판한다. 2.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 1970년대는 이슬람주의 이상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대중운동이 급부상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이성주의적 관점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세 광신도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더욱이 이슬람 세계에서 좌파 민족주의 정권이 제어하고 사회주의 급진 사상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보수주의적 성향의 이슬람 사상이 사회에 전파되는 것을 허용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부흥운동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변수로 인정이 되고 전투적인 이슬람이 부상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을 했다. 첫째,좌파 아랍민족주의의 위기를 들 수 있다. 아랍 민족국가들은 이슬람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좌파(이집트 낫세르, 바트당 시리야, 이라크)와 우파(요르단왕정, 아라비아 반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67년 6일 전쟁의 패배(낫세르)는 좌파 민족주의의 실패로 받아 들여졌고, 사우디는 이것을 종교를 망각한 것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등,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황과 공백이 발생했다. 이것을 계기로 좌파운동에 투신했던 아랍계 학생들이 이슬람주의에 대거 가담하게 되었고, 쿠틉류의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좌파이론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둘째, 1973년의 중동의 OPEC결성에 기인한 오일 위기를 들 수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73년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석유자원을 무기로 사용하여 서방 세계를 압박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중동 이슬람 세계는 오일 embargo를 통해서 국제무대에서 압력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석유 부자국가 된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무슬림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전통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와하비즘을 전지국적으로 전파하는 활동을 개시한다. 다시 말해서 73년 이 후, 석유 부자가 된 와하비주의자들은 순니 세계의 폭 넓은 개종 proselytizing 캠페인 능력을 구비하게 된 것이다. 와하비스트들의 목적은 다양한 민족주의운동을 대체하고 메카의 통치 권위 하에 다양한 목소리들 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전통적인 이슬람 지경을 넘어선 서양에서의 포교 열정(서양의 무슬림 이민 인구들을 대상으로)과, 자선과 선행의 거대한 제국 관리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미지는 사우디 왕정이 내포한 취약한 정치적 기반(친미정권)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개종 네트워크, 보조금, 이민노동자의 유입을 통해 초국적 사우디 체제는 대다수 무슬림 국가에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환심을 샀다. 75년 무렵엔,수단,파키스탄,이디아,남아시아,이집트,팔레스타인,레바논,시리아에서 대학졸업학위를 가진 청년들과 숙련된 전문가집단, 예술가 등등이 걸프국가들로 이민 오기 시작하여 점차 와하비주의자들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소진되지 않는 엄청난 펀드가 Dawa(call to Islam)의 증대를 위해 마련되었고 Muslim World League(1962)는 무슬림이 사는 세계 각국에 사무실을 개원하고 이슬람 협의체, 사원들, 미래를 위한 투자 계획 등을 지원함으로 개척의 역할을 하였다. 사우디 종교부(장관급)는 사원 주변으로 무료로 수백만 권의 코란을 인쇄하여 세계적으로 배포하기 시작했고 1,500개 이상의 사원을 사우디 펀드로 건립했다. 셋째,인구 구성의 변동도 큰 변수로 작용했다. 1970년대가 되면 식민지 해방 투쟁의 구세대가 사라지고 해방 후에 출생한 세대가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다. 구세대에 비해서 해방 후 세대는 저항적 민족주의 약했고, 독립 직후 풍부했던 경제적 이익을 상대적으로 많이 향유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70년대 인구 폭발의 시대였다. 세계 인구 자료(뉴욕,1994)에 따르면, 알제리 41.2%,방글라데시 46.6%,이집트 42.9%,인도네시아 39%,이란 49.4%,사우디아라비아 58.3%,터키 48.3% 등의 인구성장률을 기록했고 24세 이하가 전 인구의60% 이상을 차지했다. 특별히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시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가 팽창하고, 의무교육 등을 통해 교육수준(literacy)이 전반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시대였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주기적인 경기변동(특히 85년의 유가하락 사태)을 겪으면서 도시 청년층의 좌절과 빈곤이 심화되고 이들이 바로 서구적 모델에 대한 거부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넷째, 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이다. 혁명 전의 이란은 오일 수출이 급증하고, 에너지원 안전 확보 차원에서 소련의 인도양 진출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했다. 결국 이것이 호메이니의 비판을 받는 구실이 되었다. 이란은 근대화를 통한 중산층이 증대되고 있었음에도 혁명 전 시기는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고, 비민주주의적인 통치와 억압이 중심이 된 경찰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근대화 과정은 전통적인 시장을 근거로 한 경건한 무슬림 중산계급이 새로운 상권에 밀리면서 이란 사회 집단의 불만 계층으로 확대되어 갔고, 이에 더하여 농촌 출신 도시유입 청년층의 빈곤은 거대한 사회변혁의 잠재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당시 팔레비왕가는 전통적인 시야 성직자 계층과도 불화했고, 시야파 이슬람의 메시아 사상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혁명적 이상을 촉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성직자와 젊은 이슬람주의 지식인 등 다양한 세력들을 융합하는 능력을 지닌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세속정권을 전복하고 정치적 혁명을 통해 샤리아에 기반을 둔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섯째, 아프가니스탄 반소 지하드(Anti-soviet jihad)이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하자 70년대에 성장한 전 이슬람 세계의 지하드 전사들이 대거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반소 지하드는 무슬림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처음부터 초국적 이슬람 종교네트워크가 개입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금융적 지원 형태로 국제적 이슬람 연대가 이루어졌고, 85년 이후, 국제 지하디스트들(주로 아랍인들)이 페샤와르(파키스탄)로 집결해서 훈련을 받고 아프간으로 유입되었다. 즉, 초기에는 아랍 원조의 안정적 배달을 위한 아랍요원들이 투입 되었고(사우디 Red Crescent 등 이슬람구호요원 등장), 80년대 중반부터는 아랍전사들로 배치되었다. 이 때 페샤와르에 들어왔던 인물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Abdallah Azzam으로서, 그는 팔레스타인대학 교수였지만, 1973년에 사우디의 Jeddah로 이동하여 Abd al-Aziz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당시 학생이었던 오사마 빈라덴을 만나 아프간 지하드로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1985년 페샤와르에 등장하여 Council of Islamic Coordination을 세우고, 반소 지하드 학교를 운영한다. 아잠은 지하드가 집단적 의무가 아닌 개인적 의무(Fard kifaya)이며, 윤리와 재정으로 아프간 지하드에 참여하지 않으면 죄라고 규정하였고, 지하드는 상실한 전 세계 무슬림 영토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당시 1만 8천에서 2만5천의 아랍들이 아잠을 통해서 이슬람 전사로 동원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물론 페샤와르에는 300만 명 규모의 아프간 난민들이 75년부터 집결해 있었고, 파키스탄의 데오반디 마드라사 네트워크를 통해서 탈민족화된 탈리반들이 교육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 걸프 국가들의 원조(1982년,12 억불/해)는 한편으로 파키스탄의 경제를 안정시켰고, 원조금과 무기의 횡령과 밀반출로 Karachi항구는 가장 폭력적 지역이면서 헤로인의 서방 수출 기지로 활성화되었다. 결국 92년 아프간 무자헤딘이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반소 지하드는 성공을 했고, 여기에 참전했던 전 세계 지하드 전사들과 이슬람네트워크는 소련이 아닌 새로운 이슬람 변방에서의 전 지구적인 지하드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당장 오사마 빈라덴과 자와히리가 중심이 된 알카에다 조직은 수단, 런던 등지에 센터를 두고 글로벌 지하드를 지휘했고, 96년에 다시 아프간의 탈리반 정권 수립 후 칸다하르에 기지를 옮기면서 2001년 9/11 공격을 기획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제반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70-90년대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수단, 알제리, 말레이시아, 체첸, 중앙아시아, 보스니아, 코스보 등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변방 지역에서 수많은 충돌이 발생하고 정치적 이슬람이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다. 3.알카에다 글로벌 네트워크 Ayman al-Zawahiri, Osama bin Laden이 중심이 된 알카에다는 80년대 아프간 체험에서 글로벌 지하드관을 구축했고, 92-96년 사이, 수단에서의 망명 기간 동안전략들을 실험했고, 1996-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 기간 동안 군사이론을 정립하고 보다 큰 규모의 작전을 전개해갔다. 새로운 전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근거리 전략에서 원거리 타격(미국, 이스라엘, 서방)으로 전략적 방향의 선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원거리 타격은 고질적인 이슬람과격분자들의 과제인 정권교체와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대중 동원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기 되었다. 92년 카불을 떠나 전 세계 이슬람 변방 지역으로 떠났던 전투적 지하드는 비록 수단의 투라비, 탈리반 등이 정권을 잡고 있지만, 이란 혁명과 같은 영향력으로 이슬람혁명을 수출 하지 못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대중의 지지를 잃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 상황은 알자와히리를 국제적 투쟁과 미디어 전쟁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1966년 쿠틉이 처형을 당할 당시15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지하 이슬람그룹을 결성했고, <예언자 깃발 아래 기사들>이라는 책을 통해 이집트정권 타도와 이슬람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후 자와히리는 80년에 외과의사 신분으로 이슬람의료 NGO에 가입하여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 했고, 81-85년 사이,사다트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다가 감옥에서 급진이슬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전사로 성장해갔고, 86년에 Jeddah에서 병원약국조제실에서 근무하면서 오사마 빈라덴을 만나게 된다. 당시 빈라덴은 아잠에게서 무슬림형제단의 언어와 사고, 글로벌적인 세계관을 배우고 있었는데, 아프간 지하드 기간 말에는 점차 자와히리가 아잠보다 빈라덴(6년 아래)에게 정신적 멘토가 됨으로써 알카에다 조직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자와히리의 주장은 이슬람 자선기구 활동을 통한 이슬람 전사의 모집을 국제적인 미디어에 대한 유인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자리라와 같은 미디어 통해 순교자 작전을 미화하고 신성시함으로 이슬람전사들의 참여를 유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카에다가 테러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기준은 적에 대한테러의 영향력과 잠재적 순교자들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고려이다. 자와히리는 반소 지하드를 비잔틴 공략에 선행했던 페르시아 사산조 파멸의 초기 이슬람 투쟁의 연장선으로 보고, 현대의 전사들은 남은 하나인 미국 처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들에게 헌팅톤의 문명충돌론은 미국이 새로운 적으로 이슬람원리주의 지목했다는 증거가 되며, 미국은 유엔, NGO, 무슬림 세계의 부패정권, 통신체계, 위성TV 등의 6개 반 이슬람 통치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 무슬림들이 혁명투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알카에다는 이 6가지 서방의 무기들 중에서 이슬람 NGO, 인터넷, 아랍방송네트워크 사용을 통한 항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알카에다는 독특한 종말론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는데 622-657년을 이슬람의 황금기로 계시가 실현되어온 기간으로 보고, 그 이후의 시간은 이슬람 팽창의 긍정적인 운동과 물질주의적 정치가들의 영향 하에 내부 부패의 부정적 운동 사이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선을 명하고 악을 멸하는 대신 변덕과 자기이익에 따라 통치하는 이슬람세계 내부의 부패 정권을 타도하고 외부의 적을 타격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의 자녀들이 그들의 시대적 요구를 인식하고 투르키스탄에서 안달루시아(7세기에 이슬람화된 스페인, 1492년에 빼앗김)까지 지하드연맹을 이루면서 청년 지하드 전사들이 투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지하드 운동은 바로 대중 동원전략이다. 소수세포로 행동하지만 대중동원의 슬로건을 전략적으로 부각시키고 대중을 각성시키고 결국 글로벌 지하드 정치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알카에다의 원거리 타격 전략은 부시 행정부의 실수와 인식의 한계 때문에 9/11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70-80년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은 모든 좌파 테러에 모스크바가 관련된 것처럼 9.11도 이란과 이라크가 배후에 있다고 보고, 탈리반 정권 타도 후 곧바로 이라크 전쟁 을 시작했다. 미국은 새로운 적이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주도하는 국제네트워크라는 이해가 부족했고 대응전략도 오류였다. 알카에다는 와하비즘과 실리콘 벨리의 결합 산물이다. 알카에다의 뜻은 기지(the base)라는 뜻인데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 기지를 제거하면 조직전체가 근절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database라는 뜻도 있다. 미국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 사라진 적이다. 알카에다는 이제 모국과 영토가 없는 인터넷, TV 링크, 비밀 재정흐름, 국제항공여행 등을 통한 글로벌 네트워크이다. 알카에다의 탄력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미국이 탈리반을 타격함으로써 알카에다 지하디스트들은 더욱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알카에다가 미국인에 대한 지하드의 정당성 논리로 내세우는 것은, 런던의 <Al-Quds al-Arabi>신문에 게재된 알자와히리의 글 <Al-wala wala-bara(Loyalty and Separation)>이다. 여기서 ‘왈라’는 우정, 충성, 신뢰를 바라는 유대의 절단, 관계의 부재를 의미하는데, 무슬림에게만 신뢰와 우정을 보이고, 불신자, 배교자, 위선자와는 관계를 끊고, 무자비한 지하드를 그들이 이슬람화 되거나 아니면 멸절할 때까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자와히리에 의하면, 불신자와의 유대는 이슬람을 위태롭게 만드는데, 과거에 바그다드와 안달루시아도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다. 자와히리는 서구문명이 이슬람세계를 타락시키고 모든 질명의 뿌리라고 보며, 책의 사람들에 대한 관용 적시된 쿠란 문구는 없으며, 복종 아니면 살해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쁜 무슬림도 지하드 대상이 된다. 알왈라, 왈바라는 폭력 이데올로기가 되어 슬럼 비행청소년네트워크 등으로 확산되고 있고, 여기서 빈 라덴은 아이콘에 불과하다. 알카에다와 직접 고리가 없는 독립적인 micro-entreneurs가 발생하는데 술, 타락, 부정한 여성에 대한 사냥 등, 9/11에 감동된 지하디스트들이 이슬람 파라다이스의 복을 기대하며, 빈 라덴의 카리스마를 모방하는 순교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II. 포스트이슬람주의 글로벌 네트워크 1.정치적 이슬람의 파라독스 정치적 이슬람은 정치적 행동을 통한 이슬람국가의 건설을 추구한다. 당, 국가 등 서구의 사회과학적 용어를 그대로 동일하게 사용하고 이슬람혁명의 이상에 레닌의 전술을 결합시킨다. 정치적 이슬람이 반드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속주의 정치의 제도권 안에서의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특정 국가, 민족, 부족에 국한되지 않는 움마(Umma) 공동체적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정치적 이슬람은 어떤 주어진 국가 안에서의 하나의 이슬람국가를 우선 수립하는 것이 공통의 목표이다. 이것은 마치 소련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유산한 전략이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우선 일국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교두보로 세계 혁명을 도모하자는 것이 바로 일국사회주의론인데, 정치적 이슬람 또한 이와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주의의 개념 자체가 이슬람국제운동의 실패 원인이 되고 있다. 초국가적인 이상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정치적 이슬람 운동은 민족국가의 한계 못 벗어나고 있다. 코민테른 같은 이슬람주의 인터내셔널 없는 것이다. 호메이니 사후 이란도 이슬람주의보다는 국가이익에 우선하는 외교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란이 시아파 아제르바이잔보다 러시아와 아르메니아와 더 가까운 것과, 반탈리반 입장과 반무슬림형제단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그 실례가 된다. 그리고 이슬람국가이익이 곧 이슬람 위하는 것이라는 논리에서 샤리아 변용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등, 이슬람혁명이 반대로 이슬람의 세속화를 야기하고 있다. 이란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수단의 투라비 정권,예멘의 이슬라흐당, 레바논의 헤즈볼라, 터키의 부활당, 탈리반 등등, 실재 정치적 이슬람운동은 민족주의화 성향을 띄고 있다. 여기에 예외로 초민족, 국제주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사우디, 파키스탄, 무슬림형제단의 경우인데, 파키스탄은 특정한 영토가 아니라 남아시아 모든 무슬림의 국가(인도와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차이)로서 초민족적 무슬림 정체성으로 민족정체성의 결핍을 우회하는 성격이 강하고, 사우디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원리에 근거하여 수립된 정치단위이다. 반면에, 코소보의 무슬림 슬라브(Gorani)와 루마니아인들은 친 세르비아성향이며, 캐톨릭 알바니아인들은 무슬림 종족과 연결되어 있다.1999년, 체첸의 바사에브의 다게스탄 공격했을 때 체첸과 다게스탄의 무슬림이 하나가 되어 반러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킬 것을 예상했으나 다게스탄의 무슬림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간 북부 동맹과 타지키스탄은 이슬람 아젠다를 거의 버리고 민족유대가 우선한다. 따라서, 국제 지하디스트들은 국제적인 무슬림 연대가 일어나지 않는 것에 애로를 겪는다. 제도권 안에서의 정치적 이슬람의 실패는 더욱 분명하다. 이슬람국가에서의 선거에서 이슬람당은 20%대 득표를 얻을 뿐이다. 다시 말해 ‘무슬림투표’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의 제도권 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이슬람당도 정치공간에서 무슬림 대표 유일정통 정당이라는 고집을 포기하고, 다원성을 인정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70-80년대의 정치적 이슬람의 성장은 많은 무슬림국가들을 보수적 이슬람으로 몰아갔다. 야권의 거센 이슬람 원리주의적 요구를 권위주의 정권이 수용하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공인된 이슬람을 조직화 시킨다. 그 예로 파키스탄은 샤리아법안을 93년에 통과시켰고, 알제리는 84년에 가족법을, 터키는 83년에 종교교육을 의무화했다. 또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과 연계 교육기관이 1986-7년에 1,855개에서 95-96년에 4,314개로 증가했고, 파키스탄에 등록된 마드라스는 47년에 137개에서 95년에 3,906개로 증가했다. 이러한 이슬람학교 네트워크는 사우디의 오일자금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박사학위의 절대적 다수가 종교학 분야에서 취득되는데, 이는 종교학졸업자들이 사회 진출에 유리하고, 직업 전망을 높이기 위해 교육영역과 법을 이슬람요소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화를 통해서 직업 기회가 늘어난다(교육, 자캍 징수, 종교경찰 등).이러한 보수화의 맥락에서 이슬람법 강화, 이슬람 은행설립, 히잡으로의 복귀, 기독교선교사 추방 등을 설명할 수 있다. 2. 포스트이슬람주의 글로벌화와 포스트모던의 영향력은 이슬람원리주의에도 많은 변화를 가하고 있다. 영토와 민족을 결합하는 민족국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무슬림 인구의 세계적 팽창, 인터넷 등 통신혁명으로 인한 양방향 소통, 권위주의의 해체, 집단주의에서 개체주의와 개성의 강조로의 변화, 폐쇄적인 규범과 이성주의(logocentrism)를 해체하는 다양성과 자유, 실제 체험의 강조와 세대별 세포 공동체의 활성화 등지구촌 전체를 덮고 있는 이러한 글로벌화의 특성이 이슬람원리주의가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성취해 가는데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촌의 재이슬람화는 또 다른 양상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필자는 포스트이스람주의 혹은 네오원리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네오원리주의는 한마디로 재이슬람화의 민영화(privatization)이다. 즉, 국가가 경영하던 국영기업체 또는 공법인(公法人)의 경영을 생산성 향상을 위해 민간 경영자에게 넘기고, 정부의 경제계획이나 국가경제에 대한 통제보다 시장 메커니즘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민영화라고 정의한다면, 재이슬람화의 민영화는 정치적 이슬람과는 달리 사회적인 이슬람규범이나 강제규율보다 개인영혼의 이슬람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원리주의는 국가로부터의 전방위적 이슬람 이데올로기화가 아니라. 국가에 의하지 않은 사회 영역에서의 개인적인 샤리아 적용을 강조한다. 종교보다는 개인의 종교성(religiosity)이 중시된다. 이슬람이 일정 국가의 특정 문화와 전통이었다면, 글로벌 시대의 이슬람은 페르시아, 아랍, 서구, 중국 문화와 같은 문화 색체를 모두 벗어내고, 이슬람의 보편적 가치를 창출한다. 이러한 이슬람보편 가치는 물질주의와 자유주의로 물든 서구 사회의 비무슬림들에도 먹힐 수 있는 자기 변화와 자기 실현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글로벌 시대에 무슬림들 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하는 현상으로 신원리주의적 패턴을 한번 정리해보면, 개체화(individualization), 주어진 문화의 틀을 벗어난 이슬람(deculturalisation), 영토 개념을 초월한 상상화된 무슬림 Umma 등을 들 수 있다. 네오원리주의와 이슬람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국가와 정치에 대한 견해에서도 나타난다. 네오원리주의는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적 투쟁을 거절한다. 이슬람국가는 움마의 재 이슬람화로부터 나오는 결과이지 재 이슬람화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네오원리주의에서 이슬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가 자아의 개혁 자체의 필요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무슬림은 선전을 통해서 이슬람의 신조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정치 자체를 부적절 한 것으로 여긴다. 영혼의 변화가 국가의 변혁보다 우선해야한다고 본다. 지하드보다는 다와(dawah)를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포스트이슬람주의자들은 그래서 특별한 이슬람적 기관을 설립하는 것에 필요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통해서 샤리아가 충분히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스렸을 때, 국가 기관을 세우는데 그들은 무관심했다. 탈리반은 국가 강화보다는 국가 해체를 위해 노력했다(공무원 절반 해고. 오마르는 각료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음. 비무슬림 대사 접견거부, 자유 시장에 국가 개입하지 않고 방임, 자캍 징수 제외하고 밀수를 반대하지 않음으로 국가세수 잃으면서 사회경제 이슈들에 무관심). 탈리반들에게는 이슬람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샤리아에 어떤 것이 첨가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거부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네오원리주의가 확산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신원리주의는 세계화의 산물이자 세계화의 담지자라는 측면인데, 이것은 바로 신원리주의가 탈문화화의 과정을 공개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신원리주의는 이슬람을 문화의 형태로 보지 않고, 주어진 문화 안에 심겨지면 그 순수성과 총체적 차원을 상실하는 단지 종교로만 간주한다. 따라서 신원리주의는 이슬람세계의 지방 이슬람(모르코식, 이집트식 등)을 거절하고 민족전통과 풍습과도 대립한다. 나아가 특정한 이슬람문화를 선호하고 서구문화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문화 자체를 벗어 던진다. 글로벌화를 통해서 이슬람 전통의 모국을 떠나 세계각지로 교육이나 노동을 위해 이주해 가면서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고 경험하면서 이슬람은 더 이상 특정한 문화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현대를 이슬람적인 코드로 살아가는 가치와 개별화된 생활양식이 되었으며, 이제는 아랍, 아프리카, 동남아, 페르시아, 러시아, 서구 등 영토를 초월하는 초문화적인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다. 둘째,따라서 신원리주의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슬람화(개인화의 경험)를 강조한다. 장로와 권위를 상징하는 문화적 이슬람을 버리고 학자가 되기보다 학생이 되기를 더 긍정적으로 본다. 그렇다고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무슬림 움마는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재건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공동체는 부여된 문화적 규범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의탁에 기초하여 운영된다. 신원리주의자들은 혁명이 아니라 구원을 목표로 삼는다. 정치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개인적인 무슬림으로서 바른 길을 걷도록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 안에 이슬람을 세우는 것이 곧, 땅에서 자신을 위해 이슬람이 건설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방법이 이슬람국가라면, 네오원리주의자들에게는 다와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은 큰 지하드(손, 가슴, 혀의 지하드)이다. 투쟁은 이제 영적인 여행이며, 자아의 변혁을 궁극적 목표로 둔다. 그리고 무엇이 바르고 틀린 것인지 타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새로운 의무는 아니지만, 이것은 영원한 개인적인 의무가 된다. 셋째,신원리주의는 이슬람국가 출신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자기 정체성과 신념에 회의를 가진 모든 개인을 전도 대상으로 삼는다. 서구에서는 이것이 뿌리가 없는 청년들, 종종 잘 교육받은 청년들로서 좌절하고 이미 파산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런 개인들을 위해서 이슬람원리주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대학 캠퍼스까지 어디를 가도 그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규정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한다. 그리고 마약중독자들이나 감옥의 죄수와 같이 훈련(discipline)을 발견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청소년들을 전도한다. 넷째,신원리주의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이다. 즉, 특정한 영토에 심겨진 인종, 종족, 언어, 문화를 초월하는 상상의 움마를 추구한다. 지리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진정한 이슬람 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나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무슬림은 특정한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은 가상공간의 공동체가 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서 어쩌면 무슬림들이 더욱 더 국토의 경계를 초월하게 되면서 이러한 가상의 움마를 확대시키고 있지 않은지 모른다. 이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더 이상, ‘프랑스인이다’,’아랍인이라’라고 하지 않고 단지 ‘무슬림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국가를 장악하지 않아도 국부적으로 샤리아 공동체를 세우려고 한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오늘날 이슬람 국제 운동의 성격과 성장과정을 분석해 보았다. 글로벌화의 시각에서 이 현상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더욱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문화주의적 접근법은 이슬람을 하나의 서구문화와 다른 문화적 특성으로 보았고, 그런 가정 위에서 이슬람의 사회와 역사와 정치 문화를 분석해 갔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이슬람은 더 이상 특정한 영토나 국토에 한정된 실체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네트워크로써 글로벌 가상 공동체를 추구하고, 사회의 각 영역과 개인의 자아의 배려 차원에서 문화가 아닌 코드로써 이슬람 가치가 부활하고 있으며, 그것이 특별히 삶의 가치체계와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이슬람은 특정한 영토의 현상이 아니다. 글로벌의 충격을 받고 전통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지 않는 이 시대에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코드로 나타나서 인간의 영혼과 삶을 코드화하는 기제로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슬람주의와 포스트 이슬람주의의 차이를 하나의 단계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이슬람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이슬람국제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 보다는 이러한 경향성들이 실재 이슬람 운동가들 안에 혼재되어 있고, 양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슬람국제운동을 살펴보면서 이것이 동시대의 기독교운동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더 전략적이고 실제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근본을 살필 수 있는 거울인지 모른다. 초겨울 잎을 다 떨 군 감나무처럼 추워지는 이 계절에 개인의 신앙과 인생의 무성한 겉모양을 벗고 뼈 속 깊이 <근본>을 맞아들이고 성찰해야 할 것 같다.♡</p> 참고 문헌
(from : http://www.gmnnews.com/newsREAD.php?code=0800000&num=8141&msg1=해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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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5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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