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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의 상신(相臣) 다섯 사람
배극렴(裵克廉)
배극렴은, 자는 양가(量可)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렴하다고 일컬어졌다.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태조가 개국할 때에 공이 있어서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봉하고,
임신년(1392)에 정승으로 제수하여 좌시중(左侍中)에까지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고,
죽은 뒤에 임금이 친히 조상하였다.
○ 고려 말에 비기(緋記)의 말이 항간에 떠돌아 다니기를, “비의(非衣) 군자의 지혜로 다시 삼한을 바로 잡는다.” 하였다.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비(非)와 의(衣)를 합하면 배(裴)자이니, 공(公)이라고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고려 말에 왜(倭)의 배 5백 척이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를 침범하여 공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사근역(沙斤驛) 동쪽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피가 흘러 개천 물이 붉었다. 지금까지 그 개천을
‘혈계(血溪)’라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공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을 때에 잣나무를 관청 마당에 심었는데, 뒤에 진주 백성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시중(侍中) 잣나무’ 라고 하였다. 《여지승람》
○ 공이 과거에 황산강(黃山江)에서 왜구와 싸울 때에, 왜구의 장수 하나가 쇠투구를 쓰고, 손발까지 쇠갑옷을 입었으며, 보병을 좌우편으로 날개와 같이 벌리고 말을 달려오는 것을 우리의 군사가 쳐서 그의 목을 베고 크게 이겼다.
<본전(本傳)>
조준(趙浚)
조준은, 자는 명중(明仲)이며, 호는 송당(松堂)이고, 본관은 평양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고려 때에 판삼사사(判三司事)까지 지냈고, 태조가 개국할 때에 공이 있어서 평양부원군(平壤府院軍)으로 봉하고,
계유년(1393)에 정승으로 제수하여 영의정까지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태종 5년에 졸하였는데, 태종이 세자를 데리고 친히 가서 조상하였다.
○ 공은 어릴 때부터 큰 뜻이 있었다. 어머니 오씨(吳氏)가 새로 급제한 사람이 떠들썩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나는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과거에 급제한 자가 없으니 무엇에 쓸 것인가.” 하였더니, 이에 공이 꿇어앉아
울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기를, “제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하늘이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고, 이때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본전(本傳)>
○ 고려 공민왕 말년에 강원 감사로 부임하는 도중 정선(旌善)에 당도하여,동해안 지역을 다스릴 것이니
/ 滌蕩東溟知有日백성은 눈을 씻고 세상이 맑아지는 것을 기다리라 / 居民拭眼待澄淸는 시 한 구절을 지었다.
식자(識者)들이 공에게 큰 뜻이 있는 것을 짐작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
○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공의 명성을 듣고 청해서 일을 의논하고 크게 기뻐하여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승진시키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의논하니, 공이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고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법도를 세워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없애고 사유 토지를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하려고 하니,세력 있는
집에서는 원망이 물끓듯 하였으나 공은 이 의논을 더욱 고집하였고, 태조의 뜻도 공의 의논과 같았기 때문에 결국
뭇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시행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 태조가 즉위하던 날 밤, 침실로 공을 불러들여 이르기를,
“그대는 한 문제(漢文帝)가 대왕(代王)에서 황제가 되어 들어오자,
그날 밤 송창(松昌)을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아 남ㆍ북군(南北軍)을 진무한 뜻을 아는가.” 하고,
이어서 도통사(都統使)의 은인(銀印)과 화각(畵角)과 동궁(彤弓)을 주고 이르기를, “5도의 병마를 그대에게 다 맡겨
총괄하게 한다.”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공이 일찍이 음식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예빈시 판사(禮賓侍判事) 공부(孔俯)를 죄주어 때리려 하였더니,
공부가 말하기를,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어찌 재상으로서 음식 때문에 조정의 벼슬아치를 매질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웃고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한 시대의 명현(名賢)인데, 공은 일에 있어서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고
공부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니, 등급의 엄한 것이 이러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일찍이 태종이 공의 집에 오니, 정침에서 술을 올리고 나서 《대학연의(大學衍義)》1 권을 드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조야첨재》
김사형(金士衡)
김사형은, 자는 평보(平甫)이며, 호는 낙포(洛圃)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상락군(上洛君) 영후(永煦)의 손자이다.
고려 때 삼사 좌사(三司左使)까지 지냈고, 조선에 들어와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을 봉하고, 계유년(1393)에 정승으로 제수하였으며, 기로소에 들어갔고 시호는 익원공(翼元公)이다.
○ 공은 평생에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다.
○ 우왕 때에 조준과 같이 간관(諫官)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적임자를 얻었다고 하였다.
○ 태조가 평주(平州)온천에 갔을 때에 야차(野次 천막친 곳)로 공과 남은을 불러 놓고 임금이 되기 전 정답게 지내던 것과 개국할 때에 수고한 것을 말하고, 술을 마시면서 예전에 친할 때와 같이 대하였다. 태조 5년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로 삼아 대마도와 일기도(一岐島)를 치게 하니, 다음해 정월에 이기고 돌아왔다.
정도전(鄭道傳)
정도전은,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고,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상서보문각 제학(尙書寶文閣提學) 운경(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임인년(1362)에 과거에 급제하고, 우왕 때에
처음에는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갔다가 그뒤에 삼각산아래에서 살았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공양왕이 충의군(忠義君)에 봉하고, 벼슬은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까지 되었다. 태조가 개국할 때에 공이 있어서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하고, 태조 갑술년(1394)에 정승으로 제수하였고, 무인년(1398) 정사(定社) 때에 아들 정유(鄭游)ㆍ정영(鄭泳)과 함께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정진(鄭津)은 형조 판서까지 되었다.
○ 태조 갑술년(1394)에 공과 남은ㆍ이직(李稷)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을해년(1395)에 궁전을 세우자 이름들을
지어서 올렸다. <행록(行錄)>
○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올렸다. 《전고(典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본조 개국 뒤에 규모와 시설이 모두 공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남긴 책 가운데 한 조항은 또 재상의 대체를 깊이
얻었으니, 후세에 반드시 여기에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남계집(南溪集)》
○ 정치에 관계되는 전대의 서적을 상고하고 연구하여 책 하나를 저술하였으니, 《경제문감(經濟文鑑)》이다.
직명(職名)의 연혁과 직무의 잘하고 못한 것과 인물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처음에는 재상(宰相)이고, 다음은 대(臺)ㆍ간(諫)이며, 또 다음에는 부위병(府衛兵)과 감사(監司)ㆍ수령(守令)의 차례로 기록하였다.
정총(鄭摠)이 그 끝에 서문을 달았다. 《동문선(東文選)》
○ 태조 정축년(1397)에 임금이 공을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삼아 군ㆍ현의 경계를 정하게 하고,
또 편의대로 일을 하라고 허락하였으며, 이지란과 이원경(李原景)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중추부 부사 신극공(申克恭)을 동북면 도선위사(東北面都宣慰使)로 명하고 공에게 편지하기를,“작별한 지가
오래되니 몹시도 생각이 나오. 신중추를 보내어 행역에서의 수고를 위로하려고 하는데, 최긍(崔兢)이 마침 와서
지내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니, 좀 위안이 되오.
이에 솜옷 한 벌을 보내어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니, 받아주면 좋겠소. 이 참찬(參贊)과 이 절제(節制)에게도 솜옷
한 벌씩을 보내니, 나의 생각이 간절함을 말해주오.나머지는 신중추에게 듣도록 하오. 봄 추위에 때에 맞게 몸을
잘 보호하여 변방의 공적을 완성하시오. 이만 줄이오. 송헌 거사서(松軒居士書).라 하였고, 겉봉에는
“삼봉 행차(三峯行次)에서 열어 보오.” 하였다. 이 편지를 보면 태조가 신하를 어루만지고 위안하는 성의를
엿볼 수가 있으니, 신하된 사람이 어찌 은혜에 감격하지 않겠는가. 《패관잡기(稗官雜記)》 《동각잡기(東閣雜記)》
○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 궁전 양청(凉廳)에서 여러 신하와 술을 마실 때에 공이 시를 지어 올리기를,
궁중 동산에 봄이 깊어 꽃이 만발하였는데 / 禁苑春深花正繁
늙은이를 불러 금준(金罇 금으로 만든 술통)을 벌려 놓았네 / 爲招耆老置金罇
하늘에서 홀연히 때에 맞는 비를 내려 보내니 / 天工忽放知時雨
다시 온 몸에 우로(雨露)의 은혜가 배는 것을 깨닫겠네 / 更覺渾身雨露恩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 태조가 사람을 시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그대가 지어 올린 것이니,
그대는 일어나 춤을 추라.” 하자, 공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곧 귀갑구(龜甲裘)를 주고 밤이 다하도록 매우 즐겁게 지냈다.
구갑구는 초서피(貂鼠皮)로 만든 것인데, 검고 흰 것이 사이를 걸러 있는 무늬가 거북 껍질과 비슷하므로,
구갑구라고 한 것이다. 《대동운옥》 《동각잡기》
○ 임금이 일찍이 경신일 밤에 공과 모든 공신들과 술이 만취하여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대의 힘이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신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목을 쇠사슬로 매었던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만대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전에 어떤 일로 보주옥(甫州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동운옥》 《동각잡기》
○ 과거에 공이 관청에 나오는데, 신이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었다. 공이 자리에 앉자, 따라온 아전이 고하니,
공이 내려다보며 한번 웃고 끝내 바꾸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 말에 앉아 웃으면서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검고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보고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걱정될 것이 없다.” 하였다. 그가 겉치레를 하지 않은 것이
이러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문학을 잘 해서 명성이 있었고, 항상 후진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문집(文集)이 세상에 행해진다. <행록(行錄)>
심덕부(沈德符) 무진년에 태어나서, 신사년에 죽었으며, 아들 일곱 형제가 있다.
심덕부는, 자는 득지(得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이조 정랑(吏曹正郞) 심용(沈龍)의 아들이다.
고려 때에 음직(蔭職)으로 좌시중(左侍中)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이 되었고, 태조가 개국한 뒤에 공신되기를
사양하였으나 그대로 청성백을 봉하였다. 태조 6년에 판문하(判門下)가 되고, 7년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정종(定宗) 원년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고, 시호는 정안공(定安公)이다. 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었으나,
뒤에 정종의 시호를 피하여 정안으로 고쳤다.
○ 공이 전에 수원 부사로 있을 때 어사가 수원에 왔는데, 공이 들어가려고 하다가 어사가 속옷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지 않았다. 어사가 따라온 아전을 시켜 나무라니, 공이 대답하기를,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아서, 들어갈 수
없다.” 하자, 어사가 사과하였다. 깨끗하고 굳세고 아첨하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강석덕(姜碩德)이 지은 <행장(行狀)>
○ 공은 지략(智略)이 뛰어나 장수가 될 만하므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로 강계 도만호(江界都萬戶)가 되었다가 의주
부원수(義州副元師)가 되었으며, 또 서해도(西海道)부원수 겸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고, 공신으로 기록되어
추성협찬(推誠協贊)의 칭호를 주고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봉하였다.
○ 고려 말 경신년(1380)에 왜선 천 척이 남쪽 해안으로 들어와서 지나는 곳마다 잔인하게 죽이고 용안진(龍安鎭)의
포구에까지 왔다. 공을 명하여 누선(樓船) 40척으로 가서 치게 하였는데, 한 번에 모두 섬멸시키니, 왜적이 다시
덤비지 못하였다. 강석덕이 지은 <행장>
○ 무진년(1388)에 태조를 따라 군사를 파사부(婆娑府)까지 데리고 가다가 대의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려
태조를 도와 왕업을 이룩하였다. 공양왕 2년에 유언비어로 토산(兎山)에 귀양갔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청성백을 봉하고, 3년에 개성에 성을 쌓고 그해에 한양에 새 도읍을 세울 때에 공에게 명하여
그 일을 총찰하게 하였는데, 기일을 헤아려 인부를 배정하고 의리로 타이르며 너그럽게 부리니, 백성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강석덕이 지은 <행장>
○ 공이 정승이 된 뒤에 일보는 하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공청에 나갔을 때에 문안하는 편지에 물건이 따른 것은
받지 말라.” 하였다. 아들들이 벼슬에 제수될 때마다 문득 자기의 손발이 얼어 터진 것을 보이면서 경계하기를,
“내가 출입하면서 근로(勤勞)를 한 뒤에야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너희들은 어찌 편안히 앉아 지위를 받았느냐.”
하였다. 강석덕이 지은 <행장>
○ 성품이 어질고 담박하며, 편안하고 조용해서 희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첩을 두지 않았다.
산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와 정승을 20년이나 지냈는데도 창고에 남아 있는 재물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는 책만을 대하여 한적하게 지내는 것이 깨끗한 선비와도 같았다. <행장(行狀)>
[주D-001]세상이 맑아지는 것 : 후한(後漢) 말 지방에 탐관(貪官)이 많았는데, 범방(范滂)이 사명을 띠고 지방으로 안찰하러 나가게 되어 수레에 오르면서 개연히 천하를 맑게 다스릴 뜻을 보이니 탐관들이 소문만 듣고도 모두 사직하고 돌아갔다.
[주D-002]송창(宋昌) …… 진무한 뜻 : 송창은 한(漢)의 문제(文帝)가 대왕(代王)으로 있을 때 가까웠던 사람으로 한 나라 대신들이 여씨(呂氏)의 난을 평정한 뒤 문제를 추대하였을 때 문제는 그날밤 안으로 즉시 송창을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대신의 병권(兵權)을 거두었다.
[주D-003]대학연의(大學衍義) : 송(宋) 나라 선비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을 해설하되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등 각 조에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만든 책이다.
[주D-004]우로(雨露)의 은혜 : 초목은 비와 이슬의 혜택으로 자라니,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비와 이슬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마침 비가 내렸으므로 자기가 임금의 은혜를 받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5]문덕곡(文德曲) : 악장(樂章)에 선왕의 공덕(功德)을 칭송하는데 있어서 문덕(文德)을 칭송한 것과 무공(武功)을 칭송한 것이 있는데, 문덕곡은 문덕을 칭송한 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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