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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① 남북 분열의 원인
솔로몬이 죽고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926년 B.C.E. 고대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유다과 여로보암의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국가 이전의 영웅 시대도 아니고 막강한 국가도 아닌 이스라엘은 약2세기 동안이나 분열 왕국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왜 이스라엘은 분열되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 분열 이 후 남북 관계는 어떻게 유지 되었는가?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반역의 무리였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 왕조야말로 사울 왕국을 찬탈한 반역자였으며, 각 지파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다. 다윗 왕조의 시각에서는 남북 분열은 하나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회복이요, 다윗 왕조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이었다.
㈎ 정치적 원인
남북 분열의 원인은 실수를 범한 르호보암(왕상12장)에게서보다 솔로몬의 실정(실정)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사울의 왕권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어 세워졌다. 그러다가 다윗왕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삼하2:4)로 왕위에 오른 후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삼하5: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지파간의 세력 갈등과 관계의 구분이 있었다.다윗왕은 각 지파를 하나의 국가로 이끌어 가기 위해 그의 수도를 남쪽 헤브론으로부터 35Km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 공정성을 꾀하였으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남북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집단들은 별개의 세력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협력 또는 반대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새로운 왕의 등극 과정에서 막후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하면서 그가 취한 일련의 개혁들은 매우 편파적인 것들이었다. 우선 그를 지지한 국가 관리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대장 브나야등은 모두 남쪽 유대 출신들이었으며, 그의 경쟁자인 아도니야를 지지한 인물들은 민병대장 요압, 아나닷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등 주로 북쪽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지역간의 편차와 차등 정책은 국가 내에 지속적으로 남아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부왕 솔로몬과 같이 차등 정책을 발표하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분열되게 된다(왕상12:11,16).
"온 이스라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ma lanu heelek bedavid)...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12:16)
㈏ 종교적 원인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을 때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적이 있어, 이를 솔로몬이 알게 되자 그는 이집트로 피난하였었다(왕상11:29-40). 아히아의 이 발언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인 발언으로써 이러한 반역 행위를 조장하였다. 야훼종교의 기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지만 북쪽의 실로는 적어도 법궤가 머물던 곳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 법궤를 남쪽 예루살렘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실로의 성소는 불레셋에게 파괴되었다(렘26:9).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지방 성소들이 그 종교적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분열된 이 후 북이스라엘이 취한 정책을 보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즉, 북쪽 이스라엘 지도자는 예루살렘 중심적인 종교권력을 분산시키고자 벧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의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 내고,지방성소의 제사장들로 대치하였다(왕상12:25-33).
㈐ 경제적 요인
솔로몬의 대규모 관료제도와 과도한 건축 및 군사력 증강은 지출을 확대시켰으며, 이를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강제 노동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이러한 노역에 불만을 가진 여로보암이 이러한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왕상11:26-12:33). 이러한 불만은 북쪽 백성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인구도 많고 군사력도 더 크게 지닌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힘이 분산되고 지리적으로 단결되지 못한 이유로 인하여 얼마간 억압당하다가 '과중한 세금과 강제부역'이라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 결집력이 생겨나 다윗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국제적 요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세력 약화를 틈타 정복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라는 양면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삭(Sheshonk I)은 솔로몬에게 쫓겨온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환대하였다(왕상11:40,LXX의 왕상12:24). 또, 시삭은 솔로몬에게서 쫓겨난 에돔왕의 아들 하닷을 보호해 줌으로써(왕상11:14-22) 다분히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나아가 시리아, 두로, 암몬, 모압, 에돔들의 주변 국가들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 쳤으며, 기회 있는대로 이들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② 분단의 결과와 그 의미
분열을 유발한 것이 무엇이었든 그 분열의 결과는 비참하였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남북의 분열로 인하여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토를 주변 국가들로부터 빼앗겼으며, 이스라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다윗왕가 거절은 남과 북의 이분법적 사상을 싹트게 하였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정통성 주장으로 이어져 이스라엘의 사상적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두 나라간의 교류는 어느 정도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사상은 더 이상 통일에 대한 가능성을 한 번도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 굳어져 갔다. 특히 종교적인 분열은 두 민족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결국 북(사마리아인)과 남(유다인)의 영원한 분열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열은 일부 예언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희망을 싹트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조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이상이요 희망이라는 사상은 바빌로니아 포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사상은 결코 분열 이 후에 형성된 통일에 대한 기대와는 관련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다.
(5)남북 왕조의 역사
분열 왕국의 계속되는 역사는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왕상12:21-왕하25장)에 나오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들은 고정된 표현과 형식들로 작성되어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일정한 틀 안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연대기(synchronoism)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혹은 "...세에 왕이 된 ..."등의 방식으로 표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대기는 고대 근동의 종합적인 연대기 체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대의 기록이 고대 여러 나라들의 연대기와 비교하여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 법은 각기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니산(Nissan)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유다에서는 앗수르의 계산법을 따라 티슈리(Tishri)월을 새 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둘째로 왕들의 행적과 진술(진술)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주전 7세기 요시아에 의해 확정되면서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 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히스기야, 요시아왕만이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결어)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왕의 실록"이, 이스라엘왕들에게는 "이스라엘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① 북이스라엘의 역사(931-721 B.C.E.)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 이르기까지19명 의 왕이 통치하였는데,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 비교적 짧은 통치 기간으로 마감하고 있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등 비교적 안정되지 않은 파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여로보암 왕조와 바사왕조(931-884 B.C.E.)
통일 왕국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동맹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
여로보암 1세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왕상12:25), 즉각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왕상12:27-30). 그는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왕상12:31-33). 이러한 종교 정책은 유다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 왔으며(왕상14:25,926년 B.C.E.), 다마스커스의 아랍족과의 전쟁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남쪽 유다와의 관계는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의 마무리가 있었다. 여로보암과 바사 왕조는 모두 단기간 통치하다가구테타에 의해 타도 되었다.
㈏ 오므리 왕조(880-841 B.C.E.)
군사 구테타의 산물로 정권을 장악한 오므리는 4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왕상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였으며(왕상16:24),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삼았다(왕하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bait hmuri)으로 표기 되었다.
오므리 왕조의 정책은 북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렸으며, 오므리에 의해 착공되고 아합에 의해 완공된 수도 사마리아는고고학이 밝혀 준대로 탁월한 기술과 화려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이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위에 오른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869-850년 B.C.E.)은 853년 B.C.E.에 카르카르(Qarqar)에서 일어난 전쟁에 앗시리아의 샬만에셀 3세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었다(ANET,278-279). 또 그는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왕상22:39), 시돈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왕상16:31), 바알을 섬겼다.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는 죄를 범하였다(왕상21:1-16).
아합은 이처럼 국가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온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21장)이나 이방 여인 이세벨과의 결혼, 바알 신 숭배등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이러한 오므리 왕가의 잘못된 종교 정책은 이 때에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Elijah)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왕상17-19장).
무엇보다도 길르앗 출신의 예언자 엘리아는 종교적으로 어두운 억압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를 새롭게 일으킨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우뚝솟은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합의 후계자인 아하시야(850-849년 B.C.E.)는 유다의 왕 여호람에게 자기의 딸 아달리야를 아내로 주어 남북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 되었으며, 군사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주도권을 잡고 그 힘을 행사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반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이 저항 운동의 지도자는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였다.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선지자 집단"(bene hanebi'im)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열열한 애국자들로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여전히 옛 질서와 민중들에 뿌리를 박고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에 비추어 왕과 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몰고 간 인물들이었다.
㈐ 예후 왕조(841-752 B.C.E.)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아람 사람들로 받은 굴욕적인 경험의 시기와 8세기 초 앗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 날 수 있던 시기로 크게 나누어 진다.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으며, 백성들의 불만이 계속 번져 나갔다. 특히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통하여 라못 길르앗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왕하9:1-3). 예후는 곧 혁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쪽 유다의 왕 아하시아를 처형하고(왕하9:14-29), 또 아합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왕하9:30-10:11).
이러한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며, 아하시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는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해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예후는 이러한 혁명을 저질러 놓고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나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였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살룸에게 암살 당함으로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 당하는등 매우 불안정한 말기 현상을 노출 시키고 있었다.
예후 왕조는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신전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왕하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 뽑았다"(왕하10:28).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그는 그의 피 흘림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였다(호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의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 북왕국의 붕괴(752-721 B.C.E.)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 후 세계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 지기 시작하였다.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정복에 나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들을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주전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 시리아의 아르파드(Arpad)왕국과 하맛(Hammat)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팔레스틴을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아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재기를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786-746년 B.C.E.)는 북쪽 다마스커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으며, 18세의 젊은 나이로 유다의 왕에 오른 웃시아(783-742년 B.C.E.)는 예루살렘을 개수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수입하여 에돔 및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교역로를 활짝 열기도 하였다(대하26:6-9,11-15).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에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상대적으로 동시대의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부패가 진척되면서 번영이 망국병으로 번져나갔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부패상은 빈부의 격차였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직한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차단되어 버렸다(암2:6f.;5:10-12;8:4-6).
이러한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암4:4f.;5:21-24), 순수한 형태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여호와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745-737년 B.C.E.)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베가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호9:11-17;13:9-13).
드디어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왕 때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V세의 공격을 받고 3년 동안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721년 B.C.E.에 함락되고 말았다(왕하17:1-6).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 갔으며, 이 지역은 앗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앗수르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면서 혼혈 정책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이 말살 되어 갔다.
다윗과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경은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이야훼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의 신을 섬겨 야훼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7:7-18). 그리고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cf.호2:14-15).
② 남왕국 유다의 역사(931-586 B.C.E.)
㈎ 남북 분열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중앙 집권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19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왕가를 계승해 나아갔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 종교적 관점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 사회적 측면에 관한 사실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등의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부부적으로나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의 경우 역시 북쪽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는 극심하였고(왕상14:21-28), 그의 뒤를 이은 아비얌(15:1-8), 아사(15:9-24)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 오므리 왕조 때에 유다는 사실상 봉신국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예후 왕조의 혁명으로 인하여 그 관계가 악화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때의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공명정대하고 유능하였다. 그는 사법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여 소송절차를 정상화하여 부정을 뿌리뽑고, 분할되어 있던 행정 구역을 재편함으로써 재정문제도 조정하였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과의 동맹의 결과 그의 뒤를 이어 계승한 여호람은 오므리 가문의 왕비 아달랴를 맞이해야 했다(왕하8:16-24). 그들은 합법성이 인정되지 않은 그의 정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한 유다는 당분간 앗시리아의 위성국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 아하즈와 히스기야(722-686 B.C.E.)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적으로 늘 위협이 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멸망은 오히려 보다 강한 앗시리아로 부터의 충돌 위험 앞에 더 큰 부담이 되었으며,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유다는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의 유다 왕은 아하스 였다. 반앗시리아연합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던 유다는 즉각적인 재난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그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에게 막대한 금,은과 함께 사절단을 보내어 보호를 요청하였다(왕하16:1-16).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의 경제 상태는 몹시 피폐하였다. 대부분의 영토는 주변의 에돔에게 빼앗겼으며, 앗시리아에게 바칠 조공을 위해 성전 금고는 바닥이 났다(왕하16:8,17).
이 무렵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바빌로니아의 군주 마르둑 아팔리디나(Marduk-apaliddina)의 공격을 받고 바벨로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남쪽의 이집트는 비교적 강력한 지위를 회복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점차 앗시리아의 봉신국들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유다의 국론이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예언자 이사야는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이집트를 신뢰하는 것을 격력하게 반대하였으며(사20장), 유다가 즉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점차 유다는 기울어져 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왕이 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715-687 B.C.E.)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바알과 아세라 신상들을 부수고 불 살랐으며, 사르곤에 이어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하자 히스기야는 분명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 났다(왕하18:1-8). 히스기야 제14년, 즉 701년 B.C.E.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704-681 B.C.E.)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였다. 라기스(Lachish)를 점령하고(왕하18:13-16)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헤립의 군대를 진멸하고 말았다(왕하19:1-35).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터널을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 들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였으며(왕하20:20;대하32:30), 예루살렘 성벽 확장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사22:10).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때 예루살렘은구약시대 가운데 가장 큰 예루살렘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 후 북쪽 주민들의 상당 수가 남으로 이주해 온 결과로 여겨진다.
㈐ 므나쎄(686-642 B.C.E.)
히스기아의 뒤를 이어 20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하면서 그에 의존하였다. 사실상 앗시리아의 예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앗시리아의 문화와 종교 제의들을 받아 들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앞 마당에는 앗시리아의하늘의 여왕인 이스타르의 상징과 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왕하21:1-9). 야훼 신앙은 사라지고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앗시리아의 종교가 혼합된 종교형태가 극심하게 번져 나갔던 시대였다.
㈑ 요시아(641-609 B.C.E.)
국내적으로 외부 종교와의 극심한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동안 국제적으로 매우 큰 변화가 시작었다. 앗시리아는 형제들 끼리의 권력 다툼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 되어 갔으며, 신흥 바빌로니아가 서서히 일어 나기 시작한 때이다. 예언자 나훔과 하박꾹은 앗시리아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으며,예레미아는신흥 세력에 의해 일어나게 될 유다의 커다란 위기를 예고 하였다. 결국 앗시리아는 612년 B.C.E.에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나느웨성이정복되고 말았다.
아몬왕의 뒤를 이어 8세에 등극한 요시아는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622년 앗시리아와의 정치적, 종교적 관계를 단절하고, 성전 수리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한 법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복구를 추진하였다(왕하22:3-20).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모든 이방 제의와 관습, 우상을 청소하였으며(왕하23:4-18),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여(왕하23:19-23), "요시아 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왕하23:25)고 극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종교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두 예언자는 스바냐와 예레미야였다.
한편 612년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를 빼앗긴 앗시리아는 이집트의 느고 II세와 동맹을 맺고 니느웨 탈환을 위해 유프라데스로 출병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요시아왕은 그의 영토에 들어와 메소포타미아로 향하고 있는 이집트의 느고왕을 맞아 므깃도(Meggido)에서 싸우다가 609년 B.C.E.그만 전사하고 만다(왕하23:29-30;대하35:20-24). 유프라테스로 계속 진격한 느고의 군대는 하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하게 바빌로니아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609-586 B.C.E.)
요시아가 죽은 후 유다는 친이집트 인사인 요아하스가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3개월 만에 이집트로 끌려 간 후 거기서 죽고(왕하23:31-34),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609년 B.C.E. 이집트의 느고의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605년 그는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여호야킴이 통치하는 동안 바빌로니아 느브갓네살은 유다를 포함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왕하24:1-7).
뒤를 이어 받은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겨우 3개월 간의 통치의 끝을 맺게 되었다(왕하24:8-12).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는 589년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왕과 백성에게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지 할 것과, 결국 예루살렘 이 멸망하여 모든 유다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과, 얼마 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대응은 신속하였으며, 그의 군대가 588년 1월 예루살렘을 봉쇄하고(왕하25:1;렘52:4. cf.렘21:3-7), 이듬해 여름까지 완강하게 버틴 예루살렘은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성벽이 뚫리며 불 탔고, 페허가 되고 말았다(왕하25:1-12;렘39:1-10;52:4-16).
여리고 부근에서 붙잡힌 시드기야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지지않았다. 시드기야왕의 아들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처형 되었으며, 그 자신도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왕하25:6f.;렘52:9-11). 대부분의 귀족들과 주민들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미스바를 그 수도로 정하였다(렘40-44장.cf.왕하25:22-24).
이로써 586년 B.C.E. 남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된 신앙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이방인의 노예로, 방랑자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의 시작은 제2의 탈출을 꿈꾸는 새로운 희망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해 주었다.
(6) 분열왕국의 남북관계
① 분열 초기의 남북관계
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정돈되어 갔다. 유다 내부의 왕조는 비교적 큰 변화없이 안정되었고, 동질적인 경향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다만 분열 초기의 다윗 왕조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소위 "르호보암의 방어선"(대하11:5-12)이라 불리우는 성들을 살펴보면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국경선의 도시들이 아니라 유다 내부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들이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그리고 옛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기가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북쪽의 여로보암(931-910 B.C.E.)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조처들을 적절하게 취하였다. 세겜을 수도로 하였고(왕상12:25), 벧엘과 단을 종교 성소로 건설하였으며, 예루살렘과의 정치적, 종교적 결별을 선언하였다. 종교제의 뿐 아니라 달력과 축제일도 변경하여 독자적인 국가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이룩해 나갔다.
북쪽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여로보암은 그의 아들 나답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2년이 채 못되어 살해 되었으며(왕상15:25-27), 그 역시 아들 엘라에게 왕위를 계승 한 뒤 2년 만에 시므리에게 구테타를 당한다(왕상16:8-10). 첫 50년동안에 세차례나 구테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북왕조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던 전통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바침해 준다. 이러한 혼돈 상태를 북왕조는 오랫동안 견디어 내야 했다.
남북의 경계가 불분명한 연유로 국경선에서는 소규모의 국지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하였다. 그 중에서 유다왕 아사(911-870 B.C.E.)가 외국 군대인 시리아를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남북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왕상15:16-22).
이러한 국내 정세의 불안정은 외세의 잦은 침략을 불러 들였다. 르호보암(931-913 B.C.E.) 제5년 이집트 시삭의 침입(왕상14:15), 블레셋의 침략(왕상15:27;16:15), 유다왕 아사의 요청으로 시리아 군대의 북이스라엘 침략(왕상15:16-22;대하16:1-6)등이 그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봉신인 유다
쿠테타를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880-874 B.C.E.)은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남유다 왕국을 봉신으로 만들었다(왕하3:7;왕상22:4). 그의 왕조는 오므리,아합,아하지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거의 남쪽의 유다를 지배하였다.오므리 왕가의 공주 아달리야가 다윗왕가의 왕 여호람의 왕비가 되기도 하였으며, 여호람은 남북을 동시에 통치하는 왕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남북관계는 두 왕가가 각각 존재하는 통일 국가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외세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하나로 출전하였으며(주전853년 카르카르 전투,ANET,278-279;왕하3:4-27;대하25:5-13), 왕실은 서로 사돈을 맺고 친밀히 교류하였다.
오므리 왕조를 뒤엎고 등장한 예후왕(841-814 B.C.E.)은 이스라엘의 왕족뿐 아니라 유다의 왕족을 학살하였다(왕하9:14-10:14). 예후의 시각으로 볼 때 이 둘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후 왕조도 유다를 지배하였으며, 유다의 몇 차례의 반란이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왕하14:11-14). 그 후 유다의 아하스왕(731-716B.C.E.)은 친 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독립을 선언 하였다(왕하16:1-16).
③ 남북간의 교류
오므리 왕조와 다윗 왕조 사이의 유대 강화는 두 국가간의 분쟁과 마찰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나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단지 오므리 왕조의 세력 확장의 결과로 얻어진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두로와 시돈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왕상16:31), 모압을 정복하였고에돔에는 섭정왕(deputy)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주요 교역로를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유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어느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아, 미가등-은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정치,군사,경제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남북 관계는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서깨어졌으며, 이 때 북 왕국의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모여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그리고 앗수르는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으로 추방시키고, 그 대신 다른 민족들을 그 곳으로 이주 시켰다.
이로써 남북으로 분열된 고대 이스라엘은 통일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은 721년 B.C.E.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586년 B.C.E.바빌로니아에게 각각 멸망당한다.
3.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틴 회랑 지대의 남단에 위치하여 독립해서 살아오던 이스라엘은 6세기 B.C.E.에 접어 들면서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틀이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민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다양한 문화와 사상들의 교류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발생한 새로운 사조(사조)들은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 과정을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된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 일컬어 지기도 하는 이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거쳐 본토로 귀향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의 변화 및 사상 체계,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 체제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의멸망등 약 600여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기간이다. 아울러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예수 공동체의 본질과 특성을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고찰하게 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신학적 본질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586-538 B.C.E.)
①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류배)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 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드러나 약소 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렘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 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 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 왕을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고 강하게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89년 B.C.E.정월 예루살렘은 포위 되었으며, 3년 5개월 동안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렘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② '이산'(Dispersion)과'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 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리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바빌로니아 '포로'(포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추방 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 13는 제2차 추방 때에 강제 이주 되었다(렘52:28-30). 아른 자료에 의하면 제1차 추방 때에 약 1만명이 추방 되었다(왕하25: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송된 왕족, 국가 관리, 사제, 군대 장관 및 기술자 등을 모두 합쳐도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주민의 5%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애2:11-21;4:9f.), 상당 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25:26;렘42장) ,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펴져 나갔다. 많은 경우 이들은 불확실하고 불리한 팔레스틴의 생활 조건보다는 나은 것으로 믿어지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흩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계속 남아 거주하였던 다수의 유대인들(겔33:24)은 나름 대로의 생활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적어도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민족적, 종교적 긍지를 어느 정도 가지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심점은 그들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차이는 점차 커져 갔던 것이다. 나아가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가운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아 살게 되는 집단이 있게 되는데, 소위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③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으로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추방하고 본토인들을 이주, 혼혈(혼혈) 시킴으로써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는 것과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그의 직위 관청을 가지고 있었던 그달리야를임명하여, 폭넓은 권한을 가지고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25:25;렘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거나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간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561-559 B.C.E.)은 감옥에 오랫동안 갖혀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25:27-30;렘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로민들의 생활 상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조밀한 포로 수용소같은집단을 건설하고 살았으며(cf.겔3:15;스2:59;8:17;시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렘29:5-7;cf.겔8:1;14:1;33:30f.). 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의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을 요구하였다. 성전 예배기능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써는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 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각각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이집트 탈출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렘11:17).
④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Am Ha-aretz,왕하24:14;25:12)이라 불리웠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렬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렘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편, 105편, 106편등이 공적으로 읽혀 졌다(슥7:2-7;8:18-19).
한편, 일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 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주의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렘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