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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노라 / 이금안
사각 한쪽 귀퉁이에서 개미떼가 행렬하고 있다. 장엄하다. 제천의식의 장엄한 울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행렬의 중간쯤에 비스킷 한 조각이 운반 되고 있다. 행렬의 끝엔 바퀴벌레의 날갯죽지가 기어가고 있다.
그것은 하 루의 시작이었다.
순미는 그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일요일이구나. 또 망망대해가 열리는 가? 그녀에게 있어 일요일은 망망대해보다 더 넓고 큰 하루다. 연거푸 돌아 오는 주일 윤회 속의 텅비어 있는 일요일을 채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가 있는 섬마을의 아침 햇살은 도시의 그것보다 빠르다. 싱그러운 햇살이 아홉 자 짜리 작은 방에 마녀처럼 찾아든다.
그녀는 몸을 뒤척거려 개미의 행렬을 지켜본다. 갈 수 있어서 갈 곳이 있 어서 행복한 개미여! 먹다 남긴 비스켓 한 조각이 너희에겐 황금덩어리구 나. 부단한 너희의 진실은 이 지구상에 영원할 것이고, 내 탄탄한 자의식의 벽은 어떠할 것인가?
그녀는 개미의 행렬 끝에 또 한 부스러기의 비스킷을 놓아 본다. 한 마리 개미가 무심코 건널 듯 하더니 그의 촉각에 스며드는 감미로움이 있었는지 재빨리 뒤돌아서 끌기 시작한다. 어느새 열 마리도 넘는 개미가 모여서 그 부스러기의 운반을 돕는다. 비스킷 부스러기와 개미떼는 한데 엉키어 마치 기어가는 꽃송이 같다.
꽃송이에서 음악이 들린다. 잔잔한 피아노 건반의 울림이 꽃송이로부터 퍼져 나온다. 개미 행렬의 조심스럼에서 쇼팽의 이별곡이 들린다. 꽃송이에 서 이별곡이 들리자 순미는 개미를 한 마리씩 죽여 가기 시작한다. 죽은 개 미는 꼭 열두 마리다. 비스켓 부스러기만이 바보처럼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돌아누웠다.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노라가 되겠단 말야?”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소리가 환청처럼 그녀를 엄습해 왔다.
“여보! 축하해요. 언제 그렇게 시를 쓰셨죠?”
“뭐? 시라구?”
그는 동그란 눈으로 그녀에게 의아심을 드러냈다.
“당신에게 연락 왔어요. ㅈ 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이라고.....”
“당선? 하하하.... 이제야 시원하구먼. 시원해! 박민식 후배란 놈이 작년 신춘문예에 당선했잖아. 그 녀석 땜에 작년에 내가 팀장 자격을 놓친 거 아 냐. 이젠 나도 내 위신을 세울 수 있게 됐어. 됐다구! 그나저나 말야, 내 위 신을 세운 사람은 바로 순미 당신이라구.”
“뭐요? 왜 내가 당신 위신을 세워요, 세우긴....... 당선은 당신이 됐는 데.”
“아냐, 내가 당선이 된 게 아냐.”
“?...........”
“그건 당신 작품이었어. 내가 언제 쥐뿔도 제대로 된 시를 쓴 적 있었나? 난 시는 도통 어려워서 잘 모르겠더라고.”
그리고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아, 여보세요, 박 팀장 댁이죠? 응 박 팀장이구먼. 나, 나야. 진수라고. 그래, 웬일이냐고? 내가 ㅈ 일보 요번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됐다지 뭐 야. 뭘........ 고맙네. 한 잔 사라구? 사야지. 내일 말야 진하게 사지. 응 잘 자라구. ‘
결혼 3년째. 그녀의 아성(牙城)은 시로써 지탱되어 왔다. 독자는 유일하 게 남편이었다. 대학 시절 시론 교수의 추천으로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는데 독자들의 진지한 편지에 질려 지상(誌上) 발표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 전 까진, 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남편의 허위는 그 순간 그대로 그녀에게 투영되어 비춰져 왔다. 그것을 느낀 순간 남편의 모든 행위가 거짓스러워 보였다..
“당선을 취소해 주세요.”
“뭐라구? 누구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려고 그러는 거야?”
“당신이 말하는 위신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시의 작가로서 말하는 데 취소해 주세요.”
“당신은 누구지?”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비아냥거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나에게 뭐냐구?”
“아내예요.”
그녀는 되도록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당신은 몰라?”
“그 말의 의미와 이번 일과는 엄연히 달라요.”
“뭐가? 뭐가 다르단 말야?”
“아무리 부부라도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는 거예요. 마치 자기 자신의 여러 분신들을 자기 자신이 침해할 수 없듯이, 예를 들면.......”
“시끄러! 난 3년째 함께 살아온 당신이란 여자가 오늘 처음으로 어렵게 느껴져.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게 느껴져.”
“그래요. 나는 어려운 여자예요. 아내의 작품으로 자신의 허세를 세우려 는 당신이 처음으로 시시하게 느껴져요. 앞일이 막막해요.”
“그렇담 어떻게 하겠단 말야?”
“어려운 여자와 시시한 남잔 어울리지 않아요. 굳이 한 집에 같이 살 필 요가 없는 것 같군요.”
그는 입술만 떨 뿐 말이 없었다.
이틀 후 그녀가 가방을 챙겼을 때,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노라가, 노라가 되겠단 말이군.”
“오선생! 방에 지겠슈?”
주인 아주머니다.
“방에 지계셨구먼. 이쁜 색시 손님이 왔어라우.”
심진희 선생이었다. 아니 심진희 기자였다.
“진희! 네가 ........ 웬일이니?”
그녀는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진희는 진한 청바지에 헐렁한 계란색 쉐타 를 입고 있었다.
삼월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도시의 냄새가 스멀거리며 그녀에게로 왔다.
“현대판 노라는 섬마을 여선생이 되어 있구나.”
진희는 밝은 웃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몇 해만인가. 그녀가 사표를 내고 결혼한 지 두 달 후에 여성잡지의 기자 로 전직했던 진희였다. 진희는 내 모든 생활의 변화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진희의 갑작스런 출현에 자못 만족했다. 아! 얼마나 고즈넉한 일요 일이었던가?
“결혼 안 했니?”
“결혼? 잡지에 미치다 보니 깜박 고걸 잊고 있었구나. 참! 그러고 보니 우리가 벌써 서른 중반을 넘어가는구나. 이거 노처녀 아냐?”
진희는 딴청을 피웠다. 커피포트에서 퍼져 나오는 진한 내음이 방안을 흥건히 적셨다.
“요렇게 사는 생활의 의미는 뭐니?”
“의미? 뜻대로 살 수 있다고나 할까?”
“순미 널 보니까 정교장 선생님 생각이 나 어쩜 넌 그분을 참 많이 닮았 어.”
“닮다니?”
“생활 방식말야. 인생의 정도(正導)를 거부했으면서도 결코 타락하지 않 는 것! 굵은 거목의 가지처럼 유유자적한 평화가 있어. 두 사람에겐.”
정봉래 교장. 서른 다섯에 바람난 부인. 생식불능이라는 죄목 하나로 부 인에게 소박을 맞았던 남자. 가슴 가득 촬촬 거리는 잔잔한 파도를 담고 있 는 것 마냥 신선함을 느끼게 했던 분. 그녀가 사회의 첫 무대에 섰을 때 커 다란 둥지를 안락하게 만들어주며 딸처럼 귀여워 해 주던 분. 사생아라는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난 그녀로서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부정(父情) 을 느끼게 했던 사람. 갑자기 그 분을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에서 일었다.
“네게 원고 청탁하러 왔어.”
“뭐? 원고?”
“그래. 요번 오월이 우리 잡지사 창간 10주년 기념 달이거든. 그래서 특260 第34輯 261 소설(小說)
집으로 ‘현대판 노라의 행방’을 묻는 기사를 싣기로 했어. 사실 지금은 노 라들이 우글거리는 21세기 아니니?”
“..................”
“요번 특집에선 현대판 노라에 대해서 3부로 다룰 거야. 제 1부는 노라 가 된 사연, 제 2부는 21세기 노라들의 행방, 이 둘은 모두 르뽀지. 숱한 노 라들을 만나 그들의 실상을 파헤칠 거야. 그리고 제 3부는 ‘돌아온 노라’로 할 생각이야. 현대판 슬픈 노라들은 돌아와야 해. 그녀들은 하나같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기적을 바라고 있어. 기적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텐 데. 제 3부‘ 돌아온 노라’에는 실제 체험담을 실어야겠어.”
“................”
“순미 네가 이 3부를 써 줘. 그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바라는 사람?”
“그래, 너희 어머니께서 날 찾아 오셨어. 잿빛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잡 지사에 올라 오셨더구나. 지난 주 수요일 퇴근 무렵이야. 어머닌 네게도 못 했다는 당신의 아픔을 내게 털어 놓으셨어. 당신의 일평생이 외로움으로 점 철되었기에 딸자식만은 그 길로 가지 않고 남편 곁에서 따뜻한 아내 노릇하 도록 부처님께 불공을 올렸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고뇌로운 표정으로 염 주 알만 헤이시더라. 아직도 당신의 죗값을 씻지 못한 탓으로 순미네가 고 (苦)를 겪는다는 거야.”
“어머니! 어머닌 지금 어디 계신다니?”
“속세와 인연을 끊었으니 실상은 나도 만나서는 안 된대. 그러나 견딜 수 없었다면서 네 주소를 주시는 거야. 그리곤 곧장 가셨어. 그 뒷모습이 너무 성스러워서 감히 따라가서 어디 계시느냐고 아둥바둥 거릴 수가 없었어.”
진희는 마치 철인(哲人)처럼 진지했다. 순미는 자기 남편의 이야기를 했 다. 남편의 허상을 발견한 순간 도저히 그를 용납할 수 없었노라고.
“네 남편은 당선을 취소했어. 바로 사표를 쓰고 절에 들어갔대. 그 즈음 우연히 들린 어머니와 만났던 거야. 네 남편이야 변하신 어머니를 잘 몰라 보았겠지만 어머닌 첫눈에 알아봤지. 진수씨가 행정고시 공부를 다시 한다 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아아! 어머니!’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를 생각하자 죄스러움에 정신은 혼미해지 고 망연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며칠 후 진희에게 메일을 보냈다.
........진희야, 네가 떠난 뒤 곧 바로 봄은 왔다. 무겁게 짓누르던 맺힌 피가 한숨에 섞여 튀어나오고, 이내 허탈함에 겨워하며 지냈던 시간.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어본 적은 없다.
망연스레 먼 산을 넘겨보듯 나의 시간은 채워지지도 텅 비어 있지도 못했 다. 삶의 진귀함에 죽음을 망각했던 지난날들이 차라리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와 헤어지고도 이렇게 씩씩하게 버티고 있음은 무어란 말인가?
나의 방황은 끝없는 고통과 함께 쉴 곳을 찾지 못했다. 나를 내 자신이 그리워하지 못하도록 무엇인가 강인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기를 기르고 싶다. 여자 .이브의 후예. 출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순백색의 백지 위에 한 점 한 점 나의 꿈을 보태고 싶다.
사흘 전, 내가 살고 있던 주인 집 대문 앞에 갓난아이가 놓여 있었다. 낳 은 지 열흘쯤 되는 사내아이. 무섭도록 탄탄한 고 녀석의 빨간 볼이 사랑스 러웠다. 주인 아주머니는 어떤 년이 벼락 맞을 짓을 했다고 동네방네 떠들 고 다녔다.
아기를 맡을 생각이다. 그건 내 숙명일 것이다. 사생아의 멍에를 나는 알 고 있으니까.
어떻게 이 곳을 아셨는지 정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며칠 후에 여기 한번 오시겠다고 했다. 내가 여기서 임시 강사로 근무한다는 소 식 듣고 무척 놀라셨다고 했다.
삶은 오선생에게 조차 가혹했군!
그 분은 그런 식으로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여길 떠날 지도 모르겠다. 이제 주인집 아주머니께 가서 설득해야겠다. 아 주머닌 망설이다가 분명히 아기를 내게 넘겨주실 것이다.
목련 꽃잎이 개화하려 한다. 푸른 잎이 돋기도 전에 피어 나는 하이얀 꽃. 그렇게 잔인한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서서히 오려나보다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가 된 것 같구나. 진희야. 또 연락하마. 안녕!
순미가.
파도가 거세게 불던 날. 사표가 수리되었다. 아기는 그녀가 맡게 되었다. 생후 1개월. 그녀는 일단 이 섬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낳은 지 한 달 된 아 기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봄비 때문인지 이틀째 파도가 일고 있었다. 배는 육지에 나가지 않고, 육지의 어떤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 단절. 사방의 벽 속에 갇혀 버리고 싶음. 그 바램이 철저하게 이 루어지고 있었다.
사흘 후 바다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바다의 평온이 이상하게 순미에 겐 불안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이 아기를 데리고 가 버릴 것만 같았다.
벌써 아기에게 애착이 생긴 걸까? 오랜만의 평온함이 오히려 낯선 걸까?
일곱이레가 지나던 날. 정교장이 왔다. 바닷바람에 코끝이 빨개진 교장 이 그녀의 방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언제 보아도 때가 묻 지 않은 교장의 소라빛 와이셔츠가 정갈스러웠다.
“오선생, 아름다움은 여전하군!”
“............”
“밖으로 나갈까요? 방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교장은 그녀에게 경어를 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되도록 구김살 없는 표정을 짓고 싶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그는 이내 아기를 보고 놀랬다.
“그랬었군. 여기서 혼자 아길 낳았소?”
“......................”
“힘들었겠군.”
“아니에요. 교장선생님.”
아기는 잠을 자고 있었다. 교장은 아기가 신기한 듯, 마치 손자를 바라보 듯 자상스레 잠든 모습을 내려다본다.
“오선생 남편은 아이 이야긴 안 하던데?”
“..................”
“애 아범도 너무했군. 요렇게 귀여운 녀석을........”
그녀는 이야기했다. 이 아기는 육체의 아픔 없이 주어진 아기지만, 정신 의 산고를 치른 뒤 얻어낸 아기라고. 그건 신의 뜻일 거라고. 나의 숙명일 거라고. 몽실한 속눈썹을 아래로 내린 채 조단조단 이야기했다.
“오선생, 사람의 운명은 특히 여자의 운명은 자기 성격으로 결정 나기가 십상이야. 지나친 결벽성은 버릴 필요가 있어. ‘
“..............”
“그 사람 신문사 그만두고 절에 들어갔던 건 알고 있었겠지? 행정고시 공불 하고 있더군. 그 길이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인 것 같다고 하더 구먼.”
“언제 만나셨나요?”
“응, 얼마전에 나를 찾아 왔었어. 요즘엔 절에서 내려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 사람이 제가 여기에 있다고 했나요?”
“아냐. 심선생. 오선생과 단짝이었던 심진희 기자말야. 거기 메일 받고 알았지.”
“심선생에게선 자주 연락이 왔었나요?”
“응, 자나치다 싶게 자주 왔지. 심기자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사랑할 수 가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구먼.”
문득 진희가 교장선생님을 사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봐야겠군. 네시에 나가는 배가 있다더군. 오선생 되도록 빠른 결정을 내리도록 해. 사람은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행복한 게야.”
10분 정도 걸어나가면 부두였다. 바다는 봄햇살을 받아 유난히 푸르렀 다. 그래 진희는 교장선생님을 사모하는지도 몰라.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교 장을 바라봤다. 세월이 가져다 준 주름살이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잔잔한 물결과도 같이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고뇌가 함께 있었다.
“오선생, 바다가 참 아름답군. 어민들의 모습이 평온해 보여. 자연과 함 께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야.”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에 있으니까.”
“그럴 거예요.”
교장은 떠나갔다. 그는 연륜이 든 고목처럼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숱한 외로움의 세월 속에서도 타인에게 손가락질 받을 추호의 흔들림도 없 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포장적인 위선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사랑함직한 교장을 향해 오래도록 사랑앓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진희의 얼굴이 또 한번 오버랩 된다.
그녀가 이제는 섬마을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무렵에 한 통의 두툼 한 편지가 왔다.
.........그러자 알미트라가 다시 말했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결혼에 대 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들 함께 태어났으니 또한 그대들 영원히 함께 있으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뿌려 버릴 때까지. 그대들 함께 있으라. 아니, 신의 잠잠한 기억 속에서까지 함께 있으라. 그러나 그대들 함께 있음에는 간격을 두라. 하늘 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출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굴레를 만들진 말라. 차라리 사랑으로 하여금 그 대들 영혼의 해안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 잔에서 함께 마시지는 말라. 서로 그대들의 빵을 주되 한 조각의 빵을 함께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어 즐기되, 그대들 각자는 홀로 있게 하라. 비록 거문고의 줄들이 같은 가락에 함께 떨릴지라도 각기 떨어져 있듯이.
그대들 마음을 서로 주라. 그러나 내맡기지는 말라. 왜냐하면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함께 서되 너무 가까 이 서지는 말라. 왜냐하면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또 참나 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라지 못하니까.....
-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
순미!
왜 내가 예전에 지브란의 「예언자」를 못 읽었을까? 우리들의 추억이 있는 이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도 봄빛이 완연하오. 1년 반 가량의 우리들의 지나친 아집들도 얼었던 땅이 봄빛에 녹듯 녹아 내리길 간절히 바라오.
지금은 벚꽃이 한창이오. 지난 1년 나의 의지를 실험할 수 있었고, 당신 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오.
이별이란, 어떠한 경우엔 엄청난 득(得)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오.
만남이 전제된다면!
벚꽃이 만발한 칠불사에 당신과 함께 가고 싶소.
내가 당신의 섬으로 찾아가리다. 안녕!
- 당신의 반려자. 진수가 -
그의 오랜만에 받아 본 긴 편지로 된 메일이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 는 메일.
남편의 메일을 읽으면서 그녀는 프리즘을 생각했다. 일곱 빛깔 프리즘이 빛의 통과를 받기 전엔 하얀빛을 지닌다. 그러다가 빛의 통과를 받을 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휘황찬란한 색들 냈다가 빛의 통과가 다 끝나면 또다시 순백의 빛깔로 화한다.
그것처럼 결혼생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살 때는 서로가 서 로의 잔을 채우듯이 그렇게 한 몸이 되어야겠지만, 자신으로 돌아서서 자신 의 빛깔도 갖추고 있어야 하리라. 모든 걸 남편에게, 아내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아! 그는 이 아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는 인정할 것이다. 사생 아. 아기 어머니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버려야 했던 모정을 생각하면서 순미는 자신이 낳은 아기처럼 꼭 껴안았다.
다섯시간만에 ㄱ시에 도착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도회의 거리는 별스럽게도 낭만적이다. 사람들은 모두 바쁜 걸음으로 걸었고,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으며. 질주하는 차량들이 새삼스레 싱싱해 보였다.
아!’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아기가 도시의 소음에 놀랐는지 응얼거렸다. 작 은 빽 하나. 모든 짐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주어 버렸다. 마치 지난 과거를 떨어버리듯이.
그녀는 택시를 잡았다.
“그냥 시내를 한 바퀴 돌아주세요.”
생각보다 시내는 작았다. 높다란 건물들이 예전처럼 불빛을 뿜어내고 있 었고, 물결치듯 인파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 나도 여기 있구나. 예전처럼! “
“시내를 거의 다 돌았습니다. 여기서 멈출까요?”
기사 아저씨는 이상한 여자를 만났다 싶었는지, 빨리 내려 줘 버리고 싶 은 모양이다.
“아니에요. ㅁ아파트로 가 주세요.”
순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에게 편지를 쓰고 올 걸 잘못했다고 생각 했다.
ㅁ아파트 102동 305호! 불이 켜져 있었다.
‘아! 여전하구나.’
전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병사 마냥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여보, 순미가 당신 아내가 왔어요.’
그녀는 발돋음을 해서 3층에 손짓을 했다. 지나가는 남녀가 이상한 아주 머니다 싶었는지 한 번 힐끗 쳐다본다.
그녀는 뛰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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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안 작가 프로필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대구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졸업, 2011년 12월 문예운동 시부분 신인상으로 등단, 문향회 회원, 현재 굿맘하이빌 어린이집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