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에는 몇 번이나 서운산을 올랐다. 서운산 초입에 있는 청룡사 부근의 계곡에는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나온 가족들이 두엇 보이지만, 은적암으로 올라가는 산길로 접어들면 사람 그림자도 없다. 녹음 짙은 숲에서 뿜어나오는 향기로운 숲의 냄새,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만든 그늘이 내려앉은 터널과 같은 오솔길, 바로 눈앞에서 오솔길을 가로질러 나무 위로 사라지는 다람쥐..... 그 산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가끔 맞은편 산을 바라보면 울울창창한 녹색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인다. 산 전체가 녹색 덩어리로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나무 하나하나가 구현해내는 녹색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드러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도 같지 않다. 저마다 생긴 형상과 위치에 따라 다른 율동과 리듬을 타고 움직인다. 산은 저마다 다른 녹색들이 모여 거대한 녹색의 군집을 이루고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숨을 쉬고 율동에 취해 군무를 추고 있는 것만 같다.
산길을 오르느라 숨결은 가파라지고, 온몸에 흘러내린 땀으로 속옷이 축축해진다. 그러면 길가에 바위에 앉아 잠시 가쁜 숨을 돌리고, 새소리를 들으며 땀을 식힌다. 땅바닥 위에 개미들이 기어간다. 아침 나절의 폭우에 떨어져내린 상수리 열매들이 여기저기 뒹군다. 나는 누구였던가 ? 산길에 일체의 생각을 끊고 주저앉은 나는 더이상 개별적 주체가 아니다. 산길의 일부, 소나무와 돌과 맥문동 둥글레 같은 야생초 등과 함께 한낱 산의 일부, 그보다도 나의 있음은 저 캄캄한 텅빔과 같은 무의 일부, 순간의 멈추어 서 있는 영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삶을 망치는 것은 기성품과 같은 삶을 붙들고 전전긍긍하던 나였다. 삶을 완전히 손안에 쥐기 위해서는 삶을 놓아버려야 한다. 청춘은 그 시절이 한참 지난 뒤에 비로소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온몸의 오감을 활짝 열고 나를 스쳐지나는 것들, 바람소리, 새소리, 나뭇잎의 서걱거림, 계곡 물소리, 부드러운 빛, 풀과 나무들의 뿜어내는 향기 들을 빨아들인다. 이 순간은 멈춤의 시간, 휴식의 시간, 온갖 단절에 대한 이음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채우는 것은 혹사에 대한 저항, 필연과 의도성에 대한 이완, 세상을 지배하는 온갖 목적지향적 행동들에 대한 죽음이다. 나는 나를 해방한다. "느림"의 이름으로. 느림은 우리 몸과 마음에 영양소와 생기를 만들어주는 진정, 충천, 휴식, 충일의 시간이다.
"느림"의 가치를 조명하고, "우리를 소리없이 죽이는" 광속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바로 그 책이다. 느림은 개인 성격의 산물이 아니라 실존적 선택의 결과다. 삶은 롤러코스터가 아니다. 그것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좍 퍼져나가는" 것, "섬세한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다. 그것은 느끼고 누리는 것이다. 교감과 향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일하고, 천천히 걸어가고, 천천히 먹고, 천천히 바라본다. 그거 쉬운 일도 아니고 저절로 체득되는 것도 아니다. 그거 매우 비상한 능력이고 수행이다.
느림과 친화력을 가진 것들 ;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고급스러운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내 마음의 시골 찾기, 글쓰기, 포도주, 모데라토 칸타빌레, 질병, 노년기, 온천 요양, 실직, 자살 직전, 침묵, 가난, 지혜, 그리스어 배우기, 화랑이나 박물관 가기, 절제, 숭고함, 다락방. 피에르 쌍소는 쓴다 ;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급하게 해치워버려서는 안된다는 걸 뜻한다. 샤를 줄리에는 말한다.: 예를 들면 문을 여는 일, 편지를 쓰는 일, 정성스럽게 손을 내뻗는 일,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일 등을 마치 세상의 운명과 별들의 운행이 그런 일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성스럽게 완수해야 한다."
빨리빨리는 근대적 자본의 주문이었다. 빠른 것을 숭상하는 태도가 부도덕한 것은 "나"의 중요성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고 "너"를 소홀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너"의 발명품이다. "너"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 속도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 속도의 주체인 "나"의 몸과 심리에만 모든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세상의 어떤 "너"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가 또다른 "너"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빨리빨리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너"는 한낱 경쟁상대일뿐이며, "나"에게 존재 가치를 만들어주는 심오한 근원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너"는 "나"의 고향이고, "나"는 "너"다.
그런데도 나는 나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빨리빨리라는 주문에 따라 움직였다. 빠름은 생산성으로 연결되고 생산성은 곧바로 돈으로 바뀌었다. 돈은 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내면의 가능성들과 영성은 피폐해지고 거덜이 났다. 내 몸에 새겨진 시간을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로만 재는 근대적 시간관을 지워내야 한다. 여유와 한가로움만이 생명의 약동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준다. 나는 느림의 시간을 살아내는 자가 아니라 느림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세상은 하나가 된다. 고요하고 푸른 새벽 하늘을 무심한 시선을 던져 낚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로지 느림 속에서 고요하고 푸른 새벽 하늘과 하나가 된다.
사족 하나. 이 책의 번역자는 대단히 불친절하다. 몇 쪽 읽지 않았는데 날림 번역의 혐의를 걸만한 부분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내용을 깊이 되샘길질하지 못하고 설사하듯이 뱉어낸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시적 울림을 전혀 살려내지 못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짜증스러웠던 것은 역자의 불성실함에서 비롯된 번역의 부실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