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27편 1~14절
[서론] 광야의 그림자 속에서 진리를 그린 사람
17세기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의 삶은 극적인 번영과 참담한 비극이 교차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젊은 날 명성과 부를 누렸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차례로 먼저 떠나보냈고, 경제적 파산과 대중의 외면 속에서 철저한 외로움과 한계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울타리가 무너진 그 '어둠의 현장'에서 렘브란트는 붓을 들었습니다. 렘브란트 화풍의 가장 명확한 특징은 바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법)’입니다. 그의 화폭은 캔버스의 대부분이 짙은 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을 가리는 절망이 아니라, 오직 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명료한 빛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배경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다윗이 처한 실존적 상황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대적들의 공격, 전쟁의 위협, 심지어 부모에게마저 버림받는 외로움이라는 짙은 어둠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단 하나의 빛을 발견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신약적 구속사의 은혜와 우리의 실존을 관통하는 영적 진리를 묵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붙들어야 할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어둠을 뚫어내는 주님의 빛
본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빛(오리)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합니다. 다윗은 고통의 한가운데서 ‘오리(אֹורִי, 나의 빛)’라는 놀라운 고백을 선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단순히 '빛의 창조자'가 아닌, "하나님 본인이 나의 빛"이라고 다이렉트로 고백한 구절은 지극히 드뭅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빛은 사물을 사물답게 보게 하는 절대 조건입니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왜곡된 공포를 봅니다. 조그만 그림자도 집어삼킬 듯한 원수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면 현상의 실제 크기가 드러납니다. 다윗이 "나의 빛"을 선언했을 때, 나를 둘러싼 위협이라는 '어둠의 현상'들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소하고 무력한 것으로 인식의 패러다임이 전환됩니다.
이 '오리'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한계 상황과 죽음의 어둠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마침내 무력화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도와 교회를 향해 경제적 위기, 불확실한 미래, 고립감이라는 어둠의 프레임을 씌워 두려움을 주입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빛"으로 모신 성도는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어둠을 묵상하지 말고,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봄으로 세상이 주는 공포를 무력화하십시오.
둘째, 인생의 수많은 욕망을 하나로 단권화하여 주님을 관조
본문 4절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라하조트)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라고 합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다윗의 결단은 놀랍습니다. 그는 왕권의 보존이나 원수의 처단을 구하기 전에, ‘아하트(אַחַת, 한 가지 일)’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라하조트(לַחֲזֹות, 바라보는 것)’라 고백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비극은 욕망이 산만하게 분산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도 가져야 하고 저것도 이뤄야 하는 산만함(Distraction)이 불안을 낳습니다. 다윗은 이 시점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수많은 생존의 요구들을 다 비워내고, 자신의 모든 영적 에너지를 오직 단 하나, '주님의 임재'로 단권화(Focusing)합니다. 또한 '라하조트'는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게 아니라, 영적 통찰을 가지고 깊이 몰입하여 관조(Contemplation)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다윗은 성전이라는 제약된 공간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갈망했지만, 신약의 우리는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2:21)를 통해 하나님을 친밀히 대면합니다. 십자가에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관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 성도들의 가장 큰 영적 질병은 '산만함'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뉴스, 염려, 욕망에 시선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제시해야 할 가장 강력한 힘은 '거룩한 단권화'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멈추어 서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깊이 바라보는 '라하조트'의 시간을 복원하십시오. 그것이 거친 세상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거룩한 중심축을 세우는 비결입니다.
셋째, 팽팽한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소망으로 기다림
본문 14절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카바)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마무리는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이나 승전보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향해, 그리고 이 시를 읽는 회중을 향해 ‘카바(קַוֵּה, 기다릴지어다)’라고 반복하여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시간의 철학에서 '기다림'은 무기력한 수동성이 아닙니다. 어원적으로 '카바'는 '줄이나 끈을 팽팽하게 당겨 매다'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기다림은 넋 놓고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활시위를 바짝 당긴 상태처럼 신적 시간(Kairos)을 향해 내면의 긴장감과 소망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지극히 능동적인 영적 행위입니다.
이는 신약 성도의 종말론적 신앙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도는 '이미(Already)'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Not Yet)'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그 재림의 간극(In-between)을 살아갑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다시 오심과 온전한 구원을 '카바'의 소망으로 인내하며 견뎌내는 자들입니다(히 10:36-39).
우리의 기도가 당장 응답되지 않고, 현실의 고통이 쉽게 바뀌지 않을 때 마귀는 낙심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내는 헛된 자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영혼의 줄을 팽팽하게 묶는 거룩한 '카바'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소망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십시오. 주님은 산 자들의 땅에서 반드시 그분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캔버스 위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그리스도의 얼굴
렘브란트의 인생 후반기, 모든 것을 잃고 외롭게 홀로 남겨졌을 때 그려진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바울의 자화상/초상화>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늙은 바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고뇌가 가득하지만, 어둠 속에서 떨어지는 정면의 빛을 받으며 그 눈빛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담대히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을 둘러싼 환경이 렘브란트의 화폭처럼, 혹은 다윗의 광야처럼 짙은 어둠 속에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 어둠은 여러분을 함몰시키기 위한 망령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오리(나의 빛)’를 세상에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배경일 뿐입니다. ㆍ ㆍ세상의 거짓된 공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빛(오리, אֹורִי)으로 선포합시다.
ㆍ세상의 산만한 욕망을 뒤로하고, 참된 성전이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바라봅시다(라하조트, לַחֲזֹות).
ㆍ상황이 당장 변하지 않을지라도, 소망의 줄을 팽팽히 매고 끝까지 주님을 기다립시다(카바, קַוֵּה).
그때 우리는 다윗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어둡고 캄캄한 세상 한가운데서 당당히 승리하며 하나님 나라의 선하심을 맛보는 참된 신앙의 거장이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