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총동창회보 제76호 2013.11 게재
소령 강재구 이야기
박경석 육사생도2기 (작가)
강재구 순직 당시의 직속상관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렬하게 회상되는 까닭은 그만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충격과 감동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1965년 초여름, 나는 경남 진해 육군대학에서 대부대학(大部隊學)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무렵 서울에서는 한국군 전투사단 월남전 파병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다. 국회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찬반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여당은 적극 파병을 지지하고 있었고 야당은 반대했다.
내 강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교수부장이 강의실로 들어와 내 강의를 중단시켰다. 나는 물론 영관급 학생들까지 뜻밖의 일로 놀라는 기색으로 교수부장을 바라 보았다.
교수부장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즉시 총장실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 학생장교들에게 강의를 잠시 중단한다는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총장실로 향했다.
총장은 내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밝은 얼굴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면서 "박경석 중령 축하한다" 고 했다. 이어서 월남전 제1진 파병 지휘관으로 선발되었음을 알렸다.
당시 육군본부에서는 월남전 전투사단 파병이 결정되자 수도사단을 파병 사단으로 지정하고 전반적인 재편성에 들어갔다. 사단장은 물론 연대장 대대장까지 6.25한국전쟁에서 무공훈장을 수훈하고 당해 직위를 성공적으로 이수한 특급 자원을 심사하고 있었다.
나는 전 육군의 중령 가운데 단 6명만 선발되는 보병 대대장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직업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가 아닐수 없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총장에게 내 결의를 말했다. "육군대학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꼭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고. 나는 총장의 지시를 받고 즉시 짐을 챙기고 강원도 홍천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사단으로 향했다.
수도사단은 맹호부대로 호칭되면서 재편성에 분주했다. 사단장에 새로 부임한 채명신 소장을 비롯해서 말단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100% 새 진영으로 교체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어서 중대장과 소대장이 속속 교체 보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 부임한 내 휘하 제10중대장이 육사16기 출신의 강재구(姜在求) 대위였다.
내가 도착한지 불과 1주일만에 사단은 완전 재편성되면서 월남전을 대비한 각종 실전훈련에 들어갔다. 실전훈련이라서 소총탄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류탄과 각종 포탄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력이 동원되는 훈련이기에 훈련장 일대는 온통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갈 무렵인 10월 초, 나는 대대장실에서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제10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장에서 사고로 순직했다' 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나는 즉각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엎드린채 피를 쏟고 있는 중대장 강재구 대위에게 다가섰다. 이미 숨은 멎어 있었고 주변 중대원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주변의 소대장과 병사들은 나를 보자 일제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대장님. 우리 중대장님이 우리를 살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부하들의 보고를 접하고 강재구 대위의 시신을 확인했다. 강재구 대위의 복부를 중심으로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주변 상황을 살피고 중대원들의 증언으로 확인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실전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중대의 수류탄훈련장에서 박해천 이등병이 겁에 질린 나머지 수류탄을 투척한다는 것이 잘못 던져 중대원 한복판으로 날아가자 중대장이 중대원의 희생을 막기위해 달려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쳤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내가 당했을 경우를 상상했다. 만일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이 날아온다면 과연 강재구 대위처럼 그 수류탄을 내 몸으로 덮칠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분명히 '아니다' 였다. 나였다면 수류탄이 날아오면 반대방향에 엎드렸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강재구 대위는 초인간적인 직감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부하를 살린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현장에서 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대한 군인정신에 접하고 벅찬 감동에 젖었다. 그후 야전병원에서 간단히 장례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재구 대위를 이대로 국립묘지에 보낼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위대한 살신성인의 전 과정이 담긴 논픽션 형식의 보고서를 밤새 썼다. 날이 새자 지체하지 않고 사단장 채명신 장군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사단장은 내가 올린 보고서를 읽고 감동한 나머지 메스컴에 이 논픽션 형식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비로소 이 내용이 메스컴에 알려져 보도가 되자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 사연이 전국적인 화제로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도에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여론의 흐름을 간파하고 마침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군사상(軍史上) 첫 위관급장교의 육군장(陸軍葬)에다 소령으로 특진 추서하고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원래 무공훈장은 적과 싸워 전공을 올린 유공자에게 주도록 상훈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결단을 내렸다. 이 특전은 국군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경우이다.
이 특별조치로 고 강재구 소령은 국군사상 첫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내가 지휘하는 제1연대 제3대대는 내 건의가 수락되어 국방부 훈령으로 재구대대(在求大隊)로 명명되었다.
또한 내가 제출한 논픽션 형식의 보고서는 그후 초.중.고 교과서에 게재되는 한편 [소령 강재구]의 영화가 배우 신성일 주연으로 제작 상연되기에 이르렀다.
강재구 소령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는 '소령 강재구' 동상이 화랑연병장 동측 중앙에 건립되고 재구상(在求賞)이 제정되어 육군의 모범 중대장에게 매년 시상된다. 특히 육사 졸업식 뒤풀이 빅 이벤트는 매년 강재구 소령 동상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강재구 소령 순직 현장인 강원도 홍천에는 강재구기념공원이 만들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강재구 소령의 아픔을 딛고 월남전선에 출진한 맹호부대 재구대대 제1진 장병들은 월남전 대대단위 최고 수훈의 신화를 창조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엄청난 내용들이 지금은 잊혀져 있다. 교과서에 게재되었던 [소령 강재구]의 이야기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자라나는 후대 청소년들을 위해 '소령 강재구 이야기'가 이대로 잊혀지게 할 수 없다는 염원에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끝으로 강원도 홍천에 조성된 강재구공원내 기념관에 헌정되었던 [아, 강재구 소령]의 시가 목판에 빛바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내용을 다시 다듬어 시비에 헌정할 신작시를 여기에 올린다.
소령 강재구
박경석
참사랑 하늘을 울린다
의로운 기개 강산에 메아리친다
옛 화랑 충절 빛낸 것처럼
강재구 그대는
오늘의 화랑이었노라
목숨 잦는 아픔
뉘 모를까마는
부하 사랑 때문에
한 줌 재로 자진하는 숭고함에
우리 모두 고개 숙이도다
아, 강재구 소령
그대 죽음의 길 택했을지라도
모든 전우와
뒤따르는 젊은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의미
심어 주었도다
그대는 살아 있으리
그 숨결
그 정신
살신성인의 귀감되어
만세에 길이길이 보전되리라
육사 생도시절의 강재구
첫댓글 이 에세이는 문학지 창작산맥과 육사총동창회보에 각각 동시에 발표 게재하였다.
원칙적으로 에세이 발표는 한곳만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 에세이는 내용의 특수성 때문에 두곳에 게재 하게 되었다.
특히 문학지와 군사전문지의 독자 계층이 상이한 점을 참작하였다.
문학지 창작산맥 내용과 일부 자구수정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