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웃음
-헹수레비구-
승려로 수행하는 동안 나는 삼보 일배 하는 순례를 한 적이 있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멘도시노 카운티의 유키아까지 약 1,300km에 이르는 캘리포니아의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가며 절을 했다.
이 여행은 거의 삼년이 걸렸는데 나는 하루에 1.6km 정도를 이동했다.
순례를 하는 동안과 순례를 끝내고 난 후 삼년동안은 나의 스승인 고(故)
솬화선사와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묵언서약을 지켰다.
순례동반자인 헹차우와 나는 하루에 채식 한 끼만을 먹었으며 우리가 채취한 길가의 야생 채소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생존은 순례 중 친절한 사람들이 후의로 제공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1번 고속도로가 시내 한가운데 있는 주택가로 변하는 산타크루즈에서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아침, 절을 하고 일어서니 자전거를 타고 있는 9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은 멈춰 서서 도대체 보도에서 뭘하고 있는 지를 궁금해 하면서 절하는 스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학생은 내가 삼보일배하고 일어서서, 다시 걷고, 절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는 앞을 보고 절을 하며 여학생을 지나쳐 갔다. 몇 시간 후에 뒤쪽에서 여학생의 자전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학생은 내 앞으로 돌아오더니 점심 도시락을 열고 왁스종이에 싸인 것을 내밀었다.
“아저씨, 여기, 이 샌드위치 받으세요. 그렇게 가는 것으로 봐서 저 모퉁이에 도착하기 전에 먹어야 할 거예요.”
불자들은 무엇을 가지고 웃을까?
불교유머는 주로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정한 실상을 돌연히 깨닫는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사건들의 화려한 외양은 실현 가능성이 극히 드문 행복을 약속하는 망상들이다.
고통을 받을 때 이를 치유하는 한 방법은 엄청난 아픔에 대해 웃어 버리는 것이다.
불교유머는 펀치와 주디가 서로를 잔인하게 방망이로 때리는 익살극이나 냉소와는 어떻게 다른것인가?
불교유머는 아픔을 치유하는데 이는 농담과 이야기들이 주인공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난 후에 바나나 껍집을 찾아내기 때문으로 이는 “우리가 취중에 태어나 꿈속에서 죽는다”는 삶의 본질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악몽을 꾸고 있다면 깨어나는 것이 충격일 수는 있지만 다행스러운 것이다. 결국 꿈이었을 뿐이다.
때로는 아픔이 너무 커서 우리는 웃는다.
순례를 하는 동안, 어느 날 저녁 산타크루즈 인근에서 헹차우와 나는 주택단지의 담장 뒤 막다른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등유램프에 불을 켜놓고 우리는 참선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독경을 끝내고 헹차우는 차를 만들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는 내게 뜨거운 찻잔을 건네주었다. 나는 맨발로 발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부좌를 하고 앉아 여전히 참선 분위기에 들어 있었다.
김을 내뿜는 잔을 생각하지 않고, 좁은 공간에서 나는 무릎위에 잔을 엎어 버렸다. 위를 향하고 있던 내 발바닥과 발목이 뜨거운 차에 데었다. 순식간에 물집이 생겼다.
얼마나 아프던지!!!
덴 발바닥으로 어떻게 절을 할 것인가?
헹차우는 커덴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 밀고는
“야, 그것 참 굉장한 차다. 그지?
잠을 확 깨게 만들어 주네.
깨침을 얻었냐?”
얼마나 웃었는지 적어도 잠시 동안은 아픈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교유머에는 다른면도 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 즉 깨달음을 얻은 이는 코요테나 토끼 친구와 같은 트릭스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트릭스터보살은 보통 사람들은 접할 수 없는 실상을 보는 열린 눈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 제자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장난이나 혹독한 방책을 사용하는 신비롭고, 강력하고, 지혜로운 스승으로 등장하곤 했다.
언젠가 한 수행자가 산 중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수행의 삶이 본질적으로 완벽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선정에 드는 능력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즐겁거나 불쾌하거나 어떤 마음상태를 접하더라도 참을성이 있으며 주변 상황에 관계없이 그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참선하는 움막 가까이에 두 개의 판자를 못으로 이어
“마음은 재와 같다 Mind like ashes."라는 세 단어를 썼다. 그는 이 판자 이은 것을 뾰족한 나무막대기에 달고는 이 표지를 땅바닥에 박았다.
그는 손의 먼지를 털고 앉아서 참선할 준비를 했다.
그 때 관음보살이 이 수행자의 선정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순식간에 관음보살은 젊은 청년으로 변신하여 수행자의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오 분 동안 문을 계속 두드리니 그 소리가 산을 울렸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관음보살은 움막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통해 방석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참선중인 수행자를 발견했다.
“실례합니다.!” 관음보살이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저 아래 길에서 표지판을 보았는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수행자는 천천히 두 눈을 하나씩 떴다. 그는 마음속으로 뭔가 결심을 하는듯 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마음은 재와 같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감이 참 좋습니다. 저는 읽지를 못하거든요. 어느 말이 ‘재’입니까?”
수행자는 대답하기 전에 멈추었다가 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두 번째 단어가 ‘재’입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은 말이라서 그 뜻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재를 좋아한다고요 Mind likes ashes?"
“‘좋아한다likes’가 아니라 재와 ‘같다’like ashes라는 겁니다.”
질문은 삼십 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수행자가 소리쳤다. “멍청이 같으니라고. 내 말을 잘 듣도록 하시오. ‘마음은 재와 같다’고 몇번이나 더 말해야 되겠소?”
청년은 돌연히 공중으로 오르더니 관음보살로 변신해 자주색-황금색의 구름위에 가부좌을 한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재속에는 불씨가 좀 남아 있는 것 같구나. 한 두 해 후에 다시 방문하러 오겠다. 정진하도록하라.”
불교유머는 고통을 가르침과 함께 제시한다. 불법의 웃음은 죽음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약으로 등장한다.
생과사 그리고 재생에 따른 고통은 엄청난 것이다. 부처의 목표는 생사의 고리로부터 완전히 떠나 고통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유머의 특징은 현실적이고 광범위하며 인간의 원초적인 고통을 보여주는 익살극과도 같은 성향을 지닌다. 부처의 지혜라는 관접에서 보면 인간 욕계는 망상에 의해 지배된다. 어떻게 욕망이 인간을 구속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무지가 기본적인 웃음거리로 우리를 빗대어서 웃는것이다. 부처는 인간을 깨달음을 뒤로 하고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결국에는 우리를 고통으로 되몰아가는 무지의 고리를 끌고 다니는, 혼돈에 빠진 존재로 설명하고 있다.
이월 어느 비오는 날 순례 중이던 헹차우와 나는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남쪽 그레이트 고속도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서 골든 게이트 국립휴양지역을 통과하며 절을 했다. 고속도로의 갓길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공격의 연속이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바람, 눈에 날아드는 모래 그리고 마음을 끝없이 괴롭히는 혼란스러운 생각들, 쳐다보고, 의아해하고 때로는 왜 우리가 절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멈추기도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차들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런 차 중의 하나가 바로 공원의 순찰대원이 운전하는 12인승 밴이었다. 붉은 머리를 미키라는 이름의 쾌활한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이봐요.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불교신자인가요? 나는 이곳 국립휴양지역의 순찰대원으로 일하는데 하루 종일 이 해안을 차를 모고 다닙니다. 한달전에 데빌즈 슬라이드에서 당신들을 보았어요. 끈기가 대단하시군요. 나는 게으른 카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당신들이 해안을 따라 쉬지 않고 이렇게 이동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그레이트 고속도로가 수리중이라서 올라가면서 조심하라고 말해주러 들렀습니다. 그러니 바다쪽 잔디위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았지요?”
미키는 골든 게이트 다리를 지나 베이커요새를 지나는 동안 도로상황에 대한 지도를 해주고 심지어는 자기 집 부엌에서 따뜻한 국을 가져다 주는 등 쭉 우리를 지켜주었다.
어느 월요일, 그는 점심때에 들러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에요. 당신들이 사람들에게 뭔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아요. 관리부에서 일하는 내 동료 중에는 당신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당장 트럭을 보도 가장자리로 몰고 가서 당신 둘을 차로 갈아버리겠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악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데 그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종교에 관한 것이 틀림없어요. 지난주에 그이가 와서 말하기를, ‘저 얼간이들 좀 봐. 바보들 같으니라고! 사람들 앞에서 길바닥에다 절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가 보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거야?
벽장 안에서나 절을 하지 그래?”
“오늘 아침에 이 사람이 숙취에다 멍든 눈을 하고 이빨을 하나 잃는 채로 일하러 왔지 뭡니까. ‘데이트로 스키도 타고 자동 도박기 게임을 즐기려고 타호에 갔었어요.’ 그가 이야기했습니다.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저 두 미친 인간들을 지나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생각들을 다 뱉어 버렸지요. 저 작자들이 없으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했더니 내 여자 친구가 화를 내면서 상관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세계평화를 위해 절을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언제나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에 실제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요.”
“여자친구에게 ‘그럴 리가 없어. 저자들은 얼간이, 멍청이들이야. 지나가는 차들을 저주하고 있을 거야.’라고 했지요. 우리는 새크라멘토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싸웠고 그리고는 여자친구는 내게 말을 하지 않았어요. 시작이 좋지 않았어요.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내가 차 열쇠를 잃어 버려서 트렁크를 열 수가 없어 챙겨온 술을 꺼낼 수가 없었어요. 결국엔 더 비싼 가격에 술을 사게 되었고 난 술에 취했답니다. 여자 친구를 한방 때리려다가 난간에 걸려 넘어져 이빨이 부러지고 눈 속에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여자친구는 차를 몰고 가버리고 나는 새크라멘토까지 버스를 타고 와야 했는데 동생이 그곳으로 나를 마중 나왔답니다. 이번 주말을 즐겁게 보내려고 했는데 지갑도, 열쇠도, 차도, 여자친구도 모두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제일 이상했던 것은 내가 돌아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늦은 일요일 오후였는데 1번 고속도로에 도착했을 때 두 승려가 내가 타호로 출발했을 때보다 약5km정도 북쪽으로 더 가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금요일, 월요일, 아니 지난달처럼 똑같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얼굴표정으로 여전히 똑같은 절을 하고 있어요....그런데 지난 금요일 이후 내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내 인생은 뒤죽박죽이 되었는데, 갑자기 그이들이 평화스러워 보였어요.
그 사람들은 뭔가를 깨쳤는지도 모르지요.
나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미키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이기고 지는 것은 마음상태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일요일에 내가 구운 빵입니다. 조심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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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미주현대불교 6월호 ‘이달에 법문난’에 실린 글입니다.
헹슈 비구는 버클리에 있는 GTU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버클리 불교사원의 국장으로 세계종교학회와 연합신학대학에서(종교간)대화를 가르치고 정기적으로 참선 강좌를 지도하고 있다. 특히 관음보살의 유머를 즐긴다.
미국인 승려로 이렇게 수행정진하고 포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불교가 이 미국 땅 저변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공을 들려 옮겨 봅니다.
한국계 불교는 아닌듯하고 옷이 동남아쪽 승복인듯 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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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홍스님! 우연히 카페에 들렸다 스님을 알아 봤어요. 운문사 선배 금타 스님입니다. 훌륭하게 잘 지내시네요. 나는 잠시 미국에 머무는 중인데 이글을 보고 감동 받아 옮겼는데 이곳에서 글을 몇개 가져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글을 올리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네에.. 이글 다른곳에서도 읽었어요.. 또 보아도 또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