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은은 누워 있는 김은선을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았다. 은선의 복부에서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재은은 은선의 목에 손을 짚어 보았다.
맥이 뛰지 않는다. 은선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인자가 된 것이다. 재은은 곧 침착을 되찾고 날카롭게 현실을 인식해 보았다.
(119에 연락해야 한다. 경찰에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의 인생은 끝장나는 것이다. 아무리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의 행위는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판단이 서자 재은은 곧 완전범죄의 실행을 위해 첫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곧 떠오른 생각이 <시체를 없애자>였다.
만약 이대로 시체를 놔두고 은선의 집을 떠난다면, 알리바이를 포함한 모든 정황증거가 그가 범인임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은은 잠시 소파에 앉아 머리를 숙여 두 손으로 감싼 채 온 신경을 다 집중시켜 현 상황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기를 20여분.......
그는 먼저 은선의 시신을 화장실로 옮겼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기고 수돗물로 온 몸에 있는 피를 남김없이 씻어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30여분 동안 그 작업을 하고 나니, 거의 모든 핏자국을 제거할 수 있었다.
경찰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한, 아주 세밀한 수사 활동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수사가 진행되어 가택을 조사해서 핏자국을 채취한다고 해도 범행시점까지 알아내지는 못할 테고, 따라서 알리바이 수사는 실효성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재은은 화장실에서 시신 세척작업을 마치고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9시 15분. 그는 방 안에 있는 대형트렁크를 거실로 옮겨 이불로 동여 맨 뒤 은선의 시신을 그 속에 쑤셔 넣었다. 은선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보아왔던 트렁크였다.
트렁크에 은선의 시신을 넣은 후 재은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세 개의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피 묻은 과도와 옷가지, 그리고 CD였다.
과도는 물로 대충 씻어낸 후 손잡이 부분은 다시 세밀하게 수건으로 닦아 지문을 없앴다.
과도와 피 묻은 옷가지를 트렁크에 쑤셔 넣고 재은은 베란다 문 곁에 나뒹굴어 있는 CD 케이스와 CD 본체를 주워 올렸다.
은선이 집어 던져 베란다 문에 부딪친 후 CD 케이스가 열려지면서 본체가 튕겨져 나왔던 것이다. 묘하게도 CD 케이스와 CD 본체 둘다 CD 본체에 생긴 그 흠집 외에 새로운 손상이 없었다. 아마도 세게 부딪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CD 본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CD 본체에는 확연히 눈에 띄는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살인범으로 만든 불행의 자국이었다.
그 CD를 보다가 재은에게 묘한 감정이 생겼다. 그것은 CD를 은선의 시신과 함께 매장하자는 생각이었다.
비록 이런 최악의 상태까지 맞게된 상황이었지만, 황천길을 가고 있을 은선에게 나의 마지막 애정이 담긴 선물을 선사하자는 다소 불합리한 사고작용이었다.
나의 애틋한 감정이 담긴 작은 선물. 은선은 거부했지만, 저승에서나마 나의 마지막 애정의 선물을 받아 주길 바란다는 뜻에서 그녀의 시체와 함께 매장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재은은 트렁크에 시체와 옷가지, 그리고 CD를 넣은 후, 집 안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최대한 자취가 남지 않게 닦았다.
9시 40분.
재은이 은선의 아파트에 온 것이 8시 30분 경. 은선의 아파트는 모두 열두 동으로 은평구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였다. 그녀의 집은 102동 13층으로 복도식 설계로 된 구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눌렀을 때 재은은 평상심을 되찾았다.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문제될 게 없었다. 재은이 은선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에도 CCTV가 재은의 거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은은 내심 당황하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고 해도 은선의 정확한 사망시각을 알 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12월 12일 8시 30분 경에 은선을 만나고 10시-반드시 10시라고 할 것도 없다-에 돌아갔다고 말하면 된다. 문제는 트렁크인데 그것도 적당히 둘러댈 만한 나름대로의 비책이 있었다.
재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부근에 경비실이 있었지만, 어떠한 눈길도 안 받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단지에서 나와 트렁크를 100미터쯤 끌고 가서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곳은 주차금지구역이 아니라서 몇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재은이 은선의 집을 방문할 때 종종 이용하는 곳이다.
재은은 차를 타고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보통 은선의 집을 방문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었다.
겨울날씨치고는 제법 따뜻한 날이었다. 가는 동안 행인 몇 명과 마주쳤지만, 물론 재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차 뒤 트렁크 문을 연 후 트렁크를 집어넣고 재은은 곧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은선의 시체를 산 속에 파묻을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자신의 집으로 가서 연장을 챙겨야 한다. 하긴 연장이라고 해 봐야 삽만 있으면 될 테지만.......
재은은 안암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해서 삽을 챙겼다. 집에는 부모님과 동생이 있었지만, 잠시 친구를 만난다고 하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하지만 막상 목적지를 어디로 정해야 될지 몰랐다. 역시 서울 근교인 경기도 쪽이 좋겠지만, 재은에게 특별히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10시 50분 경.
(일단 출발하고 보자.)
재은은 경기도 쪽으로 차를 몰았다.
<2>
“여어, 이게 누구야. 너 심재은?”
산 속에서 작업을 마치고 내려와 차량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그 불길한 목소리가 말했다.
가평 한 부락의 초입로. 시간은 3시 무렵. 도대체 이게 웬 지옥의 저승사자의 출현인가.
지옥 문턱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려고 발버둥칠 때 저승사자가 뒤에서 발목을 나꿔챈 느낌이었다.
일대는 적요했다.
재은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가로등 불빛 안쪽으로 마을이 어렴풋이 보였다.
“심재은, 도대체 이 새벽에 웬일이야?”
“아, 실은 볼일이 있어서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재은은 재빨리 머리 속에서 지어내며 말했다.
“볼일? 자네 서울에 살지 않나?”
“서울에 살지. 그런데 춘천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 가는 길이야.”
“여어, 어쨌든 반갑군.”
그 불청객은 바로 재은의 고등학교 동창생 황진석이었다. 재은으로서는 온몸의 피가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아찔한 상황인 셈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황진석의 출현은 그의 목젖을 바싹 마르게 만들었다.
진석이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차인가?”
“음. 그런데 자네야말로 이 시간에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 외할머니댁이 바로 이곳 가평이라서 나 역시 집안일로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네.”
“허허, 그렇구먼.”
“서울로 가는 길이라면서 왜 이곳에 차를 세워 놨지? 그리고 어딜 갔다 오는 건가?”
“하하, 대변이 마려워서....... 마땅히 볼 데가 없어서 말야.”
“생리현상 때문에 그랬었구먼.”
그렇게 말하는 진석의 표정이 왠지 비꼬는 것 같아 보인다.
“근데 자네 웬 삽을 들고 있나?”
진석이 말했을 때야 비로소 재은은 자신이 지금 삽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임기응변으로
“아, 대변을 보고 내려오다가 주운 거야. 누가 분실했는지 버린 건지 모르지만 꽤 쓸만해 보여서 말야.”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가.”
진석의 표정이 여전히 냉소적이다.
재은은 삽을 차 뒷좌석에 던져 넣은 후 진석에게 말했다.
“어쨌든 반갑군. 자네 요즘엔 어떻게 지내나?”
“아, 강남에서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다네.”
“집은 어디지?”
“그대로야. 고등학교 때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있지.”
“그렇구먼. 나 역시 계속 안암동에서 산다네.”
“고등학교 때 그 집 말인가?”
“응.”
진석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을 때 재은의 집에 몇 번 찾아갔었다. 하지만 재은은 진석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친하다면 제법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진석의 반가워하는 모습과 달리 재은은 범죄의 꼬리가 밟힌 듯한 낭패의 심정이었다. 일진이 얼마나 아나 좋았으면 이런 장소에서 동창생을 만난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매우 안 좋은 상황과 맞닥뜨렸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뭐 그렇게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재은이 진석에게 물었다.
“근데 자네 이 시간에 웬 출타인가?”
“잠이 안 와서 바깥바람 한 번 쐬려고 나왔지.”
약간 마른 체형. 키는 껑충하게 크다. 그 점은 고등학교 때와 다름없다.
진석은 고등학교 때 공부는 잘 못했지만, 교우관계는 원만했었다.
“그럼 지금은 제과제빵 기술만 배우고 다른 일은 안 하는 건가?”
“음, 일단 자격증을 취득할 때까지는 기술 배우는 데 최선을 다 하려고. 하하, 서른 세살 먹은 놈이 이제 고작 학원에서 빵 만드는 기술이나 배운다고 비웃겠지?”
“아냐, 나 역시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진데 뭘.”
재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진석이 물었다.
“조그만 출판사에서 영업과장 일을 하고 있네.”
“그렇구먼. 그럼 내일, 아니 오늘도 출근해야 되는 거 아냐?”
“음, 해야지. 실은 수금문제로 춘천에 출장을 갔었는데, 그만 거래처 사람과 술을 먹게 돼서 술 좀 깨고 출발하느라고 이렇게 늦은 거라네.”
“자네 결혼은 했나?”
“아니 아직.......”
“나 역시 노총각일세, 하하.”
그렇게 몇 마디 주고받다가 진석이 말했다.
“어쨌든 반가웠네. 자네 핸드폰 번호나 가르쳐 주지 그래?”
진석의 부탁에 재은은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뇌리에 달라붙었다. 진석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재은은 둘러댔다.
“아, 지금 핸드폰이 고장이라서 수리점에 맡겼어.‘
“핸드폰이 고장이라구?”
진석이 작은 눈에 의아한 빛을 띠우며 말했다.
“음, 자네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되나? 내가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말야.”
재은이 이렇게 말하면서 차 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러자 진석이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내 조만간 연락함세.”
“아, 어쨌든 오늘 만나서 반가웠네. 이런 곳에서 자네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재은과 진석은 인사를 마치고 진석은 부락 쪽으로, 재은은 차를 타고 도로변으로 향했다.
재은은 운전을 하면서 거듭 그 돌발사태에 짜증이 났다.
(하필이면 왜 그런 곳에서 그 자식을 만났을까?)
본래 차를 사람들이 통행이 없는 도로변에 세운 후 시체를 근처 야산에 유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다 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도로 갓길에 세웠다가 불법주차로 자칫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가는 만사 도로 아미타불일 것 같아, 오히려 한적한 부락과 근접해 있는 곳에서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운수 사납게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나다니.......
그리고 더 안 좋은 건 어디까지나 육감이었지만, 진석이 그의 범행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진석은 시종일관 반갑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 왠지 조롱이 묻어나 있는 것 같았다.
은선의 시신을 매장할 때 이미 진석은 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은선의 시신을 매장하는데 확실한 건 몰라도 3시간은 넘었다. 진석이 재은의 차 주변에서 서성인 것이 진석의 말처럼 재은이 작업을 끝내고 막 돌아왔을 때가 아니고, 훨씬 전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재은은 순간적인 기지로 진석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부자연스런 점이 많았던 것이다.
재은을 그런 불쾌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전방을 향해 힘껏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시간은 오전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어떻게 서든지 오늘 회사에는 정시에 출근해야 한다. 재은은 시속 100 킬로미터까지 속력을 내며 경춘가도를 내달렸다.
<3>
재은이 은선을 살해한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재은과 은선은 깊게 사귀었다. 교제기간만도 1년이 좀 넘었고, 육체관계도 수 없이 가졌었다.
둘이 알게 된 계기는 직업적인 관계에서였다. 당시 은선은 신촌에 있는 대형서점에 근무하고 있었고, 재은은 어느 출판사의 영업과장이었다.
은선과 재은은 일주일에 두세 번 꼴로 얼굴을 마주쳤고, 그러는 사이에 차츰 관계가 발전했으며, 마침내 공개적으로 연애를 즐겼던 것이다.
재은은 은선을 처음 사귈 때부터 그녀에게 능력우선주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좀더 과하게 말하면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할까?
은선에게 그런 허영심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은은 그녀가 좋았다. 두 사람은 뜨거운 연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은선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흐르다보니 재은은 은선이란 여자가 아주 간악하게 느껴졌다. 재은은 은선을 평생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은선의 결별선언은 충격과 허탈, 그 자체였다.
은선의 새로운 애인은 현재 천호동에서 막 개업한 치과병원의 의사였다. 은선의 잘 아는 선배언니가 처음 그 남자를 소개시켜 줬고, 두 사람은 점점 남녀관계로서의 구심점을 찾아갔던 것이다.
재은은 분개했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간사할 수 있는가? 재은에게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배신행위였던 것이다.
은선은 두 달 전부터 다니던 서점을 그만 두고 놀고 있었다. 그날도 역시 은선은 밖에 잠깐 산책을 갔다와서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재은이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한 것이 8시 30분 경.
그 비극의 도화선이 된 것은 다름 아닌 CD였다.
그로부터 열흘 전쯤에 은선과 재은은 데이트를 했다. 이미 은선이 결별선언을 한 후였지만, 재은의 간청에 의해 이루어진 데이트였다.
재은의 집 부근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그들은 함께 레코드점에 가서 CD를 한 장 샀다. 재은은 그 레코드점에서 이미 몇 번 물건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요즘 음악계 풍토가 MP3나 CD 복사 문화가 발달하여 음반산업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재은은 아직도 듣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CD를 사서 듣곤 했다.
그날 구입한 CD는 엄정화의 <005. 1999. 06>이라는 앨범이었다.
“요즘 내가 즐겨 듣는 앨범이야. 이미 발매된 지 오래된 앨범인데, 난 <스칼렛>이란 곡이 아주 좋더라구. 한 번 들어 보렴.”
재은은 은선에게 엄정화의 <005. 1999. 06.>을 선물했다. 은선도 음악을 좋아했지만 별로 기쁜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 선물을 받았다.
이미 둘 사이의 관계는 빠르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은은 그 변색된 관계 한 편에서 어떻게 서든지 꺼져가는 애정의 불씨를 되살리려고 다양한 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결국 재은의 은선에 대한 감정은 애착을 넘어 집착이었던 것이다.
“은선아, 우리 다시 새출발해 보는 게 어때?”
“아, 재은씨, 정말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우리 관계는 이제 끝이라니까요. 사랑은 한 사람만의 열정으로 키워나가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인 거라구요.”
은선의 아파트에 찾아간 재은은 치졸하게도 그녀에게 애걸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소한 말싸움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몇 마디 날카로운 감정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재은은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그렇게 울분을 달래다가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화제를 돌린다는 것이 그 CD 얘기였다.
재은이 말했다.
“그때 그 엄정화 CD는 들어봤어?”
“들으려고 했는데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왜”
재은이 따지듯이 물었다.
“며칠 전에 CD를 케이스에서 꺼내서 들으려다가 그만 긁혀가지고 플레이해도 튀어 가지고 재생이 안 되더라구요. 긁혀도 원 재수 없게 한 곡도 못 들을 정도로 완전히 손상됐어요.”
은선의 이 말은 잠재되어 있던 재은의 야만적인 핏줄을 건드리고 말았다.
“김은선, 내 마음이 담긴 선물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다룰 수 있어?”
“그깟 선물 누가 해달랬어요? 자, 도로 가져가라구요, 가져가.”
은선이 그렇게 말하며 CD를 재은을 향해 던졌다. CD는 거실 베란다 문에 부딪쳐 케이스가 벗겨지며 나뒹굴었다.
순간 재은은 격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재은은 주방에 있던 과도를 은선을 향해 휘둘렀던 것이다. 은선은 곧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서는 단말마의 신음소리를 내다가 이내 절명했다.
<4>
은선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것은 그녀가 살해된 후 나흘이 지난 뒤였다. 신고자는 우유배달원으로 신고시각은 새벽 5시 20분경이었다.
우유배달원은 다음과 같이 신고경위를 밝혔다.
“그날 나는 평소와 같이 새벽에 그 여자의 집에 우유를 넣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의혹은 이틀 전부터 생겼었죠. 왜냐하면 그 여자의 집에 우유가 밀리기 시작한 게 사흘 전부터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결코 하루도 밀린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사흘 치나 우유가 밀려 있어 집안에 무슨 변고가 있나 싶었죠. 그래서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망설였죠.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공연히 내가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무슨 재난사고 일 것 같다는 육감이 들어 마침내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했던 겁니다.”
경찰은 수사 결과 은선이 그녀의 아파트에서 실종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몇 가지 확인된 사실로 도출된 사안이었다.
첫째, 아파트 현관문이 열려져 있었다는 점.
둘째, 핸드폰과 지갑이 집안에 있었다는 점.
셋째, 아파트 엘리베이터 CCTV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촬영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범죄성이 개입된 것으로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누군가에 의해 피랍됐을 것이라는 설이 도출됐으며, 좀더 극단적인 가설로 그녀가 아파트에서 살해된 후 유기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경찰은 12월 12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CCTV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12월 12일 밤 10시 경에 웬 남자 하나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녹화됐음을 밝혀냈다.
또다른 수사진은 같은 시간에 은선의 주변인물을 탐문하고 있었고, 곧 최근 은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인물로 심재은을 찾아냈다.
경찰은 엘리베이터 CCTV를 통해 심재은이 12월 12일 오후 8시 30분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3층에서 내렸으며, 그로부터 1시간 30분 후인 10시 경에 트렁크 하나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선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모든 정황이 은선을 납치, 혹은 살해 후 유기- 이 두 가지 가능성 중 그녀의 증발과정을 살펴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범인이 심재은임을 가리키고 있음을 밝혀내고 즉시 심재은을 찾아가 준엄한 취조를 벌였다.
“그날 김은선씨의 아파트를 찾아간 용건이 뭐였나요?”
“별다른 용건은 없었습니다. 은선의 아파트는 여태까지 자주 드나들었으니까요.”
“김은선씨가 얼마 전 결별선언을 했다던데.........?”
“네, 그렇습니다. 나는 물론 깨끗이 받아드렸죠.”
“근데 왜 그날 김은선씨를 찾아갔죠?”
“뭐 꼭 남녀가 연인관계에 있어서만 만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옛정도 있고 해서 찾아갔던 겁니다.”
“그날 말다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말다툼이요?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당신은 그날 이후 김은선씨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추궁에도 재은은 시종일관 태연하게 답변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CCTV에 찍힌 트렁크를 가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거론하며 이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재은의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재은은 역시 태연함을 잃지 않고 미소까지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트렁크요. 그날 은선이가 내게 예전에 쓸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백화점에서 구입했는데 괜히 샀다고 하더군요. 집 안 공간만 차지하고 무용지물이라서 처분하려고 한다고 하길래 그럴거면 내게 달라고 했죠. 그래서 끌고 내려와 차에 실어 집까지 운반하려고 하는데, 참 사람의 마음은 묘하죠. 생각해 보니 나 역시 트렁크가 있어 봤자 쓸 데가 없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도중에 내려서 트렁크를 그냥 길거리에 버렸죠.”
“그 말을 지금 우리 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하하, 믿고 자시고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경찰은 재은의 말도 안 되는 답변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럼 어디다 버렸습니까?”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마 집에 가는 도중에 버렸을 겁니다.”
경찰은 은선을 살해한 범인이 재은이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으나,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할 수는 없었다. 재은이 은선을 살해했다는 뚜렷한 확증이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흉기문제가 그랬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살인사건의 인과법칙이 성립되지 않아 용의자를 구속할 사유가 없는 것이다.
“그날 당신은 김은선씨의 아파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간 다음 다시 차를 타고 외출을 해서 다음날인 13일 아침나절에야 집으로 돌아왔다죠?”
“네, 그렇습니다.”
“그 깊은 한밤중에 차를 타고 나가 장장 7,8시간 동안 무얼 했죠?”
“그냥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경찰은 더 이상 재은에게 추궁하지 않았다. 추궁해 보았자 수사는 원점을 맴돌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는 더욱더 진행되어 재은의 범행을 입증할 단서를 찾기 위해 모든 수사관이 투지를 불태웠다.
<5>
재은은 한참 동안 그 CD를 들고 쳐다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은선의 시체와 함께 매장했던 그 CD였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 CD는 은선의 시체와 함께 트렁크에 집어넣었었지 않던가? 그리고 그 트렁크는 산 속에 묻었고.......)
005.1999.06.......
엄정화의 5집 앨범.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은선에게 선물한 CD였다. 그도 그럴 것이 CD본체 내면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훼손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선이 CD를 조심성 없이 다루다가 그만 흠집을 냈다고 한 것으로 재은을 범죄의 수렁에 빠지게 만든 징표 같은 것이었다.
재은은 일요일인 그날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 거의 저녁나절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 불을 켜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야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CD가 들어온 것이다.
재은은 곧 누가 이 CD를 꺼내 놓았지, 생각하며 CD꽂이를 살펴보는 순간 공포감이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CD꽂이에는 분명히 엄정화의 <005.1999.06.>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CD꽂이에는 한 50장 정도 되는 CD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 <005.1999.06.>도 분명히 꽂혀져 있었다.
그럼 책상 위에 있는 이 CD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재은이 외출한 사이 그의 방에 들어와 CD를 놓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협박의 신호탄이었다.
재은은 침착을 되찾아 CD꽂이에 있던 CD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CD를 비교해 보았다.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나는 멀쩡했고, 하나는 CD내면에 칼자국같이 긴 상처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재은의 뇌리에 이 사태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장본인이 떠올랐다.
황진석.
그 가평의 한 부락 근처에서 범행 도중 우연히 만난 인물, 진석은 나의 범행을 낱낱이 목격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때 작업을 마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때 진석은 내 차 주변을 거닐다가 나와 마주쳤던 것이다. 진석은 내가 은선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떠나자 매장지로 가서 흙을 파내어 트렁크를 발굴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일이 적당히 흐르자 이런 식의 협박을 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진석은 어떻게 나의 집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재은의 집은 단독주택이었다. 대문은 항상 닫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진석은 어떻게 방 안까지 침입하여 CD를 놓고 사라졌단 말인가?
고등학교 시절 재은은 진석의 집에 가보지 않았지만, 진석은 재은의 집에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재은의 집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재은에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재은은 곧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오늘 누나하고 지영이가 왔었다죠?”
“응, 그런데 왜 그러냐?”
“혹시 제 방에 누나나 지영이가 들어가지 않았어요?”
“누나는 들어간 적 없고, 지영이가 들어갔었지, 아마.”
“얼마나 오래 있었죠?”
“글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와서 네 방에서 잠깐 잠을 잤어. 누나가 6시가 넘어서 자고 있는 지영이를 깨워 데리고 갔단다.”
“지영이가 친구 집에서 놀다가 돌아온 시간이 몇 시쯤이죠?”
“한 5시.......”
재은은 어머니에게 얘기를 전해 듣고 곧 누나네 집에 전화를 걸어 지영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지영아, 삼촌이다.”
“네, 삼촌. 웬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너 오늘 우리 집에 왔다가 내 방에서 자고 갔다면서?”
“네.”
“음, 너 혹시 삼촌 방에서 엄정화 CD 못 봤니?”
“아, 네. 봤어요, 그런데 왜.......”
“그 CD가 네가 삼촌 방에 들어올 때 분명히 있었니?”
“아니 저어.......”
“사실대로 말해 봐, 어서.”
지영은 재은이 언성을 높이자 겁을 집어 먹고 우물우물했다.
“그거 제가 가져다 논 건데요.”
“네가 가져다 놓아?”
“네, 그러니까 그게.......”
“너 그 CD 어디서 났니?”
“그게 저...... 어떤 아저씨가 줬는데요.”
“어떤 아저씨?”
“네.......”
“일의 자초지종을 똑똑히 말해 보렴.”
재은은 애써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제가 오늘 친구 집에 갔다가 삼촌집 밖에서 벨을 누르려고 서 있었거든요. 근데 어떤 아저씨가 오더니 ‘너 여기 사니?’ 이렇게 묻더라구요. 그래서 전 ‘네, 그런데 누구세요?’ 했죠.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혹시 여기 심재은이라는 사람 안 사니?’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네, 제 삼촌인데요. 그런데 누구세요?’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 내가 마침 잘 왔구나. 그래 삼촌 안에 계시니?’ 하길래 잘 모르겠다고 하고 ‘무슨 일이세요?’ 하고 되물었죠. 그러자 그 사람이 엄정화의 CD를 저한테 주면서 ‘삼촌에게 전해주렴. 그럼 잘 있거라.’ 하고 가버렸어요.”
“그래...... 그렇.......구나.”
이번에는 재은의 목소리가 주춤주춤했다.
재은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니?”
“거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약간 마르고 키가 무척 크다는 것 밖에.......”
“아, 알았다. 밤늦게 미안했다. 잘 자렴.”
재은은 전화를 끊고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뜻밖의 사태에 아연해졌다.
그 부락 부근에서 맞닥뜨린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만사가 뒤틀려 버린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 자식이 그런 놈일 줄이야....... 경찰에 알리지 않고 협박을 하다니.......
재은은 그 CD를 또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영은 우리집에 자주 오는 편이었지만 내 방에는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 CD와 똑같은 CD가 내 CD꽂이에 꽂혀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지영은 별 생각없이 CD를 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잠을 잤던 것이리라.
그때 문득 재은의 뇌리에 감겨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황진석을 살해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6>
재은은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10분.
주위는 이따금씩 이지만 행인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을 그렇게 잡은 것은 진석의 통학시간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진석은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제과제빵 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고 8시 정도나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약속장소는 XX 고등학교 정문 앞. 바로 재은과 진석이 다녔던 학교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 이제 곧 진석이 나타날 것이다. 이틀 전 재은은 진석에게 한 번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고, 진석은 흔쾌히 수락했던 것이다.
재은이 진석과 가평 부락에서 만났을 때 뭔가 조금 묘한 직감 같은 것이 있어서 핸드폰을 수리중이라고 둘러댔거니와, 그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한 직감이었나, 하는 생각에 재은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진석이 재은에게 핸드폰으로 연락한 후 살해당하면, 경찰은 진석의 핸드폰에 입력된 모든 전화번호를 탐문조사할 것이고, 의당 재은에게 수사의 초점이 맞추어질 터였기 때문이다. 재은은 진석에게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재은은 범행도구로 망치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 망치는 가방 안에 숨겼거니와, 이제 곧 단순한 <연장>이 <흉기>로 변하는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진석은 8시 15분경에 나타났다. 진석은 옅은 회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한쪽 어깨에 메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 오래 기다렸나? 조금 늦었구먼.”
진석이 송구스런 기색으로 첫마디를 던졌다.
“아니, 나도 방금 왔네.”
재은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진석이 말했다.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해야지?”
(허허, 이 자식 정말 뻔뻔스럽군.)
재은은 진석의 천연덕스런 말투에 적개심이 일어났다.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려무나. 이제 곧 너를 황천길로 보내줄 테니.)
“나는 식사를 하고 나왔어. 난 무엇보다 자네 집에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우리 집엘?”
“응.”
“우리 집에 가서 뭐하자는 거지?”
“아니,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는 게 아니라, 자네 집을 알아 두고 싶어서 그래. 여기서 가깝지 않나?”
“한 20분 정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 먼저 자네 집에 갔다가 근처에서 술을 마시는 거야.”
“그러지 뭐.”
재은과 진석은 곧 진석의 집으로 향했다.
진석의 집까지 가는 동안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재은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진석의 집까지 가는 동안 진석은 재은에게 서로 연락이 끊긴 이후, 살아온 행적에 대해 물어왔고, 재은은 숨김없이 간단명료하게 대꾸해 주었다.
재은은 만약 진석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땅한 범행 장소를 찾지 못할 경우 어떻게 서든지 진석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한 후, 다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진석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만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만약 진석이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에게 친구가 집 앞에 있다, 라고 말하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아직도 멀었나, 진석?”
“아, 이제 백 미터 정도만 가면 돼.”
기회는 그 대화를 나누는 순간 찾아왔다. 주변에 사람그림자가 전혀 비추지 않을 때, 재은은 서둘러 진석 몰래 서류가방에서 망치를 꺼내 앞서 가는 진석의 후두부를 난타했다. 진석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이내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재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재빨리 망치를 서류가방에 도로 집어넣고 왔던 길을 성큼성큼 걸어 되돌아갔다.
<7>
동성동 한 주택가에서 웬 남자 하나가 머리에 온통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숨져 있다는 인근 주민의 신고가 관할경찰서에 접수된 것은 12월 21일 8시 30분경. 살인사건임이 밝혀지자 경찰은 곧 수사에 착수했다.
일차 감식소견에 의하면,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절로 사망한 지 채 1시간도 안 된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속속 밝혀졌고, 그 중에 범인의 윤곽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이내 포착되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조사한 것인데, 그것이 범인색출의 단서가 될 줄은 수사요원들조차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단서란 살해된 진석의 가방에서 나온 한 장의 CD였다.
엄정화의 <005.1999.06.>....... 바로 제과제빵 교재와 함께 들어있던 CD였다.
그것은 새 CD로 레코드점의 상호와 전화번호가 디자인된 검정 비닐봉투에 담겨져 있었다.
일단 경찰은 자택에서 불과 백 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살해당한 진석의 가족들을 상대로 취조를 벌였는데, 그 CD에는 다소 기이한 곡절이 있었다.
진석의 가족은 그의 모친과 형, 그리고 누나가 전부였는데, 그 중 누나는 결혼한 뒤 분가했고, 형은 결혼을 했지만 그냥 본가에서 아내와 자식과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 결과 그 엄정화의 CD는 진석이 친조카-형의 딸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석의 여조카인 황성숙은 현재 중학교 2학년생이었는데, 며칠 전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수사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며칠 전에 친구들이 저의 집에 놀러왔었어요. 모두 세 명이었는데, 우린 컴퓨터 게임을 하며 한참 재미있게 놀았죠. 그런데 그 중에 한 친구가 전에 저에게 CD를 한 장 빌려줬었어요. 빌려준 CD는 Sweet Box라는 신세대 해외 댄스그룹의 CD였는데, 컴퓨터 게임을 끝내고 그 CD를 듣다가 그만 제가 CD에 흠집을 내고 말았어요. 제법 많이 긁혀서 CD에 수록된 몇 곡이 플레이 도중 심하게 틔더라구요.
미안하다고 깊이 사과했는데 그 친구는 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CD중에 아무 CD나 달라는 거였어요. 제법 친한 친구인데 저의 사과를 거절하고 제 CD를 한 장 가져갔던 거예요. 저는 무척 속이 상했죠. 어떻게 친한 친구 사이에 그렇게 악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제가 그 친구에게 준 CD가 바로 엄정화의 <005.1999.06.>이었어요. 전 CD가 한 20장 정도 있거든요. 모두 다 아끼는 음반들이죠. <005.1999.06.>도 그 중 하나였죠.
제가 그 얘기를 삼촌에게 했던 거예요. 삼촌은 그런 친구는 사귈 가치조차 없다며 저를 위로해줬죠. 그리고 어저께 삼촌이 살해당한 거예요. 전 그 엄정화의 CD가 삼촌이 저에게 주려고 구입한 것이 틀림없다고 봐요.
그런데....... 그런데 묘한 건 어저께-바로 삼촌이 살해당할 때쯤 해서 그 친구가 저희 집에 찾아왔는데, 자신이 아끼는 모 가수의 CD를 가져온 거예요. 그 친구는 그러더군요. ‘야, 그때는 내가 너무 치사했다, 사과한다.’ 저는 쌓였던 스트레스가 싹 풀리더군요.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삼촌이 집 근처에서 변을 당한 거죠.
글쎄 이번 사건과 관련을 없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엄정화의 CD는 삼촌의 저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에요.“
성숙의 얘기를 들은 수사관들은
“허허, 그것 참 소설 같은 얘기로군. 한 장의 CD를 둘러싸고 친구지간에 희비극이 교차하는 감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구먼.”
황진석의 조카에게 얘기를 전해들은 이튿날, 수사진은 황진석이 엄정화의 CD를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레코드점으로 가서 수사 활동을 펼쳤다.
수사진이 찾아가자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맞아주었다. 안경을 낀 눈이 매우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결코 미모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수사진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맞아요. 이 분이 그저께 저희 가게에서 엄정화의 CD를 사 갔었어요.”
형사들이 내민 황진석의 사진을 보고 여주인은 이내 말했다.
“이 가게에 올 때 이 사람 혼자 왔나요?”
“네.”
“전에도 아주머니 가게에서 물건을 산 일이 있었나요?”
“아뇨, 처음이었어요.”
“그렇군요.”
수사진은 막상 취조를 시작했지만, 사건본질적인 질문은 별달리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실상 진석이 CD를 산 것은 이번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다만 레코드점에 혼자 온 것으로 보아, 진석이 누군가와 같이 집으로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결코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지금까지의 견해 역시 진석이 혼자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둔기로 머리를 맞아 살해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별 수확 없이 돌아가려고 수사진이 발길을 돌릴 때 여주인이 불러 세웠다.
“형사님들.”
“왜 그러시죠?”
“실은 한 가지 좀 묘한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해 보시죠.”
“다른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제가 사는 아파트로 형사들이 찾아왔었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수사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묻자 여주인은
“그게 어떻게 된 거냐 면요, 제가 사는 집이 응암동 아파트인데, 며칠 전에 저희 아파트에서 어떤 여자 하나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어요. 참고로 저는 105동에 살고 있고 그 실종된 여자는 102동에 살고 있었죠. 그러니까 그게 한 일주일 전쯤이었는데, 형사들이 그 실종된 여자사진을 보여주며 아파트 각 세대마다 탐문을 하고 갔었어요. 저도 그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는 긴가민가했어요.”
“뭐가 긴가민가 했다는 거죠?”
“그 실종된 여자가 어떤 남자와 같이 저의 가게에서 CD를 한 장 샀었던 것 같았거든요. 근데 그 여자인지 아닌지 확실치가 않고, 또 공연히 나섰다가 경찰에게 시달릴 것 같기도 해서 경찰의 탐문조사 때 그냥 그런 여자 모른다고 했었답니다.”
여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안경 속의 두 눈에 겸연쩍은 빛을 띠웠다.
“그래 그 실종된 여자가 어떤 남자와 같이 이 가게에서 CD를 샀단 말씀이죠?”
“네, 그런데 최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실종된 여자가 아파트에서 살해당한 후 유기됐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범인은 그녀의 애인이라는 거죠.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체포를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전 대번에 그 애인이 그때 제 가게에서 그 여자와 함께 CD를 샀던 남자가 아닐까, 생각했죠. 하지만 전 그 사실을 경찰에 알리지 않았어요. 솔직히 확실하지도 않았고, 또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해도 다만 CD를 산 것이 수사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거든요.
“음...... 결국 그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남자가 여자와 함께 CD를 샀다?....... 그 남자가 그 이전에도 이 가게에서 물건을 산 일이 있었나요?”
“네, 여자는 처음 왔었지만, 그 남자는 한 네다섯 번 왔었어요.”
“하지만 정말 아주머니 말씀처럼 수사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범인을 못 잡았다면 중요한 단서가 될 테지만 범인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라면.......”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그럼 또 뭐가 있나요?”
“그 실종된 여자와 남자가 산 CD가 바로 엄정화의 <005.1999.06>이었어요.”
“아아....... 이거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실종, 아니 살해 후 유기된 여자가 살해되기 며칠 전 범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레코드점에서 구입한 CD와, 그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나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죽기 직전에 구입한 CD가 같은 엄정화의 <005.1999.06>이다...... 아아.”
수사진은 수사의 그물에 뭔가 커다란 것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으니.......
김은선 실종사건 수사본부와 황진석 피살사건 수사본부가 서로 정보를 교류한 지 얼마 후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김은선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심재은과, 김은선이 실종된 후 며칠 있다가 살해된 황진석이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에 다녔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현재도 심재은의 집과 황진석의 집이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이라는 것도 조사과정에서 드러났다.
한마디로 <005.1999.06.>이 두 사건의 공통분모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수사진은 다소 막연하지만, 황진석을 살해한 범인이 심재은일지도 모른다, 라는 감성적인 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황진석 피살사건에서 심재은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던 중 심재은의 알리바이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수사진을 안타깝게 만든 것은 이번에도 다만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뿐이지 다른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난 그날 퇴근 후 9시까지 산책을 하다가 집에 들어갔습니다.”
수사진의 격렬한 취조에 재은은 이 말만 되풀이했다.
또한 심재은이 황진석을 살해했다면 도대체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것도 밝혀내야만 하는 것이 수사의 당면과제였다. 결국 황진석 피살사건은 김은선 실종사건과 마찬가지로 범인을 코앞에 두고도 별다른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경찰의 속을 태우던 두 사건이 어이없게 하루아침에 해결되어 버렸으니.......
<8>
황진석이 살해되고 닷새가 지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경찰서에 찾아왔다.
유지영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자아이는 경찰한테 중대한 신고사항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숙이 삼촌은 우리 삼촌이 죽인 거예요. 제가 그때 그 사건현장에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우리 삼촌이 살해한 사람이 성숙이의 삼촌인지 몰랐어요. 다음날 성숙이가 학교에서 얘기를 해서 알았죠. 그런데도 이제야 신고한 이유는 성숙이 삼촌을 살해한 사람이 제 삼촌이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역시 사람을 죽인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돼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전 그날 모그룹의 CD를 돌려주려고 성숙이네 집에 들렀어요. 성숙이에게 사과를 하고 CD를 건네줬죠. 그간 쌓였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기분이 상쾌해졌답니다. 그런데 성숙이의 집을 나서서 저의 집을 향해 가려고 하는데, 그 골목길에서 두 남자가 뒤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처음에는 싸움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골목모퉁이에서 엿보니 어떤 사람이 망치로 다른 사람의 머리통을 마구 갈기는 거였어요. 더욱 놀란 것은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우리 삼촌이라는 사실이었죠.
삼촌은 그렇게 사람을 망치로 때리고 나서 곧바로 제가 서 있는 반대방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어요. 저는 놀라서 일단 망치로 맞은 사람에게 다가갔죠. 그 사람은 머리가 피로 범벅이 된 채 죽었더군요.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런 기억을 더듬을 겨를이 없었고, 일단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전 오던 길을 되돌아갔어요.
그 길은 처음 가보는 길이었는데 계속 가다보니 차도가 나오더라구요. 저는 무작정 발길이 가는 대로 가다가 결국 집에 도착했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죠. 저는 요 최근 삼촌이 사귀던 여자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취조를 몇 번 받았다고 알고 있었어요. 저는 삼촌이 절대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그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거예요. 그러던 중에 삼촌이 죽인 사람이 누군지 기억 속에 떠올랐죠. 바로 며칠 전 삼촌집에 들렀을 때 찾아왔던 키가 크고 깡마른 아저씨.......
전 그때 당시 삼촌이 왜 그렇게 전화까지 해서 나에게 화난 목소리로 그 아저씨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었나 어렴풋이 이해가 가더라구요. 근데 저는 그때 삼촌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그 엄정화의 CD는 성숙이 삼촌이 준 것이 아니라 제가 그날 성숙이에게서 빼앗아 온 거였어요. 근데 삼촌한테 그만 저의 추잡한 행위가 밝혀질 것 같아 있지도 않은 말을 꾸며낸 거죠. 저는 성숙이한테 엄정화의 CD를 빼앗아 와서 깜빡 잊고 삼촌 방에 놓고 왔던 거예요. 삼촌한테는 저의 추잡한 행위를 들킨 것 같아 성숙이 삼촌이 저에게 심부름시킨 것처럼 꾸며낸 거죠.
그날 성숙이 삼촌은 제 삼촌집 앞에서 저에게 ‘혹시, 여기 심재은이라는 사람 안 계시니?’ ‘지금 안 계시다고?’ ‘음, 잘 알았다. 고맙다.’ 이 말만 하고 돌아갔어요. 하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은 건 삼촌이 왜 그토록 CD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거예요.“
지영이 고백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경찰은 심재은을 살인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그토록 혐의를 부인하던 재은도 자신의 조카가 마침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은선을 살해하고 가평의 한 숲 속에 매장했다는 것, 그곳에서 황진석을 만난 것, 진석이 그 사건을 미끼로 협박을 해서 진석의 집 근처에서 그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모두 자백했다.
하지만 재은도 그 일련의 사건들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엄정화의 CD에 대해 조카 유지영의 얘기를 전해 듣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었다.
재은은 범행일체를 자백하고 경찰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전 중학생인 조카만도 못한 인간입니다. CD 한 장 때문에 사귀던 여자를 살해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시 친구의 목숨까지 앗아갔으니...... CD를 빼앗아왔다가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친구에게 찾아가 과오를 인정하고 대가물로 다른 CD를 선사한 조카만도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한편 유지영이 친구인 황성숙에게 반강제로 취득한 엄정화의 CD에 있는 흠집은 지영이 자신이 낸 상처라고 고백했다.
“전 성숙이한테서 엄정화의 CD를 빼앗아왔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여 멀쩡한 CD를 못 쓰게 흠집을 냈어요.”
그것이 재은에게는 영락없이 자신이 처음에 은선에게 선물했던 그 CD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끝으로 재은은 경찰에게 엄정화의 <005.1999.06.>이 이제 곧 저승에서 만날 은선과 자신을 위한 진혼음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기분이 매우 유쾌하다고 말했다-끝-
이 작품을 읽고 처음부터 '무리..무리..무리..'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군요. 설정에서 무리가 오면 그 무리한 것을 작가도 이미 머리속으로 알기 때문에 자꾸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정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게 되죠. 그런데 그 무리한 설정이 하나도 아니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공감이 어려운 이야기가 되고 마는게 아닌가 싶군요. 무리한 설정들을 한번 짚어보자면 1. 헤어지자는 애인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그 시체를 감추기 위해 가평의 한 야산에 묻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에 그곳에서 동창을 만납니다. 재은도 진석도 활동무대가 아닌곳에 그것도 새벽3시에 그곳에서 만날 확률은..?
2. 조카가 친구집에서 가져온 CD가 하필이면 엄정화의 그 시디. 3. 조카의 친구가 하필이면 진석의 조카? 4. 재은의 방에 시디를 두고온 조카가 하필이면 그 시디에 흠집을 냈다? (맘이 찜찜해서 흠집을 냈다고 했는데, 맘이 찜찜하면 시디를 돌려주러 가지 않았을까요?) 5. 하필이면 삼촌이 누군가를 죽이는 그 현장에 조카가 갔다? 6. 재은이 은선과 함께 시디를 산 가게와 진석이 시디를 산 가게가 같은 곳? 7. 이 주인아줌마는 엄정화시디를 산 사람은 다 기억하고 있다? 8. 이 아줌마는 은선의 실종과 관련해 소문만으로 경찰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애인이 범인인데 시체를 유기했을것이다 증거가 없어서 경찰이 못잡고 있다..)
더구나 자기동네 사람의 사건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진석의 살인사건에서 입을 열었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까 싶군요. 9. 조카가 우연히 둘러대는 거짓말이 하필이면 진석처럼 보이는 삼촌친구가 와서 주고간 것이라고? 10. 조카가 친구에게 찾아갈 정도의 시간(저녁 8시넘는 시간)에 골목길을 가다가 사람을 죽인다? 짧은 이야기속에 대충 추려도 이정도의 무리한 설정이 있습니다. 한두가지 무리한 설정이라면 수습하고 넘어갈수 있겠지만 이정도라면 아마 독자들이 '말도 안돼'라고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 몇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설정처럼 한동네 가게를 이용할 정도로 가까이 사는 곳에서 일어난 실종사건과 살인사건이라면 굳이 두개의 관할이 아니라 하나의 경찰서관할구역이 아닐까 하는 점. 그리고 수사본부는 왠만해서는 잘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도 경찰서에서가 아니라 지방경찰청 산하에서 수사본부가 운영됩니다.서울시경 취재때 물어보니 수사본부를 설치하는 경우는 유괴사건이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인 살인사건(화성연쇄사건이라든지)등의 경우라고 합니다. 그러니 실종사건에 수사본부 설치는 역시 무리입니다. 이런 부분은 취재를 통해 좀 더 정확히 설정해야하는 부분이겠죠.
소설속에서 정작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런 무리한 설정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군요. 어쩌면 재은이 진석에게 들킨 (혹은 재은이 들켰다고 오해한) 그 시점에서 출발해서 재은이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진석을 만나 유도심문을 하거나 해서 또다른 오해로 결국 그를 살해하기 까지의 재은의 불안하고 공포에 질린 심리쪽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하는 바가 조금 더 살지 않았을까 싶군요. (설마 이렇게 사건이 풀릴줄 몰랐지? 하는 반전을 노린 소설로 쓰신건 아니겠죠? ) 그리고 딱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소설이든 영화든 중요소품으로 나오는 것은 (여기서는 엄정화의 시디가 되겠죠)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성격, 사연, 상황등을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게 좋습니다. 이를테면 재은이 은선에게 만난지 100일째되는 날 준 선물이라든지, 재은이 직접 녹음한 시디라든지, 아니면 둘을 만나게 한 특별한 시디라든지.. (사족 한가지 더. 음..삼촌이 좋아하는 엄정화..과연 조카도 좋아할지.. ^^ 뭐 취향의 문제겠지만 이런 점도 고려한다면 좀 더 치밀한 작품이 되겠죠.)
첫댓글 헉..한달만에 두편을... 꼼꼼히 읽어볼께요..^^
이 작품을 읽고 처음부터 '무리..무리..무리..'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군요. 설정에서 무리가 오면 그 무리한 것을 작가도 이미 머리속으로 알기 때문에 자꾸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정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게 되죠. 그런데 그 무리한 설정이 하나도 아니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공감이 어려운 이야기가 되고 마는게 아닌가 싶군요. 무리한 설정들을 한번 짚어보자면 1. 헤어지자는 애인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그 시체를 감추기 위해 가평의 한 야산에 묻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에 그곳에서 동창을 만납니다. 재은도 진석도 활동무대가 아닌곳에 그것도 새벽3시에 그곳에서 만날 확률은..?
2. 조카가 친구집에서 가져온 CD가 하필이면 엄정화의 그 시디. 3. 조카의 친구가 하필이면 진석의 조카? 4. 재은의 방에 시디를 두고온 조카가 하필이면 그 시디에 흠집을 냈다? (맘이 찜찜해서 흠집을 냈다고 했는데, 맘이 찜찜하면 시디를 돌려주러 가지 않았을까요?) 5. 하필이면 삼촌이 누군가를 죽이는 그 현장에 조카가 갔다? 6. 재은이 은선과 함께 시디를 산 가게와 진석이 시디를 산 가게가 같은 곳? 7. 이 주인아줌마는 엄정화시디를 산 사람은 다 기억하고 있다? 8. 이 아줌마는 은선의 실종과 관련해 소문만으로 경찰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애인이 범인인데 시체를 유기했을것이다 증거가 없어서 경찰이 못잡고 있다..)
더구나 자기동네 사람의 사건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진석의 살인사건에서 입을 열었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까 싶군요. 9. 조카가 우연히 둘러대는 거짓말이 하필이면 진석처럼 보이는 삼촌친구가 와서 주고간 것이라고? 10. 조카가 친구에게 찾아갈 정도의 시간(저녁 8시넘는 시간)에 골목길을 가다가 사람을 죽인다? 짧은 이야기속에 대충 추려도 이정도의 무리한 설정이 있습니다. 한두가지 무리한 설정이라면 수습하고 넘어갈수 있겠지만 이정도라면 아마 독자들이 '말도 안돼'라고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 몇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설정처럼 한동네 가게를 이용할 정도로 가까이 사는 곳에서 일어난 실종사건과 살인사건이라면 굳이 두개의 관할이 아니라 하나의 경찰서관할구역이 아닐까 하는 점. 그리고 수사본부는 왠만해서는 잘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도 경찰서에서가 아니라 지방경찰청 산하에서 수사본부가 운영됩니다.서울시경 취재때 물어보니 수사본부를 설치하는 경우는 유괴사건이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인 살인사건(화성연쇄사건이라든지)등의 경우라고 합니다. 그러니 실종사건에 수사본부 설치는 역시 무리입니다. 이런 부분은 취재를 통해 좀 더 정확히 설정해야하는 부분이겠죠.
소설속에서 정작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런 무리한 설정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군요. 어쩌면 재은이 진석에게 들킨 (혹은 재은이 들켰다고 오해한) 그 시점에서 출발해서 재은이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진석을 만나 유도심문을 하거나 해서 또다른 오해로 결국 그를 살해하기 까지의 재은의 불안하고 공포에 질린 심리쪽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하는 바가 조금 더 살지 않았을까 싶군요. (설마 이렇게 사건이 풀릴줄 몰랐지? 하는 반전을 노린 소설로 쓰신건 아니겠죠? ) 그리고 딱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소설이든 영화든 중요소품으로 나오는 것은 (여기서는 엄정화의 시디가 되겠죠)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성격, 사연, 상황등을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게 좋습니다. 이를테면 재은이 은선에게 만난지 100일째되는 날 준 선물이라든지, 재은이 직접 녹음한 시디라든지, 아니면 둘을 만나게 한 특별한 시디라든지.. (사족 한가지 더. 음..삼촌이 좋아하는 엄정화..과연 조카도 좋아할지.. ^^ 뭐 취향의 문제겠지만 이런 점도 고려한다면 좀 더 치밀한 작품이 되겠죠.)
하하, 일단 비평 자세히 해 주셔서 감사하구요. 뭐 비평이란 게 다 약점잡기라고 할 수 있으니 달게 받아드리겠습니다. 다만 레코드 가게 여주인이 엄정화 시디 사간 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결코 억지설정은 아닌 듯 싶네요. 장사꾼들은 의외로 자신의 손님을 잘 기억한답니다.
음.. 비평이란게 다 약점잡기라..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새벽의 서너시간을 투자해가며 읽고 글을 남긴 제가 참 뭐 한건가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