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님이 ‘부심이의 엄마생각’을 낼 때 표지 부탁을 했어요. 못 한다 했지만 어떻게 표지를 그리게 되었지요. 표지를 그리니까 선생님이 술 한 잔 산다 하셔서 나갔죠. 술을 마시며 책 이야기를 나누다, 삽화를 그려 재판을 내는 게 어떠냐는 말씀에 어떻게 그리게 된 거에요. 2005년부터 꼬박 3년동안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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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철 화백 |
신학철 화백은 ‘부심이의 엄마생각’의 삽화를 그리게 된 이유를 순전히 술 한 잔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렇진 않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시대의 이야기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도 많고 해서 문자로만 된 책보다는 그림이 어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지나가는 말에 괜히 감동받았다고 이야기했다가 그리게 된 겁니다.”
'부심이의 엄마생각'은 백기완 선생의 어릴 적 이야기 43편을 엮은 책이다. 부심이는 백기완 선생의 어릴 적 덧이름(별명)으로,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의 옷, 그것을 떡하니 입고 눈보라 치는 허연 뜰에 나설 것이면 마치 꽁꽁 얼붙은 겨울을 한사위로 갈라치는 새싹 봄빛 같이 되는 거라. 그렇게 살라고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백기완 선생은 "나이 일흔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애들처럼 어머니를 그리는 나의 피눈물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눌러도 눌러도 어쩔 수 없이 솟구치는 피눈물, 그 얼룩진 자욱"이라고 털어놓았다.
신학철 화백은 이 글 43편 중 영감이 떠오르는 그림 30여 점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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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2. 130*165.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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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심이1. 45*53.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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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당1. 45*53.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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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에 떨어진 엿은 멋는 게 아니다. 45*53. 2006 |
“삽화니까 펜으로만 그리는 것보다는 유화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본격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50년대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그린 건데, 우리의 정서, 지나간 이야기를 그린 것이고,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신학철 화백은 고향 김천으로 내려가 어릴 적 고향에 얽혀 있는 사연들을 그려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신학철 화백은 8,90년대 민중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민중미술가이다. 잘 알려진 ‘모내기’는 아직도 검찰에 압류되어 있다. 2004년 10월 국정감사 때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이 “유엔 인권위도 반환을 권고한 그림 신학철의 모내기를 돌려줄 수 없느냐”고 묻자, 송광수 총장이 “그 그림은 북한을 풍요롭게, 남한을 피폐하게 그리고 있고, 이적 표현물로 확정 판결을 받은 물건을 굳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후 진척이 없다.
“80년대는 현장이 있었죠. 시위나 집회나 강연회나 이런 것들이 있었죠. 80년대에는 거기에 맞추어서 그림을 그렸어요. 지금 지나와서 보니까. 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고, 80년대와 같은 시위문화가 바뀌게 되고 현장이 사라진 거죠.”
지금도 시위와 집회와 강연회는 있지만 80년대의 현장에서 80년대 민중미술의 영감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 상황이 재연되지는 않는다. 한 시대를 훌쩍 뛰어 넘은 지금,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둔 건 아니라고 했다.
“앞으로는 (80년대의) 현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하고 직접 만나야 해요. 지금 현재로는 대중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 아니겠어요. 내용이 달라진 것은 아니고 대중과 어떻게 만나는가, 어떻게 다가서는가가 남는 문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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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심이2. 45*53.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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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참바위. 200*122.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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