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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1 ~ 11절 환난을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
당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배척도 받고 공격도 받는 그런 처지에서 사도 바울 자신의 아픔을 담아낸 성경입니다. 그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 귀한 은혜의 말씀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고린도후서를 이제 읽어가면서 이 어려운 때를 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위로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지만 교회 안에는 문제가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지금도 신학교도 있고 성경도 있고 목회자들도 있고 늘 좋은 설교도 들을 수 있는 지금도 교회들마다 시험도 어렴도 있잖아요.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이제 처음 세워진 교회에요. 그때 당시에는 성경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목회자도 없고 그러니 얼마나 어려움과 혼란이 많았겠습니까!
그랬던 고린도교회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의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그 교회에 보냅니다.
그 교회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에 대한 대답을 해 준거죠.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 안에는 굉장히 강한 성격의 교인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그 어려움이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하게 되어야 했습니다.
사실 전도여행을 갈 곳이 많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또 고린도로 가는 일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그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방문을 했는데 사도 바울 앞에서도 사도 바울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그런 이들을 고린도교회에서 만납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참으로 어려움을 겪는거죠.
그 짧은 시간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 고린도교회에만 있을 수 없는 형편이라 또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곧 다시 와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는데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고린도 교회로 쉽게 돌아올 수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에 대해서 아주 강한 어조로 책망도 하고 무서운 경고도 하고 그런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 편지를 디도 편에 고린도로 보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에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고 그랬습니다.
사실 좋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책망의 편지, 경고의 편지를 보냈으니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잘 받아들일까 그런 걱정도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디도가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 고린도 교회에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 번 편지는 아주 엄격한 경고와 책망의 편지였습니다.
지금은 위로와 다시 보살핌의 편지를 사도 바울이 보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답을 보냈다면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그게 사도 바울의 일관된 기준이었어요.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변호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는 사도 바울의 개인 간증과 같은 메시지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죠.
그런 편지를 써야 된다는 일이.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런 체험과 은혜를 받았었구나, 고린도후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참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도 참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하였던 유대 배경을 가진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일거로 추정이 됩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비난하기를 사도 바울이 가짜 사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라는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도 가짜 복음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는 작지만 목소리가 컸어요.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신약성경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의 성경은 구약 율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니까 뭘 모르는 고린도 교인들은 아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그 형편 속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써야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처음 분명하게 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첫 부분에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분명한 고백부터 시작을 합니다.
1절 첫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이 말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고 하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됨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런 분위기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태도를 보면 참 놀랍습니다.
사실 화도 날 만하고 더 얼굴 보고도 싶지 않은 상황인데, 그 고린도교회,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서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성도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1절 하반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인간적인 눈으로 고린도교회와 교인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인과 교회를 보면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많은 속에도 여전히 주님은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역사하시고 계시니까 교회로 모이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도 아직도 미성숙합니다.
이 말에 흔들리고 저 말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성도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당신들은 성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들도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교회를 보면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야,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맞어?” 그렇게 판단될 때도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가족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이 보는 눈으로만 보면 좌절하고, 비난하고, 그냥 떠나버리게 되고, 포기하게 되고, 반드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문제가 생길 때, 목사의 마음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교인의 마음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가정의 문제가 생길 때 남편의 마음, 아내의 마음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부모 마음, 자녀 마음으로도 가정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만 해결이 됩니다.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서로를 보아야 문제가 많은 가운데도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위로받고, 거기서 힘을 얻고, 거기서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린도교회를 잘 목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 교인들로부터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는 형편 속에 있으면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말은 사도 바울은 먼 하늘에 계신 주님을 믿은 게 아니고 지금 자기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많지만 여전히 주님이 역사하심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해야 했기 때문에 이 서신 앞 부분에서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냅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자기가 고난을 많이 받았다라는 겁니다.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거죠?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고 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또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하니까 고난이 온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더 잘 믿을려고 하니까 예수님을 더 전할려고 하니까 그 고난은 더 넘치게 온다는 거예요.
고난을 안 당할 수도 있어요.
예수 믿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고난당할 이유도 없어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친다하는 표현은 그만큼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을 가졌다는 거예요.
그것만이라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세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고난만 있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함께 계시는 주님을 알았다는 증거예요.
고난도 오지만, 그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위로가 주님으로부터 사도 바울에게 임했던거예요.
그러니까 그 고난 중에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살려고그러면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 때 여러분, 흔들리거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능히 우리를 이길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힘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을려고 하면 고난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큽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정말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잖아요?
그런데 스데반은 그걸 능히 감당할 수 있었어요.
왜?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이 서서 내려다보시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그 순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만 환난만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될 환난이라면 허락하시지요.
그러나 반드시 위로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같이 주십니다.
8절에서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사형 선고 받는 줄 알았다고 그랬어요.
고난도 어지간히 받아야지, 이제 죽었구나. 이런 지경까지 갔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건져 주셨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아마 주님께 물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건져 주실거면 애초부터 고난을 당하게 하지 말던지, 왜 이런 끔찍하고 힘든 고난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물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즉각 답을 주셨어요.
여러분 중에도 왜 내게 이런 고난이 많은가?
그렇게 생각이 되는 분들이 있다면 이 9절 말씀을 잘 들어보세요.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도대체 환난이 오는가?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만이 살길이니까.
우리가 조금만 편해지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그게 망하는 길이에요.
자기를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정 문제도 풀어지지 않고 내 삶도 항상 뒤죽박죽이고, 신앙생활조차도 어려워지는 거예요.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게 뭐가 있나요?
우리 자신을 뭐 믿을 수 있는게 있나요?
더 이상 나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그 분만 의지하게 될 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강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환난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 강해지니까, 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니까 그렇게 되는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 앞으로 닥쳐올 환난과 어려움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아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의 뜻은 나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데 있구나, 그럼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지.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제는 어떤 문제가 닥치라도 겁이 없는 희망이 생긴 거예요.
지금 중국에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이 대거 다 철수하셨습니다.
중국에 더 있을 수가 없게 되었죠. 그것 때문에 중국 교회에 대한 걱정이 있지만, 사실 이 일은 이전에도 한번 있었습니다.
중국이 공산 혁명이 일어날 때 중국에 있는 모든 서양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했습니다.
신학교 문 닫고, 교회도 문을 걸어 잠겨야 되고, 목사들은 다 감옥에 가고, 중국 교회는 끝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중국 교회가 얼마나 강하게 더 크게 부흥되었는지 깜짝 놀랐어요.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중국 교회를 지키실거다.
그것을 믿게 되는거예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보면 그 때는 힘들게 느껴지지만, 그 다음에는 믿음이 더 커지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런 희망, 사도 바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은 성도와 교회와 똑 같은 고난을 겪는겁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이 위로를 받는 것은 주님이 그들과도 함께 하실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저렇게 고난을 겪는데, 하나님이 지키시는구나,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는구나, 그러면 우리도 함께 하시겠지.
그래서 그 때 당시에 모든 성도, 환난당하는 교회도 사도 바울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때 당시 사도들이 환난을 당할지라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겁니다.
로마서 5장 3, 4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야고보서 1:2에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환난은 우리에게 크게 유익을 줍니다.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줘요.
나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만 살리는 믿음만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루스 우스터만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아이들이 벽에다가 낙서를 하거나, 종이에다 낙서를 하면 그냥 내버려둔대요.
우리들 같으면 야단도 치고 못하게 할텐데 내버려둔대요.
아이들이 놀다가 낙서하다가 가버리면 애들이 낙서한 곳에다가 색깔을 칠하고 거기다가 붓을 더 대서 기가 막힌 미술작품을 만들어 내는거예요.
화가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광야에 살다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를 요셉에게 그대로 적용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낙서를 작품으로 바꿀실 수 있는 분이다.
창세기 50:20절에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요셉의 그림을 망쳐 놓았다.
요셉의 형제들, 미디안 상인들, 보디발과 그의 아내 등 이들로 인해 요셉의 인생 그림이 엉망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망쳐진 요셉의 인생 그림을 멋있게 바꾸셨다.
정말 그렇죠?
여러분도 누군가가 여러분의 인생을 망쳐 놓은 사람이 있을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또는 지금도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어.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 그림이 낙서 투성이야.
그런 분 있으실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의 인생을 망가뜨리거나 여러분의 인생에 낙서를 한 사람을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은 어떤 엉망인 인생도, 기가 막힌 작품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세요.
요셉이 그랬죠.
모세가 그랬죠.
한나가 그랬죠.
다윗이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자고 하는거예요.
사람들은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엉망이 되어버린 인생을 기가 막힌 인생 작품으로 만들어 내실 수 있다니까요. 그러므로 연단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주목해야 될 때에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지금 훈련해야 되요.
협성대학교에서 목회상담을 가르치는 이세영 교수님이라고 계신데, 미국에서 유학하실 때 이야기를 어느 글에서 쓰신 것을 읽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교회에 교육목사로 계실 때 그 때 중고등부 애들을 데리고 댈라웨이 강으로 카누여행을 인솔해 갔다는거예요.
그런데 그 아이 하나가 그만 강에 빠져서 사경을 헤매는거예요.
얼마나 놀라고 충격이었겠습니까!
헬리콥타까지 불러스 급히 뉴욕으로 후송하고, 병원에서 살려볼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그 아이의 장례를 치르는데, 목사님은 이미 벌써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모든게 다 끊어지고, 모든게 다 깜깜한 색깔로 다 칠해진 것 같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감정마저도 죽어버려서인지 어떤 것도 느낌이 없을정도로 목사님 자신이 맨붕 상태에 빠진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사고가 일어났던 그 자리로부터 장례식이 있는 그 시간까지 선생님 한 분이 끝까지 목사님 옆을 지켜주었어요. 목사님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목사님이 해야될 일들, 너무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보지 쩔쩔맬 때 다 옆에서 그냥 챙겨주면서 끝까지 지켜준 선생님이 한 분이 계셨다는거예요.
완전히 무너지고 목회도 포기하고, 공부도 포기하고, 다 끝낼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그 선생님 한 분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하실 수 있었다는거예요.
그 이야기를 쭉 쓰시더라고요.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환난이 와도 누군가가 한 사람만 내 옆에 끝까지 있어주면 얼마든지 버텨내요.
그렇다면 능력도 없고, 부족한 것도 많은 사람조차도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내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게 그게 사실이라면 어떤 환난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겠냐말이에요.
안 믿으니까 문제인거예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항상 나와 동행하신다는 엄청난 사실을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믿고 그대로 누리지 못하니까 이 문제 저 문제 앞에서 그렇게 맥없이 흔들리고 마는거예요.
요즘 주변에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아마 앞으로 더 많아지고 어려움은 더 커지리라고 예상이 됩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세요.
“이 정도 어려움 때문에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면 앞으로 환난이 닥칠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갑자기 제 마음 속에 기도제목이 확 바뀌는 것을 느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무서운 핍박이 오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여러분은 견디어 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직까지 어려움이 많지만 아직까지 환난이라고 까지는 말할 정도는 아니에요.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죠.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하고, 심지어 죽임도 당할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때가 오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믿음이 있나요?
지금 준비해야 되요.
우리가 다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았는데,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신 못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성도들끼리 모이지 못하니까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건지 아닌지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사는 일이 우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환난이 오고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서 살려주세요.
도와 주세요.
힘들어요. 이렇게만 기도하면 안됩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기도 한거예요.
우리 자신도 흔들림이 없고, 다른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위로자가 되어서 그들을 세워줄 수 있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계신 거예요.
환난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요.
더 강한 믿음의 사람.
코로나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돌아보니까 작년에도 지금도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자고 늘 부르짖었지만 지금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에 이렇게 집중해 본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분기점을 이루는 전환점을 이루는 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환난은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음 안에 더 강하게 세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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