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도피, 대만을 즐기다
겨울은 호흡기가 약한 아내에게 유독 잔인한 계절이다. 2년 전, 실버타운에서 한 달을 머물며 추스른 건강은 찬 바람이 불어오면 매번 흔들리기 시작한다. 밤마다 잦은 기침과 가래로 잠 못 이루는 아내를 보며 결단을 내렸다. 영하 10도의 한파를 피해 ‘슬기로운 피신’을 떠나기로 했다. 행선지는 한 때 몇 번 출장 갔고, 이제는 세계 AI와 반도체의 심장이 된 대만이다.
비 내리는 타이베이에서 시작된 여정.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심(eSIM)을 설정했다. 30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의 정보가 흐르는 시대임을 실감하며, 비 내리는 타이베이의 풍경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청춘의 열기와 낭만을 느끼며. 둘째 날에는 대만의 명동이라 불리는 ‘시먼딩’을 찾았다. 청춘의 열기로 가득한 그곳과 ‘화산1914’ 문화창의단지를 둘러보며 대만의 활기를 만끽했다.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맛본 달콤한 버블티와 뜨끈한 곱창국수는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고, 길거리에서 만난 계란 버거는 기대 이상의 별미였다.
오후에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인 ‘단수이’로 향했다. 진리대학의 붉은 벽돌 사이를 걷는 마음은 마치 청춘으로 돌아간 듯 설레었으나, 겨울 비바람 탓에 단수이의 백미인 노을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자연과 역사가 빚어낸 시간들. 셋째 날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버스 투어에 나섰다. ‘예류지질공원’의 여왕 머리 바위는 수억 년의 세월이 빚어낸 신비로운 예술품이었다. 경이로운 대자연 앞에 서니 인간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스펀’의 하늘은 소원을 적어 올린 형형색색의 풍등으로 수놓아져 있었고, ‘스펀 폭포’는 ‘대만의 나이아가라’라는 별칭답게 웅장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옛 금광 마을인 ‘진과스’에서 먹은 광부 도시락은 소박하지만 든든한 정이 느껴졌다.
홍등이 일렁이는 ‘지우펀’의 골목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 몽환적인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내를 위해 “부야오 샹차이(고수는 빼주세요)!”를 외치며 건넨 땅콩 아이스크림 한 입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달콤함이 번졌다.
삶의 향기와 역사의 숨결을 따라서.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타이베이의 속살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고즈넉한 ‘송산문화공원’에서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융캉제’에서 ‘우육면’을 맛본 뒤 20분을 기다려 귀한 ‘누가크래커’를 손에 넣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무심히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여행이 주는 최고의 휴식이었다.
‘보피랴오’와 ‘디화제’ 역사 거리를 걸으며 청나라 시대의 자취를 살피고, ‘용산사’의 자욱한 향 연기 속에서 현지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엿보았다. ‘2.28 평화공원’ 에서는 대만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도 했다. 저녁에 닝샤 야시장에서 50분을 기다려 맛본 굴전은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맛이었지만, 부족한 편의시설은 여행자에게 다소 고단한 숙제로 남기도 했다.
타이중, 무지개 빛깔의 추억. 여섯째 날에는 고속열차를 타고 남쪽 도시 ‘타이중’으로 향했다. 낮 최고기온이 영상 25도까지 올라가는 따스한 날씨가 우리를 반겼다. 철거 직전의 마을을 벽화로 되살린 ‘무지개 마을’의 색채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차오우 광장’과 중앙공원을 유유자적 걸었고, 고풍스러운 ‘궁원안과’에서 이색적인 아이스크림을 즐기며 여행의 피로를 녹여냈다.
여행을 마치며: 자부심과 희망의 기록. 대만은 짧은 비행시간과 저렴한 물가, 풍부한 먹거리 덕분에 한국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행지다. 예전에 보았던 타이베이 101, 국립고궁박물원, 중정기념당 같은 랜드마크는 물론이고 샤오롱바오와 망고 빙수 같은 미식의 즐거움도 가득하다.
대만은 1인당 GDP에서 이미 한국을 추월했지만, 겉모습은 화려하기보다 검소했다. 다소 낡고 우중충해 보이는 도심 건물들 사이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으로 국가 경제를 튼튼히 다지며 국제 정세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길거리 미슐랭 맛집과 야시장을 누비는 식도락의 재미를 만끽했고, 허름한 뒷골목에서 그들의 진솔한 삶을 체험했다.
비록 수박 겉핥기식 짧은 여행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더 깊어졌다. 대만의 타이베이, 타이중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서울의 다양한 매력과 세련된 인프라 역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 여행이다.
여행 초반에는 비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마지막 사흘간의 따뜻한 햇살 덕분에 아내의 기침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단순히 추위를 피한 것을 넘어, 겨울을 이겨낼 마음의 에너지를 듬뿍 채워온 기분이다. 이 따스한 기운이 아내의 건강을 지켜주며, 그리고 우리 곁에 진정한 봄이 빨리 찾아오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글쓴이: 나그네 인생 이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