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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준의 수필세계 1
근래에 와서 작품평, 작가의 작품세계를 품평하기 위해서는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작가는 제외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필은 작가의 내적 독백이라는 정의에서 보듯이 수필 세계를 조명하는데 작가를 제외해 버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수필 세계를 쓰는 것은 작품의 품평을 하자는 것보다는 말 그대로 수필 세계를 알아보자는 뜻이 강하다. 수필 세계를 찾아가다 보면, 저절로 작가도 찾아가게 된다. 하나 작품 품평에만 초점을 둔다면 작가는 제외하고,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수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살아온 삶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전상준의 수필 세계를 살펴본다.
“전상준의 수필은 일상과 과거 유년 시절의 잔잔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작품집 전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작가는 해방 직후에 태어나 전후 시절에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60년대 후반에 대학에 들어와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경북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교직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신재기의 작품해설에서 전상준을 소개한 글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가 살아온 지난날을 좀 더 상세히 더듬어 보자. 유년의 삶이 인간의 내면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하지 않는가.
전상준은 예천의 전형적 농촌에서 농사짓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 진학하기 위해 대구로 떠나올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신재기도 지적하였듯이 그의 글에는 유년의 농촌 생활의 정서가 뼛속까지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다. 그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자기에게 쏟는 아버지의 애정에 관한 울림이기도 하다. 그의 유년은 농촌 생활과 아버지가 항상 맞물려 있다. “면사무소 서기가 되면 손톱 밑에 흙 넣지 않고 잘 살 수 있다.”(<아버지의 기일>) 한 아버지의 말씀이 작가의 어린 가슴에 꿈으로 새겨졌다. 교사 첫 발령을 받던 날 “면서기보다 더 좋은 선생”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로부터 이태 후 황망하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탈곡할 나락(벼)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를 추월하려던 버스가 경적을 울리는 통에 놀란 소가 날뛰며 사고가 난다. 소달구지 대신 어머니가 몸으로 이고 지고 끌어서 농사일을 거뜬히 해내셨다. 혼자 된 여자 몸으로 맨발로 들녘을 누벼도 당당했던 건 내심 아들이 ‘면서기보다 더 좋은 선생’이 되었다는 뿌듯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상준의 유년 그리고 농촌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어머니이다. 농사꾼에서 벗어나는 일이 부모의 바람이었고, 그 바람이 전상준의 꿈이었다. 꿈이 이루어짐으로써 행복한 삶이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반면에 어머니와는 오래 같이 살면서, 그의 수필 세계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 거기에 아내도 그의 정서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녀는 오랜 삶의 반려자로서 그의 행복한 삶에서 갈등도 빚으면서 행복한 삶을 지탱해주는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상준에게 깊은 정서를 심어준 것은 고향인 농촌이다.
“‘많이 변했구나!’ 하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것이 있었다. 집 뒤 감나무이다. 연초록의 잎이 깨끗하다.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가지에 누런 감꽃이 헤아릴 수 없이 달렸다.
객지 생활을 시작하고 몹시 바빴다. 해마다 몇 차례씩 고향을 다녀왔건만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향 집 뒤꼍 감나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살아온 인생이 슬프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
나는 이 글에서 전상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년의 기억을 모두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향이나 유년은 항상 회상을 통하여 나타남으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라고 한다. 이상향은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꿈으로만 존재한다. 그가 찾기 위해 헤매는 행복도 현실이기보다는 이상향인지도 모른다. ‘객지 생활을 시작하고 몹시 바빴던,’ 전상준이 추구하는 행복은 바로 유년이고, 고향이고, 농촌 마을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누구나 어린 시절만큼 소중한 추억은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도 어린아이의 눈빛을 먹고 산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어쩌면 순수함을 사랑할 이런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우리 앞에는 권력, 명예, 재물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릴 때의 그 순수함만 있을 뿐이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짧은 만남, 긴 여운〉에서)
그의 말에 의하면 경북의 내륙 깊숙한 농촌 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눈만 뜨면 산으로, 들로 어울려 다니던 어릴 적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짧은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전상준의 고향, 유년 시절에 대하여 글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글에서만이 아니고, 실제의 생활에서도 순수하고, 순진하다, 각박한 도시에서 생활하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도 분명히 말했다. ‘이런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독백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다. 수필은 바로 자기 내면(무의식)의 의식을 거쳐서 드러내는 글이라고 하니, 그의 수필 세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도록 하자.
“나는 초록의 가을이 지나가도, 가능하면 내 삶의 여정을 좁은 길로 천천히 에둘러 걸어갈 생각이다. 좁은 길을 서둘려 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염려도 있고, 주위를 살펴볼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과 업(業)을 겸손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지명(知命)을 훨씬 넘겨 버린 지금 승진이 좀 더디면 어떻고 안 된들 어떻겠느냐, 푸른 내일을 위해 나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보다 풍요로운 삶이 계속되리라. 조급한 삶보다 때론 느리고 오랜 인내의 시간이 알찬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가을의 끝에서 연초록의 은행나무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 〈무능의 변〉에서)
‘나는 초록의 가을이 지나가도’라는 말은 장년을 넘어서는 자신을 표현한 듯하다. 이즈음에 지난 자기의 삶과 앞으로의 자기의 삶을 독백처럼 토로한 말이다. ‘좁은 길을 서둘러 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염려도 있고’라는 말이 인생을 꾸려가는 그의 방법이고, 그의 인생관임을, 그의 여러 수필을 읽어보면 느껴진다. 그의 수필 세계도 이 말속에 들어있다고 하겠다.
전상준은 대구의 수필 문단에서 상당히 무게감 있는 수필가다. 수필집을 5권이나 상재한 작가이다. 신인들의 수필작품을 심사하는 등의 문단 활동도 활발하였다. 영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평생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글쓰기 지도를 했다. 이력으로 볼 때 중진 작가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대구수필문예대학과 대구광역시립두류도서관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쓰기 지도를 했었다. 그의 세 번째 수필집은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수필집을 받아서 읽으면서, 평생을 국어 교사로 보낸 경력이 녹아 있어 문장의 기본이 잘 잡혀 있다. 문학에서 문장 만들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작가라면 반드시 연마해야 할 과제이다. 그것은 문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못한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너무 완벽한 문장의 구사가 인터넷 문장에 익숙한 현대 독자들에게 조금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를 가질 수도 있겠다.
최근에 집으로 배달되어 온 몇 권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요즘의 수필문장이 조금 가볍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일상이 수필의 대상이긴 하지만 일기를 쓰듯이 그날의 일상에서 조금 특이하거나,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 사건을 가볍게 스케치하듯이 표현하는 것으로 수필작품을 만든다. 글이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된다면, 내용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글이 많다.
전상준의 수필세계 2
전상준의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그의 글은 작은 사건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담아내려 하고 있다. 고개를 오르고, 내리면서도, 떨어지는 단풍을 보고서도, 흐르는 물을 보고서도 의미를 찾으려 한다. 수필에서 의미를 너무 강조하면 재미가 떨어진다. 그러나 전상준 글의 매력이라면 재미를 떠나서 그 의미들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야산 소리길’을 따라 가을을 걷고 있다. 홍류동 계곡에 단풍이 절정이다. 함께한 문우들이 ”아! 좋다. 참 잘 왔다“고 연발하며 즐거워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단풍의 아름다움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있을까. 계곡물의 깨끗함을 보고 앞으로의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리고 있을까. 모오리돌처럼 반들반들 닮아가는 바위를 보면서 참고 견딘 세월에서 얻은 행복을 생각하고 있을까?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여명〉에서)
인용한 글은 작품의 서두 부분이다. 가야산의 단풍 길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단풍 경치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나무와의 이별도 미련이 없는 듯하다.’라고 말함으로, 단풍 길에 떨어지는 단풍은 생의 막바지라는 것을 작가도 알고 있다. 작가 자신을 단풍에 비유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단풍을 안고 흘러가는 물길 밑에는 반들거리는 모오리돌을 만나면서, 더 오래 이어질 수 있는 생명을 본다. ‘여명(餘命)’이다. 가야산 단풍 길에서 찾아낸 의미가 ‘여명’이다. 자신의 나이가 생명의 마지막 단계이어서 길지는 않더라도 여명이 있다고 함으로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결미’를 보자.
물속의 바위가 인생을 명상하게 한다.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 메마른 마음 밭에 정서를 이입시켜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바라볼수록 쓸쓸한 색조나 애잔함의 정조를 깔고 있는 여명에, 어떻게 하면 인생의 끝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암시한다. 현실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여명〉에서)
가야산의 가을 길은 쓸쓸하고, 애잔함의 정조를 깔고 있지만, 작가가 부여하는 의미는 인생의 끝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수필은 일종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 ‘인생의 마지막도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현실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한다. 자기 성찰의 결과이다. 여명을 사랑하면서 긍정적인 삶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어떤 면에서는 명상수필이다. 현상을 보이는 데로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명상을 통하여 내밀한 의미를 찾아 나선다. 이것은 수필 〈여명〉의 특성이다. 전상준 수필집을 이야기하면서 작품 〈여명〉을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그의 수필의 전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용이 없는 번지르르한 글이기보다는 내용을 충실히 하려는 것이 전상준의 글이다.
ㅡ 여명(餘命)
‘가야산 소리길’ 따라 가을을 걷고 있다. 홍류동 계곡에 단풍이 절정이다. 함께한 문우들이 “아! 좋다. 참 잘 왔다.”를 연발하며 즐거워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단풍의 아름다움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있을까. 계곡물의 깨끗함을 보고 앞으로의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리고 있을까. 모오리돌처럼 반들반들 닳아가는 바위를 보면서 참고 견딘 세월에서 얻은 행복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무가 계절에 맞추어 마지막 향연을 펼친다. 단풍 든 잎이 햇빛을 받으며 미풍에 하롱하롱 내려온다. 어느 무용가의 춤이 이보다 아름다울까. 나무와의 이별도 미련이 없는 듯하다. 잎 사이로 비친 햇빛에 계곡물이 반짝반짝 섬광을 일으킨다. 오염되지 않은 물은 해님까지도 좋아하나 보다. 낙엽이 깨끗한 계곡물에 곱게 내려앉더니 곧 여울에 곤두박질친다. 물밑은 잘 다듬어진 반석이다.
계곡 바닥의 바위가 반들반들하다. 돌들도 모오리돌이다. 그 옛날 지각이 일어나 계곡이 처음 생겼을 때는 바닥의 바위도 울퉁불퉁했고, 돌도 물가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모나고 각을 세운 것들과 같았으리라. 계곡물이 ‘참고 견디노라면 언젠가는 둥글고 매끄러운 돌과 바위가 된다’고 속삭이며, 인간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다듬었을 것이다. 바위 또한 한곳에 붙박여 움직일 수 없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흐르는 물의 부드러운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
오래전 일이다. 아버지께서 흙담으로 지은 시골 초가집을 손보고 있었다. 어둡고 좁은 큰방에 창문을 달아 방을 밝게 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하든지 경비를 적게 들어 방을 고칠 생각에 창문을 봉창만 하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도회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마침 일요일이라 집에 와 일을 거들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이왕 방에 창문을 내려면 좀 크게 만들어 방을 환하게 하고 싶었다. 가정 살림에 미치는 경비는 생각하지 않고 창을 크게 달자고 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몇 번 쉬고 나더니 그럼 네 말대로 하자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로부터 그때 아버지의 심정을 들었다. 농사를 지어 도시로 유학 보낸 아들 학비 걱정에 어쨌든 절약할 생각이었다. 그 당시 든 경비가 나의 한 달 하숙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홍류동 계곡의 물이고 바위였으리라.
‘가야산 소리길’에서 여명(餘命)을 점쳐본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았지만 아직은 건강하다. 계곡 물속의 바위에서 남은 생을 생각한다. ‘나도 죽음을 저 물속의 둥글고 매끄러운 바위처럼 인내하며 기다릴 것이다.’ 비록 실천할 확률이 낮더라도 이 순간만은 꼭 그렇게 하리라 맹세한다. 가을 단풍을 품고 하늘하늘 흐르는 물속에서 자기의 몸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참고 견딜 바위가 위로한다.
어느 통계자료에 의하면 1937년생인 사람이 100세를 살 수 있는 확률이 남자가 18.6%, 여자가 22.4%라 하고, 1945년생은 남자가 23.4%, 여자가 32.3%라 한다. 내가 언제 이승을 떠날지 모르나 위 통계를 보면 100세까지 살 확률이 23.4%다. 여기에 해당하기라도 한다면 삶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렇다고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어느 날 후루룩 이승의 자리를 떠난다 해도 미련이 없어야 한다.
‘가야산 소리길’에서 인생의 여백을 생각한다. 여백은 삶을 여유롭게 한다. 마음속의 여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행•불행의 잣대는 내 마음속에 있다. 삶에는 따스한 평화도 있지만 물고 뜯는 싸움도 있다. 그것들에 눈감고 싶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어도 절제할 줄 아는 여유를 찾아야겠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긴장의 연속이 있을 수도 있다. 삶에는 목적과 수단이 뒤엉키고 욕망과 이상이 헷갈리는 가운데 수많은 갈등과 오해를 낳기도 한다. 너무 따지면 여백을 잃는다. 그냥 그대로 여백을 즐기고 싶다.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허허한 낭만을 노래하고 싶다.
물속의 바위가 인생을 명상하게 한다.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 메마른 마음 밭에 정서를 이입시켜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바라볼수록 쓸쓸한 색조나 애잔함의 정조를 깔고 있는 여명에, 어떻게 하면 인생의 끝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암시한다. 현실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여명〉 전문)
전상준의 작품세계 3
〈마음의 열쇠〉도 자동차 열쇠를 잘못 다루었던 사건 하나를 소재로 글을 쓰면서 의미는 ‘마음의 열쇠’로 이끌고 갔다. 이 작품도 여명처럼 이야기에서, 사건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찾아간다. 〈옷 벗기〉는 의미들이 모여서 향연을 벌인다. 〈차선〉도 〈옷 벗기〉처럼 많은 의미가 쏟아낸다. 〈상식 밖의 시간〉은 상식(관습 또는 습관)이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는가를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의 전자화, 과학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2부의 글을 보자. 비교적 그의 생활 주변에서 경험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수필로 쓸 때는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수필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훈수〉를 읽어보면, 어떤 훈수가 일어났던 특정의 상황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아니다. 훈수가 일어나는, 또는 일어났을 때의 일반적인 내용을 다양하게 풀어내면서 의미를 만든다. 〈말의 힘〉도 마찬가지이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야기에 의미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의미에 이야기를 종속시켰다. 이야기에 의미를 담는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가 진행할 때는 재미만 느껴지고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끝까지 듣고 나서야 ‘아, 그런 뜻이구나’하고 느낄 때라야 좋은 글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 터득한 지혜〉도 다분히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가 의미에 종속된다. 이 말은 이야기에 의미를 담기보다 의미를 위해서 이야기를 산발적으로 끌어온다는 것이다. 〈훈수〉나, 〈말의 힘〉이나 같은 양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수필을 ‘교술 문학’으로 분류하면서, 작가가 독자에게 무엇인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전상준의 작품은 다분히 그런 면모가 보인다. 그래서 ‘너무 교술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술 문학에서는 지적 감동이더라도 정서적 표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전달에만 치중하다 보면 정서적 표현이 약해져서 재미가 줄어드는 단점도 생긴다. 그의 수필도 그런 점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3부에서는 또 다른 수필의 맛이 느껴진다. 〈속진의 무게를 느낀 하루〉는 경주 남산 답사기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불교문화가 널려있는 박물관이다. 수많은 답사기가 나와 있다. 소재가 풍부하지만, 나만의 글을 쓰기가 그만큼 어렵다. 경주 남산에는 목이 떨어져 나간 불상이 많다. 주변에서 머리 부분을 찾으면 어설프게나마 두부와 몸체를 접합해두는 것이 많다. 바로 이 부분을 수필로 표현했다.
누군가 복원하면서 목과 턱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불상의 얼굴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시멘트로 발라 놓은 곳을 종이로 가리니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고증 없이 멋대로 복원해놓은 그 몰상식함을 비웃고 있는 듯하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목과 턱에 바른 시멘트에서 무식하다는 그 사람의 정성을 보인다.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속진의 무게를 느낀 하루〉에서)
남산을 답사 가면 남산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해설사의 해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행기나 답사기에서 해설사 또는 안내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을 흔히 본다. 그러나 수필은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자기 나름의 생각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써야만 수많은 여행기 중에서 자기만의 여행기를 쓸 수 있다. 간혹, ‘불교 미술에 대한 소양이 없어서’라며 꼬리를 내린다. 전상준의 경우는 전문적인 불교 미술이 아니고, 시멘트로 수리한 장인의 정성을 이야기한다. 엄격히 말하면 불상은 경배의 대상이지 미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미적인 가치보다 종교적인 신앙심이 더 중요하다. 해설사들은 일반적으로 미술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해설사와는 달리 비록 시멘트라고 하더라고 신앙심 또는 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글쓰기의 시선이 아닐까.
이처럼 전상준의 수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읽기를 한 부분이 많다. 수필은 보편적인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독자에게 설득하는 양식을 더 강조한다. 자신의 독특한 읽기를 한 것은 수필을 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마음의 열쇠
전상준
벌써 두 번째다.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 말도 안 된다. 엔진도 끄지 않은 채 자동차 문을 잠그다니. 아내의 농처럼 치매가 시작된 것일까. 어이가 없다.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보험회사에 전화한 것이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아직 몇 분 지나지 않았다.
열쇠는 잠긴 문을 열기 위해 꼭 있어야 할 도구다. 우리 집 거실 벽엔 나무로 만든 열쇠 모양을 한 커다란 열쇠걸이가 있다. 방을 비롯해 거실, 부엌 등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곳의 열쇠는 모두가 걸려 있다. 처음엔 몇 개 안 되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수효가 늘어 지금은 내가 보아도 참 많다는 느낌이 든다.
열쇠가 많다는 것은 잠글 곳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보기에는 자물쇠로 잠글 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습관적으로 잠그고 있다. 잠그지 않으면 불안하다. 가슴속에 불신의 싹을 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여름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온 식구가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 안방, 장롱, 문갑 등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믿었던 열쇠에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다.
열쇠는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네모난, 마름모, 어떻게 생긴 것이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등 제각각이다. 작은 자물쇠 구멍에 들어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하나, 잠겨 있는 곳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려고 할 땐 반드시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 어떤 때는 어느 것이 어디에 맞는 것인지 몰라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있는 것을 못 가져가게 하려고 채워 놓은 자물쇠를 도둑들은 잘도 여는데 나는 생활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 마음 편하게 집에 있는 모든 열쇠를 없애고 살고 싶다. 요즈음 나는 의식적으로 외출할 때 문을 잠그지 않는다.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그것을 지키겠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처량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우리 집에서 열어야 할 곳은 잠겨있는 방들이 아니라, 식구들 각자가 가진 마음의 문이다. 젊은 시절 아내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렸다. 집안의 작은 일 하나까지도 의논하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 왔다.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충돌하는 일이 쌓여 가면서 대화가 적어지더니 지금은 그 벽이 제법 높다.
경제적으로 볼 때 젊은 시절보다 열 배, 스무 배나 나아졌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못하다는 생각이 아내를 지배하고부터 문은 점점 굳게 잠겨 버렸다. 참으로 많은 종류의 열쇠를 가져와 열어 보았으나 번번이 마음의 자물쇠에 맞지 않아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아이들도 어릴 때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었다. 값싼 인형 하나에도 좋아 못살 듯한 행동을 하고,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행복해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별것 아닌 것에 즐거워할 줄 알더니 머리가 크면서 달라졌다. 웃음이 적어지고, 말수도 줄었다. 매사를 협의나 협력해서 하려고 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한단다. 내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있는 듯하다.
나에게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열쇠의 모양이 각각이듯 식구들 마음의 문을 열 방법 또한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견인차가 왔다. 겁이 났다. 지난번에는 작은 트럭을 타고 와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이번엔 엔진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문이 잠겨 차를 끌고 가려고 하나 보다.
기사가 잠겨있는 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몇 가지의 공구를 손에 들고 있다. 차의 오른편 앞 유리문을 안쪽으로 힘껏 밀더니 작은 나무쐐기를 박는다. 유리와 문틀의 벌어진 틈으로 끝이 갈퀴처럼 굽은 쇠막대를 넣고 이리저리 돌리기를 반복한다.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장갑 낀 손으로 연신 훔친다. 속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추어 본다. 함 참을 더 신간하더니 열쇠를 나에게 준다. 차는 엔진을 멈추고 있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신기하다. 열쇠도 없이 잠겨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기사가 부럽다. 차에 올라 열쇠를 꽂아 본다. 차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시동이 잘 걸린다.
순간 식구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작정이다. 기사가 잠긴 차 문을 열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듯, 나도 식구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도록 현명한 지혜를 발휘할 생각이다.
아내의 웃는 얼굴이,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앞을 스쳐 간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마음의 열쇠〉 전문)
나는 이 수필 ‘마음의 열쇠’가 전상준 수필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전문(全文)을 가져왔다. 어떤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면서 결미에 도덕적인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런 형식의 수필은 그의 첫 수필집에서 다섯 번째 수필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양식이다.
전상준의 수필세계 4
전상준의 네 번째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2000년대 중반에서, 늦어도 2010년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나이로 따지면 60대 초반에 쓴 글이 많았고, 늦어도 60대 후반에 쓴 글이다. 나이 탓인지 고향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내용이 많았다. 어릴 때 친구들 이야기, 교직 생활을 할 때의 제자들과 만남 등등의 이야기가 많다. 기억을 불러낸 회상 형식이다. 나이 든 사람은 추억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말한다. 추억담을 쓰는 수필 쓰기는 거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쓴다. 회상의 이야기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담는다. 회상에는 심리적으로도 재미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회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서를 움직인다.
전상준의 수필은 옛날로 돌아가서 과거에 머무른 것이 아니고, 옛날에서 다시 오늘로 되돌아온다. 〈초대장〉을 보자.
“이십 오륙 년 전에 인연을 맺은 제자들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사십이라 불혹의 나이가 아닌가,”
“초대장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다. 모두 얼마나 변했을까?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다들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갖가지 상상에 몇몇 제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마음이 급해진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초대장〉에서)
두 문장을 인용했다. 앞의 문장은 글의 서두에 가깝고, 뒤의 인용문은 결미 쪽에 가깝다. 과거의 제자에서 시작한 글은 오늘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상준의 수필에서 나타나는 과거 이야기는 대개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오늘의 자신을 긍정하는 방법으로 과거를 불러낸다.
〈순수함은 아름답다〉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노부부가 되어서 울릉도로 여행가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배불리 먹지 못하고’라며 회상을 통해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수필의 본류는 과거가 아닌 현재 여행이다.
고향을 등지고 무지갯빛 삶을 찾아 헤매느라 심신이 고단해 있다. 이박삼일의 시간을 내는데도 힘들었다. 그래도 식구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며, 나보다 못한 이웃에게 마음을 쓰는 아름답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한 값진 여행이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순수함은 아름답다〉에서)
〈짧은 만남 긴 여운〉도 〈순수함은 아름답다〉와 같은 형식의 글이다.
우리는 경북의 내륙 깊숙한 농촌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눈만 뜨면 산으로 들로 어울려 다니며 놀던 죽마고우이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렇게 그리워하는 친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낯익은 이름을 차례로 불러본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짧은 만남 긴 여운〉에서)
전상준의 수필은 유년기의 기억을 현재 시점에서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활용한다. 다시 말하면 회상을 사용하여 과거를 현재에 소환하여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삶이 바로 그가 생각한 ‘행복한 삶’이라고 느껴진다. 긍정적인 회상을 통해서 현재를 긍정하는 것이 전상준의 삶이다.
전상준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수필은 작가와 작품 속의 주인공이 동일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작품세계를 논하다 보면 작가를 품평하는 경향도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그는 수필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머리말에서 예전에 써 놓은 시를 인용하면서 ‘앞서가지 않아도 된다’와 ‘매사 남보다 앞서갈 수 없다. 내 사는 힘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자신의 인생관을 요약하였으며, 또한 자기의 작품을 요약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는 ‘행복한 삶’을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찾고 있다. 현재의 긍정이란 그의 말처럼, 현재에서 기쁨을 느끼는 삶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집이 헐린다〉는 수십 년을 살아온 주택에서 이사 가야 하는 심정을 쓴 글이다. 나는 이 글이 작가의 삶 자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믿는다. 이 글을 읽으면 그가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았는가를 잘 말해준다.
한때는 아내가 우리도 아파트에 살아보자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주택에 사는 것은 무능의 증거라나. 천성이 게으른 탓에 이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뭐, 팔자 길들이기로 간다고. 아파트보다 생활이 불편할지는 모르나 몸담고 살면 편리한 점도 십상 많다. 〈집이 헐린다〉에서 아내와 주고받는 말을 통하여 전상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천성이 게으르기보다는 마음이 아파트 생활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좋아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전상준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전 작품을 통하여 관통하고 있다. 작품에서만이 아니고 그의 생활 전체에도 관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가 그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변화를 싫어한다. 변화보다는 현재에 나를 적응함으로 편리함, 즉 마음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사고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삶의 태도를 어떻게 볼까.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것은 그들의(타자의) 시선이고, 전상준의 태도는 ‘불편할지 모르나 몸담고 살면 편리함’이다. 왜 변화를 싫어할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이 보장된 현재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에 혹자는 전상준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가 너무 과거지향적이라 하여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 독자는 전상준의 작품도 부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 어쨌거나 그는 뚜렷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수필 양식을 지닌 작가다.
전상준의 수필세계 6
그의 마지막 수필집은 2022년에 발간한 다섯 번째 수필집이 《행복한 삶, 너그러운 삶》이다. 그가 가장 최근에 쓴 수필 모음집이다. 첫 수필집을 낼 때가 2006년이니까 경력으로 보면 비교적 늦게 수필집을 낸 편이다. 첫 수필집에서 마지막 수필집을 낼 때까지가 16년이 걸렸다. 작품세계를 조명하려고 하니 그의 긴 인생에서 16년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 16년도 그의 일생에서 보면 만년 기이다. 만년이란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인생의 한 부분일 테지만 인생이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고 축적되어서 그 사람의 인생관을 만든다고 한다. 만년은 전 인생이 저수지에 모인 물처럼 고여 있어 그의 일생이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을 읽는데, 또 그 사람의 수필 세계를 읽는데 만년의 시기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수필집을 좀 더 찬찬히 보기로 하였다.
그는 ‘너그러움이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너그러움에 많이 인색해 ‘사람들과 부딪히고, 상처받으며 스트레스를 쌓았다.’ 했다. 이 말은 자기의 삶을 말한 것이 아닐까. 역설이지만 너그러움의 반대편에서 살면서도 너그러움으로 자기 포장을 하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가 너그럽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너그럽게 살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앞의 수필집들의 표제처럼 삶을 아름답고, 즐겁고, 지혜롭고, 여유롭게 살았다기보다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수필집의 표제가 그의 수필 세계를 관통하는 가치관이라면, 그 표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가 하는 것이 그의 수필 세계의 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행복한 삶, 너그러운 삶》에서 보여주는 수필의 소재는 현재 전상준이 사는 대구의 아파트 촌과 그 주변의 도시 공간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거울 속에 비친 육신을 쳐다본다. 꽤 늙은 한 사내가 웃음을 머금고 빤히 쳐다본다. 얼굴이 많이 익어 낯설지 않다. 표정에 삶의 연륜만큼 고단함이 묻어 있다. 저 작은 체구로 집안 식구들을 건사하며 자기 삶의 영역을 확보하는 참 고생이 많았겠다. 다행인 것은 자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라 여기면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거울 속에 작은 몸〉에서)
나는 이 독백이 전상준이 자신의 자아와 수필 세계를 집약적으로 말한 것이란 생각이다. 그의 수필 세계의 범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을 살면서 남보다 뛰어남도 없이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삶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꼈다.’ 한 그의 말이 자신의 수필 세계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무의식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적어도 그의 의식 세계에서는 행복을 느낀다. 수필은 의식 세계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그의 말에 그의 수필 세계가 함축되어 있다.
아내가 입원해 있을 때 그는 집안일의 이것저것을 하면서 아내에게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가 한 일에 마뜩잖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세상일이란 어디서나 갈등이 있고, 불만의 표출이 있다. 그러나 그는 불만과 갈등이 없는 삶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의 수필은 갈등이 없는 세상살이, 순전히 자신의 너그러운 삶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행복이라고 하였다.
〈거울 속의 작은 몸〉에서도, 사진에서도, 자신의 참모습은 아니라고 하였다. 아내가 소나무에 빗대어서 하는 말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본다. 그러면 타인은 전상준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보자.
“어느 날 내 삶과 닮았다 싶은 나무를 보고 ‘내 소나무’라고 하니 아내는 씩 웃으며 아니란다. 이유가 참 많다. 훤칠한 키에 가지를 멋스럽게 일렁이며 점잖아 보이는 소나무는 나의 삶의 과정과 맞지 않는다나 수피(樹皮)가 거칠고 줄기에 옹이를 많이 달고 힘겹게 사는 듯이 보이는 나무도 아니란다. 삶이 매몰차지 못해 집안일을 할 때마다 결정력이 부족하고 매사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두려워 우물우물해 자기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가진 재주나 능력이 뛰어나 남보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매번 꼴찌를 하지도 않는다나. 보통으로 인생을 평범하게 산 모습에 어울려야 한단다. 많은 소나무 중 그런 나무 찾기도 만만하지 않다.”
―(《행복한 삶 너그러운 삶》, 〈내 소나무〉에서)
아내가 보는 전상준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보는 전상준보다 아내가 보는 전상준이 더 정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내라고 하더라도 무의식까지는 볼 수 없을 테니, 전상준이 자기를 보는 시선이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을 말하기는 어렵다지 않는가.
내 소나무
전상준
코로나19로 생활의 폭이 좁아졌다.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다. 공원에 산책 온 모두가 얼굴에 마스크를 써 가까이 가지 않으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냥 옆을 지나치면 다정하던 이웃도 알 듯 말 듯싶다. 거리엔 사람이 줄고 대로를 지나는 시내버스엔 승객이 한두 명 타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쟁이 따로 없단다. 사람에게 인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서로를 경계하고 피한다면 적과 대치해 치열한 싸움을 하는 전쟁터보다 더한 세상이 아닐까.
매스컴이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코로나19의 감염 예방에 효과가 제일이라 연일 홍보한다.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도 매일 방송이다. 직장에서 퇴직해 생활 반경이 좁은데 더구나 갈 곳이 없다. 하루 생활이 단조롭다. 오전에는 아내와 함께 두류 공원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집안에서 지낸다.
아내와 다니는 공원 산책 코스는 둘이다. 하나는 금봉산을 중심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포장해 놓은 둘레길이다. 길이 편안하고 넓고 안전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한다. 다른 하나는 금봉산 중턱으로 난 둘레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산길이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나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는 다니기 불편하다. 좋은 점은 울창한 수목이 길따라 이어져 있고 새 소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남쪽 기슭에는 소나무가 많아 운치를 더한다. 아내와 나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요즈음 ‘내 소나무’ 찾기에 힘을 쏟고 있다. 거창한 일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소나무는 자란 모습이 나무마다 다르다. 나무의 모습에 따라 삶이 참 평탄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삶이 참 고달팠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전자는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볕이 잘 드는 곳에 보기에도 편안히 서 있고, 후자는 늘 돌 틈 사이에 억지로 뿌리를 붙이고 불편하게 서 있다. 소나무는 오랜 세월 목재로 다양하고도 폭넓게 이용하여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이다.
두류공원 금봉산 남쪽 기슭에는 적송이 많다. 적송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다. 며칠 째 햇빛을 받아 줄기의 윗부분이 붉은 기운을 띈다. 큰 산의 중턱에 자리 잡아 잘 자란 적송은 아니라도 내 나이보다 연륜이 더 많겠다. 줄기가 밑동에서 수관까지 미끈하게 뻗어 보기가 좋은 것도 있고, 줄기가 곳곳에 많은 옹이를 달고 구불구불 몸이 비틀어진 것도 있다. 제각각 자란 소나무에 삶을 대입해 본다. 내 인생과 닮은 나무를 찾는 재미가 산책의 의미를 더한다.
어느 날 내 삶과 닮았다 싶은 나무를 보고 ‘내 소나무’라고 하니 아내는 씩 웃으며 아니란다. 이유가 참 많다. 훤칠한 키에 가지를 멋스럽게 일렁이며 점잖아 보이는 소나무는 나의 삶의 과정과 맞지 않는다나 수피(樹皮)가 거칠고 줄기에 옹이를 많이 달고 힘겹게 사는 듯이 보이는 나무도 아니란다. 삶이 매몰차지 못해 집안일을 할 때마다 결정력이 부족하고 매사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두려워 우물우물해 자기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가진 재주나 능력이 뛰어나 남보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매번 꼴찌를 하지도 않는다나. 보통으로 인생을 평범하게 산 모습에 어울려야 한단다. 많은 소나무 중 그런 나무 찾기도 만만하지 않다.
한 시간 정도의 산책 시간이 매번 짧게 느껴진다.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 소나무 저 소나무를 쳐다보며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손으로 줄기를 쓰다듬으며 나무가 주는 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무 둥치를 안고 귀를 대어 껍질 속의 물관과 체관에서 나오는 소리까지 들어 본다. 어떤 때는 나무 바로 아래에 서서 고개를 양껏 젖히고 쳐다보기도 하고, 조금 떨어져서 아래위를 살피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무는 나에게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같은 행동에서도 그날 그때의 기분에 따라 전해오는 느낌이 다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가 여러 소나무 조유 중의 적송에서 ‘내 소나무’를 찾아보란다. 이곳 두류공원 금봉산 소나무는 대부분 육송과 적송이다. 나무껍질이 길게 터지고 검은빛을 나타내며 빨리 자란 것이 육송이다. 껍질에 거북 등 같은 무뉘가 있고 햇빛을 받으면 붉게 보이는 것은 적송이다. 여기는 육송보다 적송이 많다. 적송은 이삼백 년 자라야 훌륭한 재목이 된다. 그것도 산꼭대기나 기슭에 있는 것은 질이 낮고 큰 산의 중턱에 있는 것이 품질이 좋다고 한다.
금봉산은 해발 139m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다. 여기 있는 적송이 고급 목ㅈ가 될 정도로 크지 않지만, 도시민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공간에 사철 푸른 모습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영양 부족으로 잘 자라지 못해 굽고 뒤틀린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며 솔숲이 된다. 삶이 모두 옆 소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장엄하고 생생하며 소박하다. 그중에는 주위의 나무와 생존경쟁 하면서 제법 하늘 높이 뻗어 자란 것도 있다. 나무도 사람처럼 스스로 험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제 자리에 섰을 때 자기 몫을 하는 것이다.
나는 적송이 내뿜는 공기를 사랑한다. 푸른 솔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신선하고 순수하다.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씻는다. 행복이란 편안함도 느낀다. 소나무는 내가 아끼다 병들 육체와 정신이 뿜어내는 탐욕의 냄새를 정확하게 맡고 정화해준다. 숨 쉬지 않은 듯이 조용히 살면서 위대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소나무에 침묵하며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한자리에 붙박여 있어도 우주의 변화를 감지하고 처신을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아는 소나무, 솔숲을 지날 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눈다. 소나무는 크기나 수량이 다양하다. 자란 햇수나 어느 곳에 터 잡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사람의 얼굴에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행하고 말하는 것이 드러난다. 산책 때마다 소나무에서 나 자신과 마주친다. 그들이 점점 나의 스승이 되어 간다. 코로나19가 준 생활의 변화이다.
―(《행복한 삶 너그러운 삶》, 〈내 소나무〉 전문)
전상준의 수필세계 7
그렇다면 자신의 수필집들에 표제로 달았던 ‘행복한 삶’을 전상준은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자기도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사전에서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서, 삶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되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 없는 목소리다. 구체적인 어떤 모습이 아니고, 그냥 지향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만 될 것 같다. 어쨌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전상준의 수필 세계라 생각한다.
전상준이 지향하는 삶은 남에게서 싫은 소리 듣기를 싫어하는 도덕적인 삶일 것이다. 그런 삶을 기록한 수필을 약간 비껴서 읽는다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그의 수필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좀 더 깊이 읽는다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고뇌와 회의로 나름의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하겠다. 다섯 번째의 수필집에는 유난히도 그런 내용이 많다고 읽었다.
또 하나는, 고향이다, 유년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 고향, 농촌 마을이 그에게 이상향이 되어서 그의 정서를 만들었다. 이상향이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가 꿈꾸는 세계도 비현실적일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바라는 행복한 삶도 고향처럼 하나의 이상향일지 모른다.
전상준 수필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라면 ‘너무 단조롭다’이다. 단조롭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의 수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윤리의식만으로 포장되어 있어 다양하지 않다. 어떤 소재를 대상으로 의미를 도출해내는 방식이 너무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수필의 주제가 인생살이에 도덕적 가르침을 주려는 내용이라면 독자들이 예측 가능한 것이므로 식상해하지 않을까 싶다.
한 편, 한 편의 수필로는 형식을 잘 갖춘 좋은 수필이지만 같은 주제, 같은 형식의 수필을 한자리에 모아 놓으면 독자는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다. 독자가 재미를 느끼게 하려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형식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노력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문학, 즉 수필은 현실의 일상과는 다른 점이 있다. 문학이 지향하는 세계가 예술이기 때문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재미 쪽으로 변형된 세계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상준의 수필은 서정적인 표현에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수필이 교술적인 요소가, 지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정적인 표현의 효과가 더 절실하다. 딱딱한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표현한다면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 하나, 사회비판적인 글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독자들은 윤리 지향적인 글보다는 약간은 저항적이고, 조금은 폭력적이기도 한, 그래서 도전적인 글을 더 흥미로워한다지 않는가. 다양한 독자의 눈높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내용과 표현 방식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타인의 수필집을 평해주신 이동민 선생님의 노고에 탄복합니다.
칭찬 일색도 아니고 지적하신 부분에 진정성이 담겨있습니다.
지적은 상대에게 그만큼 관심도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책 내신 전상준 선생님과 평해주신 이동민 선생님,
두 분 모두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