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학전 북 리뷰(Book Review)
THIS KIND OF WAR/ 『이런 전쟁』 (3)
T.R.Fehrenbach 지음/ 최필영(외) 옮김/ 플레닛미디어, 2020.
* 제 3부 실책(Blundering)
6,25 전쟁이 해를 넘기면서 유엔이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정했지만 결의안에는 유엔의 목표는 평화적 수단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중공을 상대로 한 제재나 징벌적 조치는 거부한 것이다. 서구와 중공은 서로 속마음을 떠보며 외교적 거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공의 요구(한반도에서 외국군대 철수, 미국의 대만보호 중단, 중공의 유엔가입)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1951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사실상 전선은 한반도 중부를 오르내렸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동이 유리한 남부에서는 승산이 없었고 유엔군 역시 험준한 산악을 뚫고 38선의 네 배나 긴 전선이라 할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입장이 아니었다. 양측 다 무의미한 소모전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워싱턴은 한국전쟁에서 적의 항복이 아닌 명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중공도 소련도 더 큰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전황은 중공군에게 불리했다. 38선 근방의 서부전선 일부를 제외하면 전선은 오히려 기존의 38선보다 북쪽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규모 춘계공세는 연이은 참패를 거듭했다. 예나 지금이나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면 협상을 준비하는 게 공산주의의 생리다. 결국 미국도 유엔도 공산측도 38선을 기점으로 한 휴전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만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문제였다. 온 나라가 초토화 되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 결국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휴전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1951년 6월 3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영토의 보전을 방해하는 그 어떤 합의에도 반대하며 모든 결정에 반드시 한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5개 항의 평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한국의 휴전 반대는 한마디로 당랑거철(螳螂拒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휴전회담은 철저한 기 싸움으로 막을 올렸다. 회담 장소로 공산군의 수중에 있는 개성을 선택한 것, 유엔 대표단이 그들의 점령지에 들어올 때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를 들게 한 것, 유엔측 대표 조이(C.T.Joy)제독의 의자를 공산측 대표 남일의 의자보다 현저히 낮게 한 것 등이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단어에는 격하게 반발하면서도 자신들은 ‘살인자 이승만’, ‘꼭두각시 대만’이라는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공산측은 전선에서 패하고 있는 전쟁을 자신들이 이길지도 모를 ‘탁자 위의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평화를 간절하게 열망한 유엔측 대표단이 괴롭힘과 신랄한 모욕과 끝없는 회담 중단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실제로 휴전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59회의 지루한 회담이 2년이나 계속될 줄은 당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후 한국전쟁은 한쪽 눈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 또 다른 한쪽 눈은 정전회담장에 두는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윈스턴 처칠은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 전쟁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더 이상의 승리를 원치 않은 유엔이 참으로 좋아할 말이었다.
1951년 초여름,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부터 한국전쟁은 전쟁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상한 전쟁으로 변해갔다. 미군에게 내린 새로운 명령은 이랬다. ‘계속 싸우되 그렇다고 너무 열심히 싸우지 말라! 지지 말되 이기지도 말라! 외교관들이 그럭저럭 해 나갈 동안 전선을 유지하라!’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전쟁이 어디 있나? 그런데 이상하지 아니한가. 승리라는 목표를 내다 버린 전쟁, 그냥 흐느적거리는 전쟁, 억지로 싸우는 척하는 전쟁인데 이후 2년 동안의 전투에서 개전 이후 1년 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의 절반이나 죽었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이름만 들어도 치열한 격전들은 그럼 다 뭔가? 아무리 나사가 조금은 풀렸을지라도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이었던 탓이다. 그래서 중부 전선 일대의 산발적 고지전은 마지막 자존심의 싸움이었다. 군사분계선은 직선이라야 보기 좋다. 남이든 북이든 움푹 들어간 부분 아니면 툭 튀어나온 돌출부를 군인이란 사람들은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여기에 적들은 굴을 팠고 아군들은 벙커, 참호, 사격진지를 팠다. 그 요새를 향해 미군은 불과 며칠 동안 수십 만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고 수천 명 젊은 생목숨들이 죽어나갔다. 그 구불구불한 전선을 바로 펴기 위해서........
이러는 사이 새로운 전쟁터의 풍경이 나타났다. 사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전쟁의 짐도 나누어지는 게 맞다. 그런데 현대전에서 전장을 벗어나는 경우는 세 가지뿐이다. 전사 또는 부상, 정신이상, 부대 교대이다. 한국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의 짐을 고루 나눌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식(rest), 회복(recuperation)의 머리글자를 딴 R&R을 즐기기 위해 많은 미군들이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휴식하고 목욕하고 면도하고 원기를 회복하는 5일간의 R&R이 시작되었다. 횟수가 거듭할수록 단순한 휴식은 점점 성행위(intercourse)와 중독(intoxication), 즉 I&I로 오염되기도 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전선의 피 냄새와 화약 냄새에 찌들었던 군인들에게는 이만한 안식도 없었다.
어쨌든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체 병력으로 들어 온 미군들은 대부분이 예비군, 주방위군, 영점 조준도 서툰 신병들이었다. 귀국점수 36점을 채우기 위해 한국에서 시간을 벌려는 병사들도 늘어났다. 전방의 미군장교들은 전투보다 ‘한국 색시’에 더 관심이 많았고 주말이면 서울의 술집으로 출근했다. 이를 위해서 아니 휴전을 위해서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 육군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공병, 통신 등 전투지원병과는 미약했지만 한국군 60만 병력이 전선의 2/3를 담당한다면 미국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한국인 카투사 제도가 만들어졌고 수천 명 한국군 장교들을 포트 베닝 미 육군 보병학교, 포트 실 미 육군 포병학교 등등으로 유학 보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정부를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던 미국의 전략은 사실 서로에게 유익한 선택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마침내 한국 육군은 피의 대가로 51%의 주식을 받은 것이다.
1951년 8월, 회담은 결렬을 반복하면서 소강상태로 들어갔지만 10월 25일에 이르러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바뀌고 공산측 대표 이상조와 유엔측 대표 호즈(H.L.Hodes) 소장이 마주 앉았다. 활발한 제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협정 서명 시점에 형성된 전선을 기준으로 한 폭 4킬로미터의 비무장 지대 설치안이 나왔다. 또 그해 11월에는 협정시한 30일의 유예기간에 합의했고 현 접촉 선을 기준으로 가조인된 지도까지 주고받았다. 그러나 최대한 선전전을 벌리며 협정을 지연시키려는 공산측에게 유엔측은 사실상 시간 싸움에서 지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지만 ‘맥아더가 옳았어!’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전쟁이든 그게 휴전이든 종전이든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포로문제의 합의는 아주 난해한 핵심과제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듬해 봄 압록강변 벽동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이미 절반이 죽었다. 미군 포로들에게는 매일 옥쌀(옥수수쌀)과 삶은 수수 약간에 가끔 메주콩과 배추가 지급되었다. 미네랄과 비타민의 절대 부족은 최악이었고 하루 1,200칼로리밖에 안 될 때도 있었다. 유일한 단백질원인 콩은 요리할 줄 모르다 보니 반만 익혀 먹어 소화가 안 되었다. 살아남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게다가 중공군은 포로들에게 집요하고 엄격한 사상교육을 실시했다. 수업 시간에는 그 어떤 이유로도 빠질 수 없었다. 기절해도 그대로 방치했고 설사해도 화장실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중공군은 종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잔인했다. 한국전쟁에서 군종장교들은 유일하게 몰살된 포로집단이었다.
그러나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혀 딴판이었다. 북한에는 얼씬도 못하면서 중립국 포로 감독반은 온갖 트집을 다잡으며 포로의 인권을 외쳤다. 유엔군 사령관은 밴프리트(J.A.Van.Fleet)건 리지웨이 건 어느 누구도 포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학구와 홍철은 그들 인민군 포로에 대한 통제권을 나날이 확장해 나갔다. 문제는 포로송환이었다. 당시 전체 포로와 민간인 중 겨우 절반인 7만 명만 중공 또는 북한으로 돌아간다 했고 공산측은 적어도 11만 명 공산군 포로 전원의 송환을 거세게 요구했다. 그러자 트루만은 강제송환은 자유세계에서 가장 혐오스런 사태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만약 이 문제가 틀어지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군포로의 송환 역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동안 1952년 봄이 오면서 거제도는 사실상 무정부상태로 들어갔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수천 명도 거제도에 버려졌는데 그들 중에는 북과 내통한 간첩도 있었다. 철조망을 통해 공산 포로와 쪽지를 주고받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도대체 누가 그곳을 통제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무법천지, 암흑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급기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공산 포로들에게 납치당하는 황당한 사태까지 벌어졌다. 비로소 유엔군 사령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주목했다. 중국어에 유창하고 중부 전선을 누볐던 유능한 보트너(H.L.Boatner) 준장이 거제도로 차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52년 6월 12일 황소라는 별명의 보트너 준장에 의해 거제도는 완전히 장악되었다. 극렬 공산포로들의 대탈주 계획까지 진행되었던 긴박한 당시 상황을 다잡지 못했더라면 한국의 남단 거제도는 그때 또 다른 화약고가 될 뻔했다. 이로써 날마다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뒤엉켜 피를 튕기며 서로를 죽여야 했던 끔찍한 또 하나의 전선에는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1952년이 저물어갈 때까지도 판문점에서는 여전히 평화가 여물지 않았고 전선에서는 매일 밤 유엔군의 포와 공산군의 포가 서로에게 불을 뿜었다. 한국전쟁 후반기 한국전선에 매일 쏟아부은 포탄 사격량은 두 번의 세계대전 중 이루어진 어느 포병사격과 비교해도 훨씬 더 많았다. 유엔군 전선에 떨어진 포탄은 하루 평균 2만 4,000발이었다. 한국군 9사단이 맡은 백마고지는 일주일 사이에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고지마다 피아를 막론하고 수천구의 시신이 뒤덮었다.
한국전쟁은 아이러니였다. 전쟁 때문에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 한반도를 35년간 착취했던 일본은 떼돈을 벌었다. 미화 수십억 달러가 불과 몇 해 사이에 일본경제로 쏟아져 들어갔다. 군인이든 민간이든 한국전쟁과 관련된 미국인 수백만 명이 일본을 거쳐 갔으며 근면한 일본인들은 엄청난 돈을 가진 그들이 어디에다 돈을 쓰는지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벗은 몸을 자연스럽게 여겼던 일본인들은 나체의 상품성에 눈을 떠 농촌지역까지 샅샅이 뒤져 서구기준에 맞는 가슴 큰 여성들을 찾았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은 채 미군의 클럽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또 한국전쟁에서 파괴되거나 수명을 다한 미군 차량 수천 대가 일본에서 재생되었다. 일본인들은 탄약, 공구, 장비를 포함해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한국군과 미군이 먹을 수백만 톤 식량까지 생산했다. 요컨대, 일본이란 든든한 산업기지가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을 결코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다.
1953년의 봄이 왔다. 평화가 가깝게 다가오긴 했지만 마지막 봄은 다른 두 번의 봄보다 오히려 더 끔찍했다. 고정된 전선을 따라 치러진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는 놀랄 만큼 치솟았다. 이른바 ‘미그 앨리(MIG ally)라 불렸던 압록강 회랑에는 소련제 미그 15 전투기가 북한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 공군의 F-86 세이버(saver)와 공중전을 벌렸다. 이제 미군 지휘관들에게 전쟁은 낭비가 아니라 범죄에 가까웠다. 그들은 전선에서 회담장에서 강하게 공산측의 목을 조이지 못한 순진함을 비로소 후회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2년 전에 끝났을 전쟁은 아니었을까? 후회는 자유일지 모르나 희생된 전사, 부상 장병들의 유족과 가족들에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모든 이들에게 비통한 것은 마지막 봄의 전투는 대부분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전초선을 박살내기 위해 중대부터 사단 규모까지 104번의 공격을 시도했고 24시간 동안 무려 13만 1,800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밤마다 벌어지는 야간 습격과 치명적 포격에 병사들이 죽어갔지만 이런 전투들은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다. 더구나 미군이 상대할 중공군은 점점 더 유령이 되어갔다. 미군은 밤을 혐오하였고 중공군은 밤을 친구처럼 좋아했다. 중공군은 이전의 중공군이 아니었다. 소련제 통신장비는 그만두고라도 전선에 나가는 이등병에게까지 작전을 브리핑했다. 사기가 더욱 충천했다. 그러니 부패와 탈영, 강간과 노략질이 없는 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란 훈련장에서 중공군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뛰어난 군대가 된 것이다.
사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고지전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반드시 그 고지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가치 없는 땅을 위해서 병사들을 죽음에 노출시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나 당시 유엔군은 땅의 주인이 누군가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고지를 내준다는 것은 적들의 공격욕을 북돋우고 회담에서는 그들을 더욱 거칠고 비협조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포로 처리 문제에서도 저들은 유엔의 기세를 꺾고 자신들의 조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1953년 4월의 폭찹(porkchop hill) 고지 전투는 이 같은 전쟁 프레임을 가장 잘 보여 준 치열한 격전이었다. 그래서 미 육군은 24시간 동안 13만 발 이상의 포를 쐈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감수하면서 중공군에게 빼앗긴 고지를 기어코 되찾아 온 것이다. 4월 18일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포격 소리가 멈춘 고지 위 하늘에는 옅어진 화약 연기 사이로 무수한 별들이 드러났다. 폭찹 고지 전투는 이른바 ‘고지 위의 왕’ 게임이었다. 게임치고는 너무나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게임이긴 했다.
‘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하기는 매우 쉬웠으나 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루시초프의 언급처럼 휴전회담은 오랜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신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선을 다녀갔지만 해결한 것도 달성한 것도 없어 보였다. 마침내 미국은 더 이상의 교착상태를 인내할 수 없다는 경고를 흘리기 시작했다. 전술핵을 발사할 수 있는 280미리 포가 극동에 배치되었다. 공산측의 심리적 압박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더구나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과 이후 벌어진 소련 내부의 권력투쟁과 위성국가들의 봉기 조짐도 공산측에게 더 이상의 모험이 무의미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드디어 1953년 3월 28일, 펑더화이(彭德懷)와 김일성이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M.W.Clark)대장에게 보낸 전문이 그 물꼬를 텄다. 포로교환 문제가 급진전 되면서 무려 6개월간 막혔던 휴전회담이 다시 속개되었다. 휴전협정의 뜨거운 감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포로교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폭찹 고지 전투가 치열할 때 판문점에서는 병들고 부상당한 포로부터 교환하는 ‘리틀 스위치(little switch)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휴전 결사반대를 외치는 이승만의 저항은 완강했다. 그는 클라크 대장 지휘 아래 있던 한국군을 빼냈고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시켜 미국과 유엔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북진을 외치는 한국인의 시위가 날마다 거리를 메웠다. 외신 특파원들의 구역 주변에는 여학생 수백 명이 흙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젠하워는 국무부 극동차관보 로버트슨(W.S.Robertson)을 서울로 급파해 한국 정부를 달랬다. 미국의 비용으로 육군사단을 20개로 늘릴 것,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 계약금 2억 달러의 장기 경제원조와 950만 달러어치의 식량 459만 톤 지원 등등을 약속했다. 대신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나라의 운명이었다. 미국이 대한민국의 영원한 보호자가 될 것임을 약속한 대가였다.
1953년 6월 4일 포로문제가 완전 해결되었고 7월 19일 유엔은 한국정부가 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임을 공산측에게 보장했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북한의 남일과 유엔사령부의 윌리엄 해리슨(W.Harrison) 중장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이후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된 협정문에 마크 웨인 클라크 대장과 펑더화이와 김일성이 각각 서명했다. 당연히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서명은 없었다. 그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을 뿐 휴전에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휴전협정이 규정한 대로 이후 90일 동안 모든 포로들은 심사를 받고 송환되거나 다른 방법으로 처리되었다.
이른바 ‘빅 스위치(big switch)'라고 불린 대규모 포로 교환이 끝났지만 여전히 944명의 미군 포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3만 2,000명의 공산측 포로 가운데 9만여 명은 송환되었고 이를 거부한 포로 중 한국인은 대한민국에 정착했으며 1만 3,000여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대만으로 돌아갔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474명의 북한 여군 포로가 있었다. 이들은 기차를 타고 판문점으로 오는 동안 인공기를 꺼내 들고 철로 근방 남한 사람들에게 마구 고함을 질렀다. 판문점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옷이라며 지급한 의복을 벗어 던지고 기차의 의자를 찢었으며 파괴할 수 없는 것에는 오줌을 쌌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들 중 일부는 열차 통로에 대변을 보았다. 마침내 200만 명의 생목숨을 삼킨 처절한 전쟁은 이런 난장판을 연출하며 서서히 끝나고 있었다.
저자 페렌바크는 마지막 ‘교훈의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종류의 전쟁에 대비하지 않는 국가는 전쟁을 포기하는 국가다.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국민은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전쟁의 고통, 낭비, 영광, 용기, 트라우마는 아직도 계속 중이다. 미국인들은 여기에 나열한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잊혀져간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이 역사의 교훈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것은 교훈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교훈은 그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나는 이런 말을 더 보태고 싶다.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대가는 단 하나, 모두가 흘려야 할 피눈물이다.’ * 필자(註)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지 프리드먼(J.Friedman)은 전쟁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바보여서도 아니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고통이 닥치면 이를 감지한다. 인간이 싸우는 이유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싸울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전쟁』을 통해 페렌바크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독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겠다. 그럼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70년 전의 6,25전쟁은 나에게 당신에게 또 우리에게 어떤 전쟁인가?
-------------------------------------------------------------
* 덧붙이는 글
며칠 전 어느 탈북자의 증언을 들었는데 모처럼 공감 100%였다. 다 아는바,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삶은 수백만이 굶어 죽었던 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때가 절정이었다. 그때 조선노동당에서 하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사람 순서대로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정반대로 했던 사람 순서대로 살아남았다는 거다. 그들 가운데 가장 정반대로 나간 사람들이 바로 탈북자다. 북(北)은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내 눈에는 남(南)도 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총선에서 우리 사회의 상식이나 윤리기준과 정반대로 나가 놀았던 사람들은 선거에서 다 살아났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바 그대로다. 지금 나라 안팎이 천 길 벼랑, 그 끝자락에 서 있다. 대통령은 부인 구설수에 휘 말려 끌려다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거부권에 목을 매는 처량한 정권이 되었다. 여의도를 점령한 야당대표는 재판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피고인, 나라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에겐 대통령을 흠집 내 끌어내리는 일, 사법부를 겁박해 재판을 질질 끄는 일, 딱 두 가지뿐이다. 게다가 그의 당과 국회의원들의 아부경쟁, 충성경쟁은 오늘도 일사분란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펼쳐진 초유의 난장판이다. 이른바 ‘4.10 총선 민심’이 그려낸 참으로 기막힌 풍경화다. 70년 전 6.25전쟁 전후에도 나라가 이러지는 않았다.
또 우리는 오늘도 평양의 젊은 돼지가 올라탄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LA를 지키기 위해 서울을 포기하는 순간을 레드 라인으로 본다. 그 게임 체인저인 고고도 정찰 위성, 핵추진 잠수함 SLBM, ICBM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북한이 확보하는 날이다. 우리가 이미 목격한 푸틴-김정은의 평양 브로맨스는 그 자체로 우리 목을 겨눈 시퍼런 칼날이다. 푸틴-김정은은 세계에서 핵무기 선제공격을 공언하는 단 두 명의 독재다. 무릇 핵 없는 나라는 핵 공갈에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북은 핵이 있고 남은 핵이 없다. 그럼 미국의 핵우산은 뭘까? 난 늘 그렇게 본다. 그건 부러진 다리뼈 위에 덧발라주는 물파스다. 그래서 긴말 필요 없다. 답은 하나, 한국의 자체 핵무장뿐이다. 윤정부가 제정신이라면 조속히 미국을 설득해 막힌 핵무장의 통로를 뚫어야 한다. 의사파업, 영일만 석유, 이재명 리스크보다 더 시급한 문제다. 여의도 난장판은 선거로 대청소할 수 있지만 북핵대응은 본질이 다르다. 속수무책 먼 산만 바라보다가는 나라가 절단난다. 70년전 6.25전쟁 전후에도 나라가 이러지는 않았다. * 20240622/ 글 최익제(敎博)
첫댓글 이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스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