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94)
검은 살붙이
눈이 내린다 잿빛 바다에
바당은 내 너븐숭이
바다에만 들면 다 잊어져
차운 눈발도 시린 발도
등에 박힌 총알도
눈이 왔는데 맨발이었는데 섣달 차디찬 눈밭인데 흰 눈에 뿌려지던 피붙이 붉은 꽃인데
양말을 겹쳐 신어도 서리처럼 아직 시린 발바닥인데 칼날처럼 발목에는 한기인데
물옷 입으면 살아져
물에만 들면 사라져
그립고 서러운 마음도
총알 자국 욱신거림도
호오이 휘이잇 숨 비우듯
물옷만 입으면 지꺼져
평생 떨어온 몸 감싸안아
푸른 깊이로 데려가주는
내 검은 살붙이
이어도사나 노 저어가면
배 옆으로 수애기들
이어사나 노래 맞춰
쭐락쭐락 뛰어놀던
바당은 내 너븐숭이
지금도 물이 그리워
하고 싶어 물에질
녹고 싶어서 바당에 내리겠나 눈이
* 바당(바다), 너븐숭이(넓은 쉼터), 지꺼져(기분좋아져, 기뻐서), 수애기(돌고래), 물에질(물질)
- 허은실(1975- ), ‘사물에 스민 제주4.3 이야기’ 『기억의 목소리』, 고현주 사진,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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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으로 식구 7명 중 4명이 죽었어요. 그날 군인들이 우리를 끌어내 북촌초등학교로 다 데리고 갔어. 아버지랑 동네 젊은 남자들은 운동장에서 바로 총살시켜버리고 엄마랑 우리는 당팟(당집이 있던 자리)으로 끌고 갔는데, 엄마가 우리 네 형제를 치마 속에 다 안았어요. 그 덕에 오빠는 총을 한 군데도 안 맞고 살아났고, 나는 등에 한 발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났지. 그 자리가 평생 아파요. 그때 눈밭에 맨발로 끌려다녀서 지금도 한라산에 첫눈만 왔다 하면 벌써 발이 시려 살지를 못해. 거기서 엄마랑 작은언니도 죽고 동생은 총을 일곱 발이나 맞고도 목숨은 건졌는데, 결국 석 달 뒤에 갔지 뭐. 큰언니는 끌려갈 때 할머니랑 있었는데 총살당하고, (…) 아버지, 어머니 그날 다 돌아가시고 나니 처음엔 큰어머니가 거둬주셨는데, 큰어머니네도 먹고살기 힘드니 오빠는 고아원으로 가고 나는 남의 집 일을 도우며 연명했어요. 어린 나이에 밭일, 해녀일 닥치는 대로 했어요. 열두 살부터 해녀일을 했는데 (…) 비 오려고 하면 4.3 때 총 맞은 자리랑 여기저기 너무 아파요. 그래도 물 들어갈 때만은 편해요. 수압 때문에 통증을 덜 느끼니까.”(윤옥화, 1942년생, 위의 책 112-113쪽)
“사물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백년을 지녀오고 전해오는 마음을 헤아려본다. ‘간직하는 마음’이란 것에 대해. 듣고자 했다. 녹슬고 삭고 헐고 해지고 바래고 부서지고 그러나 끝내 살아남아 전하려는 이야기를. (…) 그렇게 목소리 속에서 한 시절 살았다. (…) 이 목소리들이 이제 당신에게 가닿으면 좋겠다. 나아가 다른 현대사의 고통과 공명하여 서로를 부르는 소리, 어루만지는 소리가 되면 좋겠다. 70여 년 전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쉬는 현재적 과거로.”(위의 책, 시인의 에필로그 「끝내 남아 부르는 노래」 중 일부, 246-247쪽)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었다.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공산 빨치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섬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 질렀다. 제주 4.3 피해자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오래 알려지지 못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 헌신적인 제주 4.3 연구자의 길을 따라가며,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제주 여성들의 경험, 침묵 속에 잠겨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지혜원 감독의 영화 <목소리들>에 소개된 줄거리)
위의 책은 구술집이자, 사진집이자, 시집입니다. 여기 수록된 시들은 시인이 4년간 제주4.3 사건 때 살아남은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녹취한 파일과 증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물들’을 찍은 사진들을 매개로 쓴 시입니다. 위의 시의 증언자인 윤옥화 님이 간직한 사물들은 물옷, 수경, 빗창과 골갱이 등 물질할 때 착용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증언자들이 간직한 사물들은 대부분 유품이고 일부 사물들은 매장지 발굴에서 나온 사물입니다.
현재 극장에서는 제주4.3을 다룬 <목소리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금년 4월에 개봉했습니다. 저는 영화보기 모임의 회원들과 함께 지난주 수요일에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 생존자들입니다. 제주4.3에 대해서는 많이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들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여성 생존자들만의 목소리로 듣는 건 아마 처음이겠다 싶습니다. 포항에서도 독립영화관인 인디플러스에서 상영 중인데 5월에도 계속 상영한다고 하니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제 그만’은 없습니다. 기억해야 할 역사는 “현재적 과거”로 늘 “살아 숨쉬”도록 언제까지이고 기억해야 합니다. 망각하는 순간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우리는 그 현장을 지금 다시 보고 있습니다. (20250430)
첫댓글 제주 4.3의 깊은 상처를 - 특히 여성들의 상처를 구술로, 사진으로, 그리고 시로 어루만진 값진 노고가 있었네요. 경의를 표하옵고, 다큐 <목소리들>도 포항 인디플러스에서 보시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