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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특집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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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문
운암 변종제-신인간사 대표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지난 4월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경대전1,2』 주해본을 출간하였습니다.
주해본 출간과 함께 유튜브 등을 통해
‘동경대전’ 강의를 하면서,
천도교인과 동학•천도교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2004년 상반기에도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MBC 방송을 통해
동학 특강을 하여 많은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는 천도교를 일반에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주장’이라는
일부 공감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2004년 방송한 ‘우리는 누구인가’에서도 그러하였고,
이번에 출간한 『동경대전1,2』 주해본과
유튜브 강의를 통해서도,
기존의 동학•천도교의 교리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어
교인들과 교단 내 학자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운 대신사께서 겪은 ‘을묘천서(乙卯天書)’가
‘천주실의(天主實義)’라고 하는 주장.
둘째, 동학•천도교에서 모시는
‘한울님’을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
셋째, 용담유사의 한자 표기가
‘龍潭遺詞’가 아닌 ‘龍潭諭詞’ 라는 주장 등입니다.
첫 번째인 ‘을묘천서’에 대한 사안은
동학을 창명한 교조 수운대신사님과 직결된 문제이고.
두 번째 ‘한울님 명칭’은
동학•천도교의 정체성과
직결된 신(神)에 관한 문제입니다.
또 세 번째 ’용담유사’에 대한 한자 표기 문제는
경전에 관한 것이 됩니다.
『신인간』에서는 문제가 되는 이 세 가지 내용 중
7월호 특집에서는 ‘을묘천서’에 대하여,
8월호 특집을 통해서는
교단 내외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동경대전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에 나설 예정입니다.
먼저 이번 특집 내용은
신인간사나 천도교중앙총부의 공식입장은 아니고
전문가들 각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또 우리 교단 내 일부에서도
이번 도올 깅용옥 교수의 주장에 대해
학자로서의 의견이고,
동학을 알리는 좋은 기회도 되니
비판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교단 내 학자들이
도올 선생의 주장과 배치되는 점을 더욱 연구하여
진실을 채움으로써
우리 교단의 외연 확장에 도움 되도록 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인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연속기획으로 마련한
신인간 7월호와 8월호 특집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 바라면서,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1,2』 주해본에 대한
여러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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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인가
을묘천서는 천주실의가 아니다
윤 석 산(서울 교구 · 한양대 명예교수)
1
동학 천도교가 세상에 나온 가장 중요한 핵심은
수운 대신사의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종교체험에 있다.
만약에 대신사께서
종교체험이라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동학이라는 가르침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사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을 체험하고 또
한울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한울님으로의 가르침을
거의 일 년에 이르는 시간을 닦고 또 헤아리며
가르침을 세상에 펴는 기반으로 삼았다.
대신사의 신비체험이야 말로
동학 천도교가 이 세상에 창명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어느 저명한 역사학자는
자신의 저서에 ‘동학의 발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동학이 역사적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발생’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러한 연구의 태도에는
대신사의 종교체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동학의 창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신사의 종교체험’이 된다.
따라서 1905년에 의암 성사에 의하여
동학이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 되면서
동학이 ‘종교화’ 된 것이 아니다.
이미 대신사에 의하여 창명이 되면서
‘종교’로서의 그 출발을 한 것이다.
다만 그 당시 동양에는
‘종교(宗敎)’ 라는 서양의 religion을
번역한 말이 없었을 뿐이지
‘종교’가 없었던 것을 결코 아니다.
불교니, 도교니, 유교가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우리 고유의 무속 역시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동학 천도교의 종교체험은 매우 다양하다,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수련하는 분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다.
한울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대신사,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 등
동학 천도교의 스승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벽력같은 소리로
‘천서(天書)’를 받으라는
가르침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므로 동학 천도교를 비롯한 수운 대신사 등
동학 천도교의 스승님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분들이 겪은
종교체험 또한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는 나이 20에 장사의 길과 함께
세상의 가르침을 얻고자 집을 떠났다.
이를 동학 천도교단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이후
교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용어이다.
모든 역사는 후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 의하여
그에 적합한 용어가 정립된다.
천도교단에서
‘주유팔로(周遊八路)’라고 기록했다고 해서
수운 대신사의 본뜻을 해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운 대신사가 주유팔로에서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울산 처가 동네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흔히 울산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운 대신사의 처가 동네는
그곳에서 좀 떨어진 성동(城洞)이라는 곳이다.
수운 대신사가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길을 떠나 10 여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자,
살기가 어려워진 사모님이 자손들을 이끌고
친정으로 가서 살게 된 것이다.
이곳 성동에 온 수운 대신사는
예의 울산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이라는 산골에
작은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였다.
천도교 기록에는 초당이라고 되어 있는데,
초당이라기보다는 움막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 움막으로 수운 대신사를 만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수운 대신사와
때로는 세상사를, 때로는 도(道)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던 중
어느 선사(禪師, 어느 기록에는
異人이라고도 되어 있다.)가 찾아와
책을 한 권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 선사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의 공을 들이고
탑상에 놓여 있는 이 책을 얻었는데,
세상에 그 내용을 해득해 내는 사람이 없어서,
수소문 끝에 수운 대신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인이 가지고 온 책을 가지고 온 해가
1855년 을묘년이기 때문에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흔히 부른다.
즉 을묘년에 하늘로부터 받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동학 천도교의 모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을묘천서가
하늘에서 받은 천서(天書)가 아니라,
『천주실의(天主實義)』 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제기의 주인공은 도올 선생이다.
더구나 최근 유튜브에 나와서
천도교 연구가이며 천도교 종법사로 추서된
삼암 표영삼 선생도 ‘천주실의’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니 을묘천서가 ‘천서’가 아니고
‘천주실의’리는 주장의 근원은
삼암 표영삼 선생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도올 선생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나의 주장은
표영삼 선생님도 충심으로 동의하시었고,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동학은 신비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윤석산은 전제로 하면서,
『천서』와 『천주실의』에 관하여
많은 합리적인 담론이 생산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주현도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나는 코리안이다 『동경대전』 1, 통나무, 2021년 106쪽
그러나 이 도올 선생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표영삼 선생이나 성주현 선생의 말은 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에 관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2020년 3월이나 4월쯤으로 기억되는데,
도올 선생과 나는 『동경대전』 독회를 하며,
『천주실의』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때 도올 선생이
“수운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고,
주유팔로 때 중국도 다녀왔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도올 선생의 그 말에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다.” 라고 반응했다.
그때 도올 선생의 말에는
‘을묘천서’가 『천주실의』 라는 말은 없었다.
다만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수운 대신사가
세상을 구할 가르침을 얻고자 세상을 떠돌고,
많은 가르침의 글들을 만나고 또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 서학의 가르침이나
『천주실의』인들 안 읽었겠는가.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을묘천서가 『천주실의』 라고
도올 선생이 말을 했다면,
나는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와 같은 도올 선생의 견해에 관하여
두 번이나 글을 써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한번은 2003년 도올 선생이 MBC에 나와서
동학 특강을 하고
『도올 심득 동경대전』이라는 책을 썼을 때이다.
이때에도 역시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올 선생의 주장에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이에 대해 을묘천서는 『천주실의』가 아니라는
나의 견해를 밝힌 바가 있다.
또한 그 다음 해에 출간한
졸저인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라는 책에도
이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니 도올 선생이 책에서 쓴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동학은 신비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윤석산은 전제로 하면서,
『천서』와 『천주실의』에 관하여
많은 합리적인 담론이 생산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이 부분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학은
수운 대신사의 신비체험,
결정적인 종교체험이 없었으면
결코 창명(創明)되지 않았다.
그 만큼 동학에서의 종교체험은 중요하다.
이와 같은 면에서 나는
『을묘천서』는 실제 책이 아니라,
수운 대신사가 겪은 신비체험이고 본다.
동학 천도교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도원기서』에도
을묘천서는 신비한 면을 지니고 기술되어 있다.
책을 전해준 선승(이인)과
수운 대신사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매우 신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을묘년 봄 3월에 이르러 봄잠을 즐기는데
꿈이지 생시인지
밖으로부터 주인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適至乙卯歲三月春 春睡自足 如夢如覺之際
有禪師自外 以訪主人)”
“선사가 사양하고 계단을 내려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문득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내 그 선사가 신인(神人)임을 알게 되었다.
(謝退下階 數步之內 人忽不見 先生心常神異
乃知神人也)”
이 기록은 도올 선생이
동학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대선생주문집』의 기록과도 동일하다.
『대선생주문집』이 동학의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록이라는
도올 선생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여하튼 동학에서의
을묘년 선승으로부터 책을 받았다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여몽여각(如夢如覺)의 사이라든가.
문득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數步之內 人忽不見) 든가,
모두 신비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바로 신비함으로 시작하여
신비함으로 끝이 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수운 대신사의 노승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신비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을묘년 책을 받았다는 것이
수운 대신사의 신비한 체험이라는 한 근거가 된다.
특히 도올 선생은
유튜브 강의(도올 동경대전 15강)에서
을묘천서의 천서가 『천주실의』임을 강조하면서,
“선사가 사양하고 계단을 내려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문득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이내 신인(神人)임을 알게 되었다.
(謝退下階 數步之內 人忽不見
先生心常神異 乃知神人也)” 라는 부분이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같은 기록 중에서
어느 부분은 사실의 기록이고 어느 부분은
후대인이 고친 것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이에 신인임을 알게 되었다.
(乃知神人也)’에 관하여,
‘신인(神人)’ 부분에 가위표를 써가면서
‘개소리’라고 하며 후대인이 썼다고 강의를 한다.
이러함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라고 하겠다.
어떻게 같은 기록 중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부분은 사실의 기록이고,
자신의 주장과 다른 부분은
후대인이 고친 ‘개소리’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가.
같은 기록을 어느 부분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은 후대인이 고쳤다는
이중자대에 의한 해석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이러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운이 쓴 글인 『동경대전』 중에는
신비함이나 종교적인 기록이
하나도 없다.”라고 강조를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경대전』 중 「포덕문」과 「논학문」 중에는
앞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신사의 종교체험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덕문」 중의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不意四月 心寒身戰 疾不得執症 言不得難狀之際
有何仙語 忽入耳中 驚起探問則 曰勿懼勿恐 世人
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問其所然 曰余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 勿疑勿疑 曰然則 西道以敎人乎
曰不然 吾有靈符 其名 仙藥 其形 太極 又形 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논학문」 중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려하여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하여도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에게 무궁 무궁한 도를 주어 이르게 하려니,
이 도를 닦고 단련하라.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擧此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曰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이러한 「포덕문」과 「논학문」의 종교체험 부분이
신비함의 기록이고 종교적인 기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대신사의 같은 글인
『용담유사』 중 「안심가」 중에도 신비체험이
매우 구체적으로 많이 나오고 있다.
을묘천서가 『천주실의』 라는 주장으로
도올 선생은 ‘기도지서(祈禱之書)’를 든다.
기도는 마치 천주교에만 있는 듯이 이야기한다.
‘기도’가 천주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만약에 수운 대신사가
『천주실의』에 의한 기도를 했다면
서학식의 기도를 해야지, 왜 하필
한 사람의 스님을 대동하고 내원암에 올라가서
삼층단을 쌓고 49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했겠는가.
또 어느 유튜버가 말한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가 남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왜 『천주실의』에 관하여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는가.
이는 마치 수운 대신사가 거짓말을 하고
은폐하는 불양한 사람이라는 의미인가.
‘기도’는 초기 동학에서는
오늘의 ‘수련’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듯 억지에 가까운 주장으로
을묘년에 대신사가 받은 책이 『천주실의』라고 하는
도올 선생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2
도올 선생도 책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천주실의』는 이미 17 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의 학자인 이수광(李晬光)과 유몽인(柳夢寅)이
자신들의 저서인
『지봉유설(芝峯類說)』과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또한 18 · 9세기에 이르러
다산(茶山) 등의 학자뿐만 아니라,
다산보다 앞 세대 인물인
신후담(愼後聃)이나 안정복(安鼎福) 등이
『천주실의』를 중심으로 천주교를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공서파(攻西派)나 신서파(信西派)를 막론하고
심각한 영향을 준 천주교리서였다.
즉 『천주실의』는 이미 17 · 8 세기에
우리나라에 많은 유학자들이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책이었다.
더구나 수운 대신사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선사로부터 천서를 받기 전 10여 년을
전국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각종 가르침과의 접촉을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많은 가르침이
과연 세상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가르침인가
고뇌하던 한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수운 대신사는 울산에 오기 이전에
이미 당시에 새로운 힘으로 밀려들어오던
서양, 서학의 가르침과도 만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을묘년(1855) 어느 선사가
수운 대신사에게 가져다준
‘해석하기 어려운(難爲解覺) 책’을
새삼 이미 2 세기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또 그 동안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해석이 되고
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천주실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운 대신사가 겪은 울산 여시바윗골에서의 일이
‘을묘천서’로 하늘에서부터 받은 책,
곧 ‘천서(天書)’라는 표현은
20세기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역사서에 나온다.
처음 을묘년에 받은 책을 천서(天書)로 기록한 것은
1910년 천도교단에서 창간된 『천도교회월보』 중
오상준(吳尙俊)이 쓴
「본교역사(本敎歷史)」 중에서 이다.
僧曰 三日後 貧道再來ᄒᆞ리니 公其理會焉ᄒᆞ소셔
僧이 果及期來ᄒᆞ니 師曰 已會矣로다 僧이 喜謝曰
公乃天人이라 不然이면 烏得理會리오 公其珍之어라
公其珍之어다 僧將去矣라ᄒᆞ고 遂下階ᄒᆞ야
因卽不見이러라 據是書ᄒᆞ니 審知天書오 書中에
有四十九日祈天之義 故로 大神師ㅣ 因書義ᄒᆞ야
意遂決焉ᄒᆞ니라.
이후 천도교단에서 나오는 모든 역사서에는
빠짐없이 ‘천서(天書)’, 즉
하늘에서부터 받은 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도올 선생은
천도교인들이 수운 대신사에 대한
신비감을 높이기 위하여
동학 천도교의 역사서를 기술하면서
을묘년 사건을 왜곡하여, 『천주실의』를
‘천서(天書)’로 꾸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보다 상세하게 자료를 살피지 않아서 일어난 오류이다.
수운 대신사 당시에, 수운 대신사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하려고,
조정의 명을 받고 경주로 내려온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을묘천서’에 해당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는
서울을 떠나 경주부(慶州府)를 향해 길을 떠날 때,
문경(聞慶) 새재를 지나면서
탐문 수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경주부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시켜
시장이나 절간 등지를 드나들면서,
수운 대신사와 동학에 관한 일들을 염탐해 냈다고 한다.
이러한 염탐을 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탐문하였다.
“5, 6년 전에 울산(蔚山)으로 이사를 간 다음
무명을 팔아서 살다가 근년에 이르러
홀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치성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으로부터 문득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
어떤 모양의 문자인지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나,
나만이 홀로 좋은 도(善道)라 말하였다.
(五六年前 移寓蔚山地 賣買白木而資生矣
近年還居本土後 或向人說道曰 吾致誠祭天而歸
自空中墜下一卷書 俾爲受學也 人固不知其何樣文字
而渠獨曰善道, 『高宗實錄』,
高宗 元年 十二月 二十日 壬辰)”
이렇듯 수운 대신사 당대에
수운 대신사를 체포하러 온 선전관이 조정에 올린 글이
『왕조실록(王朝實錄)』에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아,
수운 대신사가 세상을 떠돌다,
울산 근처에서 ‘천서(天書), 곧 신비한 책을 얻는다는,
그러한 신비한 체험’ 한 것은
당시로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특히 이 이야기는 관에서
수운 대신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수집한 것으로,
수운 대신사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펴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천도교단에서
수운 대신사의 일을 신비하게 꾸미기 위하여
‘천서’라고 조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운 대신사 시절에 천서를 받은 것으로
『고종실록(高宗實錄)』의 기록은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수운 대신사가 만약 울산에서
『천주실의』을 받고는, 경주에 와서 사람들에게
『천서』를 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수운 대신사가 자신의 도를 펴면서,
사람들을 향해 거짓말을 했다는,
매우 위험한 이야기가 된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같이 『천주실의』를 받고는,
이를 숨기고 신비한 책인 양 꾸며서
‘하늘에서 받은 천서(天書)’라고 거짓말을 했다면,
이는 지탄받을 일이다.
따라서 ‘을묘천서’를 『천주실의』로 보는 견해는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올 선생은
이와 같은 점을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을묘천서는 실제로 어떤 책을 받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가
제세(濟世)의 뜻을 품고 세상을 떠돌며,
구도의 길을 걷다가, 체험하게 되는 신비체험,
곧 종교체험의 한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수운 대신사가 만났다는 이인도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와도 같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원형(archetype)으로서의 자신’이며,
동시에 융이 말하고 있는 개성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자기, 곧
신을 만난다는 종교체험이라고 하겠다.
즉 수운 대신사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는다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이 신비체험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하게 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밖에서 도(道)를 구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안에서
도를 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도를 얻고자 했던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도를 얻고자 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을묘천서 이전까지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면,
이후부터는 유신론(有神論)의 입장에서
신으로부터 도(道)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기존의 가르침을 만나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았지만,
을묘천서 이후 기천(祈天)을 통하여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일상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구도의 방법이나 대상 등 그 양상이
을묘천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을묘천서 이후의 변화는
수운 대신사로 하여금, 용담에서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하였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게 한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을묘천서는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대신사, 그리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