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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설교
[161.6]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의 의의
수암 염상철_ 중앙감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코로나19로 인하여 2월 중순부터
온라인으로 봉행하던 시일식을 지난 시일부터
오프라인 시일식으로 봉행이 재개되어 이렇게
교인여러분과 직접 마주보고 시일식을 보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속 거리두기’로 바뀌면서 많은 분들이
시일식에 참석하셨지만, 이태원에서 발생한
확진환자로 인해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확진자 수가 전국적으로 늘고 있고
집단감염의 위험이 있어 다시 한번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기로 보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포덕 27년 4월에
“금년에는 악질이 크게 유행하리라.
너희들은 더욱 기도에 힘쓰고
도장과 주위환경을 깨끗이 하라.
지극한 정성으로 주문을 외어
수심정기가 되고 심화기화가 되면 면하게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해 6월에 과연 괴질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도를 믿고 정성 드린 도가에는
앓은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전국 각도에 알려져
무수한 교인들이 입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신사님께서는
물질적 위생의 실천과 함께 수심정기를 통하여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의암성사께서도
위생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하셨으며,
또한 포덕 51년 콜레라가 유행할 때
‘신사주문’을 지어 한울님의 감응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인 여러분과 모든 인류가
한울님의 감응으로 코로나19를 잘 극복하기를
심고 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의 의의’으로 정해 보았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 지난해부터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지난해 5월 11일엔 광화문광장에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개최했었습니다.
1894년 봉기된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 사학자들에 의해
‘조선정부에 대항한 반란’이나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수준이라고
왜곡 축소되어 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비적이나 폭도 등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110년이 지난 2004년 16대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운동, 갑오농민전쟁,
갑오동학농민전쟁 등
지역과 단체, 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왜곡되어 오던 이름이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교단 내에서는 명칭에 대해
‘동학농민혁명’보다 ‘동학혁명’을 주장하며
아쉬워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당시는 산업혁명 이전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국민이 농민이었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군의 90%가량이
농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승적 차원에서 인정하고
함께 가야할 명칭이라 생각합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교단과 유족회,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각 지역 동학농민혁명 단체 등의 이견에 의해
국가기념일 제정이 미루어지다
15년 만인 작년 2월 19일, 국무회의를 통해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최종 선정에는
고창의 무장기포일, 부안의 백산대회일,
정읍의 황토현 전승일, 전주의 전주화약일이
후보로 선정되었고
동학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최초의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승일을 기념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각 지역단체의 주장에 따라
1차 봉기의 지역으로만 후보일 선정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남북접이 모여 동학군 대본영을 설치하고
외세에 맞서 전국적으로 2차 봉기를 시작한
해월신사께서 총기포령을 내리신 9월 18일이
기념일로 제정되지 못한 부분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당시 이낙연 총리는 기념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넓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민중항쟁이었고
내용에서도, 규모에서도
서유럽의 근대혁명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며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
최초의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동학 민초들의 염원과 분노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으로 폭발했고,
해방 이후의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도
동학 정신에 뿌리를 두었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민주민족
의식과 역량을 일깨우고 길러준 동학농민혁명은
정당하게 평가되고 영구히 기억돼야 한다”며
“민간과 지자체와 정부는
동학혁명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과
유적 복원에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밝히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동학사상은
민주주의의 근본 철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패와 외세에 항거해
동학농민혁명이 봉기된 지 125년 만에
정부 주도로 처음 치러진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올해로 국가기념일 두 해째를 맞는
‘제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은
‘녹두의 함성, 새 하늘을 열다’라는 주제로
지난 월요일인 5월 11일 정읍 황토현에서 열렸습니다.
올해 기념식도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이 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개최되기를 기대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장소도 황토현으로 옮기고
행사 대부분이 축소되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국가적 단위에서 기념하고
또 그 의미를
국민들과 공유하고 확산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념식이 작은 규모라도 치러진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한 이날 기념식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 지침을 준수한 가운데
천도교와 동학농민혁명 유족, 문체부 장관,
전북도지사와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지만, 간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념식은 녹두의 함성만 있고
동학의 정신은 보이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
교인여러분!
이제 우리가 3.1운동과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최근에는 촛불시민혁명까지...
민주혁명의 효시로 평가받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뿌리로 인정받는
동학농민혁명과 그 정신을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키고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125년 전 전국의 동학군들이
당당히 불의에 항거한 동학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일반 대중의 동학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지는 이때에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해월신사께서 총기포령을 내리신
9월 18일이 기념일로 제정되지 못한 부분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해월신사께서 총기포령을 내리신 큰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고
그 뜻을 재조명하는 일에 적극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과
해월신사님이 총기포령을 내리신 의의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손화중 등에 의해
3월 전라도 무장에서
1차 봉기가 전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월신사께서는 그해 4월
각지 두목을 청산에 모이게 한 후
‘혁명은 도문에 바른 법이 아니니
전봉준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잘못을 성토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두목들도
‘덕을 천하에 펴서
널리 창생을 건지는 것이 선생의 도이니
만약 폭력으로서 도인 행세를 한다면
이것은 사문에 난적이요 국가에 난민이라
우리는 이것을 즐겨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해월신사의 뜻에 동조했습니다.
이에 해월신사께서는 전봉준에게
‘급심을 두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동학군은 연승을 거두며
전주화약을 성립한 후
호남 전역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동학군 나름대로의 군정을 실시해 나갔으니
이때부터 5백년 전래의 봉건군주제가
뿌리 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청·일 양군이 개입하고
정부의 철병요청을 거부한 일본군이
아산만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한반도에서 청국 군대를 몰아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전봉준이
1차 봉기 때 반대하셨던 해월신사에게
남북접 동학군이 힘을 합쳐서
함께 기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해월신사께서는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것은 천운의 소치이니 제군들은 도인들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해서
사원을 펴며 우리 도의 대원을 실현하라.’고 하시며
손병희로 하여금 북접 동학군을 총괄하는
통령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청산에 머물고 있던 해월신사께서는
9월 18일 각 포에 총기포령을 내리시고
대접주들로 하여금 동학군을 인솔하고
청산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손병희는 청산에 모인 북접 동학군 10만을 인솔하여
논산에 당도해
남접 동학군과 동학군 대본영을 설치하고
전봉준과 형제의 의를 맺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한 후
해월신사의 총기포령에 따라
2차 봉기를 시작하였습니다.
1차 봉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해월신사의 총기포령에 따른 2차 봉기는
반외세 항일구국혁명이었습니다.
교인여러분!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해월신사께 신택우가 묻기를
‘갑오전란으로 인하여
우리 도를 비방하여 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떤 방책으로 능히 이 원성을 면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갑오 일로 말하면 인사로 된 것이 아니요
천명으로 된 일이니,
사람을 원망하고 한울을 원망하나 이후부터는
한울이 귀화하는 것을 보이어 원성이 없어지고
도리어 찬성하리라.
갑오년과 같은 때가 되어 갑오년과 같은 일을 하면,
우리나라 일이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어
세계 인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니라.’고 하신
해월신사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학을 이야기하면
죽창을 들고 일어난 무장혁명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고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며
최초의 반외세 민족주의 혁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반봉건에 대한 혁명이고
2차 봉기는 반외세에 대항한 혁명이지만
그 정신의 본질은 시천주입니다.
내 몸에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고자 일어난 혁명이었습니다.
죽창을 들고 농기구를 들고 일어섰던
126년 전 동학군이 꿈꾸던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죽창을 들고 국가를 뒤집고자 한 혁명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한
모든 사람이 한울님임을 알리고자 한 혁명이었습니다.
폐정개혁안을 보면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를 없애고,
신분상의 모든 차별대우를 철폐하고
동학교도의 행정에의 협력뿐만 아니라 나아가
참정권의 요구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동학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에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던 조선왕조 말기의
봉건적 모순을 타개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우리나라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미완의 혁명은 오래지 않아
새로운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아홉 분은
동학농민혁명이 봉기된 지 25년 후인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다시 혁명에 참가하게 됩니다.
3.1운동은 지난해 100주년을 맞아
혁명으로써의 3.1혁명임을 천명하며
새로운 100년을 맞고 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동학사상은
이후 4.19혁명과 촛불시민혁명을 이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인여러분!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몇 가지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첫째, 동학농민혁명과
그 정신인 시천주와 인내천정신을
전 국민적으로 확산시키고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둘째, 외세에 맞서 전국적으로 2차 봉기를 시작한
해월신사께서 내리신 총기포령이 1차 봉기의
반봉건 혁명이 아닌 반외세 항일구국혁명이었음을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셋째,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1895년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는 법령을 1894년 반외세 항일구국운동이었던 2차 봉기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해
해월신사와 전봉준 그리고 우금치를 비롯한 전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스러져간 동학군들을
독립유공자로 추대해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보내며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고
우리의 미래가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