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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Haeparang Trail)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보면서
너와 내가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총 길이 770km의 걷기여행길이다
2010년 9월 15일에 문화체육관광부가
동해안 탐방로 이름으로
해파랑길을 선정하였으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월포해수욕장
백사장 길이가 900m, 폭 70m, 총 107,786㎡의 백사장에
하루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물이 맑으며 수심이 얕고 민박이 잘 형성되어 있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되는 곳으로 동물성 프랭크톤이 많아 꽁치 등
바닷고기가 풍부하여 월포 방파제에서의 낚시는 일품이다
조용한 분위기와 깨끗한 물로 점차 관광객이 늘고 있으며
주변에는 포스코 휴양소와 청소년 적십자 수련원이 있다
또한 남쪽 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2㎞ 내려가면
이가리 해안의 솔밭과 암석으로 자연발생유원지가 있어
해수욕과 삼림욕을 함께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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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봄꽃이 올 봄엔 유난히 빨리 피었다가
빨리 져 버리고 또 다른 꽃과 연초록으로
봄의 성숙함을 보여 준다
그 연초록이 이쁜날 산으로 가야하겠지만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를 안고
좀은 무거운 마음으로 해파랑길을 걸으러 간다
지난번에 끝낸 18코스 월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온통 회색빛이다
마칠때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원한 바다 공기를 한숨 마시고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청하천을 가로 지르는 월포 다리를 건넌다
등대풀
월포리(月浦里)
월포리는 월포만을 끼고 있는 청하면의 연안 최대 마을이다
1리는 적은포, 2리는 개포, 3리는 월아구와 중휘리를 합친 마을인데
1914년 월아구의 '월'자와 개포의 '포'자를 취하여 월포라 이름하였다
적은포·소근포(1리)
월포천변 월현산 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다.
개포가 군사기지 항구일 때 이 마을 앞에 강물을 따라 올라와 작은 어선들을
정박할 수 있었기에 '적은포'라 하였다
지금은 방어리와의 사이에 100여m의 방파제가 완공되어 있다
개포·낫개(2리)
청하천과 월포천이 날라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육지와는 샛강으로 인하여 따라 떨어진 새터에 신라 때
수군만호진영기가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월아구· 중휘리(3리)
월아구'들막·달래두들'는 고인돌군으로 추정되는
큰 어금니 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중휘리(중휘라리)
수군만호가 개포에 있을 때 이곳에 중군 지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월포초등학교 동편 늪지는 옛날 청하천이 이리로 흐른 흔적이며
이곳에서 화살촉과 칼 등의 병기류가 출토 되었으며
고인돌로 추정되는 입석 1기도 남아 있다
현재는 월포 침례교회와 우체국이 있다
방어리(方魚里)
다래산 동편 산기슭에 자리한 어촌으로서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서편 언덕배기 제당이 있는 주변이라 한다
마을 어귀 해변의 큰 바위가 말 같다 하여 '말바윗골'이라 불렀는데
방어가 잘 잡히는 현 위치로 마을이 이동된 후
방어진(方魚津)이라 부른 데서 방어리라 불리게 되었다
국립 수산 진흥원 영일수산종묘배양장이 있고 방어리 침례교회가 있다
월포항 방파제
월포항
해당화
미역을 건지시는....
이쁘게 피어있는 타래붓꽃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우단담배풀
조사리(祖師里)
다래산(달래산, 월현산)의 북동 산록에 형성된 마을이다
고려말 원각조사(圓覺祖師)가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조사리라 불렸다
조사의 생가 터에는 1913년 평양신학교 출신 허담(許膽) 목사가
조사리 침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동천장로교회(東天長老 敎會)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마을 북서쪽 언덕배기에는 김해허씨의 9형제가 세웠다는
구우정 (九友亭)의 흔적으로 작은 명비(明碑)가 남아 있고
그 부근에는 일제시에 성도암지에서 발굴 된
원각조사의 비가 옮겨 세워져 있다
마을 서편 1㎞지점에는 (마사지, 용천지)가 있으며
근년에 포병부대가 들어서 있다
조사리 방파제
조사리항
용치바위....
갯바위에 올라서서
설명에 있는 바위를 찾아 보아도
물에 잠겼는지 보이지 않는....????
조사리 간이해수욕장
갯메꽃
잎이 동글동글 귀엽다
해양동물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방석항 방파제
방석항 마리나항
방석리(芳石里)
1914년 방화동(芳花洞)과 독석(獨石)마을을 합하여
방석(芳石)이라 하였다
방화 도리산(桃李山)이 바위산인데다
옛날엔 복숭아와 자두나무가 많아서 꽃이 필 때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마을 이름을 방화라 했다
어래산 동편 산기슭에 1989년 건립된 한·미 해병충혼탑이 있다
독석(獨石)마을 앞 바닷가에 검고 넓직한 큰 바위가 하나 외로이 있어
마을 이름을 검은돌, 딴돌, 독석이라 부른다
한때 나포리라 부르기도 했으며
백사장에 시장이 섰으므로 '한불장터'란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 서편 어귀에 치성바위인 성혈식(性穴式) 고인돌 '애기방우'가 있고
북동 해변에는 1966년 건립된 5인 해병순직비가 있다
유채꽃
갯무
화진리(華津里)
천마산(天馬山)과 도이산(桃李山-봉화산(烽火山)북동 기슭에서부터
해안(海岸)에 걸쳐 형성된 마을로서 이진(耳津), 대진(大津), 화산(華山)과 같은
자연부락(自然部落)이 1, 2, 3리(里)로 각각 형성되어 있으며
1914년 화진(華津)이라 이름하였다
이진(耳津),구진(龜津)
포구의 모습이 귀를 닮았다 하여 불린 지명이며
일명 구진(龜津)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닷가에 거북 모습의
큰 바위가 있어서 30여 년 전까지 여기에 동제사(洞祭祀)를 지내온 데서 연유 한 것이다
대진(大津)
송라역(松羅驛)이 도이산(桃李山)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을 때
원산(元山)과 동래(東來) 등지를 오가는 선박들이 정박하면서부터
마을이 동쪽 바닷가로 이동(移動) 하게 되고 따라서 원래는 서피진(西皮津)이라 부르던 것을
대진(大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왜란 이후 한동안 이곳을 골곡포(骨谷浦)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 마을 북쪽 백사장에서 왜병 (倭兵)과 우리 수비병 간에 대혈전(大血戰)을 벌여
그 죽은 자들의 무덤이 썩은 숭이네 고랑에 가득하여
백사(白沙)가 이동하면 유골들이 곳곳에 노출된 데서 불린 지명이다
화산(華山)
화산(華山), 고송라(古松羅), 학교마을 등으로 불리는데
이는 이 마을 동편 모래언덕과 백사장에 해당화가 많은 데서 연유한다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듯....
날개를 다쳐서 날지를 못하고 있다
에구 어쩌다가~~~
오늘도 어김없이 파도는 멋진 그림이 된다
갯완두
화진1교
화진해수욕장(華津海水浴場)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며
백사장 길이는 400m, 폭은 100m, 평균 수심은 1.5m이다
포항시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 영덕 방면으로 20km 지점에 위치한다
작지만 나무가 많고 바닷물이 깨끗하며 냇물이 두 군데에서 흘러내려 담수욕도 할 수 있다
18코스 마지막이자
19코스 시작점 스탬프를 찍는다
지경리(地境里)
지경리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리(里)이다
이 마을 북쪽은 영덕군과 경계를 이루는 버드내(지경천: 地境川)가 흐르며
1리에는 지경 2리에는 어사터와 염전(鹽田)이란 자연부락이 있는데
1914년 지경리로 통폐합하였다
지경(地境)은 청하현과 영해현의 경계에 놓인 땅이라 하여 불린 지명이다
반공 피학살 현장비가 있고
애기 방우라는 성혈식 고인돌이 산록에 산재하고 있다
염전(鹽田)은 6.25전까지 300여 년 동안 소금을 구워오던 마을로서
어사터와 함께 2리에 속한다
어사터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였다던 버드내 가에 형성된 마을이다
어사터는 현재는 웃돔과 아랫돔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옛 마을은 그 사이에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남서쪽 칼산 기슭에
도씨(都氏) 중시조인 고려 때 전리상서(典理尙書) 도충박(都忠朴)의 묘가 있다
지경항 등대가 보인다
전혀 고래바위 같지 않은.....????
좀보리사초가 아닐까 싶은데....???
바다......바라만 봐도 좋은~~~
비석바위
갓바위 같으다
호랑이바위
호랑이 한마리가 동해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형상으로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용맹함과 위엄을 갖춰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예로부터 상서롭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또 호랑이는 인간의 효행을 돕거나 인간의 도움을 받으면
은혜를 갚고 성묘하는 효자를 드에 실어 나르거나
시묘살이하는 효자를 지키며 은혜를 갚기 위해 좋은
묏자리를 찾아주기도 한다는 속신이 있다
크리산세멈 스노우랜드&크리산세멈 멀티콜옐로
다양한 크기의 몽돌이 참 이쁘기도 하다
화진펜션
조망 좋은 곳이며 이런 건물들이 많이 들어 서 있다
지경리항
남정면(南亭面)
경상북도 영덕군의 최남단에 있는 면이다
15개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고 면 소재지는 장사리이다
동해와 면해 있고 장사해수욕장이 유명하다
남정천, 구계천, 장사천, 지경천 4개의 소하천이 바다 쪽으로 흐르지만
워낙 유로가 짧은 소하천이어서 하천 유역에는 충적지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남정면은 조선시대에는 외남면(外南面)이었다
읍치를 기준으로 할 때 가장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외남면'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도회좌통지도'(영덕)에 '외남면'이 표시되어 있고
그 일대에 남역(南驛: 지금의 남정리 남정 마을), 관현(館峴: 지금의 강구면 화전리 장고개로 추정)
장사진(長沙津)이 표시되어 있다
남역은 조선시대 역원이 있었던 곳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그 명칭이 나온다
장사진은 지금의 장사해수욕장을 나타낸 것이다
남정면 면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생겼다
부경리(阜境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있는 리(里)로, 부경 1리와 부경 2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동해(東海), 서쪽은 남정면 양성리, 남쪽은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
북쪽은 남정면 장사리와 경계를 이룬다
19세기 후기에 박씨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하고 원진(元津)이라 하다가
뒤에 고부(高阜: 현재의 부경 1리)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최씨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하고 지경(地境: 현재의 부경 2리)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 외남면(外南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부동(高阜洞)과 지경동(地境洞)이 병합되면서
고부동의 ‘부’, 지경동의 ‘경’자를 따서 부경동(阜境洞)이라 하였고,
남정면으로 편입 되었다
그 후 1988년 5월 부경동에서 부경리로 지명이 변경되었고
자연마을로 고부·지경·섬대마·원진·통시밋·어목골마을이 있다
영덕 영덕 블루로드
부경리 대게공원을 출발하여 강구항과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도보여행을 위해 조성된 약 64km의 해안길이다
대게누리공원을 출발점으로하여 강구항까지를 쪽빛파도의 길(D코스)
강구항에서 영덕 해맞이공원까지를 빛과 바람의 길(A코스)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까지를 푸른 대게의 길(B코스)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를 목은사색의 길(C코스) 이라고 한다
부경1리 마을회관앞을 지나간다
장사 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문산호가 보인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관람은 패스를 한다
LST-120(Landing Ship, Tank 12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해군 《USS LST-120》으로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에서 《LST 문산》으로서 활동했던, 전차 상륙함이었다
1947년 2월, LST-120를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들여 「문산」(이하 문산호)으로 명명하였고
교통부 산하 대한해운공사에서 밀가루나 석탄를 운송하는 운송업에 종사하였다
묵호항에서 석탄을 싣기 위해 정박하고 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 묵호 경비 부사령관 김두찬 중령의 전시 동원령에 의해 징발되었다
당시 육군-경찰 합동부대인 묵호 전투부대가 1950년 6월 25일에 상륙한
조선인민군 해군 제549육전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문산호는 퇴각하는 묵호 전투부대를 포항으로 탈출시켰고
3일 뒤 해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재정비한 묵호 전투부대를 태우고
묵호로 다시 출향하기도 하였다
9월 14일 문산호는 제1독립 유격 대대의 장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대대원 772명을 태우고 장사에 도착했으나 곧 태풍 케지아(Kezia)에 의해 해안가에 좌초되었다
간신히 상륙한 대대는 1주일간 조선인민군 제2군단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과의 전투에서 문산호의 황재중 선장과 선원이 전사하였다
생존자들은 9월 19일 USS 헬레나(CA-75)를 기함으로 한
제7함대 포격임무대(bombardment Task Force)의 지원으로 엄호 받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LST 조치원호를 타고 철수하였다
문산호는 장사리 해안가에 좌초되어 버려진 뒤 그대로 잊혔다가
1991년 3월 6일에 발견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한 전승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레플리카(Replicas: 복제)로 재현되었고
좌초된 실제 문산호는 아직 바닷속에 있다고 한다
장사 상륙 작전(長沙上陸作戰)
1950년 6월 25일 미명을 기하여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아군은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총 반격전을 위한 인천 상륙을 결심하고
동해안 장사동 적 후방 작전 상륙의 양동작전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시작된 전투이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4일~15일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으로작전명 '174고지'라고도 한다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는 학도병으로 구성된
대원 772명, 지원요원 56명과 함께 《LST 문산호(2,700톤급)》로
부산항을 9월 13일 15시경 출항 다음 날 새벽 5시경 장사동 해안 상륙지점에 도달하였으나
케지아호 태풍(파고 3~4m)으로 문산호는 좌초되고 적의 포화속에 대원들은
구국 일념의 투혼으로 악전고투 끝에 상륙에 성공적 후방 교란·보급로 차단, 퇴각로를 봉쇄하고
적의 전의를 상실케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작전명 174고지는 원래는 8군에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이 상륙전에서 아군은 학도대원 등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행불자를 발생시켰다
원래는 3일간 상륙한 뒤 귀환할 예정으로 총기 등의 물자도 3일 치만 지급되었다
그러나 문산호가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총알과 식량이 부족해진 가운데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출하러 '조치원호'를 보냈지만
죽기 전까지 싸웠던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였다
배가 상륙하면 배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상륙작전에 동원 되었던 문산호 (LST-120)는 1991년 3월쯤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
그 후 육군본부에서는 이 전투에 참전한 유격대원에게 우국청년(의사)이라 칭하였다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1950년 9월 14일 새벽 5시 40분쯤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북한군의 눈을 동해로 돌리기 위해 펼친 위장 작전이었다
당시 학도병 800여명은 부산에서 해군 수송함인 LST(양륙함) 문산호를 타고 장사해변으로 상륙
북한 최고 정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학도병 200여명이 전사했고 문산호는 장사 앞바다에 침몰해
지금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90%가 학생신분으로 호국일념으로 지원 입대 하였던 대원들은
전.후방을 교란시키는 유격대에 편성 되었고
이 전투를 수행 중 8일간이나 식량보급도 없는 극한상황에서
적 보급로 및 퇴각로 차단 등의 혈전을 치렀다
이때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호국충정을 기리며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
1980년도부터 매년 9월14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기 시작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특히 경기도 양평 청운사 석일산 주지스님의 도움을 받아
1991년 9월 14일 위령탑을 건립,제막 하였다
장사해수욕장
학도병 추모등불 광장
이곳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 1950년 9월 14일 새벽5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교란 작전인 장사상륙작전이 치러진 곳이다
북한군의 관심을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돌리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라는
작전명령 제174호 장사상륙작전과 인천상륙 양동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전투였다
그런데 그 참가 군인들은 17~18세 어린 학도병 772명으로 기본교육만 받은 채
군번도 군복도 없이 지켜 낸 잊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역사이다
총772명 중 139명 전사 92명 부상 그 외 행방불명 등
시신도 찾지 못한 이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고자 추모등불 광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되신
학도병들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공간이오니
시설물 보호에 적극 협조 바랍니다
장사해수욕장
아픈 역사가 있는 장사해수욕장을 뒤로하고
도로따라 걷는다
부흥리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있는 리(里)이다
자부랑리, 빗물리, 신흥리 등을 병합하면서 자부랑(慈富, 者夫郞)의 부(富)자와
신흥(新興)의 흥(興)자를 따 부흥리라 하였다
부흥1리는 도천리 앞산인 봉황산 주령(主嶺이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형국이므로
날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날미(飛勿, 나루끗)라 불렀다 한다
부흥2리는 날밋 서쪽에 새로 된 마을로 신흥(新興)이라 하였고 혹은 지형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봉황의 새끼는 아름답다 하여 가추(佳雛)라 하였다
부흥3리는 가추 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자가 많이 생긴다고 하여 자부(慈富)라 하였는데
지금은 자부랑(者夫郞)이라고 한다
부흥리해수욕장을 내려다 보고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부흥리 마을이 경상북도에서 주관한
‘2017년 토털 경관디자인 조성 사업’에 선정되어
총사업비 15억 원으로 2017년 3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추진되었다
토털 경관디자인 사업은 지붕도색 및 벽화 조성을 위주로 한 경관개선 사업
깨끗하고 보행이 편안한 거리 조성 사업 이색적인 문화공간 및 휴게공간 조성 사업
해안마을 특성에 맞는 조형물 설치사업 CPTED 디자인을 적용한 유해환경개선 사업
도시미관을 고려한 옥외광고물 디자인 사업 등이다
원척리(元尺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있는 리(里)이다
영덕현 외남면 소속으로 조선 인조 년간에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동해바다와 산언덕을 자로 재듯 조화롭게 하였다'하여 원척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시 원척동으로 하여 남정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인 '새새쪽'은 동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마새쪽'은 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작은 아이를 만나다....갯장구채
원척마을 뒷길로 오르고
해당화
자그마한 밭을 지나가서
또 도로를 만나다
구계리(龜溪里)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있는 리(里)로 구계천이 바다로 흘러든다
구계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앞 바위의 모양이 마치 새우가 물에 떠 있는 형상과 같아
하부(鰕浮)라 하다가 변하여 구배 구계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고
깊은 계곡이 있어 구계(龜溪)라고 했다고도 한다
자연마을로는 구계, 농방웃골, 불당골, 머시밭골, 백맛골, 웅굴골마을 등이 있다
구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농방웃골마을은 농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당골마을은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머시밭골마을은 모시밭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백맛골마을은 백마산 밑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웅굴골마을은 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방파제랑 백색과 적색의 등대 세 개가 보이는 구계항
구계항에서 마친다
**
걱정을 했는데
마칠때까지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었으며
회색빛의 봄풍경을 마음껏 담은 해파랑길이었다
함께 하신 모든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3. 4. 16일(일)
첫댓글 참, 참, 참,
참말로 대단하십니다.
구석구석 ~~ 다양한 모습들
감사합니다…
거기에~~
구체적인 해설까지
고맙고 고맙습니다^^
와~~하~~
멋진 다큐멘타리 한편을 봅니다.
너무 멋지네요.
갯장구채가 아름답네요.
다음 편 다큐멘터리를 기대하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혼자서 외로이 묵묵히 걸으면서 남들은 보지못한 곳까지 찾아가서 카메라를 보고또보고...
지역의 역사와 문물을 꼼꼼이 찾아 기록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