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당시 초토사(招討使)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하여 와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
뒤에 오히려 배신당하여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혔을 때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간신히 피신하였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병찬(安炳瓚)1854(철종 5)∼1929.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충청남도 청양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설)·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하여 와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 뒤에 오히려 배신당하여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혔을 때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간신히 피신하였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병찬(安炳瓚) 지역 홍성군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안병찬의 자는 치규(稚圭)요 호는 규당(規堂)이다. 순흥인 안창식의 아들로 철종 계축년에 당시 홍주군이었던 화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초연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아버지를 따라 동학운동 때 목사 이승우를 도왔고 국모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아버지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승우에게 체포되어 홍주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왜경에게 삭발을 당하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옥의 창지를 찢어 ‘志士不忘在湯 勇士不忘喪其元 寧作斷頭鬼 不爲削髮人(지사부망재탕 용사부망상기원 영작단두귀 부위삭발인)’이라는 혈서를 쓴 뒤 목을 찔러 옥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경이 달려와 생명이 겨우 붙어 있음을 보고 치료를 하자 음식을 전폐하고 투약을 거절하여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옥중 동지들의 설득으로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경성 감옥으로 끌려가 재판장 이범진에게 재판을 받으며 법정 진술에서 “지난해 국변이 있은 후 또 다시 삭발령을 내리고 길가는 행인까지 함부로 붙들어다가 삭발을 시키는 이러한 역적들을 없애고 국사를 바로잡는 것이 나의 소원인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다만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특사를 내리고 홍릉주사(洪陵主事)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돌아왔다.
광무 10년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기어코 역적의 무리들을 소탕하여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향하여 진격하려 하다가 결국 일경에세 체포된 뒤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관찰사 서리 (觀察使署理) 박찬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그의 태도가 태연자약하여 왜경들도 경탄하였다 한다. 병찬의 아우 병림도 민종식과 의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미년에는 또 다시 왜신의 무고로 형제가 공주감옥에 투옥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안병찬(安秉瓚) 지역 청양군
출생·사망 1854(철종 5) ∼ 1921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안병찬의 자는 치규(穉圭)요, 호는 규당(規堂)이다. 순흥인 안창식의 아들로 당시 홍주군(홍성)이었던 화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초연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아버지를 따라 동학 혁명 때 목사 이승우를 도왔고, 을미사변때 아버지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승우에게 체포되어 홍주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왜경에게 삭발을 당하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옥의 창지를 찢어 혈서를 쓰고 목을 찔러 옥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경이 달려와 생명이 겨우 붙어 있음을 보고 치료를 하자 음식을 전폐하고 투약을 거절하여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옥중 동지들의 권유로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체결이 발표되자 전 국민은 비탄에 잠기어 항쟁에 나섰다. 이에 한규설 등 대신을 비롯하여 유생, 여성, 학생, 노비에 이르기까지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을사오적을 규탄하니, 비록 국가는 존망지추의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지만, 이로부터 한국인의 항쟁은 시작된 것이다.
이 비분의 소식을 들은 안병찬은 그달 24일 입궐하여 궁내부 비서원에 들어가서 승지에게 상주문을 주고, 고종 황제에게 돌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상주문을 접수한 비서감승 박승봉은 <요즘 유생들의 소도 아무 장애없이 바치거늘 하물며 품임관의 상소를 바치지 못하리오>하며 즉시 올려졌는데, 이를 보고 난 안병찬은 곧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비지(批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비를 받을 경우 5적의 목을 찍으리라>고 다짐하며 적성을 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니 이 때에 그의 나이 51세였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상주문이 무력한 왕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감연히 떨쳐 일어나 적극 무력 투쟁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31세 때에 홍주 교임으로 부임하여 충청도 일원에서 명망을 얻었다. 이듬해 단발령이 내리자 김복한(金複漢) 이설(李 )등과 함께 기의의 기치를 들게 되는데 민중의 덕망과 흠모를 받던 당시의 그의 위치로 보아 의당 가야할 길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의병 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크게 느낀 재판장 이범진에 의해서 방면, 홍릉 주사에 배병되었다가 곧 사퇴하고 말았다.
그 후 을사조약이 조인되자 민종식, 김복한, 이세영 등과 빈번한 모임을 갖던 중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전국 유림들과 연락을 가지면서 존양토왜(尊壤討倭)의 기치를 들었으나. 이 때에도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후 1909년에는 반도 침략의 원흉 이또오를 처치한 안중근의 재판에서 그는 영국인 더글라스와 대동공보 사장인 미하일로프와 함께 변호인으로 자원했으나 기각되고 다만 관선 변호인만으로 재판을 끝내었으니 이로써 안중근은 사형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3월 15일 그가 여순 감옥에 있는 안중근을 찾았을 때 안중근은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 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노니……나의 유지를 계승하여 자주 독립을 회복하면 사자무감(死者無憾)이라>고 하였으니 이 때 그의 감회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추측할 수 있겠다.
그 후 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등지에서의 구국 운동이 본격화하자 그는 가재를 정리하여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함석은(咸錫殷), 오동진(吳東振), 김승만(金承萬)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 청년단 연합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면서 기관지 「대한청년보」를 발행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민족 독립의 대사업에 일대 만군의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대한청년단 연합회의 취지에서도 보듯이
<청년은 국민의 중심이요 국가의 기초라, 이번 우리 대한 광복 사업의 추(秋)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흥망과 우리 민족이 자유되고 노예됨은 우리 청년의 활동 여부에 전재함은 실로 다언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전제하고 그는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칠 줄 모르는 항일의 불꽃은 쉬지않고 타올랐다.
다시 출옥한 후 안병찬은 상해로 들어가 임시 정부의 국내연락망인 '연통제(聯通制)' 조직에서 평안북도 독판(督瓣 - 제 2대)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솔선하여 나섰다.
안병찬은 1910년대 만주 일원의 독립 혁명 대열의 최선두에서 활약하였지만 그는 평생의 사업인 조국 광복의 뜻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1921년 모스크바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가져오다가 반대파 공산당원으로부터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말로는 너무나 큰 비운이었다. 그의 사적은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에 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체결이 발표되자 전국민은 비탄에 잠기어 항쟁에 나섰다.
이에 한규설 등 대신을 비롯하여 유생(儒生)・여성・학생・노비에 이르기까지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을사 5적을 규탄하니, 비록 이로부터 국가는 존망지추(存亡之秋)의 파국으로 몰아가기 시작했지만 또 이로부터 한국인의 항쟁은 시작된 것이다.
이 비분의 소식을 들은 안병찬은 그달 24일 입궐하여 궁내부 비서원에 들어가서 승지에게 상주문(上奏文)을 주고, 고종황제에게 올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상주문을 접수한 비서감승(秘書監丞) 박승봉(朴勝鳳)은 「요즘 유생들의 소(疏)도 아무 장애없이 바치거늘 하물며 품임관(品任官)의 상소를 바치지 못하리오.」
하며 즉시 올려졌는데, 이를 보고 난 안병찬은 곧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비지(批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비(優批)를 받을 경우, 5적의 목을 찍으리라」고 다짐하며 적성(赤誠)을 토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찰청에 구금되었으니, 이때에 그의 나이 51세였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상주문이 무력한 왕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감연히 떨쳐 일어나 적극 무력 투쟁의 길에 몸을 떨쳐나섰다.
그는 1854년 충남 홍주(洪州-홍성)에서 태어났는데 31세 때(1894)에 홍주 교임(校任)으로 부임하여 충청도 일원의 지도인사로서 명망을 얻었다. 이듬해 단발령이 내리자 김복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기의(起義)의 기치를 들게 되는데, 민중의 덕망과 흠모를 받던 당시 그의 위치로 보아 의당 가야 할 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의병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크게 느낀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에 의해서 방면, 홍릉(洪陵) 주사에 배명되었지만 곧 사퇴하고 말았다. 그후 을사조약이 조인되매 민종식(閔宗植) 김복한 이세영(李世永)등과 빈번한 모임을 갖던 중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전국 유림들과 횡적 연락을 가지면서 「존양토왜(尊攘討倭)」의 기치를 들었으나 이때에도 다시 체포되어 투옥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등지에서의 구국운동이 본격화하자, 그는 가재를 정리하고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함석은(咸錫殷). 오동진(吳東振). 김승만(金承萬)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청년단 연합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면서 기관지 (대한청년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방 민족독립의 대사업(大事業)에 일대 진군의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대한청년단 연합회의 취지에도 있듯이
(청년은 국민의 중심이요 국가의 기초라, 이번 우리 대한광복사업의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의 흥망과 우리 민족이 자유되고 노예됨은 우리청년의 활동여부에 전재(專在)함은 실로 다언(多言)할 필요가 없으리라.)
고 전제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칠줄 모르는 항일의 불꽃은 쉬지 않고 점화(點火)되었다. 다시 출옥한 후 안병찬은 상해로 들어가 임시정부의 국내연락망인 <연통제(聯通制)> 조직에서 평안북도 독판(督辦-제2대)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솔선하여 나섰다.
이듬해(1921) 그는 유동열. 최고려(崔高麗)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참석,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그는 상해로 돌아가 국내연락기관으로 상해지부를 설치하였다. 상해지부의 위원에는 여운형.조동호 등의 대표를 선정하고, 전위(前衛)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별도로 설치하여 박헌영을 책임자로 하고, 후에 조직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대결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금의 부족으로 큰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으나 조봉암등을 국내에 침투시켜 항일 지하운동을 벌이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겨 놓았다.
1860년(철종 11) 11월 18일~1929년 12월 2일. 의병장.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충청남도 청양(靑陽) 출신이다.
부친은 홍주(洪州) 의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안창식(安昌植)이며, 안병찬(安炳瓚)의 아우이다.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예로서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그의 부친과 형은 일찍이 을미 홍주의진에서 활약하고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부친은 사망한 뒤여서, 형 안병찬이 홀로 의거를 일으켰으나, 1906년 2월 23일 패전하여 체포되었다가 4월 12일에야 석방되었다.석방을 전후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민종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안병찬은 참모(參謀), 안병림은 참모사(參謀士)가 되어 형을 보좌하였다.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천(舒川)을 향해가서 양총(洋銃) 20자루를 빼앗아 가지고 남포(藍浦)를 지나 3일을 유진(留陣)하면서 적군과 한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어서 보령(保寧)을 지나 홍주(洪州)로 달려갔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근처 삼신당리(三神堂里)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한 차례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쫓고 4월 26일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병림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어 남계원(南啓元)・곽한일(郭漢一) 등과 함께 공을 세웠다.의진이 홍주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성내의 일진회원의 음모로 동문(東門)이 무너지고 피아간의 접전 끝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의진의 탄환이 다 떨어져 결국 성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백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안병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적군은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수색하는데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종식과 이남규(李南珪)・이용규(李容珪) 등은 청양(淸陽)・예산(禮山) 일대에서 끊임없이 활약하였다.이러한 의병들의 활약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적군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민종식을 위시하여 곽한일(郭漢一)・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이세영(李世永) 등과 같이 안병림(安秉琳)도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문(閔門)의 일원으로 고종의 특지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안병림은 9개월 만에야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그동안 한성에 구금되었었는데, 찬 방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거의 폐인이 될 뻔하였다.1907년 10월 1일에 다시 형 안병찬 외 3인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부(公州府)로 압송 심문 받았다. 일인 순사 공팔(公八)의 모략 때문이었다.출옥 후에도 형 안병찬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안창식(安昌植)‧안병찬(安炳瓚)‧안병림(安秉琳) 삼부자가 모두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1860. 11. 18~1929. 12. 2
안병림은 홍주(洪州)의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안창식(安昌植)의 아들이며, 병찬(炳瓚)의 아우이다.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유(文成公 裕)의 후예로서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부친과 형은 일찌기 을미 홍주의진의 중추적 인물이 되어 활약하고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이어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부친은 사망한 뒤여서, 형 병찬이 홀로 의거를 일으켰으나,
1906년 2월 23일 패전하여 체포되었다가 4월 12일에야 석방되었다. 석방을 전후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민종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형 병찬은 참모(參謀), 병림은 참모사(參謀士)가 되어 형을 보좌하였다.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천(舒川)을 향해가서 양총(洋銃) 20자루를 빼앗아 가지고
남포(藍浦)를 지나 3일을 유진(留陣)하면서 적군과 한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어서 보령(保寧)을 지나 홍주(洪州)로 달려 갔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근처 삼신당리(三神堂里)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한 차례 격전을 벌여 왜병을 쫓고 4월 26일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병림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어 남계원(南啓元)・곽한일(郭漢一)등과 함께 공을 세웠다. 의진이 홍주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성내의 일진회원의 음모로 동문(東門)이 무너지고 피아간의 접전 끝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의진의 탄환이 다 떨어져 결국 성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백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병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적군은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수색하는데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종식과 이남규(李南珪)・이용규(李容珪) 등은 청양(淸陽)・예산(禮山) 일대에서 끊임없이 활약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약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적군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민종식을 위시하여 곽한일(郭漢一)・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이세영(李世永) 등과 같이 안병림(安秉琳)도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문(閔門)의 일원으로 고종의 특지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병림은 9개월 만에야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그동안 한성에 구금되었었는데, 찬 방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거의 폐인이 될 뻔하였다. 1907년 10월 1일에 다시 형 병찬 외 3인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부(公州府)로 압송 심문 받았다.
일인 순사 공팔(公八)의 모략때문이었다. 출옥후에도 형 안병찬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으며
순흥인 안창식은 고려조 좌찬성 문성공(左贊成 文成公) 안유(安遊)의 후예(後裔)로 효행(孝行)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은 경양(璟良)의 손자(孫子)이다. 그는 헌종(憲宗) 4년 무술(戊戌 1838) 2월에 출생(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네 살 때에 할아버지가 그의 재주를 시험(試驗)하기 위하여 글을 지으라 하니 곧 「사람의 소리에 산이 운다」하고 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였다.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때 판서(判書)였던 이건필이 그 의 재주와 효성이 아까워 벼슬 자리를 천거(薦擧)하였으나 늙은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이를 사양(辭讓)하였다. 갑오(甲午 1894) 동학운동 때 홍주성이 동학군(東學軍)에게 포위(包圍)되어 위급(危急)하게 되자 군사를 모집하여 초토사(招討使)였던 이승우를 도와 평정하였다. 이에 이승우가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벼슬을 내리도록 하였으나 끝내 사양(辭讓)하였다. 을미(乙未)년 8월 국모(國母)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창식은 그의 아들 병찬에게 ?나는 늙어 힘이 없으나 뒤에서라도 도울 터이니 나라를 위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라?고 하였다. 이에 병찬은 채광묵 과 같이 수백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가 당시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失敗)하여 이승우에게 김복한 등과 같이 체포(逮捕)되었다. 창식도 아들과 같이 체포(逮捕)되어 홍주옥에서 서울로 이수되어 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特使)로 다음해 병신(丙申)년 봄에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날로 기울 어지는 국사(國史)를 걱정하다가 을미(乙未 1895)년 11월1일 홍주 다동에서 세상(世上)을 떠났다.
안창식의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유(文成公 裕)의 후예로서 대대로 홍주의 남쪽에 위치한 청양 화성(靑陽化城)에서 살면서 문학을 전업으로 삼았다. 그는 형체가 장대하고 기개가 고상하며 침착하고 강개하여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 일을 걱정해 왔다.
그의 이러한 성품이 병찬(炳燦)・병림(炳琳) 두 아들을 의병운동에 투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특히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운동의 반민족적 측면을 우려하여서
1895년 여름부터 비밀히 거의(擧義)할 뜻을 두고서 한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광호(廣湖)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른바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
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왕래하면서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아들 안병찬(安炳燦)이 전 승지(承旨) 김복한(金福漢)・전 승지(承旨) 이설과 함께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왔다. 마침 안창식은 그 고을 사람인 채광묵(蔡光默)과 더불어 1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 군사를 내놓아 채광묵과 함께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다고 핑계하고 관문(官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날이 11월 29일 홍주의진의 첫 입성이었다. 화성(化城) 의병의 입성을 계기로 여러 의병장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속속 홍주로 들어왔다.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눌려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가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지로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끝내 이승우의 배반으로 12월 4일 성안에 있던 의진의 수뇌부가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아들 안병찬도 체포되었다. 집에 있다가 이 소식을 접한 안창식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홍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중도에서 돌아왔다.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승우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월 20일 안창식은 을사 홍주의거와 관련되어서 체포되었다. 심문받을 때 창식은 "30년 동안 군림하신 국모(國母)가 적당에게 시해를 당하셨는데 도리어 원수를 갚으려는 자를 역적이라고 한다면 국모를 시해한 자는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시골의 미천한 자가 혹시 높고 귀한 이의 상투나 수염을 움켜잡아도 오히려 패악무도한 자라 이르는데, 하물며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이랴. 도리어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역적으로 만든다면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가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였으며, 한사코 뜻을 번복하지 않았다. 1896년 정초에 두 부자와 의진 관련자들 23명이 모두 서울 법부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안창식은 연로하여 일찍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어졌으며,
아들 병찬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전략- 안창식(安昌植)께서는 종제인 화농 항식과 그 아들이자 증조이신 규당 안병찬(安炳瓚) 그리고 증증조 병림과 함께 홍주의병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우국충정 누라서 따르겠는가 한 가족이 다함께 생명을 초개같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일 전선에 뛰어드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길이 빛나는 나라사랑 충절의 표상으로 이는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충효에 바탕한 문중의 기상이자 자랑으로서 우리 모두가 몸둘바를 모르게하는 바이다. 의병운동이 세불리하여 왜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옥살이를 당하셨는가 하면 증고조 항식어른께서는 대마도에 유배되시는 욕을 당하셨다.
인근지역유적지 : 주류성30Km 승용차로 20분
인근관광지 : 장곡사 10Km 승용차로
인근행락시설 : 대천해수욕장30Km 승용차로30분
지역특산품 : 구기자, 청양고추 (우편주문, 현지구입)
청대사(靑垈祠)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에 위치한 청대사는 1994년 9월에 건립된 사당으로 순흥안씨 문중 출신 애국지사 4명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홍주의병 안창식 선생과 병찬. 병림 부자, 안항식 선생의 곧은 뜻을 기리는 청대사(靑垈祠)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홍주의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네 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해마다 청양군수, 홍성보훈지청장, 청양문화원장 등이 봉행에 참석하며 순흥안씨 유족대표와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다.
홍주의병 활동으로 안창식 선생 3부자는 옥고를 치렀으며 3·1운동 당시 유림들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파리장서 사건까지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성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으로 1906년 5월에는 단일 전투로는 최대 희생자를 낸 홍주성 전투를 치르다 일본군에게 300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순흥안씨 충의효행 기적비 "비문 중에서" 보면
-전략- ....창식께서는 종제인 화농 항식과 그 아들이자 증조이신 규당. 병찬 그리고 증증조 병림과 함께 홍주의병 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우국충정 누라서 따르겠는가 한 가족이 다함께 생명을 초개같이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일 전선에 뛰어드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길이 빛나는 나라사랑 충절의 표상으로 이는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충효에 바탕한 문중의 기상이자 자랑으로서 우리 모두가 몸둘바를 모르게 하는 바이다.
의병운동이 세 불리하여 왜적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옥살이를 당하셨는가 하면 증고조 항식어른께서는 대마도에 유배되시는 욕을 당하셨다.
충효절의와 애국정신에 투철한 가문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5월 11일(음 4월 18일)에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등이 충청도 홍산(鴻山) 지치(支峙)에서 창의(倡義)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민종식은 보국(輔國) 민영상(閔泳商)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 가정에 태어나서 지조가 있고 친지나 빈곤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 주기 때문에, 평소부터 관민간에 신망이 두터웠다. 진작 관직에 뜻이 없어, 충청도 정산군(定山郡) 천장리(天庄里)[지금 청양군(靑陽郡)]로 은퇴하여 뜻있는 선비들과 사귀어 놀면서 국가의 앞길을 염려하여 오던 중, 을사5조약이 있은 후 1906년 봄부터는 처남 되는 이용규(李容珪) 및 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黙) 등의 의사들과 함께 의병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충청남도 전라북도 지역으로 연락을 취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오던 중, 5월 11일에 드디어 이용규·이상귀(李相龜) 등 각지의 의사들과 함께 홍산에 모여 정작 창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던 것이다.1)
민종식 의진은 곧 행군하여 서천(舒川)의 구병동(九兵洞)·문장동(文章洞)을 거쳐 서천읍으로 들어가니 군사의 수효가 1천을 넘었으며, 비인(庇仁)·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방에서 호응하는 군사가 만으로 세이게 되니 후기 의병 중에서 가장 성대한 세력이었다. 이중 서천과 남포에서는 많은 총포와 화약·탄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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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양기사≫ 병오년 4월 26일조, ≪매천야록≫ 권5 광무 10년 4월조, ≪의사이용규전≫ 중 평리원 재판 문답기 등, ≪고종태황제실록≫ 권49 광무 11년 7월 3일조 등 민종식 등에 대한 평리원(平理院) 질품서(質稟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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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하기도 하였으며, 시천읍에서는 북종하지 않는 군수 이종석(李種錫)을 잡아 가두고, 남포에서도 군수 서상희(徐相喜)를 감금하고 병력을 증강하며, 일본군대와 만나서 이를 격퇴하면서 수명을 생포하였다.
또 4일간 남포에 유진하는 중에는 보령(保寧)의 우국지사(憂國之士) 유준근(柳濬根)을 맞이하여 함께 구국전략을 의논하기도 하였다.2)
유준근은 을사5조약이 있은 후에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관리들에게 ‘전곡갑병(錢穀甲兵)이 모두 저 오랑캐의 것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세금을 누구에게 바치려는 것이냐’고 하며 납세를 거부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 만큼,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기로 유명하였다.
남포 유진 중에는 종식의 초청을 받아 병중에도 불구하고 종군하였는데, 당시 일본군과 관군측에서는 황제의 명을 빙자하고 의병들의 해산을 종용하여 서로 담판이 있기도 하였다. 적측에서 의병진의 담판사절을 가두고 보내지 않는 것을 준근이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고, 결박하여 있던 의병사절을 놓아 함께 돌아오기도 하였다.3)
민종식의 진은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成)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에 바로 홍주[지금 홍성]로 진격하였으며,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성중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었다. 남문 성벽에 의지하여 대항을 시도하던 적군은 우세한 의병진의 공격을 당해 내지 못하고, 거류 일본인들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하여 예산(禮山) 방면으로 달아나고 마니, 홍주성은 의병진의 손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호서(湖西)의 중진(重鎭)인 홍주성을 무난히 차지한 의병진에서는 곧 민중들을 안정시키고 진용을 정비하며, 소를 잡아 하늘께 제사 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 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였으며, 아래와 같이 새로 부서(部署)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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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양기사≫, ≪의사이용규전≫, ≪황성신문≫ 광무 10년 5월 25일자 참조.
3) ≪기려수필≫ 유준근전 붙임.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지은 ≪우록유공묘지명(友鹿柳公墓誌銘)≫ 참조.
그리고 의병진이 홍주에 입성함과 함께는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이식(李侙)·안항식(安恒植) 및 전승지 김상덕(金商悳), 유학자 윤석봉(尹錫鳳)·유호근(柳浩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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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묵 등 여러 사람들이 연속하여 홍주 의진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김상덕은 군사(軍師)에, 신보균은 유병소 서기에 임명되었다.4)한편 각지에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며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2 홍주성 공방전
의병진에서는 입성과 함께 곧 군사를 6대로 나누어 4대문과 각 요소를 엄중히 파수하였는데, 미리부터 의병진의 동정을 탐지하며 따라 오던 적측의 군경들은 그날로 홍주성 근처에 집결하였으며, 이튿날 즉 5월 20일부터는 공격 태세로 나와서 피아간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중의 의병진 세력이 우세하고, 또 성중에서는 관민이 일체가 되어 주밀한 작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침범하여 오던 일본헌병대 등의 적군은 번번이 격퇴당하였으며, 또 10여 명의 포로가 생기기까지 하였다.5)
이러한 현지의 형편이었던 만큼, 적측에서는 조선 주둔군 사령관 장곡천(長谷川)이 곧 재경성(在京城) 남부(南部) 수비대(守備隊) 사령관 본조(本條)에게 명령하여, 포병·기병·헌병의 일부 및 보병 2개 중대를 긴급 증파하게 하였으며, 여기에 다시 홍주·공주·전주 일대의 헌병·경찰대 및 한국군진위대(鎭衛隊)의 병력이 합하였던 것이니, 적측은 그 수에 있어서나 정예면(精銳面)에 있어서나 실로 근래에 없는 대병력의 출동이었던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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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양기사≫ 병오년 4월 26일조, ≪고종태황제실록≫ 권48 광무 11년 7월 3일조 중 평리원 질품서(質稟書) 및 ≪의사이용규전≫ 참조. 민종식 의진의 충주 입성 후 부서 선봉장 이남규의 이름이 보이는데 ≪수당선생약전≫(修堂先生略傳) 등 이남규 관계문헌에도 그가 직접 홍주의병에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남규가 평소 민종식·이용규 등과 친근하고 또 의거관계를 의논할 수도 있었던 만큼, 의병진이 홍주에 입성하면서 이남규를 그 부서에 예정하였던 것이요, 이남규가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던 것은 아닌가고 보여진다. 또 안병찬·박창로 등 역시 제1차 의병으로 하여 감금되었다가 석방된 지 겨우 10여 일의 일이며, ≪기려수필≫ 안병찬 전 중에도 민종식 의진에 참가한 기록이 없으므로 보아서 역시 참모진에 예정만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5) ≪의사이용규전≫ 고광연보(古狂年譜) 참조. 일본측 기록 등에 의하면 5월 28일에 정찰차로 홍주성 서문 밖으로 파견되었던 경부 토방원지조(土方源之助) 이하 7명의 적군 중 토방 등 20명도 행방 불명되었다고 하였음.
6) 국사편찬위원회 편찬≪한국독립운동사≫ 1, 제1편 제4장 제4절 홍주의병 및 ≪황성신문≫ 광무 10년 5월 31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