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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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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주체 | 배극소, 최효술 |
작성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
작성시기 | 1860 |
형태사항 | 크기: 62.5 X 3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
소장정보 |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
안내정보
1860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1차 작성자 : 서진영
상제정보
1866년 7월 13일, 裵克紹가 『立齋集』의 文句에 대한 의문점과 자신의 소견을 밝히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
1차 작성자 : 서진영
간찰 원문 텍스트
분류 |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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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주체 | 배극소, 최효술 |
작성시기 | 1864 |
형태사항 | 크기: 42.5 X 34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
소장정보 |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
간찰 원문 텍스트
漆溪 道案 將命者。
疏上。稽顙謹封。
克紹稽顙再拜言。
國哀罔極。而
嗣聖有聲。臣民慟慶。普率同情。而伏惟
忠孝盛德。必有倍切於常情矣。謹伏問和煦。
道體順時完養。不瑕添損。令允侍學。承歡連衛。哀溯區區不任
下忱。克紹。罪惡不天。洊遭禍釁。樑催之淚。風樹之痛。次第霣迫。繼而値
方喪重哀。生三之恩。一時俱空。一縷之苟延。儘是冥頑矣。且去年巨創
之餘。家禍連酷。累遭朞功之慘。自春曁冬。歷盡幾劫滄桑。驚惶神
思。尙未底定。況今練期已過。而拘於
邦制。不得行祀。拊時之感。靡逮之痛。益復罔極矣。自顧愚陋。素無講
熟之工。而遽此遭罹。變常之節。每多疑悔。而禍患連仍。憂病侵凌。末由
就質於
容丈之席。且前秋。過蒙厚眷。遠垂俯慰。而未得躬謝。哀感之衷。祗
自罪悚而已。謹將疑變數條。替伻仰詢。伏乞
批誨焉。餘荒迷不次謹疏。伏惟
鑑察。
甲子 三月 十五日。孤哀子 裵克紹 疏上。
1866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기본정보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배극소, 최효술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작성시기1866
형태사항
크기: 37 X 4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6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1866년 배극소가 최효술에게 보낸 편지이다. 근래 어버이 산소의 석상을 세웠는데 면을 새기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비위를 먼저 장사지내고 부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도 무방한지, 혹은 합봉이나 합폄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또한 어떠한지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이어서 중용 수장의 장구 ‘순기성’의 뜻에 관하여 의문 나는 점을 물어보았다.
1차 작성자 : 김선주
상세정보
1866년 10월 24일, 裵克紹가 어버이 산소의 石床을 세웠는데 비면을 새기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중용 장구 등에 의문 나는 점을 묻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
1866년 裵克紹가 어버이 산소의 石床을 세웠는데 비면을 새기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중용 장구 등에 의문 나는 점을 묻기 위해 崔孝述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앞부분은 안부와 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어보았다. 이어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근래 어버이 산소의 석상을 세웠는데 시속을 따라 비면을 새겨서 묘지나 묘표의 뜻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바로 考妣를 合墳한 곳을 표시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가로로 행간을 만들어서 上行에는 큰 글씨로 ‘處士某貫某公諱某之墓’라고 하였고, 下行에는 작은 글자모양으로 ‘孺人某貫某氏合祔’라고 쓰는 것이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또한 妣位를 먼저 장사지내고 祔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도 무방한지, 혹은 마땅히 合封이나 合窆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또한 어떠한지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이어서 『中庸』 首章의 章句 ‘循其性’의 뜻에 관하여 물었는데, 已發의 용은 진실로 그 성을 따른 도이고, 未發의 체도 또한 그 성을 따른 도인데, 어찌 도의 체로써 홀로 그 성을 따른다고 이르지 않겠냐고 하면서 말로 정의를 내릴 때에 차이점이 나기 쉬우니, 다시 변별된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편지의 끝부분에는 위에서 말한 중용 구절이 陰陽五行이 理氣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 당시에 질문하였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돌아와 다시 추구해보아도 아직도 먼저 들었던 의혹을 풀지 못했다고 하였다. 氣는 음양오행의 기이고, 理는 또한 음양오행의 리이므로 그 아래 健順五常이라 한 것은 음양오행의 리로 성을 삼은 것이니, 상면에 이른바 음양오행이 어찌 리를 버리고 온전히 기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大學或問』에 이르기를, "천도가 유행해서 만물을 발육한다"라고 했으니 그 조화가 되게 하는 까닭은 음양오행일 뿐이고,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 리가 있은 후에 이 기가 있다고 하였다. 또 "인물의 생은 반드시 이 리를 얻은 이후에 健順仁義禮智의 성을 삼을 수 있으며, 반드시 이 기를 얻은 이후에 魂魄五臟百骸의 몸을 삼을 수 있다"고 한 것을 들어서 이 리와 기는 음양오행의 리와 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자세히 답변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간찰의 수취인은 百弗庵 崔興遠의 손자인 최효술이다.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타고난 자질이 道에 가까웠는데 이에 더하여 性理에 대한 학문을 탐구하여 유림의 師表가 되었다. 外王考 鄭宗魯를 따라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나라에서 전후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 7책이 전한다. 발급인인 배극소(1819~1871)는 자가 乃休, 호는 默庵, 본관은 盆城이다. 부친은 裵相觀이다. 直齋 金翊東과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0년(철종 1) 증광시 생원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출세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855년(철종 6) 류치명이 智島로 유배를 당하자 그곳까지 따라가서 머물며 학문연마에 힘썼다. 저서로는 『默庵文集』 등이 있다.
원문 텍스트
1866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漆洞 道案 將命者。
孝山 裵生 上候書。謹封。
前春。侍誨未盡講質。自擬續候在邇。而憂冗纏掣。未遂躬造之忱。
便信阻濶。亦闕替候之儀。恒切悚恨之交幷矣。際承令允惠訊。憑伏審
始寒。
大耋道體節宣康福。鯉庭侍學。長第毖迪。區區伏慰。不任下忱。但膝下
疹憂承有關念之端。此是今年輪運。而完福所庇行。當有順經之慶矣。訓
下生。虛羸之症。姑未完蘇。孤露餘生。此固例祟。而自己分一事。亦緣此多放過。
每不覺瞿然汗惕耳。近營親山石床。爲循俗刻面。以替誌表之意。而是考妣合
墳處也。橫作行間。上行大書。處士某貫某公諱某之墓。下行微小字樣。書云
孺人某貫某氏合祔。如何。且妣位先葬。而着祔字。亦無妨否。或云。當書合封。或合
窆未知。亦如何。伏望批示焉。春間。奉誨時。擧中庸首章章句。循其性之義。而俯
詢焉。八耋神識。記得四五年前所誨語。儘覺資稟之旣異而完養之有道也。欽
服之餘。歸以思之。則李艮翁所謂未發。而戒愼恐懼。獨非循其性之自然乎云者。
實是透見得十分盡頭也。蓋曰各循其性。各有當行則循與行字。似是專就。已
發上言。而惟其道之一字。兼體用該動靜。未發而道之體具焉。已發而道之用行
焉。無物無時道無不在。則已發之用。固是循其
性之道。而未發之體。亦是循其性之道也。豈以道之
體。而獨不謂循其性乎。名言之際。毫忽易差。更
爲辨誨焉。愚意以章句陰陽五行。兼理氣看
了。而向時奉質。未蒙頷可歸復推究。尙未解先
入之惑也。玆敢更煩仰質。蓋陰陽五行。固是氣
也。而但以此章句。上下文理。繹以觀之。則天所以化生萬
物者。卽不過。氣以成其形。理以賦其性也。然則其所謂
氣成理賦之訓。乃申釋化生萬物之義。而氣是陰陽
五行之氣也。理亦陰陽五行之理也。故其下健順五常云
者。以陰陽五行之理。而爲之性則上面。所謂陰陽五行。
豈可曰舍理而專言氣乎。是以大學或問曰。天道流行。
發育萬物。其所以爲造化者。陰陽五行而已。而所謂陰
陽五行者。必有是理而後有是氣。又曰人物之生。必得是
理。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
性。必得是氣。然後有以爲魂
魄五臟百骸之身云云者。與
此中庸章句一串語意。而其曰
是理是氣者。非指陰陽五
行之理與氣歟。伏望詳批答。
餘伏祝。天氣漸寒。
爲道保重。以副區區之望。不
備。伏惟
下鑑。
丙寅 十月 二十四日。訓下生 裵克紹 再拜。
1867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기본정보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배극소, 최효술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36 X 31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7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1867년 2월 20일, 배극소가 안부와 회강에 나가지 못한 마음을 최효술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배극소는 잡다한 일에 얽매여 회강에 참석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효술의 부친이 혼인을 한지 6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한 것을 축하하였다. 편지 상으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난번의 부탁한 일은 끝내 뜻을 돌릴 수 없었다고 전하며 편지를 마쳤다.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867년 2월 20일 裵克紹가 안부와 會講에 나가지 못한 마음을 崔孝述에게 전하는 편지
1867년 2월 20일 裵克紹(1819~1871)가 안부와 會講에 나가지 못한 마음을 崔孝述(1786~1870)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배극소는 지난번의 편지로 회강을 한다는 소식을 받고 名理의 논의를 들으려고 했는데 잡다한 일에 얽매여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최효술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건강하고 아이들도 잘 지낼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최효술의 부친이 혼인을 한지 60년이 되는 해를 맞이했는데 무슨 선을 쌓아서 80 먹은 양친을 모실 수 있냐고 하였다. 자신은 어버이를 여의여 부러움이 배가 된다고 하였다. 배극소은 최효술의 마을에 역병이 없어졌는지 물었다. 자신은 예전과 같이 지내는데 遠近의 爻象이 근심된다고 하였다. 지난번의 부탁한 일은 전에 편지로 대강 말했는데 그 후에 끝내 뜻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마땅히 사실을 알려야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인편도 없으니 이 점을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추록을 써서 최효술의 10촌 편지도 같이 보내니 잘 전해달라고 하였다.
발신자는 배극소로 자는 乃休이고, 호는 默庵이다. 아버지는 裵相觀이고, 어머니는 朴恒敦의 딸 密陽朴氏이다. 3남 중 장남으로 동생 裵德紹와 裵達紹가 있다. 直齋 金翊東 · 定齋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영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묵암문집(默庵文集)』이 있다.
수신자는 崔孝述로 본관은 慶州이고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崔湜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鄭宗魯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 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류치명을 비롯하여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李源祚 · 孫亮述 등 영남의 문인들과 교유 하였다. 저서로는 『지헌집』 15권이 있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순주
원문 텍스트
1867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漆溪 侍棣座 執事。
孝山 裵弟 謹候書。謹封。
頃書後。承有會講之擧。擬聽名理之論。而袞冗所
掣。竟違進參。迨庸悵恨。伏惟春和。
堂上壽體。與道俱泰。
侍奉棣學候。連護崇謐。子舍制履。長弟支重。仰
溯區區不任拱祝之至。而且聞。
尊府蕸福歲値回昏。有何積善之深。而得侍八耋之雙
親乎。孤露餘生。每於此等事。尤倍萬欹艷也。但以
引嫌停禮云。尤見德意之盛。而奉下之情。想不無介
恨也。村沴近得淨霽否。克紹。身家亦姑依。而惟遠
近爻象甚爲悶煎耳。向托事。前
書已陳大槩。而厥後縷縷頌言。
終不回意。此實緣分之似有定矣。
卽當奉告實狀。而事旣不諧。便
且無憑。尙且遷稽。
諒之如何。餘不備禮。
丁卯 二月 二十日。弟 裵克紹 拜。
令四從氏書幷付。奉傳是望耳。
1867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기본정보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배극소, 최효술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35.5 X 37.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7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1867년 2월 20일, 배극소가 학문 하는 방법과 자세를 이야기하고자 최효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배극소는 학문을 하는데 있어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처리를 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면 된다고 하였다. 다른 일을 한다고 시간이 없다며 나태해지거나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함께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867년 2월 20일에 裵克紹가 학문 하는 방법과 자세를 이야기하고자 崔孝述에게 보내는 편지
1867년 2월 20일에 裵克紹(1819~1871)가 학문 하는 방법과 자세를 이야기하고자 崔孝述(1786~1870)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배극소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보고 싶은 마음을 전하였다. 지난날 상대방의 삼종 조카 편으로 會講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일에 얽매여 가지 못했다고 하였다. 자신은 부모님을 잃고 근심과 병으로 師友와 함께 하지 못하고 또 번잡함을 떨쳐 옛 일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것을 핑계 삼아 타인도 꾸짖지 않아 점점 나태해졌는데 자신의 뜻이 확고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은 일에 끌려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극소가 선배의 말을 전하며 인사는 남에게 시켜서 할 수 없으니 누구를 시켜서 할 수 있겠냐고 하였다. 예부터 학문을 하는 자가 학문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학문만 할 수 있겠냐고 하였다. 일을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하는 것이라고 하며, 일 처리를 마치고 나서 옛 사람과 같이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준칙으로 삼으면 일상생활을 하는데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오히려 게으름에 스스로 안주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 습관이 되고, 여유가 나지 않으면 책상으로 가지 않는 것을 스스로 책망하고 자책해야 한다고 하며 편지를 마쳤다.
배극소는 程子의 말과 『論語』, 「夙興夜寐箴」의 글을 인용하여 최효술에게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충고를 하였다. 항상 학문만 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며 어떠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먼저 해결하고 남는 시간에 학문을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발신자는 배극소로 자는 乃休이고, 호는 默庵이다. 아버지는 裵相觀이고, 어머니는 朴恒敦의 딸 密陽朴氏이다. 3남 중 장남으로 동생 裵德紹와 裵達紹가 있다. 直齋 金翊東 · 定齋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영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默庵文集』이 있다.
수신자는 崔孝述로 본관은 慶州이고 자는 穉善, 호는 止軒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崔湜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宗魯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 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류치명을 비롯하여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李源祚 · 孫亮述 등 영남의 문인들과 교유 하였다. 저서로는 『지헌집』 15권이 있다.
『慶州崔氏匡靖公派大譜』, 新川族譜社, 1992
1차 작성자 : 김순주
1868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본문 확대본문 축소
기본정보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배극소, 최효술
작성시기
1868
형태사항
크기: 38 X 3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8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1868년 7월 16일, 배극소가 스승 최효술에게 학문에 대한 질정과 건강을 잘 보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앞부분에는 스승이 자식을 잃었는데 조문을 하지 못하여 애석한 마음을 전하였고, 그 다음에는 공부하면서 느낀 소회와 스승이 가르쳐주신 것에 여전히 의심이 생겨 질의하니 조목조목 가르쳐 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868년(고종 5) 7월 16일 裵克紹가 스승 崔孝述에게 학문에 대한 질정과 건강을 잘 보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
1868년(고종 5) 7월 16일 裵克紹(1819~1871)가 스승 崔孝述(1786~1870)에게 학문에 대한 질정과 건강을 잘 보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승이 자식을 잃었는데 조문을 하지 못하여 애석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부하면서 느끼는 소회를 담았다.
편지의 앞부분은 안부와 계절 인사로 시작하였다. 본론에서는 배극소의 스승이 자식을 먼저 잃게 되었는데, 슬픈 나머지 道를 닦는 마음에 손상은 없으신지 물었다. 한편 스승은 밤낮 이치에 대해 분명히 하시는 소양을 갖추어서 성스러운 덕이 요동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아울러 상을 치르는 아들과 손자들도 모두 건강을 잘 지키고 있는지 물었다. 배극소는 지난 번 홍수로 길이 막혀 조문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근심거리가 생겨 나아가 안부를 묻지 못해 슬프고 애석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공부에 대한 소회이다. 배극소는 여러 해 동안 몸이 야위어져 현기증으로 공부에도 나아감이 없이 나태해져 공부를 북돋우거나 도리를 계발하는 보탬이 없으니, 끝내는 소인으로 귀결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또한 매번 분수대로 책상을 가까이하면서 책 속에도 스승이 없지 않으나 보고 느끼는 것이 직접 배우는 것과는 다르니, 책을 통해 마음에 징험하고 몸에 체득하기를 바라기 어렵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전에 스승이 가르쳐주신 것을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여전히 의심이 많아 질의하니 조목조목 가르쳐 주시길 바란다고 하였다.
편지의 끝부분에는 도를 위하여 건강을 잘 지키시길 바라고, 편지의 예식을 갖추지 못하지만 살펴봐 달라고 하였다.
발급인 배극소의 본관은 盆城, 자는 乃休, 호는 默庵이다. 경상북도 河陽郡 출신이며, 부친은 裵相觀이고, 모친은 密陽朴氏로 朴恒敦의 딸이다. 3남 가운데 맏이이며, 동생으로 裵德紹와 裵達紹가 있다. 直齋 金翊東과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0년(철종 1) 증광시 생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출세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855년(철종 6) 류치명이 智島로 유배를 당하자 그곳까지 따라가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영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默庵文集』 6권 3책이 있으며, 묘는 경상북도 慶山 珍良邑에 있다.
수취인 최효술의 자는 穉善, 호는 止軒, 본관은 慶州이다. 百弗庵 崔興遠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湜이며, 어머니는 晉州鄭氏로 立齋 鄭宗魯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0년에 遺逸로 천거되어 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865년에 敦寧府都正을 거쳐 副護軍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柳致明 · 李秉夏 · 李敦禹 · 이휘령 · 李源祚 · 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지헌집』15권 7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원문 텍스트
1868년 배극소(裵克紹) 서간(書簡)
漆溪 服案 上候書。
省植謹封。
省式言。夏潦極備。時候不佳。向者又經。
令允寃祥。伏惟
悲念之餘。
頣養道體。不瑕添損。晝夜之理。講明有素。想不爲
盛德之所動。子舍彧房舍哀侍。亦次第支重否。克紹前
阻潦戱。未卽趨唁。繼掣憂擾。尙稽晉候。區區悲愧不任下忱。
克紹年來以患難。餘生賤質虛羸。往往有眩暈之症。拘撿無
節度。繙閱無程課。因循懦退孤陋。自在無鼓作啓發之益。
竊恐恁地悠悠。終於小人之歸也。以是瞿然。每隨分近案。方
冊之中。非無餘師。而警發觀感。與親炙有異。鈍根鹵莽。未
能領略微奧。安可望驗於心。而體於身乎。前者俯誨。心
性之說。歸復推思。尙多疑晦。敢此禀
質。伏乞條晦開噵昏惑焉。餘。伏
祝
爲道保重。以副瞻仰。不備。伏惟
鑑察。
戊辰 七月 十六日。訓下生 裵克紹 再拜。
출처: 한국학 자료센터
첫댓글 귀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묵암 선생의 간찰 잘 보았습니다
아울러 선대의 문헌을 고이 모셔온 최효술 선생의 후손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