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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3
창세기 34:18-31
할례 전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이름을 주셨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로 상대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시겠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제 야곱의 가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담아내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세겜 성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언약으로 주신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의 수치를 철저히 드러내신다.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18절). 13절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라고 하였다. 즉 비진리를 전하였는데 하몰과 세겜이 그것을 진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의 아들들이 전한 것은 언약의 아들로서 전한 것인데 진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그 상태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좋게 여기므로”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타브’는 ‘선하게 여기다, 즐거워하다, 잘 되다, 성공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알지 못하면 할례라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행위로 자기 의가 드러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율법주의로 살면서 믿음에 성공했다고 착각한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2-4)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19절). “이 소년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나아르’는 ‘아이, 소년, 젊은이, 하인, 종’이라는 뜻이다. 세겜을 갑자기 “소년”이라고 표현함으로 주체는 언약의 아들들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은 열두 아들이 아니었기에 완전한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몰과 세겜이 종과 같이 되어 비진리의 말에 순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딸’,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교회 됨을 모르고 있었기에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라고 표현하였다. 세겜은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였더라”라고 한 것은 육적인 야곱의 딸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집(28:7, 22)을 이루고 있는 야곱과는 다른 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진리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20-21절). 디나를 통해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과 통혼함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성읍 문”에서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였다는 것은 법적인 효력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세겜 사람들은 할례를 율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땅은 넓어”라고 말함으로 그들이 땅적 존재로 땅에 매여 있음을 나타낸다. “용납할 만하니”라고 번역한 이 말의 히브리어는 ‘야드’로 ‘손’이라는 뜻이다. 손이란 행함을 상징한다. “거주하며”의 ‘야샤브’는 ‘머무르다, 앉다, 살다, 정착하다’라는 뜻이다. “매매하게 하고”의 ‘사하르’는 ‘돌아다니다, 두루 다니다, 무역에 종사하다, 장사하다’라는 뜻이다. “친목하고”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샬렘’이다. 즉 통혼함으로 평강을 이루자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야곱의 가족을 땅적 존재로 땅에 매이도록 율법적인 행위를 하도록 만들며 장사하는 자들로 정착하게 만들자는 의미가 된다. 진리가 없는 자들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진리인 줄 알고 사고파는 율법적인 행위로 땅에 매인 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을 오늘날 교회들은 비진리를 헌금하여 사도록 강요하여 평안,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22-23절).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법적으로 선포하였다. 할례를 받는다고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셨을 때 그 의미가 마음의 할례에 대한 것임을 생각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할례라는 율법 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할례를 언약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할례는 인간의 행위를 끊고 언약의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렘 4:4).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렘 9:26)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며 사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스데반은 강론 중에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라고 하였다. 마음의 할례가 없다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것은 곧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24절).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자 한 본심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23절)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율법을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도리어 언약을 모르면 율법을 사유화할 뿐이다. 야곱이 아들들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할례 언약을 자신들의 수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이용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일이다. 세겜 사람이든 야곱의 아들이든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생명나무를 선악의 나무로 취하는 죄인이다. 율법의 말씀을 언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행위로 취하면 성취감이 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남을 돕고 구제를 하는 것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지만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25-29절).
“삼일”은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일이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삼일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심판 일 수밖에 없다. “시므온”의 뜻은 ‘귀 기울여 듣는다’라는 뜻이고,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연합’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를 위해 나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할례 언약을 들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신다. 이런 점에서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라는 말씀에서 “칼”이 말씀을 상징한다면 시므온과 레위는 각기 자기 말씀을 가지고 세겜을 심판한 것이 된다. 언약을 알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언약 정신을 알지 못했다. 오직 힘에는 힘으로 처리한다는 과거 야곱이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 누이동생의 강간 사건을 처리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물러 그저 자기를 위하여 편한 정착을 원하였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아직 아니었다. 그러므로 디나는 강간을 당하여야 했고 이런 이스라엘의 부끄러움을 폭로하심으로 벧엘로 끌고 가신다.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27절)라는 말씀은 시므온과 레위의 선봉대 역할로 나머지 모든 아들도 가담하여 약탈하였다는 것이다. 할례를 거짓말, 살인, 도둑질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탐욕이며 우상숭배이다. 언약의 아들들이 거짓말하여 비진리를 전하였고, 살인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노략하여 도둑질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들 것인처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아들들의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녀”(31절)와 같은 존재라고 폭로하신 것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
마음의 할례가 없었기에 말씀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언약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으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 결국 할례를 도구로 이용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과 전통에 매인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준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 7:6-8)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0-31절).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바아쉬’는 ‘나쁜 냄새가 나다, 악취를 풍기다, 미움을 받다, 무례하다’라는 뜻으로, 세겜 성의 일로 가나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약적 의미로 보자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결국 할례 전쟁은 이스라엘과 세겜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전쟁이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박수와 칭찬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비진리를 거스르는 진리의 아들들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202411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