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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 유홍준
저자 유홍준 선생은 지난해 10월 부산 중구청 대강당에서 있은 특강의 강사로 초청되어 만난 적이 있다. 정열적이고 확신에 차서 우리 문화의 특성과 가치, 발전과 보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같아서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국내편에 이어 일본·중국편까지 20권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냈는데, 여간한 정열과 애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 말은 그의 ‘트레드 마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문화재를 보고 안내판도 읽어보지 않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안다고 다 아는 것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는 것이 세상일이란 것을 생각하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미 발표한 14권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가려 뽑은 것이라고 하는데 ‘창비’출판사가 그 양에 부담을 느끼는 MZ세대를 위해 가려 뽑아달라고 하여 선발한 것이라고 하므로 내가 보기엔 이미 읽은 내용일 것이다 싶다. 그렇지만 저자는 친절하게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사랑해 주신 기존 독자분들께도 최상의 독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므로 복습하는 생각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남도 답사1번지」라고 한 월출산 자락에 있는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등을 찾아가던 옛날이 오롯이 생각난다. 그때가 2000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책을 들고 다니면서 찾아가 사진 찍었던 기억이 새롭다.
2019년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 안동의 ‘병산서원’은 류성룡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곳으로, 병산서원이 다른 서원과 비교되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고, 회재 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가 빼어나나 서원 터가 좁아서 공간 운영이 활기가 없고, 남면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의 호쾌한 기상을 닮았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서 허전한 데가 있고, 한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마치 우리나라 4대 명산을 두루 섭렵하였을 서산대사가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하고(아름답긴 해도 웅장하지는 않고),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하며(웅장하나 아름답지는 않고), 구월산은 불수부장不秀不壯하고(아름답지도,웅장하지도 않고), 묘향산은 수이역장秀而亦壯하다(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웅장하다)라고 했던 것에 견줄만한 평가가 하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병산서원은 주변 경관과 건물인 만대루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된 구현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극찬한다. 병산서원에는 400년 넘은 베롱나무도 일품이지만, 마당의 역할을 만대루가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롭지 않을 수 없다.
16세기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리나라 누정(누각과 정자)이 885개라고 했다. 대부분이 남쪽 지방에 있는데 소쇄원,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한벽당 등을 책을 들고 찾아가봤던 생각이 마치 엊그제 같고, 생각만 해도 그 시절이 그립다.
배롱나무가 유명한 곳으로는 흔히 강진 백련사, 병산서원, 소쇄원 근처에 있는 명옥헌을 꼽기도 하는데, 나는 내 안태고향인 창녕 옥천리 가는 길목에 있는 ‘문암정’도 포함하고 싶다. 꽃이 만개했을 때 올려다보는 풍경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정원미는 중국 정원처럼 인공에 의하여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주택의 마당에 끌어들여서 주인형세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원의 이상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이 말은 명옥헌을 두고 저자의 스승이면서, 서양철학을 전공했으나 한국 미학에 관심이 많았던, 숭실대 총장을 지낸 조요한 선생이 한 말로 우리나라 정원을 볼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죽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아마도 자연비경이 아름다운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과 단양인지 모르겠다. 청풍호와 삼도봉, 구담봉, 옥순봉에는 등산으로 올르고 배를 타고도 가 봤지만, 이제 간다면 등산은 힘들어 어려울지 모르겠다. 단양휴게소 뒤 적성산성과 적성비, 온달산성, 온달동굴 등을 찾았을 때가 더욱 그리워진다.
淸風과 寒碧은 단짝처럼 들린다. 청주댐이 생기고도 청풍호 혹은 청풍호반이란 이름을 고집하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짐작 간다. ‘맑은 바람 밝은 달’그것에서 나는 내 닉네임을 만든지 오래다. 寒碧은 생각만으로 시원함이 느껴기는데, 그 한벽당이 남한강가 청풍에 있었으나 댐 공사로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졌다. 서울에서 경상좌도인 안동으로 갈려면 조령이나 죽령을 넘어야 하고, 거슬러 올라오면 충주 목계나루를 지나 단양을 지나 반드시 청풍을 지나게 되어 있다. 길목에 정자를 세워 자연을 구경하도록 한 것 한벽루다.
청풍에서 묵어가든 그냥 지나가든 시인 묵객들과 문인이라면 이 유서 깊은 강변의 정자에서 저마다 서정을 시를 남기곤 했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의 시가 남아 있는데, 한결같이 한벽루를 신성이 사는 집에 비겼다. 정약용은 ‘선관(仙官)이로세’라고 했고, 윤선도는 ‘누각은 맑고 또 호방하다’고 했다. 임진왜란 중에 이곳을 지나던 유성룡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는지 〈숙 청풍 한벽루〉라는 시를 통해 심정을 읊었는데,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변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온밤 서린 바람에 낙엽소리만 들리네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근심하여 머리만 희었네
쇠잔한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
일어나 높은 난간 향하여 북극만 바라보네
누정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공간을 말하는데 2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 불리고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지만, 흔히 정자라고 통한다. 정자는 사찰·서원·저택·마을마다 세워졌다.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라면 규모도 당당하고 잘 생겼다. 진주 남강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청풍의 한벽루, 이들 3대 정자 외에도 평양 대동강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 벽상루, 의주 압록강 통군정이 이름이 높았다.
정자에서도 한·중·일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다.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다실로 건축적 장식성이 매우 강한데 비해, 한국의 정자는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생활 속 공간으로 그 친숙함과 미학적 특징이 살아있다.
폐사지라면 나도 관심이 갔던 곳이라, 원주 법천사지, 여주 고달사지, 양주 회암사지, 강릉 굴산사지 등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중에 소개한 진전사지(陳田寺址)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불국사 석가탑을 빼닮은 진전사 3층 석탑은 설악산을 바라보는 곳, 낙산사 북쪽 8㎞ 지점에 있다. 9세기에 세워진 이 탑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석가탑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고 한다. 탑은 석가탑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기단이 2단으로 튼튼한 안정감을 주고 1층 탑신은 훤칠하고 2층과 3층은 같은 크기지만 4:3:2로 좁아지며 지붕돌(屋蓋石)과 5단의 서까래가 품격을 보여준다. 다만 석가탑이 높이 8.2m인데 비해, 진전사탑은 5m로 크기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또 석가탑은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하고 단아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과 탑신에 아름다운 장식을 하고 있어서 친근감을 더한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은 다보탑과 쌍탑 형식으로 1가람 쌍탑 형식이지만, 진전사 탑은 단탑가람이다. 이 둘을 비교하는 이유는 불국사가 신라 중기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문화능력을 과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중앙에 귀족의 권위가 필요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함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차이가 아닐까.
진전사는 헌덕왕 13년(821)무려 37년간의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도의선사가 창건했다. 그는 신라 선종의 종조로 그로부터 염거화상(2조), 보조선사(3조)로 이어진 선종이 구산선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오지 중 오지인 보령 성주사, 강릉 굴산사 등 폐사지와 영월 법흥사, 남원 실상사,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 장흥 보림사 등으로 번져갔다. 역사의 흐름은 이들 호족 중 한 사람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불교 이데올로기는 선종이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된다. 조계종은 현재 도의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도의선사 부도는 염거화상이나 누군지 알 수 없는 연곡사 동·북부도, 혹은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은 신라말 처음 사리탑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전 고승인 원효·의상·자장·진표 그 어느 승려도 사리탑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화엄세계에서 고승의 죽음이란 그저 죽음일 따름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도의선사 때에 이르면 대선사의 죽음으로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부처와 동격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문(一門)을 이룬 큰스님의 죽음은 석가모니를 다비하여 사리를 모신 것과 같이 성불했다고 믿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한 예우로 사리를 봉안하고자 했다. 불탑에 이어서 승탑이 등장한 것이다.
‘내 사랑 황진이’에서 나는 황진이 관련 시를 모아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는 백호 임제(1549∼1587)의 시도 있는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 할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임제가 29세 때 알성급제하고는 제주목사로 부임해 있던 아버지 임진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제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한라산을 등반하고, ‘남쪽 바다, 산을 오른 작은 글’즉 〈南溟小乘〉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1577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 5일까지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으로 발길 닿는 대로 기록한 내용이지만, 마치 그와 함께 백록담에 오르는 듯한 잔잔함을 전해 준다. 2월 12일자 기록이다.
구름이 자욱해서 정상에 오르지를 못하고 존자암에 머물러 있었다.(…)
어제까지 성중에 있으면서 멀리 한라산 중턱을 바라보면 흰구름이 항상 덮여 있었다. 지금은 내 몸이 백운 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장난 스런 시 한 편을 짓고 「백운편」이라 제목을 붙였다.
하계(下界)에선 흰 구름 높은 줄만 알고
흰구름 위에 사람 있는 줄 모르겠지.
(…)
가슴속 울끈불끈 불평스런 일들을
하늘문을 두드리고 한번 씻어보리라.
임백호는 35살 때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길에 개경(송도)에 있는 황진이 무덤을 찾아 술상을 차려놓고, 위 시를 읊었다. 이를 안 조정에서 사대부로서 채신머리를 잃은 것이라며 문제삼았고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이를 낭만으로 봐야 할까, 불효로 봐야 할까 아니면 처자식을 건사하지 못했으니 무책임으로 봐야 할까? 지금까지 한 번 밖에 오르지 못한 한라산 백록담(2011.6.15.)이지만, 그곳이 언제나 그립고 다시 가고 싶다.
대부분 절에는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이 없는 절도 있는데 거기는 적멸보궁이 있다. 대웅, 즉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적멸보궁이다. 대웅전과 적멸보궁 한켠에는 무량수전이라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셨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건물로 창건연대가 확인되고,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유명하다. 정면5칸, 측면3칸 팔작지붕이고 주심포 공포로 아주 간결한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배흘림이라는 한국건축의 미를 대표하기도 하는데, 실제 기둥머리 지름이 34㎝, 밑둥 44㎝, 가운데가 49㎝로 곡선의 탄력에 탄성이 나온다. 건축사 신영훈 선생은 이를 두고 “길고 굵은 나무와 짧고 아기자기한 부재들이 중첩하면서 이루는 변화 있는 조화로운 구성에서 눈 밝은 사람들은 선율을 읽는다. 장과 단의 율동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무량수전에 모셔진 불상도 일품으로 흙으로 빚은 소조불(塑造佛)로 도금을 한,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으로 개성이 강하고 건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부석사는 창건주 의상과 선묘, 그리고 부석(浮石)전설은 후대에 신비화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원형은 송나라 찬녕이 지은 『송고승전』에 전한다. “의상과 원효가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는 깨친 바 있어 되돌아오고 의상은 당주(남양, 아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에 닿았다. 의상은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했으나 의상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자 ‘세세명명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말했다.
의상이 종남산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신도의 집에 들러 사의를 표했다. 이때 선묘는 밖에 있다가 의상을 선창가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의상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옷과 집기들을 들고 나왔으나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났다. 선묘는 옷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스스로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신라에 귀국케 해달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귀국 후 의상은 산천을 섭렵하며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여기야말로 법륜의 수레바퀴를 굴릴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교(邪敎)의 무리 500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던 선묘는 의상의 뜻을 알아채고 허공중에 사방 1리나 되는 큰 바위가 되어 사교 무리들의 가람 위로 떨어질까 말까하는 모양으로 떠 있었다. 사교 무리들은 이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의상은 이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강의했다.
지금 부석사에는 선묘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신선각처럼 지어져 있지만,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는 오히려 일본에서 더 상세히 전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일본 고산사에는 가마쿠라 시대(12세기)만든 선묘 조각상이 보존되어 있기도 하고,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 역시 우리나라에 있는 어느 것보다 오래전에 제작되어 보존되어 있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다. 중국의 전탑, 일본의 목탑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는 목조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9층탑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향한 것은 백제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9층 쌍탑은 최고 석탑으로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 보여주는 명작이 아닐 수 없다. 미륵사탑과 정림사탑이 세워진 것은 600년 무렵으로 이때가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금동반가유상, 서산 마애불 등이 제작된 시기도 이 시기로 불교문화를 체화, 육화하여 자체 생산력을 갖춘 시기였다.
정림사터 오층탑의 형식은 곧 신라로 전래되었는데, 감은사에 조영된 석탑은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를 반영해야 했고 백제보다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표현을 담아 탑을 세우고자 했다. 탑은 상승감과 안정감이 배치되는 美感이다. 상승감이 살아나면 안정감이 약해지고 안정감이 강조되면 상승감이 죽는다. 그것을 결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기단과 몸체의 확연한 분리다. 기단부를 강조해서 안정감을 취하고 삼층탑이지만, 경쾌한 체감률로 상승감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기단을 상하 두 단으로 쌓고 몸체는 1층을 시원스럽게 올리되 2층, 3층을 점점 좁아지게 해서 상승의 시각을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설명하기보다 감은사 탑을 사진으로 보면 알 수 있다. 2000.5.1. 손자들과 갔을 때 찍은 것이다.
감은사 동탑에서 나온 사리함과 사리장엄구도 화려하고 엄숙하기까지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고 넘어간다. 그것은 인터넷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수학여행을 비롯해, 심지어 한 해 10번도 더 경주를 답사하기도 한 적이 있으나 나는 언제나 관광객으로 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겨우 이 책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들고 찾아간 것이 고작이었다. 경주는 남산의 불상들과 달리 불국사에서는 인공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920년대 무너진 사진을 보면 비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 축대 등이 모두 인공적인 구조물이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시대 문화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문화재 중 하나로 이 시기에 성덕대왕신종, 석굴암, 안압지 출토 판불 등이 만들어졌다. 이 모두는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 때 만들어졌다. 8세기 3/4분기 때로 통일신라 문화 정점의 시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신라 문화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 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했다. 결국 혜공왕은 신하인 선덕왕(宣德王)이 된 金良相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신라에는 성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신라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천 년의 역사를 건국부터 무열왕까지 통일 이전을 上代, 통일 후 경덕왕까지를 中代, 혜공왕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를 下代로 구분했다. 나라에도 흥망이 있고, 개인에게도 길흉이 있으니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이지만, 자식 복은 지질이도 없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자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표훈이 하늘에 올라 상제께 소원처럼 부탁했고 “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고 하는 것을 표훈이 왕에게 알렸으나 왕은 “비록 나라가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그가 혜공왕으로 8세 때 왕위에 올라 태후가 섭정했다.
왕은 여자로 태어나려다 남자로 태어났으므로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희롱하고 지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갈리 없었다. 성덕대왕신종(메밀레종) 조성도 경덕왕이 실패를 거듭하다 혜공왕 7년(771)에야 완공했고, 불국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국력이 쇠미하고 나라가 혼란해졌다. 불국사는 화엄세계를 추구하는 교종의 사찰이지 선종 사찰이 아니다. 더욱이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부처님 궁전이다. 흔히 산사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도, 나무도 없다. 산비탈을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엄청난 축대를 쌓아야만 했다. 그것이 불국사의 특징이자 아름다움이다.
불국사 석축은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고 계단이다. 그 정상이 수미산인데 범영루(종각)가 이를 의미한다. ‘수미범종각’이라고 하는 이유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모두 33계단으로, 곧 33天 세계를 의미한다. 어떤 기록은 청운 아래가 백운이라 했지만, 아래 계단이 끝나면서 무지게 다리 모양으로 돌이 깔려 있는 부분이 백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끝나면서 자하문 문턱에 다리를 가설하듯 돌을 깐 것이 청운교다. 어쨌든 위의 것이 청운교이고 아래가 백운교다.
33천에 올라 자하문에 들어서면,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마주하게 되고 그 좌우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우뚝 서 있다. 이렇게 쌍탑을 설정한 것은 『묘법연화경』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다보불이 평소에 “내가 부처가 되어 죽은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하는 자가 있으면, 내 그 앞에 탑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나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라고 찬미하며 증명하리라”고 서원을 내렸는데, 훗날 석가여래가 『법화경』진리를 말하자 그 자리에 칠보로 장엄한 다보불이 탑으로 우뚝 섰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보탑의 내력이다.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의 이런 관계는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이라 하여 부처님 두 분이 나란히 있는 불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다보탑 사리함에서 나온 불상 2구는 다보불과 석가불일 가능성이 있다. 대웅전 영역 서쪽은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여기로 오르는 칠보교와 연화교는 극락세계의 정문인 안양문에 곧잘 연결되어 있다. 칠보교는 칠보를 돋을새김한 일곱 개의 계단으로 마모되기도 했으나, 연화교의 연꽃 받침 조각은 지금도 선명하다. 극락전 뒤쪽으로는 대웅전과 이어주는 3열의 돌계단이 각각 16단으로 모두 48단을 이룬다. 이는 48대원을 내어 극락세계를 건설한 것을 상징한다. 이외에 비로전과 관음전도 모두 이런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불국사 답사에 관해 한 가지 의문은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우고는 神琳과 表訓 두 스님을 청하여 각각 머물게 하였다.(古鄕傳)는 내용과 경덕왕 때 大相 김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0)에 불국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혜공왕 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774) 12월 2일 대상이 죽었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완성하고, 처음에 유가 대덕 항마(瑜伽大德降魔)를 청해 절에 거주케 하고 오늘에 이르렀다.(寺中記)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불국사는 창건하는데 24년도 더 걸렸다는 것이다. 일련 스님은 위 두 기록을 재인용하면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의문은 김대성이 아무리 국무총리였다고 해도 혼자서 이런 대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는가 하는 점, 그가 죽자 왜 나라가 나서서 마무리했는가? 하는 점 등이다.
불국사 경내의 쌍탑 중 하나인 다보탑은 이형탑으로 고품격, 특이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석가탑 역시 명품 중의 명품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감은사지 3층 탑보다 2/3로 줄여졌지만 그렇다고 왜소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알맞은 크기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물론 감은사 탑보다 80년 뒤에 만들어졌으므로 느낌은 감은사 탑과는 다르다. 감은사 탑은 1층 몸돌을 한 장의 돌로 만들지 못하고, 네 개의 기둥돌과 네 장의 돌판을 붙이고 그 속에 자갈을 채웠으나 석가탑은 1층 몸돌, 1층 지붕돌, 2,3층 몸돌,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만들어 세련미와 완결미가 완벽하고 감은사탑과는 다르다. 하지만 감은사 탑 역시 신라 최초의 탑인데다 근접하기 힘든 기품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답사에도 초중고급이 있다고 하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너무도 쉬운 코스라 그렇다. 하지만 초급자라고 해서 초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도 중급코스나 고급코스에 더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고급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초급의 진가를 알게 된다고 한다. 이 진보의 순환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 답사는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아무도 안내해주지 않고, 안내판도 없었던, 오래전 해그름에 찾은 서산마애불을 처음 접한 그때의 감동은 그것을 처음 발견한 나뭇꾼의 말처럼, ‘그것의 환한 미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상의 미소는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한 상징성이 강조된 것으로, 일반적인 특징은 점차 사라지고, 입체감보다 평면감, 양감보다 정면관(正面觀)에 치중한다. 옷주름과 몸매를 표현한 선은 날카로워지고, 점차 엄격해졌다. 그로 인해 불상은 인체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의 모습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 서산마애불을 비롯한 백제의 불상은 오히려 인간미가 더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군데군데 희미하게 서 있었던 전등불 가로등을 따라 내려오던 그 날의 기억이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30년도 더 지났을 그날이 어제 같이 그립다.
부여 답사 혹은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낙화암 아래 배를 타고 지나가던 그림같은 풍경과 정림사지 5층탑에 새겨진 소정방이 썼다는 애환의 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싶고, 부여박물관 뜰에서 본 유인원의 공덕비도 마음 아팠다. 이것이 꼭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품어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손자 태원이 돌 무렵에 갔었으니 그때로부터도 어느 듯 14년이 지났구나. 정림사 5층 석탑은 그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백제 미학의 상징적인 유물이 아닌가 싶다. 그 구조의 미학을 밝힌 사람은 『조선답파의 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으로, 그는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지만, 그것을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정림사탑은 목조탑 모습에서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이라고 평가한다.
백제가 그리워 부여를 찾는다면, 백마강가의 나성 한쪽에 세워져 있는 부여가 낳은 신동엽의 시인의 시비까지를 보아야 한다. 1969년 세상을 뜬 그는 부여가 낳은 불세출로 여겨지는 인물로, 저자 유홍준 선생도 역사와 현실 인식을 가르쳐준 시인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그의 「금강」마지막 장을 본다.
백제.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개방된 이후에 아직 가보지 못한 서울 종묘는 거기에서 종묘제례라는 문화유산 행사를 행함으로 인해 더욱 의미가 깊다. 둘은 1995년과 2001년 세계유형·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것들은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이제 인류문화 유산이 된 것이다. 동양에서는 불교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 교회당이 1천 년 이상 신전의 지위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신전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집트의 핫셉수트라 라는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중국 천단(天壇),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종묘다.
종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1971년 종묘제례가 재현되어 일반에 공개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성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그곳은 개방되지 않았다. 정전은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m, 남북으로 80m에 이르는 데다, 정문인 신문(神門)을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과 지붕 밑으로 깊고 짙은 그림자, 붉은색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그 엄숙함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앞에 가로 109m, 세로 69m 월대(月臺)공간은 비움 그 자체이며 그것은 절대적 공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올라설 수 없는 1m 남짓의 지대는 이곳이 완벽히 비워진 곳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진공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거기서 울려 퍼지는 종묘제례는 마치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듯..,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박석(薄石)은 마치 땅에 새긴 지문과도 같다. 이것은 절대로 물신주의나 현대 도시가 목표하는 기능성의 건축과는 다르다.
1395년 세워진 경복궁보다 먼저 세워진 종묘는 태종에 의해 재 디자인되고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광해군 시대 다시 건립됐다. 영조와 헌종 때 증축되었고 현재의 규모인 16칸으로 갖추고 훗날에 대비하여 신실에 여유를 두었으며, 정전에 19분의 왕(왕비까지 49위)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왕비까지 34위)을 모셨다. 아니 조선의 역대 왕이 27명인데, 무엇이 그리 많은가 싶지만, 35명 왕이 모셔진 것은 태조의 선조 4분(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익종)처럼 왕으로 추존된 분이 1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비의 수가 왕보다 많은 것은 당연히 계비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신라 경덕왕 때부터 고려 시대에도 종묘가 있었다. 종묘는 일종의 신전으로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모시고 섬겼다. 이에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역대 왕의 신주는 왕이 왕일 수 이는 근거였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주례(周禮)』에는 도읍(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고 했다. 사직의 社는 토지 신, 稷은 곡식의 신을 말하여 백성의 생존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사직단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은 장엄하고 화려한 것 같지만, 태종의 역작인 창덕궁은 비원으로 인해 그 감동이 많이 반감된다. 그러나 인정전을 비롯 선정전, 회정당, 대조전 등 창덕궁 건물들은 궁궐 건축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조는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이것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고, 검소하면서 누추한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다.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또한 이 말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백제본기〉온조왕 15년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누 화이불치’기억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