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김형완 선생 2022년 오늘 글)
경찰이 마을 사람은 열외없이 학교운동장에 모두 모이라고 해서 나왔더니, 다짜고짜 서북청년단의 매질이 시작됐다. 못이 박힌 각목과 쇠파이프는 보통이고 심지어 삽과 낫으로 찍기까지 했다. 이유도 없고 영문도 모를 무차별 폭력이었다. 피와 살이 튀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똥오줌을 지렸다. 중학1년생 소년을 철사에 손목을 묶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단 것도 모자라 서북청년단은 밑에서 지들끼리 웃으며 이 소년의 발을 잡아 당겼다. 그 소년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밀항해서 겨우 살아 남아 올해로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이 노인의 손목엔 철사에 패인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군경의 무차별 학살과 서북청년단의 살인, 강간, 방화, 구타를 피해 주민들은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 갔는데, 입구는 밖에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좁아 아이가 납작 엎드려야 겨우 드나들 정도였다. 그나마 굴 안엔 높이 1미터50센티, 넓이 4제곱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굴 천장에선 쉴새없이 물방울이 맺혀 떨어져 온몸이 젖을 정도로 축축했으나, 그 물이 있어 연명이 가능했다. 마을 사람들은 비좁아 앉지도 눕지도 못 한 채 사십일을 이 축축하고 칠흑같이 어둔 굴 속에서 박쥐와 함께 버텼다. 이 토굴에서 어린 아이 둘을 잃은 아버지는 야음을 틈타 아이의 주검을 굴 밖에 묻고 돌아 왔는데, 얼이 반쯤 나갔지만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영락교회의 목사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청년들 중심으로 결성된 서북청년단이 제주에서 빨갱이를 박멸시키는 아주 애국적인 활동을 하였다고 치하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하였다. 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약 8만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약 일만오천명 정도가 일본으로 도피, 밀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민의 7분의 1이 도살 당했다고 하지만, 실은 절반에 가까운 규모였고, 대부분 친인척 관계였음을 감안하면 도민 전체가 참화를 당한 셈이었다.
학살배후 미군은 둘도 없는 동맹군으로, 학살지휘자 이승만은 국부로, 학살실행자 백선엽과 조병옥은 애국자로, 서북청년단의 괴수 한경직은 고상한 성직자로 각각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제주도민의 검붉은 피로 아로 새겨졌다. 학살자의 정치적 유전자는 오늘에 고스란히 물려져 그 후손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권력자로,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과 반북,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를 내세워 숭미 친일 반민족적 행태를 버젓이 자행한다. 제주43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내일이 사삼 일흔네 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