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령 1개월 전에 내신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인사의 속성상 내가 발령되어야 할 곳의 분위기나 인적 사항에 대하여 알아본 적이 없다. 바보 같은 행위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비밀 유지라는 공무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다.
약 1개월 동안에 현장 교장으로서 해야 할 제반 자료들을 정리하고 지금까지 모셔왔던 교장선생님들의 학교 경영 기법들을 떠올리며 기억에 남았던 것들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3월 1일자 백일초등학교로 발령되었다. 학급규모는 47학급, 복수 교감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학교였다.
교감선생님 두 분(이원형, 임정기)과 행정실장이 찾아와 학교 현황을 설명하였다.
선임 교장선생님께서 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으로 재임 시에 모셨던 분이었기에 학교교육은 정상궤도를 가고 있으리라 짐작은 되었지만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터였기에 소상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학년 소식지 발간 학부모들께
열정이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3월 2일 부임했다.
수년간을 전문직으로만 생활하다 음악이 흐르고 애들이 북적대는 학교현장에 와 보니 마음이 설레고 그득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자리해야 될 곳이구나!’ 밀려오는 만각(晩覺)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학교 현장이 학부모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가끔 들었다. 왜일까?
그렇다.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알려주면 의구심이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뭔가 새롭게 학부모님들이나 어린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맨 먼저 시작한 시책이 학년소식지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규격은 A4용지 양면에 전면에는 학년소식, 후면에는 학교소식을 싣도록 해서 매월 25일 발행하되 지난 한 달의 주요 행적들과 다음 달에 있을 행사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수록하도록 하였고, 선생님들이 직접 제작하여 배부토록 했다. 밖으로 나가는 글들이기에 철자법 하나하나 어휘 활용 등도 철저하게 교정하여 보내게 지도했다. 선생님들의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2개월이 지나고 나니 가슴이 찡할 정도로 멋진 소식지들이 다투어 발간되었고 학교에 걸려오던 문의전화는 거의 없어졌으며, 학부모님들의 인식 또한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교육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쓰레기는 왜 교장 눈에만 보이는가?’라는 말을 되 뇌이며 나는 소신을 가지고 7시 50분이면 학교에 도착하여 계획된 일정을 검토한 후 운동장은 물론 교사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변화 사항이나 보완해야 할 점을 찾고 간부회의에서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을 이야기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힘겨워했지만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동참하여 뜻한 바를 해결해 냈던 일에 대해서는 함께했던 직원들에게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초등학교 영어 연구학교 보고회
초등학교에 영어가 교과화 된지 2년째, 영어교과 도입과 함께 연구를 시작한지도 2년째가 되어 공개 보고회를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백일학교에 부임하여 100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백일학교가 처음으로 도입된 초등학교 영어교과에 대한 선행연구를 일반화시키기 위하여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개 보고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모든 초등학교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챈트, 쏭, 게임 등 다양한 기법의 수업공개는 많은 찬사와 조언을 들으며 성공리에 끝났다.
나는 효동초등학교 재임 시 전라남도 지정 조기영어특별활동연구학교의 연구·교무주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장학활동을 펼쳤으나 선생님들의 적극적 참여 열정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5, 6학년에도 적용해야 할 초등 영어의 전반적인 방향과 지도 기법을 일관되게 점검할 수 있으리란 생각 하에 연구학교를 재지정받아 연구토록 했다.
그 후 백일학교는 2009년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704명의 명단에 김백일 장군이 친일 인사로 발표되면서 그 분의 이름을 딴 교명을 당시 독서회 이름에서 따 온 ‘성진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