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4대 미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침어(동빈허시)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낙안(춘래불사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폐월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는 양귀비,수화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후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 )가 왕소군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를 지었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 오랑캐(흉노족)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봄이 와도 진정 봄을 느낄 수 없는 왕소군의 서글픈 심정을 묘사한 이 시에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 유래하였다
*중국의 5대 미인과 드라마틱한 생애*
1.서시(西施) - 침어(沈漁)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춘추 적국시대의 "서시"는 춘추 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이때 수중의 물고기가 물에 비친 서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해서 침어(沈漁)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중 서시의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해진 후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하자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夫差)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고 그 후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2.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초선(貂嬋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 짓 하는 것조차 잊은 재 땅으로 떨어졌다."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보를 갖춘 미인이다.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와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호한야와 결혼을 시킨다.집을 떠나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 나서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비극적인 여인 왕소군이 오랑캐의 첩이 된 유래
왕소군은 18세 때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입궁했다.
원제는 천명이 넘는 궁녀의 얼굴을 파악하기 위해 화공을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했고,
후궁들은 조금이라도 튀어 보이려 화공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왕소군만이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화공은 왕소군의 초상화에 커다란 점을 찍어버렸다.
왕소군의 초상을 본 원제는 왕소군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왕소군은 아름다운 미모였지만
5년간 원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그 후 잦은 흉노(오랑캐)의 침입에 고민하던 원제는
흉노의 호한야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딸과 혼인시키겠다며 궁으로 초대했다.
차마 자신의 딸과 오랑캐를 혼인 시킬 수 없어, 자신의 후궁 중 총애받지 못한 궁녀들을 불러 그 시중을 들게 했다.
이때 호한야는 왕소군의 모습에 반해 원제에게 왕소군을 달라 청하였고, 이미 호한야와 약조를 한 뒤였던 원제는
뒤늦게 왕소군의 절세미모에 반했으나 결국 오랑캐인 호한야에게 왕소군을 빼앗기고 말았다.(그후 원톨하여 병 앓음)
후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 )가 왕소군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를 지었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 오랑캐(흉노족)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봄이 와도 진정 봄을 느낄 수 없는 왕소군의 서글픈 심정을 묘사한 이 시에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 유래하였다
3.초선(貂嬋) - 폐월(閉月)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버렸다."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어느 날 저녁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이것을 본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하여, 이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은 후에 의로운 목숨을 다한다.
4.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양귀비 초상화 신장155cm,체중65kg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해서 수화라 함.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아편의 원료를 양귀비라고 할 정도의 미녀 양귀비가 있습니다.
중국의 4대 미인 양귀비 실제얼굴 초상화는 위와 같은데요,
중국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양귀비가 살았다는 중국황제의 별장 '당화청궁'에 걸려 있습니다.
역사서에는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뜻으로, 당나라 때에는 미의 기준이 오늘날과 달라
풍만한 체구의 둥글둥글한 스타일이 미녀였습니다.
양귀비는 가무에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당 현종이 아들의부인, 즉 며느리인 양귀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을까요.
(이때 양귀비의 나이22세, 현종은 57세였다)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하게 보냈다.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나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면서 무의식 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더니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당명황이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찬탄하여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 당나라 내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당나라 멸망의 원인인 양귀비를 증오한 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고, 양귀비는 결국 목매달아 죽었다
영화속의 양귀비 판빙빙
5.조비연(趙飛燕) -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 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 한나라 황후 조비연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날씬한 여인으로 불렸다."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다.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한 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조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 하지 않은가.황제가 급히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조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조비연은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이런 연유로 "비연작장중무(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하였다.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그러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 황제가 죽자 조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고 만다.
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이다.
그중에서 각각 "침어(沈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의 대명사 격인
4명의 여인을 골랐으니 이들을 일컬어 중국4대미인이라 칭하였다.
아쉽게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
탈락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 싶다.
멋지죠? 생각만해도 즐거워할줄 알아야 젊어 진답니다 -의당 - 2010첫 편집&2015년 재구성
첫댓글 캬!!!!. 함 석헌 옹께서 생전에 군사정권에 대항 하며 사용하였던 것에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는 어느 글을.ㅋㅋㅋㅋ
와 여기에 그런 뜻들이 들어 있네요. 감사~
그분도 중국고사에서 적당하게 인용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