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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집의 世系는 시조로부터 21세 니제공까지의 줄기이다. ○世系는 이재공의 글이 아니라 유집을 편찬하면서 아마 장자 性裕가 쓴 것으로 본다. ○필자의 향토사적 식견으로 보면, 이 부분의 世系가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것도 보여서, 이를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 |
◇丙子 二歲 三月十九日 遭先考喪 兒名期八, 祖母金氏命名云
병자 2세 삼월십구일 조선고상 아명기팔, 조모김씨명명운
병자년(1756년)에 두 살이 되고, 3월19일 아버지 상을 당하였음, 어려서 이름이 기팔(期八)이었음, 조모김씨가 이름을 지어주었음.
◇丁丑 三歲 二月 痘疫/ 정축 3세 2월 두역
정축년(1756년) 3세 때 2월에 마마에 걸림.
◇戊寅 四歲/ 무인 4세
◇己卯 五歲 始學語與隣兒游戱, 聞其呼父, 歸問, 母氏曰 : “吾父何在求之”, 終日哭泣不輟
기묘 5세 시학어여인아유희, 문기호부, 귀문, 모씨왈 : “오부하재구지”, 종일곡읍불철
기묘(1759년)에 5세에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웃집 어린이와 함께 놀면서,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돌아와 물으면,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어디에 있어서 찾겠니?” 하며 나무라니 종일토록 울면서 그치지 않는다.
◇庚辰 六歲/경진 6세
◇辛巳 七歲 祖母金氏口授文字, 一聞輒解/ 신사 7세 조모김씨구수문자일문첩해
신사년(1761년) 7세 때에 조모김씨가 입으로 문자를 가르쳤는데 한번 들으면 쉽게 이해하였다.
◇壬午 八歲 妣洪氏托敎於親鄕徹昊氏學史初/ 임오 8세 비홍씨탁교어친향철호씨학사초
임오년(1762년) 8세, 어머니 홍씨가 친정 고향 철호씨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여 비로소 역사를 배웠다.
◇癸未 九歲/계미 9세
◇甲申 十歲/ 갑신 10세
◇乙酉 十一歲 二月自安洞書齋 搆疾還家。3月講小學于同里河龍甲, 卽從曾祖新齋公門人
을유 11세 이월자안동서재 구질환가。3월강 소학우동리하룡갑, 즉종증조신재공문인
을유년(1765년) 11세 때 2월에 안동서재(安洞書齋)에서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다.
3월에 소학을 같은 마을 하용갑에게서 배웠는데, 즉 종증조 신재 나형규(新齋 羅炯奎)의 문인이다.
◇丙戌 十二歲 十月遷高祖考妣墓於舊壙五步酉坐原。 十二月行緬禮兩朔風雪間日省殯人以爲童年之所難無不感歎。
병술 12세 10월천고조고비묘어구광오보유좌원。12월 행면례양삭풍설간일성빈인이위동년지소난무불감탄。
병술년(1766년) 12살, 10월에 고조 할아버지〔世器〕와 할머니 묘를 이장하였는데, 옛 구덩이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유좌원이다.
12월에 무덤을 옮기어 장사를 다시 지내면서 바람도 불고 눈이 오는 두 달간에 날마다 성묘를 하니 어린 나이에 하기 힘든 일을 했다고 감탄하지 않은 자 없었다.
◇丁亥 十三歲/정해 13세
◇戊子 十四歲 三月從族叔得緯氏出接, 做課寶寺/ 무자 14세 삼월종족숙득위씨출접주과보사
무자년(1768년) 14세, 3월에 종족숙 득위씨를 나아가 영접하여 다보사(多寶寺)에서 공부하였다.
○ 종종숙 득위(從族叔 得緯) : 羅重器의 증손자이다.
◇己丑 十五歲/ 기축 15세
◇庚寅 十六歲 三月家內染疫先痛出塲後, 祖母及慈親繼痛症甚危谻, 禱天八日隣人呼謂曰 : “此際用生血則可以出汗云。” 故先斫左脂灌祖母口, 又斫右脂灌母氏口俱得回甦焉。十二月納禽于竹浦 耽津崔氏, 栗亭 鶴齡五代孫, 正言四勿玄孫, 進士翼中曾孫女。
경인 십육세 삼월가내염역선통출장후, 조모급자친계통증심위갹, 도천팔일인인호위왈 : “차제용생혈칙가이출한운。” 고선작좌지관조모구, 우작우지관모씨구구득회소언。십이월납금우죽포 탐진최씨, 율정 학령오대손, 정언사물현손, 진사익중증손여。
경인년(1770년) 16세. 3월에 집안에 전염병이 와 먼저 앓고 난 후에, 조모와 어머니가 이어서 앓았는데 증세가 심하여 위독하여지자, 하늘에 8일 동안 기도를 하자 이웃 사람들이 큰소리로 이르기를, “이 때에 생 피를 써야 땀을 낼 수 있다.” 말하므로, 먼저 좌측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조모 입에 넣어드리고, 또 우측 손가락을 베어 어머니 입에 넣어 드리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12월에 죽포에 사는 탐진최씨에게 납폐(納幣)하였다. (부인은) 율정 최학령의 5대손이요, 정언 최사물(崔四勿)의 현손이며 진사 최익중의 증손녀이다.
(해설)
○ 납폐(納幣)하였다 : 원문 納禽은 納幣의 誤記 같아 필자가 수정 해설코자 한다.
○율정 최학령(栗亭 崔鶴齡) : 조선 중종, 명종 때 학자. 자 운로(雲老), 호 율정(栗亭). 1539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홍패(紅牌)에 오자(誤字)가 있어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보낸 뒤 고향에 포의(布衣)로 돌아갔다.출세를 단념하고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홍문관 교리에 추증되고 모암사(慕菴寺)에 모셨다.
○ 최사물(崔四勿) : 최학령의 아들. 선조(宣祖)9년(1576년), 별시(別試) 병과6(丙科6) 로 문과 합격하다
◇辛卯 十七歲 八月省前祖母黃氏墓於興德 壽山 從翊贊戚叔公 徹錫 學十月還
신묘 17세 팔월 성전조모황씨묘어흥덕 수산 종익찬척숙공 철석 학십월환
신묘년(1771년) 17세. 8월에 전 조모황씨의 묘가 흥덕 수산에 있는데 성묘하다.
익찬(翊贊)을 하신 아저씨 뻘의 철석(徹錫)공을 따라 공부를 하다 10월에 돌아오다.
○ 흥덕현 [興德縣]으로 원래는 나주목 속현이었는데 오늘날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성내면·신림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을 지칭함.
이재 황윤석의 생가가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있음
◇壬辰 十八歲 四月 往竹寺 修正《溪齋遺稿》 /임진 18세 사월 왕죽사 수정《계재유고》
임진년(1772년) 18세. 4월에 죽사(竹寺)에 가서 《계재유고(溪齋遺稿)》를 수정하다.
○ 죽사(竹寺) : 금성읍지 사찰 소개 在州五里錦城山이라 하였다.
◇癸巳 十九歲 二月 往拜黃翊贊請《溪齋遺稿》序校正
계사 19세 이월 왕배황익찬청《계재유고》서교정
계사년(1773년) 19세. 2월에 黃翊贊(익찬 黃徹錫 인듯함)을 가서 뵈고 《溪齋遺稿》 序文을 교정할 것을 청하다.
○익찬(翊贊) : 조선 시대 때 왕세자를 호위하던 세자 익위사(翊衛司)에 딸린 정6품의 무관(武官) 벼슬. 좌우(左右) 익찬이 한 명씩 있었음
그런데 황윤석이 익찬을 하였으며, 溪齋遺稿 서문을 썼다 하였으니, 황철석과 황윤석은 동일 인물임
◇甲午 二十歲 /갑오. 20세
◇乙未 二十一歲/ 을미 21세
◇丙申 二十二歲 三月初五日 英廟賓天參哭班, 行素因山前。八月從光州 柳丈逵上疏請討春川 李明徽侵斥宋子之罪。九月上京伏閤至十五日登徹, 伏承退去之允。州倅李公明中贈詩。
병신 이십이세 삼월초오일 영묘빈천참곡반행소인산전。팔월종광주 유장규상소청토춘천 이명휘침척송자지죄。구월상경복합지십오일등철복승퇴거지윤。주졸이공명중증시。
병신년(1776년) 22세 3월 초5일 영조 임금이 돌아가시어 곡반(哭班)에 참여하고, 임금의 장례 전까지 궁중에서, 고기나 생선(生鮮)이 없는 찬으로 밥을 먹었다.
8월에 광주에 있는 유규(柳逵) 선배와 같이 상소로 춘천에 사는 이명휘(李明徽)가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침해하여 배척함을 토죄할 것을 청하다.
9월에 서울로 올라가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고 엎디어 청하기를 15일간에 이르렀으며, 상주문(上奏文)을 임금에게 삼가 올리니, 물러 날것을 윤허하여 삼가 받자옵다.
고을 원님 이명중(李明中) 공(公)에게 시를 보냈다.
○ 임금의 장례 : 원문 因山(인산)은 태상황(太上皇) 및 그 비, 임금과 그 비,
황태자(皇太子) 부부(夫婦), 황태손 부부(夫婦)의 장례(葬禮)
○ 이명중(李明中) : 나주목사로 영조51년(1775년) 3월14일 부임하여 영조52년(1776년)
7월에 이임하였다.
◇正宗 元年 丁酉 二十三歲 上京二月見慶科初試大小見。屈自黃 頤齋受《溪齋遺稿》序于頤齋 黃戚丈。
정종 원년 정유 이십삼세 상경이월견경과초시대소견。굴자황이재수《계재유고》서우이재황척장。
정종 원년 정유(1777년) 23세. 서울에 올라가 2월에 경과(慶科) 초시를 보다. 많은 사람이 보았다.
엎드려 황이재로부터 《계재유고(溪齋遺稿)》 서문을 받았는데 친척이 되는 어른 이재 황윤석이 썼다.
○ 경과(慶科)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보이던 과거(科擧)
○ 장자의 대동보 이름은 성유(性裕)인데 초명(初名)은 성립(性立)으로 기록되어 있다.
◇戊戌 二十四歲 二月二十二日 長子 性心生 / 무술 24세 2월22일 장자 성심생
무술년(1778년) 24세 때 2월22일 장자 성심(性心)이 태어나다.
◇己亥 二十五歲 三月上京拜金山林于渼湖 元行受翰林公碑文卽族祖廷誼氏。 所請而因見徐公 有隣還
기해 25세 3월상경배김산림우미호 원행수한림공비문즉족조정의씨。소청이인견서공유인환。
기해년(1779년) 25세 3월에 서울에 올라가 초야에 묻혀 사는 미호 김원행을 가서 뵙다. 즉 한림공 나창의 비문을 족조 정의(廷誼)씨가 받았다.
서유인(徐有隣)을 뵙기를 청한 바 뵈고 돌아오다.
○ 서유인(徐有隣) : 미호가 지은 한림 나창 묘비 글을 판서 서유인이 썼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서유인을 뵙고 온 모양이다. 서유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부분은 미호집에서 나창의 비문을 나정의에게 전한 것까지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나학신도 있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庚子 二十六歲 往沙川行執贄禮于本庵 金先生/경자 이십육세 왕사천행집지예우본암김선생
경자년(1780년) 26세. 사천에 가서 본암 김종후 선생과 처음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 사천(沙川) :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남한강 변에 있다.
○ 본암 김종후(本庵 金鍾厚) :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ㆍ문신(1721~1780). 본관은 淸風, 자는 백고(伯高). 호는 본암(本庵)ㆍ진재(眞齋). 벼슬은 장령(掌令),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를 지냈다.
영남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김종후의 동생이 정조의 측근인 金鍾秀이다.
아마 이러한 인적 교류 바탕이 인연이 되어 학신의 조모가 수직을 받다 청풍 김종수가 축하의 글을 보낸 것 같다.
◇辛丑 二十七歲 往拜黃頤齋于興德龜湖論冠昏禮。留一月餘聞大學講說八月還。
신축 이십칠세 왕배황이재우흥덕구호론관혼례。유일월여문대학강열팔월환。
신축년(1781년) 27세. 이재 황윤석을 찾아가 뵙고 흥덕 구호에서 관혼례를 논하다.
1개월여 동안 머물면서 대학을 강론하다 8월에 돌아오다.
◇壬寅 二十八歲 /임인 이십팔세
◇癸卯 二十九歲 二月 發文請討咸平士人李孝祖偸撤紫陽祠 朱夫子 宋先生影幀之罪。上京問議于徐判書有慶 金相國翊。 改摹懷德 宗晦祠因訪, 淵源家從先生奉祀孫宋欽書遊蘓堤一旬而還。
계묘 이십구세 이월 발문청토함평사인이효조투철자양사 주부자 송선생영정지죄。상경문의우서판서유경 김상국익。 개모회덕 종회사인방연원가, 종선생봉사손송흠서유소제일순이환。
계묘년(1783년) 29세. 2월에 함평에 사는 사인 이효조(士人 李孝祖)가 자양사의 주자와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남몰래 뜯어버린 죄에 대해 토죄할 것을 청원하는 통지의 글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 판서 서유경(徐有慶)과 상국 김익(金翊)에게 물어서 의논하였다.
본떠 다시 만들고자 회덕 종회사를 인하여 방문하였다.
사우연원으로 집안끼리 따르는 선생의 봉사손 송흠서와 소제(蘇堤)에서 열흘 동안 놀다가 돌아왔다.
○ 자양사(紫陽祠) : 함평에 있는 紫陽書院을 말하는 것 같다.
○ 서유경(徐有慶) : 1727(영조 3)~1788(정조12) 대의 인물로 자는 군선(君善), 부사(府使) 인수(仁修)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26)진사에 합격, 음사(蔭仕)로 경산·
금산 현감(慶山錦山縣監)을 거쳐 1773년(영조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예조 좌랑(禮曹佐郞)·교리(校理)·승지(承旨)·
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한 후 1776년(영조52)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그 다음해 형·예조 참판(刑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한성 좌윤(漢城左尹) 등을 거쳐
1780년(정조 4) 공·예조 판서(工禮曹判書)와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청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1787년(정조11) 정헌대부(正憲大夫)·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고, 이듬해 숭정대부(崇政大夫)·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 종회사(宗晦祠) : 회덕에 있는 송시열을 배향한 사당,
○ 소제(蘇堤) : 중국 절강성 서호의 10경중 하나인 蘇堤春曉의 약칭인 듯함.
여기서 말하는 소제는 중국 절강성 서호가 아니라 懷德의 인근인 대전의 蘇堤湖를 말한듯하다.
◇甲辰 三十歲 十二月 祖母有疾夜往城內藥局問藥, 回路咫尺難辨, 見鬼於西門外, 逢虎於寒水洞而歸。
갑진 삼십세 십이월 조모유질야왕성내약국문약회로지척난변, 견귀어서문외봉호어한수동이귀。
갑진년(1784년) 30살. 12월에 조모가 병이 생겨 밤에 성안에 있는 약국에 가서 약을 묻고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 지척도 분별하기 어려웠는데, 서문 밖에서 귀신을 보고 한수동에서 호랑이와 마주쳤지만 돌아왔다.
○ 밤에 귀신을 보았다는 것은 몸이 허약하여 헛것이 보였다는 말이다.
필자가 생각건대 학신의 몸은 건강 체질은 아니리고 본다. 자주 병에 걸리고,
전염병도 먼저 걸려 나은 후에 조모, 어머니 모두 걸렸다.
○ 한수동 : 남간정사의 위치이므로 곧 학신의 집 근처인 것이다.
◇乙巳 三十一歲 八月見屈鄕解因廢擧業 /을사 삼십일세 팔월견굴향해인폐거업
을사년(1785년) 31살. 8월에 향시에 떨어짐으로 인하여 과거 공부를 페하였다.
◇丙午 三十二歲 五月 祖母患痢百藥無效, 晝夜禱天, 幸得神效。七月上京九月, 上幸孝昌墓駕前, 上言封祖母淑夫人, 見兪相公彦鎬。受溪齋公墓誌得慶壽詩。十月還, 仲女生。
병오 삼십이세 오월 조모환이백약무효, 주야도천, 행득신효。칠월상경, 구월상행효창묘가전, 상언봉조모숙부인, 견유상공언호。수계재공묘지득경수시。십월환, 중여생。
병오년(1786년) 32세. 5월에 조모께서 이질 병이 생겼는데 백약이 효험이 없자 주야로 하늘에 기도를 드리자 다행히 신기하게도 효험을 보았다.
7월에 서울에 올라가서 9월에 다행히 임금께서 효창묘로 가는 수레 앞에서 조모를 숙부인으로 봉작해 달라고 상소의 말을 올리고 상공 유언호(兪彦鎬)를 뵈었다.
계재공의 묘지(墓誌)를 받고 장수의 시를 지었다. 10월에 돌아왔으며 둘째 딸이 태어났다.
◇丁未 三十三歲 三月十五日 設祖母慶壽宴。九月慈親腫乳砭灸無效, 醫云捉付生鵲則可以見效。方求之際一鵲墜庭因付得差。四月以景賢書院有司, 追配高峰 奇先生, 問禮於金判書履安定位次, 沈判書履之出補本州甚得下愛。來見居室, 門上書“風雷齋”, 改以“益齋”親書揭之。“風雷”二字盖取改過之意, 早孤無學以此自省之方。參應製蒙賞。
정미 삼십삼세 삼월십오일 설조모경수연。구월자친종유폄구무효, 의운착부생작칙가이견효。방구지제일작추정인부득차。사월이경현서원유사, 추배고봉기선생, 문례어김판서이안정위차, 심판서이지출보본주심득하애。래견거실, 문상서풍뢰재, 개이익재친서게지。풍뢰이자개취개과지의, 조고무학이차자성지방。참응제몽상。
정미년(1787년) 33세 때 3월15일에 조모 장수 축하연을 베풀었다.
9월에 어머니께서 젖가슴에 부스럼이 생겼는데, 돌침 놓는 것과 뜸질 하는 것이 효과가 없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산 가치를 잡아서 해드려야 효험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방법을 구하려는 때에 한 마리 까치가 마당에 떨어져 이를 해드림으로 차도가 있었다.
4월에 경현서원의 有司가 되어 고봉 기대승 선생을 추배하는데, 판서 김이안(金履安)에게 위차(位次)를 정하는 예법을 묻고, 판서 심이지(沈履之)가 나주목사로 보임되어 본주(나주)로 오게 되어 아래 사람을 매우 사랑함을 알았다.
사는 곳을 와서 보고 문 위에 “풍뢰재(風雷齋)”라 써진 글을 “풍뢰익재(風雷益齋)”로 몸소 고쳐 써서 걸었다. “풍뢰” 두자가 잘못을 고치는 뜻이 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로부터 배움이 없어 스스로 반성의 방책이었다. 응제(應製)에 참가하여 포상을 받았다.
김이안(金履安) : 미호 김원행의 아들로 시호는 文獻이다.
位次(위차) : 위계의 고하에 의한 차례(次例)
沈履之(심이지) : 沈頤之(심이지)의 오기이다.
沈頤之는 나주목사로 정조10년 3월15일 부임하여 정조10년 6월29일 전라 관찰사로 이임해 갔다.
응제(應製) : 왕의 특별한 명에 의해 임시로 치르는 과거를 이르던 말인데, 여기서는 농서윤음에 응답함을 말한다.
◇戊申 三十四歲 五月參河西金先生從享疏。八月因館學通追配金黃崗麗輝, 沈巽庵義謙, 鄭松江澈三先生于月井書院。拜吳提學載純受南磵序。
무신 삼십사세 오월참하서김선생종향소。팔월인관학통추배김황강여휘, 심손암의겸, 정송강철삼선생우월정서원。배오제학재순수남간서。
무신년(1788년) 34세 5월에 하서 김인후선생을 추향(配享)하자는 상소에 참여하였다. 8월에 성균관과 사학 공통으로 황강 김여휘, 손암 심의겸, 송강 정철 세 선생을 월정서원에 추배 하였다. 제학 오재순(吳載純)을 뵙고 남간서문(南磵序文)을 받았다.
오재순(吳載純)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1727~1792). 자는 문경(文卿). 호는 순암(醇庵)·우불급재(愚不及齋).
대제학을 거쳐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己酉 三十五歲 往遊綾城牧李公樂培有唱和詩/기유 삼십오세 왕유능성목이공낙배유창화시
기유년(1789년) 35세. 능성에 가서 목사 李樂培와 놀면서 시를 부르기도 하고 화합하기도 하였다.
능성(綾城) : 오늘날 화순군 능주를 말함. 당시에는 능주목이었음.
◇庚戌 三十六歲 正月初五日遭祖母喪。三月襄禮于溪齋公墓右, 時南平守宋欽書來唁,其弟欽詩同來。 六月二十二日次子性彦生。
경술 삼십육세 정월초오일조조모상。삼월양례우계재공묘우, 시남평수송흠서래언, 기제흠시동래。 육월이십이일차자성언생。
경술년(1790년) 36세. 정월 초5일 조모 상을 당하다. 3월에 계재공 묘 우측에 장사 지냈으며, 그때에 남평 태수(太守) 송흠서가 와서 위로 하였는데, 동생 宋欽詩도 같이 왔다.
6월22일 둘째아들 性彦이 태어났다.
송흠서(宋欽書) :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계문(稽文), 호는 호은(湖隱). 우암 송시열의 7대손이다.
동생 송흠시 : 동생 송흠시도 호조좌랑, 의빈부都事, 安義현감, 高城군수 등을 지냈다
◇辛亥 三十七歲 受《溪齋遺稿》跋文於宋公 欽書/ 신해 삼십칠세 수《계재유고》발문어송공흠서
신해(1791년) 37세. 《계재유고(溪齋遺稿)》 발문을 송흠서 공으로부터 받았다.
◇ 壬子 三十八歲 四月 服闋上京拜李公書九 請南磵公節義撰入於《尊周錄》。時自上特命李公撰次丙丁以來忠臣烈士之事。
임자 삼십팔세 사월 복결상경배이공서구 청남간공절의찬입어《존주록》。시자상특명이공찬차병정이래충신열사지사。
임자년(1792년) 38세. 4월 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은 후에 서울에 올라가 이서구를 뵙고 남간공의 절의를 《존주록》에 넣어 짓도록 청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특명으로 이서구(李書九)가 병자, 정묘년 이래 충신열사의 일을 가려 뽑아서 순서를 매긴 때이다.
존주록(尊周錄)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이태수(李泰壽)가 존명양이(尊明攘夷)의 사적(事蹟)을 간추린 책.
이서구(李書九) : 1754(영조 30)∼1825(순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 癸丑 三十九歲 受先考行狀於奇判書彦鼎/계축 삼십구세 수선고행장어기판서언정
계축년(1793년) 39세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행장을 판서 기언정(奇彦鼎)에게서 받았다.
기언정(奇彦鼎) : 1716(숙종 42)∼1797년대의 인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중화(仲和), 호는 나와(懶窩). 아버지는 정후(挺後)이다. 1763년(영조 39)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랐는데 1771년에는 정언이 되었다.
명종 때 유명한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의 후예로서 대대로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는데, 이 당시 그 후광을 입어 1782년(정조 6)에는 당상관으로 특별히 초자(超資)되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으며, 계속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했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外祖父가 나천추(羅天樞)이다.
◇甲寅 四十歲 三月因州牧趙時淳大祭還。用禮幣事, 陷於誣獄, 八月見釋。 時靈光 李齊萬爲査官, 而巡相李書九特題明決。
갑인 사십세 삼월인주목조시순대제환。용례폐사함어무옥, 팔월견석。 시영광 이제만위사관, 이순상이서구특제명결。
갑인년(1794년) 40세. 3월에 나주목사 조시순으로 인하여 대제(大祭)를 하고 돌아왔다. 예폐(禮幣)를 사용한 일로 아무런 죄(罪) 없는 사람을 관가에 무고(誣告)하여 일으키는 옥사에 빠졌으나, 8월에 석방되었다.
이때 영광 이제만이 사관(査官)이었는데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특별히 글을 지어 보내 명확히 해결한 것이다.
조시순(趙時淳) : 정조17년 5월22일 부임하여 정조19년5월6일 이임하였다.
예폐(禮幣) : 공경(恭敬)하는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예로써 주는 물건
◇乙卯 四十一歲 三月 繡衣李公 羲甲經宿。 八月遊嶺南拜仁同宰李公 采, 請《新齋遺稿》校正。
을묘 사십일세 삼월 수의이공희갑경숙。 팔월유영남배인동재이공채, 청《신재유고》교정。
을묘년(1795년) 41세. 3월에 암행어사 이희갑(李羲甲)이 지나가면서 하룻밤 묶었다.
8월에 영남에 여행하면서 인동의 고을 원님 이채(李采)를 뵙고, 《신재유고(新齋遺稿)》 교정을 청하였다.
이희갑(李羲甲) : 1764(영조 40)∼184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여(元汝). 참판 태영(泰永)의 아들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강제(講製)문신이 되었다.
호남암행어사·홍문관교리, 이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이조참판, 함경도감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채(李采) : 1745-1820년대 인물로 본관은 牛峯, 李縡의 손자요,대사간 李濟遠의 아들이다.
◇ 丙辰 四十二歲 二月見長子性心冠禮。道內進士朴夏鎭諸狀出於去歲末, 今始得見自愧沮之。
병진 사십이세 이월견장자성심관례。도내진사박하진제장출어거세말, 금시득견자괴저지。
병진년(1796년) 42세. 2월에 큰아들 성심(性心)이 성인이 되어 갓을 씌우는 의식을 하였다.
도내 진사 박하진(朴夏鎭)이 여러 가지 상소의 장(狀)을 세말이 가는 때에 내었는데, 처음 안 일이라 스스로 부끄러워 그만두라 하였다.
◇ 丁巳 四十三歲 七月州倅任公 焴以沙川同門來訪, 從遊知有老親屢餽食物不勝多感。受《南磵集選》校正。自朝家訪故家世族。州倅採議校中其薦目曰 : “學襲家庭性全孝友.” 州牧薦目曰 : “家庭孝友士林雅望。” 三月以辨聖誣事發文。八月 封疏伏閤七日還, 出給傳曰 : “爾等退脩學業。”
정사 사십삼세 칠월주졸임공육이사천동문래방, 종유지유노친루궤식물불승다감。수《남간집선》교정。자조가방고가세족。주졸채의교중기천목왈 : “학습가정성전효우.” 주목천목왈 : “가정효우사림아망。” 삼월이변성무사발문。팔월 봉소복합칠일환, 출급전왈 : “이등퇴수학업。”
정사년(1797년) 43세. 7월에 고을 원님 임육과 사천동문이 방문하여, 같이 따라 놀면서 늙은 어머니가 있는 것을 알고, 자주 음식물을 보내었는데, 크게 감동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교정한 《남간집선(南磵集選)》을 받았다.
조정으로부터 여러 대(代)에 걸쳐 세도를 누린 큰 집안을 찾았다.
고을 원님이 향교안에서 논의를 채택하여 추천한 목록에 이르기를 “가정에서 배움을 계승하니 효우가 온전한 성품이다.” 라 하였으며 나주목사가 천거한 명목에 이르기를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를 하니, 사림에서도 훌륭한 인망이 있다.”라 하였다.
3월에 임금의 무고에 관일 일을 변명하는 글을 보냈다.
8월에 엎드려 합하(閤下)께 봉하여 상주문(上奏文)을 바치고 7일 돌아왔는데, 상주문을 내어주면서 전하는 말에 이르기를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연마하라.” 하였다.
◇戊午 四十四歲 二月 應農書旨上, 四綱三目疏, 五月蒙允。八月成影幀, 自號宗華居士。
무오 사십사세 이월 응농서지상, 사강삼목소, 오월몽윤。팔월성영정, 자호종화거사。
무오년(1798년) 44세. 2월에 농서에 응지하여 4강 3목을 임금께 상소하다.
5월에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여 허가를 받았다.
8월에 영정을 완성하여, 스스로 호를 종화거사(宗華居士)라 하였다.
◇己未 四十五歲 六月擬孝昌墓守封官未蒙點下 /기미 사십오세 유월의효창묘수봉관미몽점하
기미년(1799년) 45세 때 6월에 효창묘 수봉관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庚申 四十六歲 二月上京受慶壽帖識文於副提學金公 近淳, 刊《南磵集選》。六月正廟賓天往參因山, 絶意世事。搆屋溪上書以泥齋, 盖取不通之義。 三月送子性心于性潭宋先生煥箕門受學。
경신 사십육세 이월상경수경수첩식문어부제학김공근순, 간《남간집선》。육월정묘빈천왕참인산, 절의세사。구옥계상서이이재, 개취불통지의。 삼월송자성심우성담송선생환기문수학。
경신년(1800년) 46세. 2월에 서울에 올라가 수직 경축의 첩 지문을 받았는데 부제학 김근순이 썼다. 《남간집선》을 펴냈다. 6월에 정조가 승하하여 임금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왔다.
세상의 일에 대한 뜻을 끊었다.
시냇가 위에 얽어 만든 집에 이재(泥齋)라 현액(懸額)을 썼는데 정의(正義)가 통하지 않은 것에서 취해 온 것이다.
3월에 큰아들 성심(性心)을 성담 송환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도록 떠나보냈다.
지문(識文)을 어떻게 해석할까. 경수첩에는 序文(머리말), 跋文(꼬리말), 識文 등으로 구성된 것인데 말이다.
굳이 해석을 한다면 “밝혀두기 글”이 가장 타당하겠다.
◇今上辛酉 四十七歲 正月先考妣以雙孝登道啓。二月十二日戌時長孫生。仲女適忠州人 朴澈休。
금상신유 사십칠세 정월선고비이쌍효등도계。이월십이일술시장손생。중여적충주인박철휴。
순조 원년 신유년(1801년) 47세 때 정월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쌍효로 도백이 임금에게 사실을 적어 올리는 보고서에 등재되었다. 2월20일 술시에 큰손자가 태어났다.
둘째딸의 사위는 충주인 박철휴이다.
이재(泥齋) : 호가 이재(泥齋)임을 분명히 한 문구이다. 그러나 호는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宗華居士도 호이니, 泥齊도 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宋煥箕(송환기) : 羅州儒生上巡相書에서 니제공의 스승이란 글이 있었다. 그러므로 대를 이어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게 한 것이다.
송환기는 1728년(영조 4)∼1807년(순조 7)대의 인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壬戌 四十八歲 三月十四日丁先妣喪, 四月行襄禮于州東石峴傍親進士公墓下 坤坐之原。虞祭以後逐日哭墓至六月初六日獲疾, 於中路金友恢元外舍夕扶輿還家, 翌日巳時卒。三月葬于州東非音面 金水村前麓丙坐之原。夫人崔氏後十三年甲戌二月初二日卒墓附左。
임술 사십팔세 삼월십사일정선비상, 사월행양례우주동석현방친진사공묘하 곤좌지원。우제이후축일곡묘지육월초육일획질, 어중로김우회원외사석부여환가,익일사시졸。삼월장우주동비음면 금수촌전록병좌지원。부인최씨후십삼년갑술이월초이일졸묘부좌。
임술년(1802년) 48세 때 3월14일 정일(丁日)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4월에 장례를 거행하였는데 나주 동쪽 석현에 있는 방계 친척 진사공 묘 아래 곤좌이다.
우제(虞祭)를 지낸 이후에는 날마다 묘에서 곡을 하고 6월초6일에 이르러 병을 얻었으며 내왕하는 길의 중간에 친구 김회원(金恢元)이 바깥 집에서 밤에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 왔는데,
다음날 사시(巳時)에 졸하였다. 3월에 주 동쪽 비음면 금수촌 앞 산록에 병좌로 장사 지냈다. 부인최씨는 그 후 13년만인 갑술년 2월초2일에 돌아가 묘는 그 좌측에 썼다
.
우제(虞祭) : 장사 후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
사시(巳時) : 오전9시-오전11시 사이
비음면(非音面)은 과거에는 나주였지만 1914년 통폐합되어 오늘날은 영암 신북면이다.
◇癸亥 鄕多士李光爕薦狀于道伯/ 계해향다사이광섭천장우도백
계해년(1803년) 고을 다사(多士) 이광섭(李光燮)이 추천의 상소장을 도백에게 올렸다.
◇壬午 右道儒洪羲祚薦狀于繡衣。 柳璟等薦狀于牧伯。
임오 우도유홍희조천장우수의。 유경등천장우목백。
임오년 우도유생 홍희조(洪羲祚)가 추천의 상소장을 암행어사에게 올렸다.
유경(柳璟) 등이 추천의 상소장을 목사에게 올렸다.
◇丁亥 前縣監金錫海請褒于道伯/ 정해 전현감김석해청포우도백
정해년 전 현감 김석해가 전라관찰사에게 표창을 청하였다.
◇戊子 歲首州牧趙公 咸永報營薦目/ 무자 세수주목조공함영보영천목
조함영(趙咸永) : 나주목사로 순조 27년(1827년) 4월21일 부임하여 순조30년(1830년) 4월 8일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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