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의 생애
그는 한국이 낳은 신유의 능력을 나타낸 최초의 목사였다. 그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 전국의 많은 집회에서 1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유했다. 당시 동아일보(1920년, 58호)는 “김목사의 이적” 제하에 이렇게 보도했다.
김익두목사는 1874년 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에서 농부 김응선의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입신양명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있던 때라, 돈 없고 배경 없던 김익두에게 과거급제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17세가 되자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곧 망하게 되었다. 연속되는 실패와 좌절로 인해 인생에 낙담한 그는 술독에 빠지고 말았다. 김익두는 술만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패기와 힘 역시 좋아서, 한다하는 싸움꾼도 한 주먹에 쓰러뜨리곤 했다. 술집이건, 국밥집이건, 냉면집이건 그에게 외상을 주지 않은 집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무전취식자였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루가 시작할 때마다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오늘 동안은 김익두 만나지 않고 무사히 보내게 해주옵소서”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우연히 소안련 선교사의 집회를 지나치게 되었다. “사람은 죄 지은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지옥으로, 의인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죄라는 말이 김익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죄라면 누구보다도 많이 지은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다. 기독교인이 된 김익두는 10개월 동안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자신의 생활과 습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무려 성경을 100독 한다. 그가 세례를 준비하며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평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 사람아, 방구석에서 무슨 청승인가? 우리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하지.” “내가 요새 약을 복용중이서 술을 못먹겠네그려.” “무슨 약인데?” “응, 지금 구약과 신약을 먹고 있거든. 술은 절대 금물이라는 처방이 있어서 안되겠네그려” 1901년 1월, 김익두는 그의 나이 27세에 소안련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기 이르렀다. 안악의 한 주먹이던 그도 이 때, 많은 조롱도 당했고, 돌질도 맞아 피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참고 전도에 임했다고 한다. 이렇듯 열심인 김익두를 보고 소안련선교사는 그에게 신천교회의 개척을 맡겼다. 헌신과 기도로 교회에 봉사하니 신천교회는 곧 수십 여명의 신도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날로 부흥 발전하게 되었다. 김익두는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3회로 졸업했고, 신천교회 강단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봉사하였다. 그 신천교회에서만 11명이나 되는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한 때 소문난 건달로 이름났던 김익두 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희대의 부흥사였다. 그는 전국을 무대로 부흥회를 인도했고, 그가 가는 곳은 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더욱이 놀라운 신유의 능력이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김목사의 부흥집회는 인기가 대단했다. 1919년 10월, 평안남도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다음 그는 동료목사와 마가복음 16:17-18의 말씀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 때 김목사의 마음속에서는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도 유효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김 목사 옆에 걷지 못하는 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김 목사는 대뜸 그에게로 다가가 이렇게 외쳤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서 걸어라.” 그러나 손에 힘을 주어 일으키려해도 그는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길로 자신에게 믿음과 능력주시길 기도하는데 전념했다. 1919년 12월, 김 목사가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수백의 성도 중에 병자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박수진(朴壽眞)이었는데, 10년 전부터 아래 턱이 빠져 갖은 방법을 다해도 고칠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마음으로 예수라도 믿어 보겠다고 집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김 목사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불일듯했다. 김익두 목사는 3일간을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박수진을 붙잡고 외쳤다. “믿사오니, 이 소자의 떨어진 턱을 붙여 주시옵소서” 떨거덕. 그 순간 놀랍게도 턱이 정상이 되었다. 이듬해 9월 부산진교회에서는 8 년동안 걷지 못한 소년, 등이 굽은 곱사병자, 한센병 환자, 폐병 환자, 혈루병자 등 무려 1만여 명의 병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고쳤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세파는 거세게 몰아쳤다. 신사참배문제로 일경의 탄압을 받았고, 해방된 후에는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겪어야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당해야 했다. 1950년 6?25가 발발했고, 그해 10월 14일 새벽, 신천교회에서는 가슴을 저미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이 교회당 안으로 난입하여 새벽기도를 드리던 김 목사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청중들을 향해서도 무참히 난사하기 시작했다. 임성근 전도사를 비롯하여 청년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렇게 김익두 목사는 주님의 품으로 떠났다. 살아생전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무려 770여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1만여명의 불치병 환자들을 구했고, 또한 그로인해 목사된 사람이 2백여명에 이르렀으니, 그는 분명 하나님이 크게 쓰신 한국의 큰 목자였다. |
출처: 행복한 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happy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