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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7:24~30 마태 7:21~30
수로보니게 여인은 나에게 참으로 특별한 인상을 주었고, 많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이야기여서 나는 몇년 전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눈물'이란 곡을 짓기도 했다.
'거라사광인'이나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나 화려한 비쥬얼은 없지만,
'슬픔, 한, 결의, 굴욕, 낙담, 용기, 기쁨, 등...'
이 짧은 이야기 안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이 다이나믹한 감정변화의 기승전결이 있다.
먼저 본문의 이 여인의 출신과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
수로보니게는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 시리아 지역에사는 페니키아 사람이란 뜻이다.
이 지역은 상업과 무역이 왕성한 두로와 시돈을 끼고 있어 부유한 지역이지만 헬라 문화에 젖어 난잡한 성문화와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다.
또 마태는 이 여인을 가나안여인이라 했는데, 이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예로서 우상숭배도 문제지만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등. 더러운 성 풍속으로 하나님도 가증히 여기시고 유대인들도 개,돼지 취급하는 이방족속이었다.
그래서 사창가를 꺼리는 현대 기독교인처럼 유대인은 이 지역엔 아예 발을 들여 놓지도 않았다.
한편, 이 수로보니게 족속도 자기를 멸시하는 유대인을 똑같이 무시하고 경멸해서 서로간 원수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런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리지르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한다.
앞서 말했듯, 유대인과 이 족속은 서로 만날 일이 없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여자는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란 말도 들어 예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평소 생각지도 해본적도 없는 말을 외치여 예수님을 부른다.
예수님이 이 지역엔 왜 가셨는지는 나와 있지 않으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땅을 안 밟으려 빙둘러 가는 사마리아도 그대로 통과 해 가셨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더러워 가지 않는 두로와 시돈지역도 개의치 않고 가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차가운 반응은 언듯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지금의 나는 그 지방의 우상숭배와 더러운 성풍속을 알기에 예수님이 얼른 고쳐주지 않으신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초신자 시절엔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었다.
'내가 아는 주님은 이런분이 아닌데...'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분이신데...'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하는 주님의 모습은 내가 체험한 주님같지 않아 낯설었다.
그래서 그때 다녔던 교회의 사모님께 물으니 사모님도 잘 몰랐는지 "그때의 이스라엘 문화를 알아야 돼." 하는 말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후, 다행히 나의 이런 의문은 어느 목사님의 글로 어느 정도 해소가 됐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자존심이며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테스트란 말에 그제야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목사님의 글과는 상관없이 깨달음이 왔고, 그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한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여러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여인은 앞서 말했듯이 물질은 부유했으나 영적으로나 정신 적으로나 너무나 황폐한 이방 여인이다.
나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생각하면, 누군지는 밝힐 순 없지만 나와 가까운 어느 분의 누나와 그 딸이 생각난다.
내가 스물 세살 때 무렵이였으니, 삽십년이 훨씬 넘은 일로 그 분의 여자 조카애가 귀신들림이 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 여자아이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열일곱의 나이였고, 몸과 정신이 그러니 학교는 다니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평소 앓다가도 밤, 열두시만 되면 침대에서 뛰며 괴성을 지르며 발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 분의 누나는 그때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작은 저수지도 갖고 있었고, 그 옆에서 큰 식당도 운영 해서 나름 부유한 편이었다.
그런데 남편도 없이 자식이 달랑 그 딸 아이 하나라, 그 누나는 딸의 병을 고쳐보려 엄청난 돈을 써가며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병원에선 병명조차 밝히지 못하고, 여자애는
밤 열두시만 되면 괴성을 지르고 침대에서 뛰니, 이쯤 되면 누구나 아이가 귀신이 들려 그렇다는 것을 아는데 그 누나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무당에게서 딸이 너무나 쎈 열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워낙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는 사람이라 그저 병원치료에만 목을 매었다.
그러나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자, 미국의 유명한 병원까지 가서 딸을 고쳐보려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엔 돈도 떨어지고 지쳐서 병원치료도 포기하고 집에서 방치한 채 지냈는데, 밤마다 소리를 지르고 그난리를 피우니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 분이 누나네 집에서 같이 지냈던 차라, 밤마다 그 소릴 듣자니 미칠거 같고, 누나가 평생 이렇게 살걸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 '내가 저 애를 죽이고 감방을 갈까'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또 멀쩡해져 음악을 듣기도 하고 그분과 얘기도 했는데, 그때 변진섭이 인기를 얻고 있을 때라 변진섭 오빠가 너무 좋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카가 너무 불쌍하기도 하고 자기가 그런 마음을 먹은 게 미안하기도 해서 "변진섭을 좀 만나게 할수 없을 까" 하고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얼마후에 그 아이는 변진섭도 만나지 못한 채 죽었다는 이야기를 그 분에게서 들었다.
분명 그 분이 죽인 건 아니고, 신병으로 죽은 건데, 그때 나는 '귀신이 들리면 죽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때 난 그아이에 대해 그 분에게 얘기만 많이 들었지, 사진으로라도 본적이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후, 내가 마흔이 넘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알았을 때 이 여인과 그 분, 누나의 처지가 너무 닮아 있다고 느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살았으나 하나님과는 먼 이방나라 여인이었고,
또한 그 분의 누나도 물질은 풍부했으나 집안에 위, 아래, 옆으로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림자도 없는 불신자 집안이었다.
그리고 귀신들린 딸 때문에 고통당한 것도 같고,
그 분, 누나가 딸을 고치려 아무 연고 없는 먼나라까지 간것과 이 수로보니게 여인도 거리는 자기를 반길리 없는 다른 민족, 유대인인 예수님께 온 것이 비슷하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남편없이 낯선 남자들이 있는 낯선 곳에 혼자 온것으로 보아 남편이 없었음이 추측 되는데,
그분 누나도 남편이 없었으니, 둘다 남편없이 그 무거운 짐을 혼자 떠맡은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과 그 분 누나는 근본적으로 다른게 있었다.
그 분 누나도 아마 그 오랜 시간 고통 당하는 중에 그 누군가에게 교회에 가보라며 귀신 쫒는 목사님이 있다고 하더라 는 비슷한 얘기를 분명 들었을 것이다.
아마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으면 교회에 가기 전에 무당부터 불러 굿판부터 벌렸겠지만 최종 종착지로는 교회를 찾았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처음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을 거절하셨던 것처럼 그분, 누나가 교회를 찾았어도 쉽게 축사가 안된다던지, 믿음을 시험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누나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렸다면 그 아이는 분명 고침을 받았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면 아직 사십대일 텐데 너무나 아쉽고 아깝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지만, 그분 누나는 딸을 위해서 자기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버리기 힘든 것이 자기 생각, 고집이라 한다.
날 가르쳤던 신학교 교수님은 불신자인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영접기도라도 하고 돌아가시게 하려 했는데, 말로만 따라하면 되는 영접기도를 끝끝내 안하고 돌아 가셨다는 것이다.
그 교수님은 아버지를 믿게 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써봤는데 소용이 없었다며, 아무래도 진짜 구원받는자는 따로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정말 죽는 마당에 밑져야 본전이지 영접기도가 뭐가 어렵다고 안따라 하신걸까.
정말 예정론처럼 구원 받는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복음을 전해도 받아 들이는 사람 안받아들이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아무튼 확실 한건 이런 고집과 자존심이 있다면 예수님을 절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 한것이고, 여인은 딸을 위해 원래 자존심이 없던 자 처럼 순순히 개의 위치로 내려 갔다.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이 여인을 무시할 의도로 개취급 한 것은 아니지만 이 대화의 승리자는 명백히 이 수로보니게 여인인 것이다.
여인의 대답엔 슬픔과 한이 느껴지긴 해도 구차함과 비굴함은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겸손과 미덕과 인내와 재기가 느껴진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기분 나쁜 내색도 않았고, 차라리 우리 이방인이 더 낫다며 유대인을 비방하지도 않았다.
온마음에 오직 딸에 대한 하나의 목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딸도 고침받고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도 듣게 되었다.
예수님이 여인을 개취급 한것에 대해, 유투브에서 어느 목사님의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말씀 한 '개'는 이스라엘인이 갖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이 이방여인인 이 여인에게 개라고 한것은 솔직한 말일 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다 이 개는 헬라어로 '퀴리아'인데 이는 '작은 개'란 뜻이며 그 작은 개는 식사할때 비록 상아래서 빵을 받아 먹긴 해도 주인과 더불어 먹는 식구개념의 애완견이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는 유대인이니, 그저 순서를 지키라는 뜻의 말이지, 일부러 굴욕감을 주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란 그런 말씀이었다.
고개가 끄덕여 지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애완견이든, 밖에서 떠돌아 다니는 개이든, 사람을 개로 빗대어 말 했다는 것은 여간 기분 나쁜일이 아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메시야는 무슨, 이 예수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유대인들이 뭐 그렇지, 괜히 여기까지 와서 시간만 낭비했네."
하고 돌아 섰을 까? 아니면,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야.
내 상황에 무슨 자존심이냐. 아이만 고칠수 있다면 난 저사람의 발을 개처럼 발도 핥을 수 있어."
하며 은혜를 구걸했을 까.
닥쳐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후자를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난 딸이 없고 아들 하나 있지만 만약 아들이 그런 상태라면 정말 무슨 짓이든 했을 것 같다.
불신자들을 보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경우가 거의 고집과 자존심, 교만때문이다.
전 세계의 20억이 믿는 예수보다 내 생각이 옳은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나보다 멍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남 얘기 할 것 없이 나부터가 그랬다.
그 자존심과 고집, 교만을 꺾일 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영접기도의 첫 문장은 예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는 문구로 시작한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짧아도 자기 안에 자존심, 교만이 있는 사람은 쉽게 따라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존감 바닥일 때 죄인임이 인정되고 쉽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기 전 젊은 날에 한때 뉴에이지, 명상에 빠진적이 있었다.
그런데 명상가들은 자신이 신이라 생각하기에 죄의식을 강요하는 기독교를 멸시한다.
가장 낮은 의식의 단계가 죄의식, 수치심이라며 기독교를 가장 수준 낮은 종교로 취급한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수 있어."
그때도 이와 같은 거짓말로 인간을 구렁텅이에 빠트렸는데, 재미를 본 사단이 같은 수법으로 또 속여 먹으려 하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말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하늘 위 아래, 나보다 더 존귀한 존재는 없다니...
이게 사단의 속임수이며 그들의 교리인 것이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지나치도록 자의식과 자존감을 심어주려한다.
"넌 최고야. 넌 누구보다 똑똑해."
긍정적 언어의 힘이란건 있지만, 정말 조심해야 할 문제이다.
지나친 자의식, 자존감은 자칫 진정으로 무릎 꿇어야 할 대상앞에서도 구부릴 줄 모르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맺기 전에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존심을 버린일 외에 잘한 점이 또 있다.
먼저 소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이 없는데도 계속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간청했다.
제자들도 "이제 그만 보내소서." 하고 여자를 귀찮아 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란 호칭을 썼다.
분명 여자는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유대인처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자기와 상관 있는 척 했다.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너무 눈치를 본다.그러니 예수님 앞에서도 눈치를 본다.
자존심은 세지만 자격지심 또한 강하다.
그러니 '내 주'가 아니라, 기독교의 '주'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들고 가는 것이다.
마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권한이 없는 사람처럼 목사에게, 또는 기도원 원장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한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천한 출신이지만 우리에게 훌륭한 믿음의 본을 보인다.
나의 '수로보니게의 눈물' 노래의 첫 소절이
"주여, 주여. 내주여." 로 시작한다.
이방여인에게 예수님이 내주가 될리 없는데 "내주여" 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주가 되길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뻔뻔히 내 주라고 한다. 내가 뭘 깨달아서 그렇게 가사를 쓴 건 아니고 멜로디의 음절에 맞추려다보니 그렇게 됐다.
처음 썼을 땐 이방여인이 "내주"라고 하는 게 좀 맞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그자리에 꼭 세음절의 단어가 들어가야 해서 그냥 "내 주여!"라고 썼다.
그런데 이 설교문을 쓰면서 깨달음이 왔다. 예수님이 주가 되길 허락하지 않아도 내주라고 부르는 용기가 믿음이라는 것을...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주가 되길 허락했는데도 내주가 되지 않고 우리 교회의 주님, 목사님의 주님으로 생각한다.
내가 예전에 어느 노처녀와 친한 적이 있는 데, 당시 결혼을 하고 싶은 그 노처녀에게 두 남자가 접근을 했다.
한남자는 자기 허락도 없이 주변에 자기를 여자친구라 소문내고 조금 친해지자 전화해서 "서방님 가시니까 문 열어 놔라." 하고 자취방에 쳐들어오고 이렇게 뻔뻔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외모에 조건도 안좋은데 결국 그 남자에게 넘어가 사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싫은 남자가 그러면 신고 감이지만, 그 남자도 간을 보고 그렇게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남자는 돈도 있고 조건도 좋고 매너도 좋은데 자기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하고 꼭 소개해준 누나한테 말을 전해 자기 의사를 묻는 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데이트신청까지...
그래서 너무 짜증이 나 차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 여자애를 더 좋아한건 후자의 남자일 것이고 더 착하고 성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력이 너무 없지 않은가.
시람은 조건만 보고 사귀는 것이 아니다. 끌림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자기에게 다가오길 어물거리며 눈치 보는 사람보다 용기있게 "내 주님!" 하고 주님 앞에 확 다가가 도장 콱! 찍는 사람에게 더 끌리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누구를 통한 주님이 아닌 내 주님께 쳐들어가 예수님의 마음을 훔치는 그런 박력있고 적극적인 성도가 되길 바란다.
주님의 산ㅡ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