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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뢰1990담판협정21PP26
II.6. 시간-이미지(L’image-temps)에 관하여(198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82-87.(P.250)
- 시네마(Cinéma), n° 334, 18 décembre 1985
- 대담자들: 카바소(Gilbert Cabasso, 1948-)와 달론(Fabrice Revault d’Allonnes, s.d.)
영화1: 이미지-운동(Cinéma 1: L'image-mouvement, 1983) 다음으로 영화 2: 이미지-시간(Cinéma 2: L'image-temps, 1985)이 나온 그 해 대담이다. 이 두 권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거의 생각이 안날 정도 인데, 이번 대담을 읽으면서 느낀 것으로, 들뢰즈가 벩송의 무의식을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달리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는 점이다. 벩송은 MM의 기억에서 무의식이 꿈의 평면처럼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행동의 평면과 대비하여 기호와 표상도, 개념과 관념도 아닌 영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꿈의 평면이라는 비유 속에서 ‘평면’에 속지 말고, 그 평면은 밑바탕의 흐름 총체이며, 기억 총체의 의미이다. 그런데 밑바탕의 흐름, 즉 들뢰즈에서 심층은 현실에 맞닿아 있는 역동성이며 되기(생성)의 힘이다. 스스로 밀고 나가는 힘이며, 생산하고 창조하는 역동적 힘이다. 이를 들뢰즈가 분출하는 것으로 또는 탈주하는 것으로 설명할 때, 현실로 나가는 힘들을 선으로 비유하여, 탈주선 또는 용출선이라는 표현으로 될 것이다.
벩송에서 무의식은 활동 중이지만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은 실재성의 총체이다. 드러나 의식 일반은 현실적 의식이다. 이에 비해 무의식의 내용은 기억이고 생명체에서 유전인 셈이다. 무의식은 정태적이거나 위치 설정을 할 수 없기에 흐름이며, 현실 의식에서 무엇인가가 솟아날지 모른다는 점에서 다발이다. 이런 무의식의 역동적 힘을 스피노자에 생산하는 권능과 비슷하다. 이 생산하는 권능이 실재성으로 어떠한 줄기[가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공통용어로 표현되기도 하고, 표면의 감각작용보다 안쪽의 감정이 있고, 그 보다 깊이에서 감화작용 등이 있다.
현실의식에서 공통개념으로 다루는 것은, 5관을 통하여 감각(5감)을 신체와 더불어 운동하는 데 있어서, 운동기제의 움직이는 간격이 필요하고 공간적 측면으로 돋보이게 하기에 시공간적 활동이라 한다. 여기서 시공간적이라는 것은 신체의 부위가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 간격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감각작용은 신체의 현실적 활동을 토대로 한다. 이에 비해 현실의 대상을 좀 더 분명하게 그리고 재인식을 확실하게 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추억들을 덧보태는 기억(영혼이)을 동원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덧보태지는 것은, [지성 또는 속좁은 이성이] 지적작업으로 더 나은 활동을 위해 더 분명한 도구적 조작을 위한 노력들도 포함되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게다가, 인간사, 삶에서 인간들 관계에서 연관되었던 추억들을 덧붙이는 경우에는, 오관의 감각작용에 연관있는 추억들 이상으로 양식이라 할 수 있는 감정과 감화작용이 덧붙여진다. 거기에서 사물과 또는 타인과 관계 속에서, 기쁨과 슬픔에 연관된 감동과 감응이 일어난다. 이런 의식 내재적 활동에서, 지적 노력과는 다른 감화작용의 덧붙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 감정과 감화를 구분할 수 있다면, 감정과 현실 개념의 결합에서 도덕론이, 감화와 현실의 이상(예상참여)과 연관 지을 때 종교론이 표출 될 것이다. 벩송의 무의식의 활동은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라, 현실에서 확장적 역할을 하기도 하고(도덕론), 미래에 예참에서 투사적 역할도 한다(종교론). 전자에서 동철에서 군자, 서철에서 현자, 후자에서 성인 또는 성자라 부른다. 그러면 지성과 속좁은 이성의 역할을 무엇닌가 한마디로 신체의 움직을 유용하고 실용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빨려들면 자본 제국이 스스로 선(착)하다고 하고,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서툴다(나쁘하다)고 한다. 변증법이 아니다. 방향을 바꾸어 인민은 군자와 성인을 본받으며 산다는 점에서 착(선)하다, 그러나 체제의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강압과 공포를 심는다는 점에서 나쁘다(사악하다)고 한다. 변증법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순간에 가족제도, 위계제도에 빠지며, 파라노이아로 해석하려 든다. 들뢰즈/가타리가 삼위일체의 가족체(filiation)이 명령과 억압의 도구라고 비판하며, 생성하는 가지들의 동맹(alliance)[연대]을 주장하는 데는 이런 이유(la Raison, 넓은 이성)가 있다. 철학사에서 순수 이유(la raison pure)은 심층에 흐르고 움직이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지, 칸트가 말하듯이 순수 이유가 찾아갈 곳이 없어서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상층에 찾아간다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벩송의 무의식을 이어 받아서, 프로이트의 이드(리비도)와 달리, 무의식을 역동성과 능동성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라고 한다. 사실은 그것이 자연이며, 인간의 본성(la nature)이다. 들뢰즈가 영화를 설명하면서, 신체 속에서 역동적 힘을, 화면에서 역동적 힘으로 전개한 것이 큰 장점일 것이다. 게다가 이 역동적 힘들의 연결들 또는 선들을, 벩송의 두뇌의 회로처럼, 설명하는 것이 이채롭다. 들뢰즈는 이 연결들에서 하나의 통일된 단일 방식도 아니고, 또는 단선으로 진행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인데, 이것을 현대 생리학의 실증을 수용하여, 두뇌 신경회로의 시냅스이론을 끌어들였다. 그래도 그는 두뇌의 회로가 예술의 회로와 상응하는 것처럼 설명하는데, 이는 예술(영화) 작품도 어째거나 도구적 작업을 통해서 화면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영혼의) 사유에서 환타지(플라톤주의의 용어로서 공상)를 투사적으로 관념처럼 표현하는 경우에, 영화 화면의 조작 작업(자르고 붙이든, CG를 사용하든)으로 하여금, 화면을 시간-이미지를 만들어서, 가상적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긴다. 가상적 세상은 선의 이데아의 세상이 아니다. 전자는 이미지의 논리이고 후자는 추상의 관념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이미지가 종교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삶을 현실에서 꾸려가면서 정교하게 만들어가는 것과 달리, 가상성의 세계를 펼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리라. 내적감화를 심층의 토대로 하는 삶의 과정에서 생성하고 확장하는 것이 실재성의 현실이지, 가상성을 확장하고 투영하는 것을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후자에서 상상계의 권위와 권력을 분석하는 이야기는 옛 신화와 전설을 – 할미와 하비로부토 듣고도 또 듣고 싶어 하는 여섯 살 어린애 취급하는 작업이다. 문학적 표현으로 어린애 취급, 권력카르텔인 상층은 개돼지 취급하는 것과 같다. (54RMB) (54RMC)
## II. Cinéma 53
II. 6. 시간-이미지에 관하여(Sur L’image-temps 82-87
- 시네마, 334호, 1985년 12월 18일,
카바소(Gilbert Cabasso 1948-)와 달론(Fabrice Revault d’Allonnes, s.d.)와 대담.
Q1. - 시네마 10년‥… 그리고 한 철학자가 시네마의 진보 개념들을 발설하기를 제안한 것이 단지 오늘이다. 철학적 반성의 이런 맹점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는가? (82)
GD(질 들뢰즈): 철학은 운동을 사유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 중요성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 철학은 사유 속에서 운동하기를 원하는데, 이는 시네마가 이미지 속에서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이것은 바쟁(Bazin, 1918-1958)의 모험이었다. (82)
[천야: 시네마 100주년, 철학은 운동[의식의 흐름]을 사유한다. 영화에 철학이 아주 중요하게 관여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두 탐구는 독립적이지만 서로 만날 가능성도 있다.(82).]
Q2. - 오늘 또한 당신은 시네마의 비평에 대해 기대하는가? 그 비평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82)
GD: 비평의 임무, 그것은 개념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필름 속에서 분명하게 “주어져” 있지 않고, 그럼에도 시네마에, 이런저런 필름들에 적합하다. 시네마에 고유한 개념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철학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그것은 기술적 용어들이(des notions techniques) 아니며, 그러나 기술론(la technique, 기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83)
[기술, 즉 기계적 작업은 시네마의 개념 작업이나 설명에 적합하지 않다. 필름의 이미지들의 운동이 무엇을 드러내느냐에서 물론 사진기와 영사기, 디지털과 컴퓨터 그래픽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도 화면에 비치는 것은 이미지이며 이미지의 운동 또는 지속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 21세기에 들뢰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
여행과 파노라마(한 눈에 전풍경보기)는 동일한 공간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여행은 공간을 선으로 긋기를 그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행은 시간 속에서 몰입되어 간다. (83)
[여행은 시간 속에 있다. 비스콘티의 영화에서이다. 구로사와와 미조구치의 영화는 다르다고 한다.]
시네마는 이미지의 자동-운동으로, 심지어는 자동-시간화로 진행한다. 내가 연구하기를 시도했던 것은 두 측면이다. .. 이것은 전문학술들이어야 하고 동시에 매번 개념들의 차히에 관해, 특수화에 관해, 재조직화에 관해 접합되어야 한다. (83)
Q3. - 당신의 반성을 가로지르는[관통하는] 사유-신체의 문제거리로부터 어떻게 정신분석학과 시네마와 그 학문의 연관을 배제하는가? 또한 언어학도 배제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 개념들은 다른 곳에서 오는가?” (83)
GD: 철학이 시네마와 연관하여 제기한 개념들은 특수해야만 하며, 다시 말하면 시네마에만 알맞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틀짜기(le cadrage)와 거세, 클로즈업(le gros plan)과 부분대상을 연관시킬 수 있다. 나는 그게(ça)[Id] 시네마에 무엇을 기여하는지 보지[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상상계(l’imaginair)”도: 이것이 시네마에 유효한 용어인지 확실하지 않다. 시네마는 실재성의 생산자이다. 드레이어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봐야 소용없다. (84)
[일단 들뢰즈는 라깡류에서 영화의 개념작업을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영화의 특수한 용어를 대입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 인접과 닮음의 언어와 겉치장이 있다고, 즉 유사한 점이 있다고 같은 도마위에 올려서 분석하는 것은 어불성일 것이다. 유사점에서 표상(재연)의 르네상스 이래로 시대적 변천에 관해서는 푸꼬가 말과 사물에서 말했는데, 들뢰즈가 그 분석의 장점은 오성(지성이건 속좁은 이성이라 표현하건)이건 지적작업이건, 권력에 빌붙어서 권력을 옹호하는 광기(변증법)를 이어온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꼬의 작업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론(le criticisme)이며,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으로 순수 이유를 비판한 것과 같은 계열에서 사회성과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54RMC)]
철학-영화의 문제 속에서 우리를 앞서가게 하는 것은 키에르케골(Kierkegaard, 1813-1855)과 드레이어(Dreyer, 1889-1968)로 비교된 정신분석학이 아니다. 정신적 규정작업이 어떻게 시네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그러한 것은 시네마 전제에 참여하는 것인데, 추상적 시네마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열광적이다. [들뢰즈는 라깡류의 정신분석이 개념들 통한 정신분석이 답이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오는 감화작용(affection)에서 오는 감동과 감명을 어떻게 감화들로 표현하느냐가를 중요시할 것이다.]
시네마에서 간접화법(la narration), 그것이 상상계와 같다. 그것은 운동과 시간으로부터 흐르는, 반대방향은 아니고, 매우 간접적인 귀결이다. 시네마는 이미지의 운동들과 시간들이 시네마에게 이야기하게 한 것을 이야기 할 것이다. .. 이야기들(des histoires, 역사들)보다 더 많은 생성들이, 다른 형상들(forme)이 있다. (84)
[영화의 화면의 흐름이 생산하는 것이 있다. 그 흐름에서 간접화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계이다. 따라서 상상계는 사유 작업에서 상상작업하고도 다르다. 상상계는 공간화된 추상의 틀을 만드는 작업과 같아서 이 작업이 삼위일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틀은 플라톤주의의 지성의 틀이며, 종교의 권위의 틀이며, 국가의 권력의 틀에 오래 동안 젖어있는 것이다. 오랫동안이라 해도 2천5백여년밖에 안되지만 말이다. - 이미지의 생산으로서 상상작업으로서 시네마에는 생성들이, 형상들이, 시뮬라크르들이 있다. 이들은 사유의 표상에 견줄수 있는데, 시네마에서는 생성들을 개념 또는 관념으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실재적으로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54RMB)] [상상계가 표면의 겉면과 같다. (C)]
Q4. - 그것은 아주 중요한데, 당신은 당신의 책에서 신-신재론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전쟁과 연결되어 있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단호한 절단[이 있다] - 이탈리아에서 비스콘티(Visconti, 1906-1976)와 로셀리니(Rossellini, 1906-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서는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1903-1963)가 이후에는 웰즈(Welles, 1915-1985)가 너무 이야기화 하는(historicisante, 역사화하는) 모든 접근으로부터 멀어지는데‥… (85)
GD: 신실재론과 중대한 절단[단절]은 전쟁의 말기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화기 신실재론이 감각운동 도식들의 파산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 그때에 주요인물의 새로운 종이 태어난다. 그러나 특히 영화이미를 시간화하는 가능성이 태어난다. 그것은 운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순수상태에 속하는 약간의 시간, 즉 순수시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시네마의 혁명이며, 이 혁명은 웰즈에게서, 또한 곧바로 오즈에게서 전쟁에 앞서서, 다른 조건들에서 준비될 수 있었을 것이다. (85)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이 누보로망 이전에, 이탈리아 신실재론에 있었다는 것은 앞의 대담(1983)에서도 나왔다. 시간-이미지 단초는 이 시기에 있다. 그리고 내용의 풍부성에는 이미지들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고다르의 “두 가지를 여섯 번(1976)관한 세 가지 질문들”(1976)에서 시네마에 맞는 개념을 찾았을 것이다. - 영화에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공통개념으로 삶을 사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면을 끌어(밀어)올리는(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화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감화작용의 감동과 감명은 감정으로 기호들을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전설, 설화, 역사)보다 감화작용(affection)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장면들의 이미지 연속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이 장면들은 용어도, 개념도, 관념도 아니라서, 감화(affec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화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감동과 감명이 공감과 공명으로 소통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통은 언어에서도 정신분석학에서도 설명 또는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Q5. - 그러나 이 변화들이 어떤 기준들에 연관 있는가? 어떻게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 변화를 미학적으로 가치있게 하는가? 결국에는 필름들의 가치평가는 무엇에 기초하는가?
GD: 내가 생각하기에 특별히 중요한 기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두뇌의 생물학, 미시 생물학이다. 이 생물학은 변이(mutation, 돌연변이)로 가득 차 있으며, 예외적인 발견물들을 축적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도 아니고 언어학도 아니다. 이것은 기준들을 제공하는 두뇌의 생물학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은 만들어진 개념들을 응용하는 다른 두 학문들에 대한 불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85-86)
[생물학과 다른 학문의 방향의 논리에는 큰 차히가 있다. 생물학에서 현 생명체는 각각 그 종의 최상위 존재이며, 부모, 부모의 부모 등 조상들은 후배 즉 후신들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에게 부모, 조상들은 먼저 존재[선전재로서]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현존은 지금이 먼저이고 부모 조상은 과저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에서는 현존자들이 가장 높은 존재이며, 현존자들은 과거의 어떤 방식으로든 차이를 지닌 변이들이기 때문에, 78억 인간 종(2021년)은 같은 것이 없다. 다음 시대의 현존자들도 과거와도 닮은 점이 없는 변이들이다. 즉 자연, 즉 무의식은 능동적 생산이다. 상상계에 갇힌 자아(인격성)가 아니다. (54RMB)]
레네(Resnais, 1922-2014)의 시네마와 같은 시네마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두뇌의 시네마이다. 거기에서 또한 가장 즐거운 또는 가장 감동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레네의 인물들을 끌고 가는 회로들(les circuits)은, 또 인물들이 위치하는 파(波)들은 뇌의 회로들, 뇌의 파들이다. (86)
[이 회로에 관한 것은 벩송의 MM에서 온 것이리라. 그런데 벩송은 두뇌에 한정하지 않고, 의식(기억)의 회로였다. 들뢰즈는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의 작동영역에서 일어나는 회로는 감정회로 일 것인데, 감정 이전의 감화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감화에서는 두뇌의 회로라기보다, 기억의 회로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직 기호화로 등장하지 않은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의 작동인데, 플로티노스의 행동 없는 관조의 것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두뇌적인 것이 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자 원하지 않는다: 감동적이고 정념적인 두뇌가 있다‥…. .. 왜냐하면 대부분의 영화 생산 작업은, 임의적 폭력과 허약한 에로티즘들과 더불어, 소뇌(le cervelet)의 결함[장애]을 증거한다. 클립들(clips, 동영상)의 예는 병리적(pathétique, 감명적)이다: 그것은 우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새로운 영화영역이다. .. 새로운 회로를 창조하는 것은 두뇌로부터 동시에 예술로부터 이해된다. (86)
[두뇌의 회로에서 대뇌 피질부분이 5관의 감각작용에 관한 것이라면, 피질의 밑부분의 소뇌부분은 감정작용이라면, 그보다 더 심층에 있는 것이 감화작용의 부분이라고들 한다. 이 심층의 회로와 더불어 감정과 감각의 회로를 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회로들은 새로운 예술(영화, 비디오, 디지털-아날라그 화면)에서 창조작업을 하는 것만큼이나 두뇌 안에서도 회로를 만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 현대 신경(두뇌)생리학에서는, 일상적 삶을 살기 위한 회로다운 회로는 7-8세에 이루어지고, 그래서 회로가 형성되기 전 6세 이전의 추억들은 (회로들이)연결 안 된 상태이거나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회로의 새로운 생성들은 평생동안 필요에 따라 계속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벩송의 관점으로 두뇌의 회로가 공간적이라기보다 시간적 간격을 필요로 하는 위상적 회로들이다. 왜냐하면 주의 또는 지적 노력에는 시간 간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간격을 잘 이어가는 지적 노력은 새로운 회로를 창안 또는 창조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회로가 그 인물에 한정되고, 다른 이에게 전수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어렵고 드물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54RMB)]
Q6. - 시네마는 철학자보다 도시에서 더 잘 선천적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어떻게 이 틈을 메울 것인가? 어떤 실천이 있을까? (87)
GD: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나는 예를 들어 스트롭 부부가 정치적 영화인인 한에서 “도시” 속에서 더 쉽게 개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창조작업[제작]은 가치이며 정치적 담지자이다. (86-87)
창조작업의 모든 형식들은, 텔레비전에서 우발적 창조작업을 포함해서, 여기서 공통적인 적(ennemi)을 발견한다. 그것은 항상 두뇌적 문제이다. 두뇌는 모든 회로들의, 즉 가장 근본적인 조건 반사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회로들의 감춰진 앞면이다. (87)
두뇌는 시-공간적 부피이다. 두뇌는 거기서 새로운 현실적 길들을 그리는 예술에 속한다. 사람들은 영화적인 시냅스들(synapses)에 대해, 즉 연결접속(raccords)이든 거짓접속이든,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예를 들어 고다르(Godard, 1930-)에게나 레네(Resnais, 1922-2014)에게서 동일한 것도 동일한 회로들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집단적인 중요성 또는 집단적인 범위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의존하는 것 같다. (87)
[두뇌의 회로로 설명은 벩송을 빌어왔겠지만, 신경계를 연결하는 한 세포 끝과 다른 세포와 사이의 간격을 시냅스라고 한다. 시냅스는 전기적 이동이 아니라 이온의 이동이라 한다. 즉 이 이동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인 셈이다. 이 연결의 이온물질의 조절은 누가 하는가? 내가 읽은 바로는 아직 답이 없지만, 형이상학적 용어로, 생명의 근원적 권능과 같은 미는 힘에 의존할 것 같다. 살아있는 한에서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사유이전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역동적 활동 경향일 것이다. / 두뇌가 시공적 부피(용량, 위상)라는 단위라고 하지만, 그 연결망은 무한정하게 연결점을 갖는 다양체이다. 영화에서 이미지의 운동작용은 거의 환타지와 망상에 가까운 수준을 세울 수 있다. 인간에게서 의식의 상상작용은 신체적 삶과 연관인데, 이를 초과하여 정신의 추론을 보태어 공상하거나 망상하는 경우는 환각이라기보다 환타지일 것인데, 이를 가상적(virtuel)이라 한다.(54RMB)] (lu 54M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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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철학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사회비평가이다.
1889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1889-1968) 덴마크 영화감독. 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La Parole (Ordet, 1955), 게르트루드(Gertrud, 1964),
1898 미조구치(Kenji Mizoguchi, 溝口 健二, 구구 건이, 1898-1956) 일본영화감독. 구로사와(Akira Kurosawa)와 오주(Yasujirō Ozu)와 더불어 일본 영화의 거장이다. 오하루의 일생, 1951)
1901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 프랑스 영화인, 13편의 장편 영화 출품. Procès de Jeanne d'Arc 1962, Au hasard Balthazar 1966
1903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Ozu Yasujirō, 1903-1963) 일본의 영화감독, 각본가. 일본에서 무성 영화가 성행했던 193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으며 가족과 결혼, 특히 세대간의 갈등을 영화의 주제로 다뤘다. 늦봄(1949년), 초여름(1951), 동경 이야기(1953), 부초(1959)
1906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1906-1976) 이탈리아 영화 감독 (Mort à Venise 1971)
1906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네오레알리스모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 무방비 도시,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 스트롬볼리, 로베레의 장군 등이 있다.
1910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흑택명, 1910-1998) 일본 영화 감독. 1950년 라쇼몽羅生門, 1950,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
1911 레이(Nicholas Ray, 본명 Raymond Nicholas Kienzle, 1911-1979) 미국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배우. We Can't Go Home Again 1976
1915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 미국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영화감독으로.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 상하이에서 온 여인(The Lady from Shanghai, 1948).
1918 바쟁(André Bazin, 1918-1958) 영화와 텔레비전 비평가. 1938년 생클루 사범출신인데 교수자격시험 구술에서 낙방경험이 있다. Cahiers du cinéma의 창간자들 중의 하나.
1920 에릭 로메르(Éric Rohmer, 본명 모리스 셰레르(Maurice Schérer) 1920-2010) 프랑스의 영화 감독. 로메르는 총 23편의 장편 영화를 감독하였다.
1922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 프랑스 영화감독. ‘시간’을 탐구하는 그의 실험은 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의 종합판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마리앙드 바에서(L’Ann dernie Marienbad, 1961), 1997년 작인 누구나 [과거에는] 그 노래를 알았다.(On Conna la Chanson, 1997)의 제목 뜻은 ‘누구나 아는 진부한 얘기’라는 관용어이다.
1930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1933 스트로(Jean-Marie Straub, 1933- ) 그리고 다니엘 윌레(Danièle Huillet, 1936-2006). 프랑스 영화인 커플(Les Straub), 이들은 메츠에서 시네클럽을 할성화했다.
1948 카바소(Gilbert Cabasso 1948-), 존엄사 협회 공동 총괄사(Coordonnateur communal de l'Association pour le droit à mourir dans la dignité, à Montrouge.),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2011년 이후 철학교수 은퇴. 교수자격 통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달론(Fabrice Revault d’Allonnes, s.d.) 영화 비평가, 수필가. 배우. 1992년 박사학위( La Lumière dans le cinéma " moderne ", Univ. Paris 3, 1992) Le banquet (1995), Mes entretiens filmés (1998), Mes entretiens filmé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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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트들(Les Cahiers du cinéma)(1951년 4월 창간), 바쟁(André Bazin),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로 뒤카(Joseph-Marie Lo Duca), 케젤(Léonide Keigel)에 의해 창간되었다.
시네마(Cinéma), 이 영화 전문지는 1954년에 시네클럽 프랑스 연맹(Fédération Française des Ciné-Clubs: FFCC)에 의해 창간되었으며 첫 제호는 시네마55(Cinéma 55)였다고 하며, 1954년 11월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호(n° 600)는 1999년 4분기에 나왔다. - 들뢰즈가 대담한 영화지는 이 잡지일 것인데, 1985년 당시에는 주간지였던 것 같다. 1985년 12월 18일자 표지 사진에는 주간지(hebdomadaire)라 표기되어 있다.
시네마(Cinéma)는 주간지라 한다. - 시네마(Cinéma), n° 334, 18 décembre 1985. - 이 영화 전문지는 아래의 에장쉬츠의 Cinéma(2001-2008)와 다르다. 게다가 들뢰즈가 대담한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n° 352, 1. octobre 1983)와도 다르다. 그런데 이 시네마(Cinéma)는 fr.Wiki에서 언제 창간이 되었는지를 찾을 수 없다.
2001 Cinéma 2001-2008년까지 6개월 마다 나오는 영화 전문지. 에장쉬츠(Bernard Eisenschitz, 1944-)에 의해 창간되었다. (lu 54MLA)
(7:02, 54RMB) (7:34, 54R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