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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1080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잠자고 (마가복음 14:32-42)
2020-1-30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깨어 기도합시다.
고민이 심하고 너무나 놀라고 고통스럽습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 집니다. 나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 처럼 그런 감정에 눌려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도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받는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도로 힘을 얻어 우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깨어 기도합시다.
1. 기도의 이유: 십자가의 고통이 고민되어서 기도한다(32-35)
2. 기도의 유익: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굴복시킨다(36절)
3.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37, 38절)
이 시간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고민하시며 기도하신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기 소원합니다.
1. 왜 기도? - 십자가의 고통이 고민되어서 기도한다(32-35)
1) 고통가운데 기도하심
1) 몇 시간 뒤면 가롯유다가 성전 호위병을 끌고와서 예수님을 잡아 넘겨 줄 것입니다. 성찬 때에 제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6절에는 찬양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에 부르는 시편 118편을 찬양했습니다. 118:25,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예수님 자신이 “주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으로 오시는 분”으로 찬양하며 가십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산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너희 모두가 나를 모른다 하고 도망할 것이다.” 모든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죽어도 당신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감람산의 겟세마네 라는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자주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가롯유다도 잘 아는 그곳으로 갑니다 (요 18:2). 그리스도는 그분의 발로 걸어서 잡히려 갑니다.
2) “내가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 11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세명을 제자들을 뽑아서 앞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세 명이 기도에 모범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배우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과 우리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3) 33절에,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찬송하던 예수님이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셔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기적 중의 기적인 십자가의 표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슬퍼하며 놀라십니다.
세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너무 마음이 눌렸습니다. 놀랐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죽을 지경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이미 받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이렇게 겁을 내고 마음이 눌리시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진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고통스런 십자가의 사명 앞에서 마음이 눌리고 불안합니다.
우리의 불안과 우울을 짊어 지고 실제로 마음이 눌리고 불안하십니다. 우리처럼 불안하시고 고통하십니다.
--->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하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고통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생각할 때 불안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는 고난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흘리고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는 듯한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서적 불안과 눌림이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냐 차이만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인 문제를 스스로에게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가 이 두려움과 고통을 이기고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예수님께서 먼저 당하셨습니다.
2) 제자들에게 부탁: “여기 앉아 있으라. 깨어 있으라”
1) 두려움에 짓눌린 예수님은 3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낙망하여” 말 그대로 하면, “내 혼이 아주 낙망하여” 이 말은 시편 42,43편에서 구약 성도들이 절망가운데서 부르짖던 기도를 기도합니다. 시편 42:5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11에도, 43:5에도 반복됩니다. 시 42:3에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전에 함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배반하여 버릴 것이기에 마음이 더 상합니다 (43:4).
2)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 의해 버림당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대제사장들과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며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마태복음 27:43).
곧 당하실 일을 생각하며 마음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당하던 고통을 대신하여 당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낙망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낙망과 함께 하십니다.
2) 내 마음이 예수님은 그 정서적 불안과 고통을 제자들에게 솔직히 말씀하십니다. “꼭 죽을 것만 같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솔직하게 “괴로와 죽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서적 어려움을 가족이나 성도에게 감추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우리는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공동체입니다.
3) 11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앉아 있으라” 3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머물러 깨어 있어라.” 계속해서 여기 머물러 있으라. 계속해서 깨어 마 26:38은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38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며 도우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를 지시는 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아무도 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 함께 기도하며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기도할 때 그것 때문에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신 것은 예수님이 지고 계신 제자들의 불안과 고통을 그들도 앞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도록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도움을 받기 원하십니다.
“여기에 앉아 있으라. 여기에 여기 계속 머물러 있으라. 계속 깨어서 기도하라.”
---> 지금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같은 말을 하십니다. “여기에 앉으라. 여기에 계속 머물러 기도하라.” 우리의 “여기”는 어디입니까? 우리의 겟세마네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직분과 사명을 앞두고 우리가 두려워 하고 있는 이 곳이 바로 우리의 겟세마네입니다. 그런 우리의 두려움과 눌림에 예수님이 참여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여기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이 곳이 우리가 기도할 바로 “여기 겟세마네”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감당해야 할 가정과 직업, 학교에서 염려하고 있는 그 곳이 바로 “여기 겟세마네”입니다. 그곳이 바로 기도할 곳입니다.
염려는 자연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염려될 때 기도합시다. 큰 염려가 생길 때 까지 기다리지 말고 매일 따로 시간을 떼어 내어 기도합시다.
2. 어떻게 기도?: 소원을 아뢰지만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굴복시킨다(35, 36절)
1) 자세: 엎드려 기도(35절)
예수님은 다시 3명의 제자들을 두고 조금 앞으로 가서 땅에 엎드러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우리 보다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 때문에 우리도 기도합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합시다. 하나님이 힘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도합니다.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기도할 때도 마음의 자세는 엎드립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2) “아빠 아버지” 라 부르며 어떤 분인지 고백(36절)
1) “아빠 아버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기도는 그냥 명상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 당시 기도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공경심과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0문). 영원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친근하신 아들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낮아 지셨습니다. 그래서 낮아진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나갑시다. 이것만큼 위로가 없습니다.
2)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예수님은 아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 우리도 기도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합시다. 그렇게 능력있는 분으로 고백합시다. “아빠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믿고 기도합시다.
3) 소원을 말씁드립: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1)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십니다. 이사야 51:17은 “여호와의 손에서 분노의 잔”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분노의 잔입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분노의 심판이 더 큰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한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분노와 심판을 그리스도 혼자서 다 받아야 합니다. 지옥의 고통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야 합니다.
2) “이 잔을 내로부터 지나가게 하옵소서” 우리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방법으로 해 달라고 소원합니다. 아버지께 완전히 버림받고 저주받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사랑하는 아버지께 솔직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아뢸 수 있습니다. 한 시간 이상, 몇 시간이고 몸부림 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 이 잔은 우리 성도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잔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만 받으실 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신 잔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도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의 짐이 무거울 때 솔직히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방법으로 하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투명하게 의사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립시다.
4) 내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킴(36, 39절)
1)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오래 동안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십니다. “십자가 위헤서 아빠 아버지의 버림을 받는 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뜻임을 압니다. 신의 뜻대로 하소서. 나의 소원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대로 버림받겠다고 굴복합니다. 제자들에게 왔다가 두 번째로 기도할 때도 같은
39절에 같은 말씀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소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소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면서, 다시 자기의 소원을 말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킵니다.
2) 히브리서 5:7-9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공경하면서 통곡하며 눈물흘리며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말씀을 다 들어 주셨습니다. 들어 주셔서 고난을 피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 주셔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내가 소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더 분명히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원래의 소원을 하나님의 소원에 굴복시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 가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릴 자유를 주셨습니다. “뭐, 그런 것을 원하느냐?”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들어 주십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5) 기도의 응답: 담대하게 사명의 길로 나아감(41절)
1)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은 42절에 말합니다.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는 사명의 길로 나갔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선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에 순종”할 새로운 의지의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져야할 십자가를 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기쁘게 지고갈 마음을 주셨습니다.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이었던 예수님은 담대하게 십자가의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3)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십가가를 지고갈 수 있는 힘과 의지와 기쁨을 주십니다.
3.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37, 38절)
그래서 기도의 복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잠자던 제자들(37, 38)
37절, “내가 기도할 동안에 앉아 있으라” 37절,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세 번 동안 기도하시면서 세 번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세 번 다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37절,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책망하십니다.
“한 시간”은 35절에, 예수님께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너희와 교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알고 그것에 감사하며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 우리도 이 때에 기도합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다스리시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재림하실 그 영광의 주를 기다리며 기도합시다.
2) 기도해야 할 이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함(38절)
1) “깨어 기도하라.” 실제 잠자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편히 잠잘 수 있습니다. 사실은 기도해야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우리를 사단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넘어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사딘의 공격에 넘어갑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된 자아를 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나를 말합니다. 육신은 죄악된 본성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7은 맔합니다(308페이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8:13(신약 24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령님을 의지하여 아직 남은 죄악된 성향을 죽입니다. 기도는 복종입니다. 기도는 자기부압나더,
2-1) “마음/영은 원이로되” 36절에서 말하는 “뜻”운 “의지”입니다. 38절의 “원”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게는 쓰지 않고 사람에게만 씁니다(마 26:41, 막 14:38, 롬 1:15).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고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가 될 때 우리는 흔들림없이 믿음의 길을 갑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한다고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과 우리 안의 죄악된 성향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4) 계속 자고 있는 제자들(37, 40-42)
1)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두 번째 기도하고 오셨을 때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꺼풀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슨 말을 할지 몰랐습니다. 너무 죄송했습니다.
---> 우리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 바랍니다. 제발 기도합시다.
2) “이제는 자고 쉬어라. 그만 되었다.” 기도하지 않고 있던 제자들 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구원 역사의 다음 페이지가 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 집니다.” 기도할 때가 끝났고 이제 고난을 받으며 일하실 떼가 왔습니다.
이제 자라! 잠자고 기도하지 않던 베드로는 정말 영적 잠을 잡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나는 예수를 절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5) 이 말세에 기도하라.
여전히 우리는 악하고 약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우리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와서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셨고” 37, 38절이나 말합니다. 마가복음 13:36 에서 경고하십니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홀연히 (갑자기)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주인님에게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았으니 깨어서 그 직분을 다합시다. 직분을 다하기가 두렵고 힘들 때마다, 로마서 8:26은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할 지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로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심한 고통으로 마음이 눌리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솔직히 기도했습니다. 그 십자가가 떠나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넘어갑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두려움과 연약을 가지고, 우리 가족의 문제를 안고, 또 교회를 위해 중보합시다. 아침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무기로 먼저 옷 입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지고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