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발심(發心)
제93강 도 닦을 마음을 내 오롯하게 이룬 공덕을 드러냄
증발심(證發心) 중에서도
‘도 닦을 마음을 내 오롯하게 이룬 공덕을 드러냄’이라는 부분을
얘기하다 말았습니다.
증발심에서 나타나는 그 공덕이라는 말은
자기 이익만 아니라 일체 중생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개인에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깨달음이 자기가 변모할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등 모든 존재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영향을 끼쳐준다는 거죠.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게 한 개인에게만 속해 있다면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갖고 있는 것이라면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환영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수행자가 깨쳤다면 그 이익이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돌아가야 되는 것이죠.
여기서 증발심에서 얻은 그 공덕이라는 것은
바로 중생 구제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도를 이루는 것이 뭐냐.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욕계는 욕심의 세계고, 색계라는 것은 물질이 깨끗한 세계고,
무색계는 정신만 있는 세계라고 보통 얘기하죠.
중생을 구제하려면 이 육신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물질이 없는 데서 도를 이루는 게 아니고
물질이 청정한 세계에서 도를 이룸으로 해서
다음에 색신으로 나타나서 중생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게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입니다.
그래서 색구경처에서 도를 이루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논 - 69)
自然而 有 不思議業일새 能現十方하여 利益衆生하니라.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 있기에
시방세계 나타난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진여와 반대는 것은 진여가 그것을 없앱니다.
바로 그것이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에요.
모든 중생들은 자기가 진여의 힘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참다운 이 마음이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바로 이 진여로서
진여가 아닌 망념을 없애주는 것은 당연 한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겁니다.
이 말은 수도 없이 비유로서 얘기를 했습니다.
향연기가 피어오르면 허공에서 사라지는데,
연기가 피어오르든 피어오르지 않든 허공은 변함이 없습니다.
진여를 회복하게 되면 늘 텅 비어 있지만
향연기라는 번뇌를 만나면 향연기를 없애듯이
진여를 완전히 회복한 보디사트바(Bodhisattva, 菩薩)는
진여를 회복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없애주는 것이 당연한 거죠.
그게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관계도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상호관계를 갖고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에
진여가 회복되는 즉시 중생구제 활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증발심에서 얻은 공덕입니다.
이 공덕은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얘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疏)》 313p에 보면 게송이 있습니다.
원효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소(疏) - 69 - 1》
欲界及無色에서 佛不彼成佛이라
色界中 上天에서 離欲中에 得道니라.
욕심이 있는 세계와 무색계에서
부처님이 성불한 것 아니었다네.
색계 중의 높은 하늘 구경천에서
욕심을 떠나갈 때 도를 얻었네. |
이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중생을 구제하려면 몸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바로 색구경처에서 도를 이뤘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본문 315p ‘의심을 없앰’을 보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해도 의심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의심을 없애는 부분, 중생 구제에 대한 얘기죠.
(논 – 70)
問曰. 虛空無邊故로 世界無邊이고
世界無邊故로 衆生無邊이고
衆生無邊故로 心行差別이 亦復無邊이라.
如是境界 不可分齊일새 難知難解니라.
若無明斷이면 無有心想인데 云何能了일새 名一切種智리오.
물음 : 허공이 끝이 없으므로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그 마음의 차별도 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계를 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알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명이 끊어졌다면 마음에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릅니까. |
무명이 끊어져 버렸으면 알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들어가 있으니까
알만한 대상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해서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왜 그렇게 부르느냐는 거죠.
증발심에서 진여를 체득했다면,
진여는 주객이 없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진여는 공(空)의 측면이 있고 불공(不空)의 측면이 있습니다.
공(空)과 불공(不空)은 같은 것이라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공(空)의 자리는 근본자리인데, 이 자리는 분별이 없는 자리죠.
텅 비어 있는 것은 높고 낮음이 없고 평등한 자리란 말이에요.
그래서 분별이 없는 자리기 때문에 앎이 없다[無知] 이거죠.
이것을 보조지눌스님이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진심무지(眞心無知)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진여의 공(空)의 자리는 앎이 없는[無知]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르느냐는 겁니다.
무명이 끊어진 자리는 텅 빈 진심무지의 자리인데
어떻게 낱낱이 아는 지혜가 생기나요? 하고 의문을 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열반경』을 인용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공만을 체득한 자는 불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다.’, 이랬습니다.
화두를 들든 무엇을 해서든지 공을 봤다 해도
그 공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얘기죠.
공과 불공을 같이 봐야 만이 완전하다고 원효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분은 공 하나의 측면만 들어서 질문한 것이죠.
모든 본질은 텅 비어 있는 것이 맞습니다.
찻잔도, 여러분 개개인도 다 텅 비어 있습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뤄져 있을 뿐이지 개체는 없는 거죠.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나 사물은 공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만이 진실이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
答曰. 一切境界는 本來一心으로 離於想念이나
以衆生妄見境界故로 心有分齊니라.
대답 : 모든 경계는 본디 한마음으로서 상념을 벗어나지만
중생들이 헛되이 경계를 보기에 마음에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모습이 있다. |
진여(眞如)가 뭐냐 하면 한마음[一心]이죠.
일심 자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거죠.
상념이 없는데 중생들은 바깥 경계를 보고 있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망념이 사라지면 일체 경계가 사라진다 그랬습니다.
다른 말로 마음[생각]이 일어나면 사물이 나타나고 경계가 일어난다는 거죠.
이게 우리가 앞에서 배운 얘기죠.
마음이 생기면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 법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오직 마음뿐이지 다른 경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바깥에 뭐가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들이 그렇게 볼 뿐이라는 거죠.
전부다 망념이 만들어 낸 세계를 우리가 진짜로 있다고 보는 거예요.
파장의 세계인데 모양과 색깔이 있을 수 없죠.
그런데 모양과 색깔을 본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지어 내서 본다는 겁니다.
(”)
以妄起想念하여 不稱法性故로 不能決了니라.
諸佛如來는 離於見想이어 無所不遍이니라.
心眞實故로 卽是諸法之性이라.
自體顯照 一切妄法하니 有大智用 無量方便이니라.
隨諸衆生所應得解하여 皆能開示 種種法義이니 是故로 得名一切種智니라.
헛되이 상념을 일으켜 법의 성품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헛된 견해와 생각을 벗어나
어떤 곳이라도 그 지혜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그러하다.
자체가 헛된 모든 법을 환하게 비추는 큰 지혜의 작용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곳을 따라
모두 온갖 법의 이치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중생들이 바깥경계가 있다고 계속 집착해서 살기 때문에
낱낱이 아는 지혜가 필요한 거죠.
그게 불공(不空)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인연을 따른다, 수연(隨緣)이죠.
텅 비어 있으면서도 중생이 집착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경계를 나타내는 겁니다.
중생이 보는 이 세계에 맞추어서 지혜를 내서 구제하는 거죠.
그래서 ‘낱낱이 아는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것도 역시 진여의 작용 중에 하나다 이거죠.
그게 수연(隨緣)입니다.
공(空)이 불변(不變), 바뀌지 않는 거죠.
그러면서도 또한 인연 따라서[隨緣]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진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진여의 불공이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생 근기에 따라 딱딱 맞게 방편을 제시해서 이끄는 거죠.
그래서 낱낱이 아는 지혜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낱낱이 아는 지혜는 무엇을 통해서 체득이 가능하냐는 거죠.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연기(緣起)라 그러죠.
이 연기는 본질의 측면과 현상의 측면이 있습니다.
본질의 측면에 들어가는 방법은
생각의 흐름을 그치게 되면 본질이 보이기 시작을 하죠.
대승사마타[止]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상의 측면은
나타나는 모든 세계를 낱낱이 알려면 관(觀, 위파사나)이 필요합니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가는 수행입니다.
앞으로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면서 지관쌍수(止觀雙修),
사마타(ś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śyanā, 觀)의 쌍수(雙修)를 배우게 되는데,
사마타는 집중입니다.
집중하게 되면 마음의 고요함이 오죠.
이게 잘 아시다시피 삼매라든지 선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집중만 하게 되면 볼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 지혜 개발이 안 되는 거죠.
이게 초기 불교에서 얘기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가 왜 필요한지 거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너무 집중에만 치우쳐 있으면
그 집중하는 의식점을 일부러 분산시킵니다.
몸을 관찰 할 때도 한 곳만 계속 집중해서 관찰하는 게 아니고
다른 부분에 현상이 생기면 그 부분과 동시에 같이 관찰 하게끔 합니다.
예를 들면, 몸만을 관찰하게 해서 몸이 다 사라지면
그때는 관찰할 대상이 없는 거죠.
다 사라진 곳에 머물게 되면 무기공에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때는 또 관찰점을 찾게 합니다.
접촉되어 있으면 감각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바닥에 닿아 있는 엉덩이 부분입니다.
그 감각을 관찰하면서 다른 부분에 현상이 일어나면
같이 관찰하게끔 하는 거죠.
호흡도 들숨 날숨 사이의 틈이 있습니다.
틈만을 관찰하게끔 하면 집중이 잘되어서 마음에 고요함이 오지만
그 쪽으로 가면 꿰뚫어 보는 힘이 약해져 버립니다.
그때는 들숨 날숨 속에서 틈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다른 부분에 감각이 일어나면 같이 관찰하게끔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현상 자체가 상호관계를 가지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서 조건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전체의식이 깨어나는 거죠.
부분을 보는 마음이 전체를 보는 마음으로 바뀌어 간다는 거죠.
우리는 사물을 보면 모양과 색깔만 보잖아요.
그래서 꿰뚫어보는 관(觀), 위파사나는
이것을 꿰뚫어 봐서 실체가 없는 것을 명확히 보는 겁니다.
‘낱낱이 아는 지혜’라는 것은,
현상적인 세계를 위빠사나로 관찰해서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생멸인연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라는 것을
「대승기신론」에서 분명히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겁니다.
힌두교는 사마타만 있고 위빠사나는 없습니다.
지구상에 전도라든지 포교를 하지 않는 종교는 유대교와 힌두교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힌두교 같은 경우는 사마타 수행만 있는 거예요.
본질만 체득하는 거죠.
그러나 본질만이 진실은 아닌 것이죠.
모든 상호관계를 갖고 있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연기(緣起)의 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힌두교는 연기법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선정(禪定)만 있고 진여(眞如)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불교 수행에는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 구제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다른 종교와 차이 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정념(正念)으로 하기 때문에
념(念)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도 다음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가서 자세히 설명할 겁니다.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정념’은
남방불교의 전유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승, 소승 다 통 털어 불교수행은 념(念)으로 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
又 問曰. 若諸佛이 有自然業이어 能現一切處 利益衆生者라면
一切衆生이 若見其身 若睹神變 若聞其說하여 無不得利인데
云何世間에 多不能見이리오.
물음 : 모든 부처님께서 자연스런 업이 있어
모든 곳에 나타난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그 분의 신통변화를 보거나 설법을 듣고 많은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간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볼 수 없습니까. |
누가 물은 거죠.
부처님은 자연스런 업이 있어가지고
모든 중생에게 신통변화를 보여서 중생들을 다 구제하는데
왜 중생들은 이런 일을 못 봅니까, 그게 이상하지 않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대답을 합니다.
(”)
答曰. 諸佛如來의 法身이 平等하고 遍一切處하여 無有作意故로 而說自然이라.
但依衆生心現인대 衆生心者는 猶如於鏡이라.
鏡若有垢이면 色像不現이듯 如是衆生心이 若有垢이면 法身不現故이니라.
대답 :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고 모든 곳에 두루하여
억지 의도가 없기에 ‘자연스런’이란 표현을 쓴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인데,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 때가 끼면 모습이 나타나지 않듯,
중생의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처님은
늘 중생들을 위해서 법을 설하고 법신을 나타내 보이지만
거울과 같은 중생의 마음에 때가 잔뜩 끼어 있으니까
옆에 부처님이 계셔도 못 본다는 거죠.
부처님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중생을 하나라도 더 구제하려고 노력을 하고 계시는데
신통변화를 보여주고 온갖 법문을 다 설해도
우리 중생들은 마음에 때가 끼어서 못 본다는 겁니다.
원효스님께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 법문을 듣고자 한다면 삼매에 들어라,
삼매 속에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가 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삼매라는 것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죠.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됐을 때 부처님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증발심의 공덕이 중생 구제하는 건데,
중생을 구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떤 수행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그게 저는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부처님은 늘 법신상태에 있으면서도
물질의 몸인 색신을 나타내서 중생 구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하고 그러는 거죠.
『법화경』에도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한 가지 때문에 그렇다.
이 세상은 원래 구원되어 있고,
모든 중생들도 본래 부처인데 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를 알려주고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중생 구제하는데,
이것이 우리 수행하고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한 곳만 보면 부분은 잘 보이지만 전체를 못 보듯이
불교수행에는 사마타만 있는 게 아니고 위빠사나도 있다는 거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존재의 연기의 실상을 명확하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집중에 의한 마음의 선정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가 제일 좋죠.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서로 의지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사마타는 지(止), 위빠사나는 관(觀),
지관쌍수(止觀雙修)가 나오는 겁니다.
이런 수행을 했을 때 비로소 중생 구제가 나오는 겁니다.
‘낱낱이 아는 지혜’가 생기는 거죠.
우리가 연기 관계를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중생들이 상호 관계 속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중생들의 마음까지도 하나하나 알려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일체 모든 중생들 하나하나 마음 상태를 다 아신다’. 고 했고
‘삼천대천세계에 비가 내리는 빗방울 숫자를 다 안다’,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까지 다 했습니다.
발심마다 경계가 하나하나 다르고
경계가 깊어질수록 그 발심의 경지가 달라지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강한 마음이 있어야 만이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거죠.
물론 발심은 괴로움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셔야 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수행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수행 체험에 대한, 현상에 대한, 마장에 대한,
그리고 또 수행 깊이 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런 것을 낱낱이 얘기를 하겠습니다.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
첫댓글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참 좋은 날입니다..광혜의하루님
큰공부이루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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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운인연에 두손모읍니다 정혜신님
부처님 지혜광명 충만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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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깊어지면 질수록 진여의 공덕이 공부의 크기만큼 나타납니다...
이처럼 너무나 멋지고 대단한 부처님공부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함께하며 보여주고 알아가면서 부처님의 위신력 경험합니다
보신불과 화신불로 부처님공부 증명하여
이 멋진세상 함께하면 무진장 행복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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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 95 - 智雲스님 講義 - 12. 發心 - 第93講 道 닦을 마음을 내 오롯하게 이룬 功德을 드러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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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허당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제가 btn 홈페이지에 2004년~2006년 대승기신론을 지운스님 동영상으로 강의할때 공부했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가장행복한 공부 카페에서 그대로 문자화에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양해를 얻어 모셔(아비라불교 밴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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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_()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