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정이는 불 놓고
눈을 떴다. 자다 깨다 몸을 뒤척인다. 이불을 헤집고 침대의 유혹에서 달아난다. 예정된 시각보다 이른 시간이다. 시험장까지는 한 시간여 걸린다. 간단하게 씻고 집 나설 준비를 한다. 매년 고사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금까지 시험을 준비해 오면서 최종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혜택은 미루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채의 기쁨을 품에 넣기는 역부족이었다.
새벽녘에 집을 나섰다. 여태껏 포근하던 날씨는 시련을 주듯 입김이 하얗게 뿜어지는 기온이다. 손난로와 보온 물통을 챙겨 차를 몰았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이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흐릿한 가로수 가지는 바람에 휘날린다. 강변도로를 달린다. 오늘따라 신호의 연결이 좋다. 덩달아 콧노래를 내뱉으며 자연스러운 자동차 흐름에 맡긴다. 아침 햇살에 차창 밖으로 성애가 뿌옇게 내린다. 어느덧 시험장 입구에 도착하였다. 학교 정문에는 시험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응원 구호와 함께 걸렸다. 응시생들이 서너 명씩 운동장으로 들어선다. 딸 아이를 들여보내면서 손을 꼭 잡고 등을 두드리며 눈빛을 보낸다.
매년 그렇게 해오듯이 부부는 시험장에서 가까운 절을 찾았다. 본 절과 암자가 함께 있는 곳이다. 주차장을 지나 절 입구에 닿았다. 잎이 마주나고 가을에 갈색으로 단풍이 드는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줄지어 섰다. 기세를 떨치던 잎은 말라 부스러지듯 힘을 잃었다. 나란히 키 자랑을 하느라 높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은행나무도 한몫한다. 노랗게 물들어 자태를 뽐내던 이파리는 색깔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부는 가지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수명을 다해 길바닥에 수북이 내려앉았다. 한 장 두 장 덧씌운 산길은 얇은 담요를 덮은 듯 발길에 닿는 촉감이 정겹다. 오늘처럼 낙엽이 이렇게 새롭게 느낀 적은 일찍이 없다. 나뭇가지는 몸통에 매달려 한 그루의 나무로 역할을 해왔다. 몸집을 불리고 열매를 맺게 도왔다. 봄과 여름 내내 바람과 가뭄을 이겨 내었다. 나무의 일원으로서 꼭 필요한 역할을 해냈다. 가을을 만나 결실을 안겨 주었다. 이제 겨울을 앞두고 몸통이 이듬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도록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한다.
싱싱하던 잎은 나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영양분을 이제는 나누기 어려워 정든 집을 떠난다. 가지에서 사뿐히 뿌리 주변에 내려앉아 영양소 역할을 한다. 자신을 희생한다. 낙엽이 쌓인 산길을 무심히 걷는다. 붉은 단풍잎과 나란히 색깔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서 나무처럼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며 함께하는 이웃을 만나게 될까.
대웅전 앞에 섰다. 불상을 바라보며 삼 배를 올린다. 사람들은 대부분 간절함이 필요하면 종교에 기댄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도 부처님, 하나님을 찾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에게 힘을 보태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마음에 기도를 올린다. 자식이 능력에 못 미쳐 그 위안으로 삼고자 함이 크다. 법당에는 먼저 온 이가 자리에 앉아 주문을 왼다. 멀리 큰 산봉우리를 안고 있는 한적한 암자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등에 업고 동네를 품에 안았다.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며 절을 올린다. 자식이 순조롭게 시험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자신이 노력한 결과만큼 해 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시간은 왜 이리 느리게 가는지 숨이 차다. 암자를 벗어나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걷는다. 차가운 공기는 몸을 웅크리게 하고 굳어버린 손가락을 연거푸 비벼댄다. 작은 바람에 나뒹구는 노란 이파리는 색종이를 접었다 펼쳤다 하는 것처럼 길바닥의 도화지에 갖가지 그림을 그린다.
휴일을 맞아 가족 단위 산행객이 눈에 띈다. 털모자에 두툼한 목도리와 장갑까지 준비되었다. 경사가 큰 산길인데도 머뭇거림이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느새 우리를 앞질러 발걸음을 옮긴다. 한두 번 오르내린 움직임이 아니다. 늦가을의 산 풍광을 눈에 담는다. 산행객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듯하다. ‘마음은 콩밭에 있다.’ 보는 듯 그치는 듯 산허리를 돌아간다. 암자를 찾아 올라갈 때는 이 산 귀퉁이만 지나면 곧 나오겠지 하면서 찾아 나섰다. 처음 가는 곳이라 어디쯤 있을까 눈을 좇느라 정신을 쏟아 힘든 줄을 몰랐다. 내려오는 길은 예사롭지 않다. 아내의 손을 잡고 가슴을 뒤로 젖히며 발걸음을 조심조심 내디딘다. 가볍던 걸음이 점점 느려져 무거워 보인다.
암자를 나오니 추위를 피할 곳이 마땅찮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몸을 녹일 곳을 찾는다. 종합 운동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카페에 들어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우선 마실 것을 주문하고 기다린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그리고 카공족까지 진을 치고 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음료가 나옴과 동시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찾는 푹신한 의자 대신에 엉덩이 살갗이 짓눌리는 압박감이 전해지는 나무 의자가 마주한다.
몸을 녹일 수 있으니 만족한다.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절 입구에 서 있는 높다란 나무를 떠올린다. 나무는 모든 것을 내어 주지 않는가. 봄에는 아가 손을 보는 듯 새싹의 반가움을 안겨주고, 여름에는 청년의 싱그러운 그늘을 내어준다. 가을에는 중년처럼 갖가지 열매와 저마다의 단풍을 지어내고, 겨울에는 젊음을 불사른 노년의 맨살을 보여준다. 작은 가지들은 예술의 소재가 된다.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버려지지 않는다. 떨어진 잎은 몸통이 찾는 뿌리의 영양분 공급원으로 땅에 되돌려준다. 이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는가.
딸의 도전이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삼십여 년의 직장 생활은 울타리에 갇힌 망아지 모양새다. 이제 빗장을 조금씩 벗겨내야겠다. 여태 옭아맨 지식을 내려놓고 켜켜이 쌓인 먼지를 씻으려 한다. 멀리 잊고 지냈던 인문학을 찾고 지혜를 모아 보련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을 펼쳐보자. 자식들 못지않게 어버이로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다. 사람은 아는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작은 깨달음이라는 오늘의 물방울이 모이고 쌓여 큰 바위를 뚫는 결과를 이루어 내는 날을 기다린다.
도시 보통 사람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을 시작한다. 텃밭을 일구고 가축 키우기가 소꿉놀이처럼 다가온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궁금하다. ‘시작이 반이다.’ 농촌 쭉정이는 불 놓고 알맹이는 거둬들이는 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