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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3권
21.1. 아홉 가지 지혜[3]
(8)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
53. 그가 이와 같이 깊이 숙고하여 관찰하는 지혜로써 모든 상카아들이 공하다고 파악하고 다시
“이것은 자아가 공하고 혹은 자아에 속하는 것이 [공하다](M.ii.263)”라고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을 파악한다.
그가 이와 같이 자아와, 자아의 소지품이라고 할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다시
“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에게 있어서든 내 것은 결코 없다.(M106/ii.263-64)”라고 네 가지 측면에서 설한 공함을 파악한다.
54. 어떻게?
나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곳에서도 자아를 보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
자기의 자아를 어떤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서 추론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형제의 경우 형제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친구의 경우 친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필수품의 경우 필수품의 그것을 소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추론할만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듯이다.
어느 곳에서든 결코 없다.
나의:
여기서 우선 ‘나의’라는 단어를 당분간 제외시켜, 어디에서도 남의 자아를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나의’라는 단어를 가져와 그것은 나의 소유물로 누구에게도 없다라는 뜻은 즉 그는 다른 사람의 자아가 어딘가에 나의 소유물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형제의 경우 자기 형제라고, 친구의 경우 자기 친구라고, 필수품인 경우 자기 필수품이라고, 이와 같이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자아를 이런 상태로 추론할 만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가 어디서도 자아를 보지 않고,
자아가 다른 사람의 어느 상태에 속한다고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아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아를 나의 어느 상태에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측면에서 공을 파악한다고 한다.
55. 이와 같이 네 가지 측면에서 공을 파악하고는 다시 여섯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한다.
어떻게?
“눈은 자아가 공하거나, 혹은 자아에 속하는 것이 공하거나, 항상함이 공하거나, 지속함이 공하거나, 영원함이 공하거나, 혹은 변하지 않기 마련인 법이 공하다.
… 마노는 공하다 … 형상은 공하다 … 법은 공하다 … 눈의 알음알이는 공하다. … (Nd2. 187)”라고,
이와 같이 늙음ㆍ죽음까지 이 방법은 계속된다.
56. 이와 같이 여섯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한 다음 다시 여덟 가지 형태로 파악한다.
“① 항상함의 고갱이
② 견고함의 고갱이
③ 행복의 고갱이
④ 자아의 고갱이
⑤ 항상함
⑥ 견고함
⑦ 영원함 혹은
⑧ 변하지 않기 마련인 법에 관한한 물질은 고갱이가 없고, 고갱기가 아니고, 고갱이를 떠났다.
느낌은 … 인식은 … 상카라들은 … 알음알이는 … 눈은 … 항상함의 고갱이, 견고함의 고갱이, 행복의 고갱이, 자아의 고갱이, 항상함, 견고함, 영원함, 혹은 변하지 않기 마련인 법에 관한한 늙음ㆍ죽음은 고갱이가 없고, 고갱이가 아니고, 고갱이를 떠난 것과 같고,
마치 아주까리처럼, 무화과나무처럼, 세따왓초 나무처럼, 빨리밧다까 나무처럼, 포말(泡沫)처럼, 수포(水泡)처럼, 신기루처럼, 파초의 줄기처럼, 환처럼 고갱이가 없고, 고갱이가 아니고, 고갱이를 떠났다.
그와 같이 물질도 … 눍음ㆍ죽음도 항상함의 고갱이, 견고함의 고갱이, 행복의 고갱이, 자아의 고갱이, 항상함, 견고함, 영원함, 변하지 않기 마련인 법에 관한한 고갱이가 없고, 고갱이가 아니고, 고갱이를 떠났다.(Nd.2. 184-85)”
57. 그는 이와 같이 여덟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한 뒤 다시 열 가지 형태로 파악한다.
“물질을 비었다고, 허하다고, 공이라고, 자아가 아니라고, 지배자를 가지지 않았다고,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다고, 얻을 수 없다고,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타인이라고, [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본다.
느낌을 … 알음알이를 비었다고 … 분리되었다고 본다.(Nd.2. 279)”
58. 이와 같이 열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하고는 다시 열두 가지 형태로 파악한다.
“물질은 중생이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청년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고,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느낌은 … 알음알이는 …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Nd2. 186)”라고.
59. 이와 같이 열두 가지 형태로 공을 파악한 뒤 다시 조사의 통달지(tīaṇa-pariññā)를 통하여 마흔두 가지 형태로 파악한다.
물질을 무상으로, 괴로움으로, 병으로, 종기로, 화살로, 재난으로, 질병으로, 타인으로, 붕괴하는 것으로, 전염병으로, 재앙으로, 두려움으로, 협박으로,
떨림으로, 무너지기 쉬운 것으로,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
보호가 없는 것으로, 피난처가 없는 것으로, 귀의처가 없는 것으로,
비었음으로, 허함으로, 공함으로, 자아가 없음으로,
달콤하지 않음으로, 위험으로, 변하기 마련인 법으로, 고갱이가 없는 것으로,
재난의 뿌리인 것으로, 살인자로, 복리가 없음으로, 번뇌에 물들기 쉬운 것으로, 형성된 것으로, 마라의 미끼로,
태어나기 마련인 법으로, 늙기 마련인 법으로, 병들기 마련인 법으로, 죽기 마련인 법으로, 근심하기 마련인 법으로,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 절망하기 마련인 법으로,
일어남으로, 사라짐으로, 달콤하지 않음으로, 위험으로, 출구로 본다.
느낌을 … 알음알이를 무상이라고 … 출구로 보면서 세상을 공하다고 뚫어 본다.”
“모가라자여, 항상 마음챙기면서
자아에 대한 사견을 버리고
세상을 공하다고 뚫어 보라.
그러면 죽음을 건널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뚫어 보는 자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하리.(Nd2. 190)”
61. 이와 같이 공하다고 보면서 세 가지 특상을 제기하고 상카라들을 파악할 때,
공포와 즐거워함을 버리고 상카라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중립적이 되고,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취하지 않는다.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이혼한 남자의 비유]
62. 어떤 남자에게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예쁜 아내가 있었다 하자.
그 남자는 그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서있거나 앉아 있거나 얘기하거나 웃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상심하여 극도의 슬픔을 경험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가 그녀의 부정을 보고는 헤어지려는 마음에 이혼할 것이다.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내 아내’라고 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어느 누구와 함께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을 보게 되더라도 화내지 않을 것이고 슬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관심하게 되고 중립적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모든 상카라들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하여 깊이 숙고하는 지혜로써 상카라들을 파악할 때,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취할만한 것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여,
공포와 즐거워함을 버리고는 모든 상카라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중립적이 된다.
63.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세 가지 존재, 네 가지 모태, 다섯 가지 태어날 곳,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에 대해 그의 마음은 물러나고, 움츠리고, 되돌아오고, 퍼지지 않는다.
평온이나 혐오스러움이 확립된다. 마치 약간 경사진 연잎 위의 물방울이 물러나고, 움츠리고, 굴러 떨어지고, 퍼지지 않듯이,
이와 같이 … 마치 닭털이나 근육을 불에다 올려놓으면 물러나고, 움츠리고, 굴러 떨어지고, 퍼지지 않듯이,
이와 같이 세 가지 존재에 대해 그의 마음은 물러나고, 움츠리고, 되돌아오고, 퍼지지 않는다.
평온이나 혐오스러움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그에게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나타난다.
64. 만약 이 지혜가 평화로운 경지인 열반을 평화롭다고 보면 모든 강카라들의 진행을 버리고 오직 열반으로 들어간다.
만약 열반을 평화롭다고 보지 못하면 반복해서 오직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일어난다. 항해하는 선원의 까마귀처럼.
[상선의 까마귀의 비유]
65. 항해하는 상인들이 배에 올라타면서 육지를 발견하는 까마귀를 싣는다. 배가 강풍에 휩쓸려 엉뚱한 방향을 향하여 떠밀어가 해안을 찾지 못할 때, 그들은 육지를 발견하는 까마귀를 날려 보낸다.
까마귀는 돛의 꼭대기로부터 하늘을 날아 사방팔방을 조사하여 만약 해안을 발견하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발견하지 못하면 거듭 거듭 돌아와서 돛의 꼭대기에 앉는다.
이와 같이 만약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평화로운 경지인 열반을 평화롭다고 보면 모든 상카라들의 진행을 버리고 오직 열반으로 들어간다.
만약 열반을 평화롭다고 보지 못하면 반복해서 오직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일어난다.
66. 키의 끝에서 밀가루를 키질하는 것처럼,
목화씨를 빼낸 다음 솜을 터는 것처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카라들을 파악한 뒤,
공포와 즐거워함을 버리고 상카라들을 조사함에 대해 중립적이 되어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관찰로 머문다.
이와 같이 머물 때 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되어 일곱 분 성자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
[세 가지 해탈의 관문]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67. 세 가지 관찰을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들이라 부른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① 모든 상카라들이 한정되어있고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표상이 없는(無相) 경지(dhātu, 界)로 들어가게 한다.
② 모든 상카라들에 대해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원함이 없는(無願)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③ 모든 법들을 타인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공(空)한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Ps.i.48)”
68. 한정되어있고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한정되어있고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무상에 대한 관찰은 ‘상카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정짓고 그들의 행처를 찾아보면 그들은 결코 멸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그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서]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본다.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절박감을 내게 하고 괴로움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은 상카라들에 대해 분발한다.
타인으로 보게 하고:
‘나’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보게 한다.
69. 이처럼 이 세 가지 구절은 무상에 대한 관찰 등으로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렇게 설하셨다.
“무상이라고 [상카라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공포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공으로 나타난다.(Ps.ii.48)”
70. 그러면 이런 관찰들은 어떤 해탈의 관문들이 되는가?
그들은 표상 없음, 원함 없음, 공함이라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편안함(輕安,paspassa)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71. 여기서 표상이 없는 해탈이란 표상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다.
표상이 없는 경지(요소, 界, dhātu)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성스러운 도는 표상이 없고,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함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원함 없는 [해탈이고],
공한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공한 [해탈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72 그런데 논장(Abhidhamma)에서는
‘사견을 버리고서 초지(初地,paṭhama-bhūmi=예류도)를 얻기 위하여, 세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고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출세간 禪을 닦을 때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린 뒤 원함이 없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공한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Dhs.71;70)”라고 오직 두 가지 해탈을 설하셨다.
이것은 아무런 방편 없이 위빳사나가 [도에] 이르는 [방법에] 관해서 설하신 것이다.
73. 그러나 『무애해도』에서는 위빳사나의 지혜를 두고
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항상하다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
괴로움으로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Ps.ii.67)”라고 고집을 벗어버림으로써 공한 해탈을 설하셨다.
② 그리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항상하다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Ps.ii.68)”라고 표상을 벗어버림으로써 표상 없는 해탈을 설하셨다.
③ 그리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영원하다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Ps.ii.68)”라고,
희망(원함)을 벗어버림으로써 원함 없는 해탈을 설하셨다.
비록 이렇게 설하셨지만 위빳사나의 지혜가 상카라들의 표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상이 없음을 설한 것은 아니고 공과 원함 없음은 방편 없이 직접적으로 설하신 것이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도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성스러운 도가 나타나는 순간에 해탈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원함 없는 해탈과 공한 해탈 두 가지만 [아비담마에서]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선 해탈에 대한 설명이다.
[일곱 분의 성자들의 분류]
74. 앞에서 ‘익서은 일곱 분 성자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라고 설했다.(§66) 여기서
① 믿음을 따르는 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
③ 체험한 자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
⑤ 법을 따르는 자
⑥ 견해를 얻은 자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
이들이 일곱 분의 성자들이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그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
75. 확신(결심,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믿음의 기능(信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①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나머지 일곱 경지(즉, 세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서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가 된다.
편안함(輕安)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삼매의 기능을(定根)을 얻는다.
그는 모든 곳에서 ③ 체험한 자가 된다.
무색계 禪을 얻고 최상의 [아라한]과를 얻은 자를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영지(靈知)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통찰지의 기능(慧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⑤ 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된다.
[그 다음의] 여섯 곳에서 ⑥ 견해를 얻은 자가 되고,
최상의 과에서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가 된다.
76.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할 때 믿음의 기능이 강해진다. 믿음의 기능이 강해지기 때문에 예류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①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한다.(Ps.ii.53)”
다시 설하셨다.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믿음의 기능이 강해진다. 믿음의 기능이 강해지기 때문에 예류과를 실현한다. 그러므로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Ps.ii.53)”
77. 다시 설하셨다.
“[첫 번째 도의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해탈했기 때문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무색계 禪을] 체득하고 증득했기 때문에 ③ 체험한 자라 한다.
견해라고 불리는 첫 번째 도의 지혜]를 얻기 때문에 ⑥ 견해를 얻은 자라 한다.
[나머지 세 가지 도의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해탈하기 때문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먼저 禪을 체득하고 다음에 소멸인 열반을증득하기 때문에 ③ 체험한 자라 한다.
상카라들은 괴로움이요 소멸은 행복이라고 통찰지로 알고, 보고, 확인하고, 실현하고, 체득했기 때문에 ⑥ 견해를 얻은 자라 한다.(Ps.ii.52)”
78. 나머지 네 가지 경우에, 믿음을 따르기 때문에 혹은 믿음으로써 따라 가기 때문에 ①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한다.
마찬가지로 통찰지라 불리는 법을 따르기 때문에 혹은 법으로써 따르기 때문에 ⑤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무색계 禪과 성스러운 도와 두 가지로 해탈한 자를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꿰뚫어 알면서 해탈했기 때문에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라 한다. 이와 같이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한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였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앞의 두 지혜와 같다.
79.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앞의 두 가지 지혜와 뜻으로는 하나이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말씀하셨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하나지만 그 이름은 세 가지다.
처음에는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간에는 깊이 숙고하여 관찰하는 지혜라 이름하고,
마지막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라 한다.”
80. 성전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어떻게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인가?
일어남(uppāda)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다.
진행 … 표상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다.
일어남이 괴로움이라고 … 공포라고 … 세속적이라고 … 일어남이 상카라라고 … 절망이 상카라라고 이것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헤다.(Ps.i.60-61)”
81. 여기서 합성어인 ‘muñcitukamyatā(해탈하기를 원함)-paṭisaṅkhā(깊이 숙고함(-santiṭṭhanā(평정)’는 [드완드와(병렬) 합성어로] ‘muñcitu-kamyatā(해탈하기를 원함)’와 ‘paṭisaṅkhā(깊이 숙고함)’와 ‘santiṭṭhanā(평정)’로 분해된다.
처음 단계에서 역겨움의 지혜로써 역겨워하는 자가 일어남 등을 버리기를 원함이 해탈하기를 원함이고,
벗어나는 방편을 찾기 위해 중간에 숙고하는 것이 깊이 숙고함이고,
해탈한 뒤 마지막에 침착함이 평정이다.
이것에 대해서
“일어남이 상카라이다. 그 상카라들에 대해 침착함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이다.(Ps.ii.64)”라고 설하셨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지혜는 오직 하나이다.
82. 더욱이 성전을 통해서도 이 지혜는 오직 하나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하여 관찰함과 상카라에 대한 평온이라는 이 법들은 뜻으로는 같고 문자만 다르다.(Ps.ii.64)
[도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
83. 이와 같이 상카라에 대해 평온을 얻은 선남자의 위빳사나는 정점에 이르렀고 [도의] 출현으로 인도한다.
‘정점에 이른(sikhāppattā)’위빳사나 혹은 ‘[도의] 출현으로 인도하는(vuṭṭhāna-gāminī)위빳사나’는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 등 세 가지 지혜의 이름이다.
이것은 정점인 최상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정점에 이르렀다’라고,
출현으로 향해가기 때문에 ‘출현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밖으로는 표상(nimitta)이라는 집착의 대상으로부터, 안으로는 [오염원들과 무더기들의] 일어남으로부터 출현했기 때문에 도를 출현(vuṭṭhāna)이라 부른다.
그곳으로 가기 때문에 출현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도와 함께 결합한다는 뜻이다.
84. 여기서 천착(abhinivesa)과 출현의 설명을 위하여 마띠까(mātika, 論母)가 있다.
① 안을 천착한 뒤 안으로부터 출발한다.
② 안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현한다.
③ 밖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현한다.
④ 밖을 천착한 뒤 안으로부터 출현한다.
⑤ 물질을 천착한 뒤 물질로부터 출현한다.
⑥ 물질을 천착한 뒤 정신으로부터 출현한다.
⑦ 정신을 천착한 뒤 정신으로부터 출현한다.
⑧ 정신을 천착한 뒤 물질로부터 출현한다.
⑨ 한 번에 다섯 무더기들로부터 출현한다.
⑩ 무상이라고 천착한 뒤 무상으로부터 출현한다.
⑪ 무상이라고 천착한 뒤 괴로움으로부터 출현한다.
⑫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무아로부터 출현한다.
⑬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뒤 괴로움으로부터 출현한다.
⑭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뒤 무상으로부터 출현한다.
⑮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뒤 무아로부터 출현한다.
(16) 무아라고 천착한 뒤 무아로부터 출현한다.
(17) 무아라고 천착한 뒤 무상으로부터 출현한다.
(18) 무아라고 천착한 뒤 괴로움으로부터 출현한다.
85. 어떻게?
(1) 여기 어떤 자는 먼저 자신의 상카라들에 대해 천착한다. 천착한 뒤 그들을 본다.
단순히 안을 보는 것으로는 도의 출현에 이르지 못한다. 밖의 법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무더기들과 무생물의 상카라들에 대해서도 무상, 고 무아라고 본다.
그는 어떤 때는 안을 명상하고 어떤 때는 밖을 명상한다.
그가 이와 같이 명상하여 안을 명상할 때 위빳사나가 도와 결합한다.
이를 일러 ‘안을 천착한 뒤 안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2) 만약 그가 밖을 명상할 때 위빳사나가 도와 결합하면 이것을 ‘안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3) 이 방법은 밖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현함과. (4) 밖을 천착한 뒤 안으로부터 출현함에도 작용된다.
86.
(5) 다른 자는 먼저 물질을 천착한다. 천착한 뒤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을 덩어리로 만들어서 본다. 단순히 물질을 보는 것으로는 도의 출현에 이르지 못한다. 정신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는 정신이라고 정신을 본다.
그는 이와 같이 명상하여 물질을 명상할 때 위빳사나가 도와 결합한다.
이를 일러 ‘물질을 천착한 뒤 물질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6) 만약 그가 정신을 명상할 때 위빳사나가 도와 결힙하면 이것은 ‘물질을 천착한 뒤 정신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7) 이 방법은 정신을 천착한 ㅟ 정신으로부터 출현함과
(8) 정신을 천착한 뒤 물질로부터 출현함에도 적용된다.
87.
(9) “무엇이든 일어나는 법은 모두가 멸하기 마련인 법이다.(M.i.380)”라고 천착한 뒤 이와 같이 출현할 때 ‘한 번에 다섯 무더기들로부터 출현한다’라고 한다.
88.
(10) 어떤 자는 먼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명상한다. 무상이라고 명상하는 것만으로는 출현에 이르지 못한다. 괴로움이라고도, 무아라고도, 명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명상한다.
그가 이와 같이 수행하여 무상이라고 명상할 때 출현에 이른다.
이것을 일러 ‘무상이라고 천착한 뒤 무상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11)-(12) 만약 괴로움이라고,무아라고 명상할 때에 출현이 있으면 이것을 일러 ‘무상이라고 천착한 뒤 괴로움으로부터, 무아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13)-(15) 이 방법은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뒤 괴로움으로부터, 무상으로부터, 무아로부터 출현함과
(16)-(18) 무아라고 천착한 뒤 무아로부터, 무상으로부터, 괴로움으로부터 출현함에도 적용된다.
89. 여기서 무상이라고 천착한 자든, 괴로움이라고 천착한 자든, 무아라고 천착한 자든 출현할 때에 무상으로부터 출현함이 있으면 이 세사람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다.
그들은 믿음의 기능(信根)을 얻는다. 표상 없는 해탈로 해탈한다.
첫 번째 도의 순간에 믿음을 따르는 자들이 된다.
일곱 곳에서 믿음으로 해탈한 자들이 된다.
만약 괴로움으로부터 출현함이 있으면 이 세 사람은 편안함(輕安)이 큰 자들이다.
삼매의 기능(定根)을 얻는다. 원함 없는 해탈로 해탈한다.
모든 곳에서 체험한 자들이 된다.
무색계 禪을 의지처로 한자는 최상의 과의 경우 양면으로 해탈한 자가 된다.
무아로부터 출현함이 있으면 이 세 사람들은 영지가 크다.
통찰지의 기능(慧根)을 얻는다.
공한 해탈로 해탈한다.
첫 번째 도의 순간에 법을 따르는 자들이 된다.
여섯 곳의 경우 견해를 얻은 자가된다.
[12가지 비유]
90. 이제 이 출현에 이르는 위빳사나를, 그 이전의 지혜와 나중의 지혜와 함께 섬령하기 위하여 12가지 비유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표제(uddāna)이다.
① 박쥐 ② 검은 뱀 ③ 집 ④ 소 ⑤ 야차녀 ⑥ 어린아이
⑦ 배고픔 ⑧ 목마름 ⑨ 추위 ⑩ 더위 ⑪ 어두움 ⑫ 독
이 비유는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 이후부터 어떤 지혜에도 모두 적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적용할 경우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 이후부터 과의 지혜까지 모두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적용해야 한다고 설했다.
91.
(1) 박쥐:
박쥐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열매나 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섯 개의 큰 가지가 뻗어있는 마두까 나무에 내려앉아 가지 하나를 조사했지만 그곳에서 취할만한 꽃이나 열매라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첫 번째 가지마냥 두 번째 가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가지를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쥐는 ‘이 나무엔 열매가 없구나. 취할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생각한 뒤,
그 나무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렸다.
그는 위로 쭉 뻗은 가지에 올라 나뭇가지 틈새로 머리를 내밀고 위를 올려다본 뒤 허공을 날아올라 열매가 달린 다른 나무에 내려앉았다.
92. 여기서 수행자는 박쥐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집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蘊)은 다섯 가지가 뻗어있는 마두까 나무처럼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천착하는 것은 박쥐가 나무에 내려앉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물질의 무더기를 명상한 뒤 그곳에서 취할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나머지 무더기들을 명상하는 것은 박쥐가 각각의 가지를 조사한 뒤 가질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무상 등의 특상을 통해 봄으로써 역겨워하여 해탈하기를 원하는 등의 세 가지 지혜는 그 박쥐가 ‘이 나무에는 열매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여 나무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수행자의 수순하는 지혜는 박쥐가 쭉 뻗은 가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고뜨라부(種姓)의 지혜는 머리를 내밀고 위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도의 지혜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과의 지혜는 열매가 달린 다른 나무에 내려앉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93.
(2) 검은 뱀:
검은 뱀의 비유는 깊이 숙고하는 지혜에서 설했다.(§49)
그러나 여기서는 비유의 적용이 조금 다르다.
고뜨라부의 지혜는 뱀을 놓아버리는 것처럼. 도의 지혜는 놓아버리고 왔던 길을 돌아보면서 머무는 것처럼, 과의 지혜는 달려가서 두려움이 없는 곳에 서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94.
(3) 집:
집주인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 잠에 빠졌을 때 집에 불이 났다고 한다.
그는 잠에서 깨어 불을 보고 두려워하여
‘만약 불에 데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면 좋을까”라고 두리번거리다가,
길을 발견하고는 뛰쳐나와 급히 안전한 곳으로 가서 섰다.
95. 여기서 어리석은 범부가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거머쥐는 것은 집 주인이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 들어 곤히 잠든 것과 같다.
바른 도를 닦아 세 가지 특상을 보고 일어난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잠에서 깨어 불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는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과 같고,
수순하는 지혜는 길을 발견함과 같고,
고뜨라부의 지혜는 뛰쳐나오는 것과 같고,
도의 지혜는 급히 가는 것과 같고,
과의 지혜는 안전한 곳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적용해서 보아야 한다.
96.
(4) 소:
어떤 농부가 밤에 잠이 들었을 때 고들이 외양간을 부수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가 꼭두새벽에 외양간에 가서 그들이 도망간 사실을 알고는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국왕의 소들을 보았다.
나의 소겠거니 생각하고 그들을 끌고 왔다.
동이 텄을 때 ‘이들은 나의 소가 아니라 국왕의 소로구나’라고 인식하였다.
‘왕의 사람들이 ‘이 놈이 도둑이로군’라고 나를 잡아서 형벌에 처하기 전에 도망하리라’고 두려워하며,
소들을 버리고 급히 도망가서 두려움이 없는 곳에 섰다.
97. 여기서도 어리석은 범부가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무더기(蘊)들을 거머쥐는 것과 ‘나의 소겠지’하면서 왕의 소들을 취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세 가지 특상으로 무더기들을 무상, 고, 무아라고 인식하는 것은 동이 텄을 때 국왕의 소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두려워하는 것과 같고,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는 놓아버리고 가기를 원하는 것과 같고,
고뜨라부의 지혜는 놓아버림과 같고,
도의 지혜는 도망하는 것과 같고,
과의 지혜는 도망가서 두려움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적용해서 보아야 한다.
98. (5)야차녀: 한 남자가 야차녀(yakkhi)와 함께 살고 있었다한다. 그녀는 밤에 ‘이 남자가 잠들었겠지’ 생각하고 시체가 흩어져 있는 묘지로 가서 사람의 살을 뜯어먹었다. 그는 ‘이 여인이 어딜 가지’라고 궁금해 하면서 따라가다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것을 보고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를 잡아먹기 전에 도망가야지’라고 두려워하면서 급히 도망가서 안전한 곳에 섰다.
99. 여기서도 [범부가] 무더기(蘊)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거머쥐는 것은 야차녀와 함께 사는 것과 같다.
무더기들의 세 가지 특상을 보고 무상 등의 성질을 아는 것은 공동묘지에서 인간의 살점을 뜯어먹는 것을 보고 ‘야차녀로구나’라고 아는 것과 같다.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두려워하는 것과 같고,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는 도망가기를 원하는 것과 같고,
고뜨라부의 지혜는 묘지를 떠나는 것과 같고,
도의 지혜는 급히 도망가는 것과 같고,
과의 지혜는 두려움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적용해서 보아야 한다.
100.
(6) 어린아이: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누각 위에 앉아있다가 길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소리를 듣고
‘누가 내 아들에게 해코지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여 황급히 달려갔다.
자기 아들이라 인식하면서 남의 아들을 안고 돌아왔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들인줄 인식했을 때 부끄러워하면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 여자가 아이를 훔쳤다고 하지 말아야 할 텐데’하면서,
본래 장소에다 내려놓고는 잽싸게 누각으로 올라가 앉았다.
101. 여기서도 [범부가]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취하는 것은 자기 아들인줄 잘못 인식하여 남의 아들을 껴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특상을 통해 ‘나’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 아이는 남의 아들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부끄러워함과 같고,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는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림과 같고,
수순하는 지혜는 본래 장소에다 아이를 내려놓음과 같고,
고뜨라부의 지혜는 아이를 내려놓고 길가에 서있을 때와 같고,
도의 지혜는 누각으로 올라감과 같고,
과의 지혜는 올라가서 앉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적용해서 알아야 한다.
102.
(7) 굶주림, (8) 목마름, (9) 추위, (10) 더위, (11) 어둠, (12) 독:
이 여섯 가지 비유는 출현에 이르는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자가 출세간법으로 기울고 향하고 기대는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설했다.
103.
[(7)굶주림]:
배고픔에 압도되고 굶주림에 내몰린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듯이,
윤회의 굶주림에 내몰린 수행자는 불사를 맛보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란 음식을 열망한다.
104.
[(8)목마름]:
목마른 사람이 목과 입이 타 들어가서 갖가지 재료로 만든 마실 거리를 갈망하듯이,
윤회의 목마름으로 타는 수행자는 성스러운 팔정도라는 마실 거리를 열망한다.
105.
[(9)추위]:
추위에 벌벌 떠는 자가 뜨거움을 갈망하듯이,
윤회에서 갈애와 애정이라는 추위에 벌벌 떠는 수행자는 오염원을 태워버릴 도의 온기를 열망한다.
106.
[(10)더위]:
더위에 녹초가 된 자가 차가움을 갈망하듯이,
윤회에서11가지 불(S.iv.19)에 의해 기진맥진한 수행자는 10가지 불이 꺼진 열반을 열망한다.
107.
[(11) 어둠]:
어두움에 둘러싸여있는 사람이 빛을 갈망하듯이,
무명의 어두움에 둘러싸인 수행자는 도를 닦아서 생긴 지혜의 빛을 열망한다.
108.
[(12)독]:
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독을 제거할 약을 갈망하듯이,
오염원의 독으로 괴로워하는 수행자는 오염원의 독을 제거할 때 불사의 약인 열반을 열망한다.
109. 그래서 설하셨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삼계의 존재에 대해 …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에 대해 그의 마음은 물러나고, 움츠리고, 되돌아오고, 퍼지지 않는다.
평온이나 혐오스러움이 확립된다.
마치 약간 경사진 연잎 위의 물방울이 물러나고, 움츠리고, 굴러 떨어지고, 퍼지지 않듯이.”라고(§63)
모든 것은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110. 이렇게 하여 그는 초연한 자(patilīna-cara)라 불린다.
이것을 두고 설하셨다.
“비구가 초연하고
멀리 여읜 마음을 닦을 때
그를 두고 사람들이 적절하게 말하기를
존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Sn.810)”
이것은 깨달음의 구성요소 등의 차이를 결정한다
111. 이와 같이 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수행자의 초연한 상태를 결정하고 나아가서
① 성스러운 도에 있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도의 구성요소, 禪의 구성요소
② 도닦음
③ 해탈의 차이를 결정한다.
그런데 어떤 장로는 기초가 되는 禪(pādakajjhāna)이 깨달음의 구성요소와 도의 구성요서와 禪의 구성요소의 차이를 결정한다고 한다.
어떤 자는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는 무더기들이 결정한다고 하고
어떤 자는 개인의 성향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들의 견해 가운데서 오직 이 준비의 위빳사나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가 결정한다고 알아야 한다.
112.
[① 구성요소의 차이]:이제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
㉠ 위빳사나에 의한 결정에 따르면 마른 위빳사나를 하는 자(sukkhavipassaka,乾觀者)에게 일어난 도와, 증득(等至)을 얻은 자에게 禪을 기초로 하지 않고 일어난 도와, 초선을 기초로 하고 기초가 되는 禪이외의 다른 상카라들을 명상하여 일으킨 도는 초선의 도가 된다.
모든 경우에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 여덟 가지 도의 구성요소들, 다섯 가지 禪의 구성요소들이 있다.
그들의 준비의 위빳사나는 기쁨과 함께하기도 하고 평온과 함께하기도 하며 출현할 때에는 상카라들에 대해 평온한 상태에 이른 뒤 기쁨과 함께 한다.
113.
㉡ 오종선(五種禪)에서 두 번째, 세 번째 禪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 도와 함께하는 禪은 순서대로 네 가지, 세 가지, 두 가지의 구성요소들을 가진다.
모든 경우에 일곱 가지 도의 구성요소들이 있다.
네 번째 경우에는 여섯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서들이 있다.
이 차이는 기초가 되는 禪에 의한 결정과 위빳사나에 의한 결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들 이전의 위빳사나는 기쁨과 함께하기도 하고 평온과 함께하기도 한다.
출현에 이르는 위빳사나는 오직 기쁨과 함께한다.
114.
㉢ 제5선을 기초로 하여 도가 생겼을 때 평온과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이라는 두 가지 禪의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깨달음의 구성요소와 도의 구성요소는 각각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이다.
이 차이도 두 방법의 결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 경우 준비의 위빳사나는 기쁨과 함께하거나 평온과 함께한다.
출현함에 이르는 위빳사나는 오직 평온과 함께한다. 무색계 禪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 도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禪으로부터 일어난 어떤 상카라들을 명상한 뒤 도가 생겼다면, 이 도와 가까운 지점에서 출현한 증득이 그 도를 자기와 같은 상태로 만든다.
마치 땅의 색깔이 도마뱀에게 자기의 색깔을 갖게 하는 것처럼.
115.
㉣ 두 번째 장로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증득이든 그것으로부터 일어나 그 증득에 속하는 법들을 명상한 뒤 도가 생기면 그 도는 그 증득과 같다.
여기서도 위빳사나에 의한 결정은 앞서 설한대로 알아야 한다.
116.
㉤ 세 번째 장로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의 성향에 맞게 禪을 기초로 하여 그 禪에 속하는 법들을 명상한 뒤 도가 생기면 그 도는 그 禪과 같다.
이것은 禪을 위빳사나의 기초로 하지 않았거나 혹은 禪에 속하는 법들을 명상하지 않고 성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이 뜻은 「난다꼬와다 경」(Nandakovāda Sutta, 난다들을 교계하는 경. M.iii.277)에서 설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도 위빳사나에 의한 결정은 앞서 설한대로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깨달음과 도와 禪의 구성요소들을 결정한다고 알아야 한다.
117.
[② 도닦음의 차이]:
만약 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처음에 어렵게 노력과 자극을 통해 오염원들을 억압할 때 이것을 어려운 도닦음(dukkhāpaṭipadā)이라 부른다.
그와 반대되는 것을 쉬운 도닦음(sukhpaṭipadā)이라 한다.
오염원들을 억압한 뒤 위빳사나의 목표인 도의 출현이 천천히 생기면 둔한 초월지(dandhābhiññā)라고 부르고,
그 반대를 빠른 초월지(khippābhiññā)라 한다.
이와 같이 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은 [도가] 오는 곳에 서서 그 도에게 각각의 이름을 준다.
그러므로 이 도는 네 가지 이름들을 얻는다.
118. 그런데 어떤 비구에게는 이 도닦음이 [예류도부터 이라한도까지가] 서로 다르고 어떤 자에게는 네 가지 도에서 한결같다.
부처님들의 경우 네 가지 도 모두에게 쉬운 도닦음과 빠른 초월지를 가지셨다.
법의 사령관인 [사리뿟따 존자]도 그와 같았다.
그러나 목갈라나 존자는 첫 번째 도는 쉬운 도닦음과 빠른 초월지를 가졌지만
나머지 세 기지 도의 경우 어려운 도닦음과 둔한 초월지였다.
119. 도닦음처럼 지배(adhipati)도 어떤 비구에게는 네 가지 도에서 다르고 어떤 자에게는 네 가지 모두에서 한결같다.
이와 같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도닦음의 차이를 결정한다.
[① 자기 성품에 따라]:
만약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명상한 뒤 출현하면 표상 없는 해탈로 해탈한다.
만약 상카라들을 괴로움이라고 명상한 뒤 출현하면 원함 없는 해탈로 해탈한다.
만약 무아라고 명상한 뒤 출현하면 공한 해탈로 해탈한다.
이것이 자기 성품에 따라 이름한 것이다.
122.
[② 반대되는 것에 따라]:
무상의 관찰을 통하여 상카라들의 덩어리를 분해한 뒤 영원하다는 표상, 지속된다는 표상, 항상하다는 표상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표상이 없다고 한다.
괴로움의 관찰을 통하여 행복이라는 인식을 버린 뒤 원함과 열망함을 말려버리고 왔기 때문에 원함이 없다고 한다.
무아의 관찰을 통하여 자아, 중생, 인간이라는 인식을 버린 뒤 상카라들을 공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하다고 한다.
이것이 반대되는 것에 따라 이름한 것이다.
123.
[③ 자기의 덕에 따라]:
탐욕 등이 공하기 때문에 공하고, 물질의 포상 등이 없기 때문에 혹은 탐욕의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고, 탐욕을 원함 등이 없기 때문에 원함이 없다.
이것이 자기의 덕에 따라 이름한 것이다.
124.
[④ 대상에 따라]:
이 도는 공하고, 표상이 없고, 원함이 없는 열반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기 대문에 각가 공하고, 표상이 없고, 원함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대상에 따라 이름한 것이다.
125.
[⑤ 오는 곳에 따라]:
오는 곳은 두 가지이다. 즉 위빳사나가 오는 곳과 도가 오는 곳이다.
도의 경우에는 위빳사나가 그 오는 곳이고
과의 경우에는 도가 그 오는 곳이다.
무아의 관찰을 공함이라 한다.
공함의 위빳사나로 [도달한] 도는 공하다.
무상의 관찰을 표상 없음이라 한다.
표상 없음의 위빳사나로 [도달한] 도는 표상이 없다.
126. 그런데 이런 용어는 논장(Abhidhamma)의 가르침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경장(Suttanta)의 가르침에 발견된다.
[경장]에서는 ‘고뜨라부의 지혜는 표상이 없는 열반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서 표상이 없다는 이름을 가진 뒤 스스로 [도가] 오는 곳에 서서 도에게 이름을 준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도는 표상이 없다고 설했다.
도가 오는 곳에 따라 그것의 과도 표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127. 그리고 괴로움의관찰은 상카라들에 대한 원함을 말려버리고 오기 때문에 원함이 없다고 이름 한다.
원함 없는 위빳사나를 통해 생긴 도도 원함이 없다고 한다.
원함 없는 도의 과도 원함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는 도에게 자기의 이름을 준다.
도는 과에게 준다. 이것이 오는 곳을 따라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해탈의 차이를 결정한다.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끝났다.
(9) 수순(隨順)하는 지혜
128. 그가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를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을 때 확신에 바탕한 믿음은 더 깊어지고, 정진은 더욱 탄력을 받고, 마음챙김은 잘 확립되고, 마음은 잘 안정되고,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은 더욱 예리하게 일어난다.
129. 이제 도가 막 생기려는 그 순간에 있는 [수행자의] 상카라에 대한 평온은 상카라들을 무상이나 괴로움이나 무아로 명상하고는 잠재의식에 들어간다.
잠재의식 다음에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했던 방법대로 상마라들을 대상으로 삼아 이것은 무상이라거나 괴로움이라거나 혹은 무아라고 하면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잠재의식을 막고서 생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즉, 의문전향) 다음에는 간단없이 상속을 연결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삼아 첫 번째 속행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을 준비(pari-kamma)의 마음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 같은 방법으로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삼아 두 번째 속행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을 근접(upacāra)의 마음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 같은 방법으로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삼아 세 번째 속행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을 수순(anuloma)의 마음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들 각각의 이름이다.
130. 차별 없이 이 세 가지 마음 모두를 반복(āsevana)이라고, 준비라고, 근접이라고, 수순이라고 불러도 된다.
무엇에 수순하는가?
앞의 것과 뒤의 것에 수순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앞의 여덟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가 [세 가지 특상을 명상하는] 그 진실한 역할(kicca)에 수순하고,
뒤의 [도의 순간에]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속하는 법(菩提分法)들의 진실한 역할을 수순하기 때문이다.]